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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그레이디] 면도기



스윗님! 연성교환 신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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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드는 칫솔에다 치약을 짜다 말고 멈추었다. 거울 아래 아무렇나 던져진 면도기를 보고 눈썹을 한 번 들어올린 참이었다. 치약을 꽂고, 거울을 마주한 채 불렀다.


그레이디, 면도기.


말이 끝나자마자 그레이디가 욕실로 달려왔다. 면도크림이 그대로 묻은 면도기를 싹싹 닦고 칫솔 옆에 꽂아두는 동작만은 매번 재빨라서, 보이드는 늘 생각했다, 이렇게 바지런할 거면서. 굳이 말 두 번하게 하는 심보가 뭘까. 굽은 등을 돌리고 나가려는 그를 보이드가 붙들었다. 잠시만, 하고 불렀다가, 양손으로 볼을 감싸고, 입을 가져가 쪽, 한번 맞추었다. 어김없이 웃음이 잠깐 떴다. 개구진 표정이 사랑스러웠다. 다시 돌아서서 어기적, 어기적 걸음마다 끌리는 발소리가 좋았다. 보이드는 칫솔을 입에 넣었다. 소파에 앉아 리모콘을 누르는 그레이디의 옆모습이 얼룩진 거울에 비쳤다. 보이드는 지워질 리 없음을 알고서도 손끝으로 거울 위 흰 물자국을 문질렀다.




제대 후 그레이디는 밤마다 병든 고양이처럼 몸을 잔뜩 웅크린 채 끙끙 앓아댔다. 몸 상한 곳 없이 제대한 그는 끔찍한 환상통을 앓았다. 아니, 사지가 제대로 붙어 있었으므로 환상통이라 할 수조차 없었다. 그레이디는 어느 날은 다리가 찢어지는 것 같다고 하고 또 어느 날은 머리가 부서질 것 같다고 하며, 고래고래 욕을 질러대고 보이드의 손을 사납게 쳐냈다. 연인이 쳐낸 손을 가만히 잡고 있으면 그레이디는 베개에 파묻던 얼굴을 반만 보인 채 그를 쳐다보았다.


그 눈빛이 꼭, 얻어맞은 짐승 같아서 가슴이 무너졌다. 보이드는 침대 대신 거실의 소파에 앉아 마른 세수를 했다. 다리가 덜덜 떨려 허벅지를 주먹으로 쾅, 쾅 내리쳤다. 퓨리를 탈 때부터 화가 나면 나오는 버릇이었다. 차라리 살덩이 하나라도 잃어버리고 아파했다면, 덜 가엾을 것을. 내 팔다리를 주고 실컷 깨물기라도 하랄 것을. 성경을 펴고 새벽까지 기도하고서야 다시 침실에 들어갔다. 그때쯤에는 그레이디도 지쳐 엎드린 채로 곯아떨어졌기에, 그 등에 손바닥이나마 올릴 수 있었다. 상상 속의 통증을 이기지 못한 그레이디는 본 적 없게 난폭했고, 날뛰는 그를 붙들려 하다 보이드의 손등이며 허벅지에 생채기가 생기기도 여러 번이었다. 런닝셔츠와 트렁크만 입은 채 고통 찬 비명을 지르는 그는 정말로 다친 짐승 같아서 상대하는 보이드의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기어코 고집 피우는 녀석을 달래기 위해서는 그 고집만큼의, 혹은 그보다 더 큰 인내심이 필요했다. 보이드는 끈질겼다. 소파가 찢기고, 손등에 기어코 피딱지가 앉고, 성경책이 스튜 냄비에 처박히더라도. 그레이디, 그레이디, 그레이디 트레비스 상병, 제발, 날 봐. 





병원치료는 언뜻 별 게 없어 보였다. 의사는 극심한 스트레스가 환각을 만든다고 했다. 보이드는 스트레스가 병명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화가 났다. 그리고, 병원에서 시키는 일은 모두 했다. 그가 거실에 세자리아 에보라의 노래를 틀어 놓고 볕이 잘 들게 하기 위해 창문을 고치며 한 달치의 약을 차곡차곡 정리해 스테인레스 상자에 담는 동안 그레이디는 조금씩, 조금씩 나아졌다. 


스테인레스 상자가 거의 비었을 때쯤, 어느 비가 오던 밤에 그레이디가 그의 등을 껴안으며 말했다. 어이, 바이블, 나 이가 근질근질해. 보이드는 어, 응, 하고 배에 닿은 그레이디의 손을 감싸며 건성으로 대답했다. 화가 난 그레이디가 어깨를 잡아끌며 덧붙였다. 이봐, 이봐, 꼭 이가 나는 거 처럼, 간질간질하다고. 급기야는 손 하나를 끌어다 입으로 가져가 아예 넣어 버릴 기세기에 보이드는 결국 등을 돌리고, 녀석의 관자놀이를 쓸어 주었다. 어디 봐. 한 마디에 그레이디는 기다렸다는 듯 앞니를 이이, 하고 드러내 보였다. 봐, 꼭 이가 새로 나는 거 같다니까? 결코 고르다고 할 수 없는 치열, 깨진 송곳니 사이에 어떤 작은 변화를 찾기는 밤이 어두웠고, 누운 채 입을 벌린 그레이디의 모양새가 우스워서 보이드는 결국 그냥 푸스스 웃어 버리고 말았다. 좀 자세히 보라고, 투정을 부리기에 못난 코끝에 입을 맞춰 주었다.


이제 다리는 안 아파?


그리 묻자 그레이디는 처음 듣는 일인 양 보이드를 멀뚱히 보다 느리게 고개 끄덕였다. 머리도, 안 아파? 다시 주억거리기에 머리통을 끌어다 품에 안아 주었다.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이는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나이다. 정수리에 대고 읊어준 다음 등을 도닥였다. 그레이디가 큰 품을 구기며 보이드의 가슴에 파고들었다. 웅얼웅얼, 무언가 말을 내뱉기에 함께 웅크려 보았다. 한껏 숙여 머리 냄새가 코에 닿을 쯤에야 겨우 목소리가 들렸다. 저기, 바이블, 성경책도 그, 종류가 많냐? 


보이드는 되묻는 대신 그레이디의 이마 위 밤톨 같은 머리칼을 쓸어 보았다. 큰 눈동자를 굴리던 그레이디가 덧붙였다. 다시 사면, 그, 비싼가? 원래 읽던 걸로 사야 되나? 보이드의 얼굴이 금세 일그러졌다. 머저리 같으니라고. 


늘어진 커튼이 맞지 않는 창문 위에서 쌕, 쌕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보이드는 그레이디의 굽은 등을 느리게 쓸어 주었다. 안고 있을 때만은 시간이 느렸다. 커튼 틈으로 들어온 달빛이 연인의 발목을 얼핏얼핏 비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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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샤] 열일곱, 오후


세레스님께서 주신 보상리퀘 암샤입니다! 리퀘 감사해요!! 늦어서 죄송합니다...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실험실에는 아무로 레이 혼자 있었다. 이봐, 하고 부르니 빨간 머리통이 뒤돌았다. 아무로의 깨끗한 이마를 보며 샤아는 눈을 조금 찌푸렸다. 그리고 입 열었다. 거기는 12학년 자리인데. 물론 이 학교에 학년별 자리는 없었다. 그러나 암묵적으로 아이들끼리 정한 룰이란 게 있었다. 샤아 아즈나블은 아무로 레이가 10학년인 것을 알고 있었다. 고학년 실험실에 자주 드나든다는 사실도, 혹은 그 외의 것들도 익히 알고 있었다. 금방 나갈 거야. 그리고 아무로는 옆에 놓인 스패너를 집어들었다. 샤아는 그를 등진 자리에 앉았다. 책을 올려 놓고 자켓을 벗어 옆자리에 걸어 두었다. 몸을 움직이는 동안 아무로가 벗어 놓은 푸른 교복 자켓과, 그의 등과, 구부러진 어깨, 그리고 집중한 듯한 귓불 뒤 볼이 시야에 스치듯 들어왔다. 샤아는 펜을 끄집어 들었다. 사각, 사각, 몇 번 종이 위에 스치는 동안 아무로는 기계 위에다 스패너를 꾸준히 돌려대고 있었다. 


녀석은, 아무로 레이는 집중할 때에 누가 방해하는 것을 병적으로 싫어했다. 그 사실 또한 샤아가 모르는 바 아니었으나 종종 그가 있을 시간에 이곳에 와서 그와 등을 맞댄 채 앉아 말 시키곤 했다. 추운 날에는 등 뒤로 아무로의 체온이 느껴졌고, 더운 날에는 그의 몸 냄새가 짙게 났다. 저보다 두 살 어린 몸은 저와 다르게 꼭 불덩이 같아서 샤아는, 제 몸의 온도마저 망가진 기분을 종종 느끼곤 했다. 이곳에 단 둘이 함께 있을 때에는 단 한 챕터도 공부하지 못하고 나간다는 사실을, 그가 알까. 살이 맞닿을 때마다, 눈이 마주칠 때마다 자라는 열기를, 감정을. 샤아는 고개를 기울이며 입꼬리만 살며시 올려 웃었다. 내려깐 속눈썹이 생각을 담고 느리게 가라앉았다가 뜨길 반복했다. 아무로와 감정선을 가진 지 일 년이 다 되어 가는데도 여전히 조바심이 나는 그였다. 조바심을 가지면 가질수록 느긋해 보이길 원하는 성정 또한, 그가 알까, 싶었다.


실험은, 잘 되어 가? 그럭저럭. 그리고 다시 침묵. 샤아는 펴 놓은 책에서 절반도 읽지 못하고 있었다. 글자가 따로 놀았다. 엄지로 양쪽 눈꺼풀을 번갈아 꾹, 꾹 눌렀다. 아무로, 나 아무래도 대학은 포기할 것 같다. 이번에는 답이 없었다. 샤아는 다시 펜을 들었으나 움직이지는 않았다. 철과 플라스틱이 부대끼는 소리만 잠깐. 그리고 샤아는 펜을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두어 바퀴 돌렸다. 입대하기로 했어. 그제야 아무로의 손이 멈췄다. 잘 됐네. 하는 말이 돌아온 것은 한참 지나서였다. 다시 기계 소리. 샤아는 들리지 않게 한숨 쉬었다. 책을 덮었다. 펜을 집어 넣었다. 교복 타이를 길게 늘어뜨렸다. 이 학교에서 몇 년을 다녔는데도, 타이는 도무지 적응되질 않았다. 어른들은 이걸 어떻게 하고 다니는지, 까지 생각했을 때 그의 어깨가 잡혔다. 뒤돌렸다. 아무로의 얼굴이 보이는가 싶더니 입술이 닿았다. 혀가 뒤엉키고 치아가 부딪치는 서툴고 엉망인 키스였다. 샤아는 저도 모르게 그의 어깨에다 손 올렸다. 얼굴이 떨어지고, 붉어진 아무로의 얼굴이 다시 보였다. 이번에는 샤아가 그의 목을 끌어당겼다. 반바지 아래 종아리 살이 부대꼈다. 입술이 떨어진 후, 아무로가 그의 머리칼을 손끝으로 만졌다. 조금 쓸쓸한 동작이어서, 샤아는 아주 잠깐 슬펐다. 잘 할 거야. 그렇게 말해 주는 투가, 평소 그답지 않게 단단해서, 그 무게감에 조금 더 슬퍼졌다. 아무로는 그의 이마에다 제 이마를 맞대었다. 지금이야 키가 비슷하지만 그는 어쩌면 저보다 더 자랄지 모른다고, 샤아는 생각했다. 고마워. 하고 대답했다.


실험실 창문에 오후 해가 성급한 속도로 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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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의 연금술사 - 올리비에, 버커니어] 봄의 진동


겨울과 봄을 구분하는 일은 이곳 브릭스에서 큰 의미가 없었다. 처음 브릭스에 부임하고 몇 년 동안 올리비에는 이곳에서 계절을 분간하길 포기했다. 벽에 올라 산을 보면 만년설이 쌓여 있고, 햇살이 유독 노곤한가 싶으면 어김 없이 찬 바람이 날을 세웠다. 눈으로 보이는 것과 피부로 닿는 것이 이렇게 다를 진대, 잠깐 보이고 닿는 것으로 어찌 인간이 자연을 파악할 수 있을까. 여왕은 벽 바깥에서 부는 바람 소리보다 제 발 아래 진동을 더 믿었다. 말이 없어지는 만큼 무거워졌다. 무게는 검 끝에 실려 그녀가 함부로 날을 세울 수 없게 만들었다. 북쪽을 지키는 일이 그러했다. 날카로워지는 대신 가라앉는 것, 마치 침잠하듯이 혹은 침묵하듯이.


나를 버리는 것과 브릭스를 버리는 것은 다르다. 버커니어가 올리비에의 말을, 제 상관의 말을 이해하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어릴 적부터 북부의 추위를 입고 자란 그는 덩치만큼 두텁게 상관을 신임할 줄 아는 자였다. 충직한 개보다는 되려 날랜 곰에 가까웠다. 그는 결코 가라앉는 법이 없었다. 끝없이 움직이는 성정을 갖고 있었다. 상관이 침잠할 때에도 큰 발로 기계실을 쿵, 쿵, 걸어다니며 집사마냥 꼼꼼하게 이곳을 관리했다. 어이, 엉덩이 맞기 전에 일해라. 쩌렁쩌렁한 목소리까지 모두 하나였다. 발 아래 버커니어가 있음으로 올리비에는 비스듬히 앉을 수 있었다. 한 쪽으로 기운 무게는 그녀에게 안정감을 주었다.


이 추위에도 어쩔 수 없이 늘어지는 오후가 드물게 있었다. 올리비에는 홍차를 내려 놓고 벽 너머를 보길 즐겼다. 흑백만 선연한 풍경은 그녀에게 가장 큰 위안 중 하나였다. 다리를 고쳐 꼬아 앉으니 군복 주머니 안에 무언가 덜걱거렸다. 손만 넣고 그대로 비스듬히 앉은 그녀가 눈을 내려 깔았다. 


수어 년 전, 드라크마의 군대가 훈련 중인 브릭스를 노린 적이 있었다. 지금보다 조금 어리던 소장은 적의 코앞까지 달려 나갔고, 그 날 버커니어는 소장을 호위하다 팔을 잃었다. 찢겨나간 군복 자락을 보며 올리비에가 소리쳤다. 자네는 무엇이 중요한지 아직도 모르겠나, 나는 이곳의 지휘관이지 너희의 어린 애인이 아니다. 버커니어는 빈 어깨를 다른 손으로 붙든 채 대들지도 못하고 울먹였다. 그 큰 덩치가 표정을 일그러뜨려가며 울상 짓는 게 싫어 올리비에는 그 자리에서 돌아서며 전쟁터를 정비하라 일렀다. 버커니어는 땀을 뻘뻘 흘리며 그녀를 쫓아갔다. 억지로 앞에 가로 서고 하나 남은 손을 내밀어 보였다. 손바닥 위에 떨어진 계급장이 있었다. 당시 그는 소위였다. 피 묻은 금색 다이아몬드 하나를 올리비에에게 쥐어주고 그는 도로 돌아섰다. 반항 한 번 하지 않은 녀석이 설명 하나 없이 쥐어 준 견장이 무슨 뜻인지, 그녀가 모를 리 없었다. 


흑백의 장관 위로 큰 그림자가 지더니 익숙한 얼굴이 드러났다. 버커니어가 이를 드러내며 씩 웃었다. 식사 시간입니다. 올리비에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식당으로 가는 걸음을 버커니어가 뒤에서 따랐다. 날이 좀 따땃해진 것 같지 않습니까? 호쾌하게 묻길래 슬며시 웃었다. 그래, 날이 좀 풀렸더구나. 


네 개의 발 아래 익숙한 진동이 웅, 웅, 고동처럼 반복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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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그레이디) 선인장의 우울

연성트레이드 신청해 주신 스윗님 감사합니다!!
블레이디 행쇼...!









보이드가 가장 걱정한 것은 그레이디의 감정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레이디가 갖고 있는 고질적인 우울이었다. 그레이디의 마음은 눅눅한 이곳으로 이사온 이후 더욱 눅눅해졌다. 그는 자신의 기분이 버릴 때 지난 낡은 가구 같다 여겼다. 짜증 나면 온몸이 덜걱댔다. 그는 잠 속에서 때때로 비 맞은 것처럼 떨었고 보이드는 그때마다 그레이디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어둠 속에서 말없이 다독이며, 관자놀이에 입 맞추며, 더는 젖지 않도록. 잠결에 닿는 보이드의 온기와 기도말은 짙고 오래 남아 아침까지 더웠다.










제대한 후 오랫동안 직장을 갖지 못한 그레이디는 집에 있는 동안 식물을 키우기 시작했다. 처음 키운 것은 베고니아였고, 꽃봉오리를 틔우기 전에 말라 죽었다. 두 번째로 작은 화분에 선인장을 키우기 시작했다. 선인장은 마르지 않았다. 그는 낮에 몇 분이고 선인장을 바라보며 앉아 있었다. 물을 자주 주지 못해 좀 쑤실 때마다 버릇처럼 그렇게 했다. 물을 참아가며 키운 선인장은 습기 많은 집에서 용케도 흙을 말리며 커갔고, 생각보다 금방 꽃 피웠다. 손바닥만 한 선인장에 손톱만 한 꽃이었다. 어이 이거 좀 봐. 두 손으로 화분을 조심스레 감싸 자랑스레 내밀어 보여주는 그레이디를 마주한 채, 보이드는 악의 없이 웃었다. 보이드는 식물을 기르는 것이 그에게 분명 도움될 거라 믿었다. 모르긴 몰라도 그런 치료법도 있지 않던가, 그림을 그리게 하고 그러는 종류의. 확실히 선인장 꽃이 핀 뒤 그레이디는 예전보다 크게 우울해하지 않았다. 화를 내는 일도 줄었다. 뾰족뾰족한 것을 죄다 선인장에 옮겨 꽂아놓은 양 말랑해졌다. 보이드는 자신이 집을 떠나 있는 낮 동안 그레이디가 선인장을 향해 하염없이 앉은 모습을 떠올렸다. 군화발을 한시도 얌전히 못 대고 있던 그레이디가 몇 분이고 그렇게 선인장만 향해 있을 모습은 이제 상상하기 어렵지 않았다. 보이드는 문득 공포에 질렸다.










그레이디는 보이드가 곰팡이 슨 부엌 벽에 기대 앉은 채 동전을 하나하나 세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는 보이드가 절대 지쳐 울 일이 없을 거라 믿었다. 저 구질구질한 페니들을 세고 또 세다가 손가락에 철 냄새가 깊게 배더라도, 꼬질꼬질하게 구겨진 지폐를 애써 하나하나 펴야 하더라도. 돈을 넣어 둔 통에까지 곰팡이가 번져 일일이 마른 천으로 닦아내야 하더라도. 그것이 그레이디를 화나게 했다. 그는 보이드의 등이 저를 돌아보길 바라며 술병을 소리나게 내려놓곤 했다. 여기 진짜 지긋지긋해, 씨발. 씹어 뱉는 것은 보이드에게 위로 건네기 위한 그레이디의 방법 중 하나였다. 그가 술병을 내려놓으면 보이드는 뒤돌아보았다. 어김없이, 두 눈가를 늘어뜨리며 웃는 것도 우는 것도 무표정도 아닌 얼굴로. 눅눅한 집안에 잠깐이나마 퍼지는 햇살 같은 그 표정을 그레이디는 성경 같은 표정이라고 부르고 싶었다. 마주하면 마음이 풀렸다. 꼭 배배 꼬인 줄을 단번에 잘라내어 후루룩 풀어내듯이, 보이드는 마법처럼 그를 해체하곤 했다. 무력해지는 순간을 즐기는 것은 그레이디의 몫이었고 손톱 아래 때가 낀 손으로 따스히 그를 쓰다듬어 주는 것은 보이드의 몫이었다. 머리가 엉망으로 길어 버린 그레이디의 뒤통수를 쓰다듬던 보이드는 문득, 먼지 앉은 창틀에서 위화감을 느꼈다.

선인장 어떻게 했어?

그레이디는 대답 대신 입술을 혀로 축이며 시선을 피했다. 보이드의 두 손이 그의 양 뺨을 감쌌다.

그레이디, 선인장.
내다 버렸어.

퉁명스럽게 쏘고 한 번 눈치 보았다. 보이드는 그를 끌어안았다. 안도감이 깊게 들었다.










침대는 보이드가 중고시장에서 고른 것이었다. 그레이디는 중고시장에 있는 물건을 탐탁치않게 여겼으나 눈을 빛내며 신중히 고르는 보이드를 보고 굳이 내색하지 않았다. 트럭까지 빌려 가져온 침대에다 보이드는 진드기약을 바르고 비닐을 씌웠다. 그레이디는 약이 소용 없다 믿었기에 젖어 떠는 밤이 아니면 팔뚝과 배를 긁어댔다. 심리적인 요인으로 발발한 가려움은 발작적으로 올라오지 않았다. 은근하게, 천천히, 사람을 기만하듯 스멀스멀 피부를 덮었다.

비가 오면 부엌 벽 한구석에서 물이 샜다. 그레이디는 벽장을 뒤져 전쟁 때 신던 군인 양말을 꺼냈다. 질긴 천을 쭉쭉 당겨 물 새는 구석에 박았다. 보이드는 그것을 보고 핀잔 줬다. 아깝게 왜 그걸 써. 그레이디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숙여 허리 맨살을 드러낸 채 얼굴만 돌려 대답했다. 이딴 양말 난 하나도 안 아까워. 제법 힘 줘 말하는 얼굴에서 보이드는 변명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으나 일부러 아무 말 않았다. 대신 그의 뒤로 다가가 바지 위로 드러난 살과 런닝셔츠 위에 몸 겹쳤다. 비는 간혹 끈질겼다. 둘은 빗소리를 들으며 숨죽여 섹스하다가 그래도 비가 그치지 않으면 알몸으로 늘어진 채 매트리스 아닌 곳을 의미없이 뒹굴었다. 엎치락뒤치락하며, 서로의 땀 젖은 피부에 자국을 여럿 내며.

땀에 절은 그레이디가 자는 동안 보이드는 맨몸으로 신발만 구겨 신은 채 창가에 붙어 담배 폈다. 선인장이 놓였던 자리를 가늠했으나 오래 머물지 않은 사물은 흔적을 남기지 못했다.










그 뭐야, 내일부터 나 집에 없어.

그레이디가 말할 때 보이드는 수프에 감자가 익었는지 확인하고 있었다. 국자로 감자 동거리를 꾹 눌러 보던 그는 연인의 말 뜻을 금세 알아듣고 대답했다. 취직 축하해. 그리고 웃었다. 옆으로 다가온 그레이디는 쑥스러워 하는 듯 보였다. 검지로 제 콧잔등을 긁으면서 괜히 보이드의 팔뚝에 부대껴왔다. 보이드가 국자를 들어 후, 후, 불고 내밀었다. 그레이디는 호르륵 소리까지 내며 받아 먹고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뒤에서 등에 살을 붙이며 엉겨붙는 모양새가 어렸다.

앞으로 그, 나 일하면 이사도 가고 할 거니까.

까지 말하고 그레이디는 그의 어깨에다 눈을 묻었다. 보이드는 국자를 놓고 뒤로 손 뻗어 그의 정수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보이드의 정장은 영국식이었다. 그레이디가 입기에 자켓 어깨가 조금 끼긴 했으나 품이 얼추 비슷해서 팔이며 허벅지나 가슴은 꽤 태가 났다. 보이드는 그의 뒤에 서서 목 뒤며 등을 한참 펴주었다. 거울 속에서 눈이 마주쳤다. 보이드가 그의 어깨에 양손을 올린 채, 귀에 대고 속삭였다. 자랑스러운 그레이디. 그레이디의 귀가 붉어졌다. 그 위에 보이드의 입술이 잠깐 닿았다.

창가에 다시 들여놓은 선인장은 며칠 밖에서 비를 맞았음에도 금방 가시를 말리며 도로 자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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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과남 10주년] 쏜튼x스란두일





북과 남 보세요 여러분 북과 남

깡패 미모의 리처드가 나옵니당

원래 쏜튼마가렛 쓰고 싶었는데ㅠㅠ 도저히 생각이 안 나네요 ㅠㅠ

그래서 티캣님과 같이 잠깐 풀었었던 쏜튼 스란두일로;;;;


완전 단문입니다ㅠ 









"이런 재주가 있는 줄은 몰랐군."


스란두일은 제 몸에 걸쳐진 까만 면직물에 감탄했다. 밀튼의 공장에서도 최고급으로 꼽히는 질감이리라. 비록 스란두일의 생활이 면 공장과 거리가 멀다 해도 좋은 면의 질감과 태를 구분치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는 만족감을 숨기고 있었으나, 아래서 바지 솔기를 정리하던 쏜튼은 제법 뿌듯하게 웃었다. 


"마음에 드십니까?"


자신감 있는 목소리로 물으니 예의 위엄 찬 미소로 답해주었다. 그래, 훌륭하구나. 쏜튼은 피식 웃고는 한 쪽 굽히고 있던 무릎을 펴고 바로 섰다. 저보다 비슷한 위치의 시선이 마주했다. 가까이서 본 스란두일의 눈은 항상 색소가 옅어서 사람 아닌 이종이나 아주 아득한 곳에서 온 종족 같아 보였다. 한 때 쏜튼이 그의 시선을 두려워 한 적 있었으나, 그것은 이질감 탓이 아니었다. 곧게 뚫어 나가는 스란두일의 눈에서 제가 읽힌다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무언가를 두려워해보신 적 있습니까? 하고 일전 물었을 때에 스란두일은 똑같은 눈으로 자신을 보며 대답했더랬다. 나는 항상 두려웠고, 두렵다. 그러나 평온하기 그지없는 이마 위에 읽어낼 수 있는 것이라곤 무엇도 없었다. 쏜튼은 그 날, 겨울의 심해를 떠올렸다. 분명 생명도 물도 있으나 누구도 들여다보지 않으려 하는 물. 스란두일은 말하자면 물보다는 바람에 가까웠으나 쏜튼은 깊은 바다를 떠올리고 눈을 감아 버렸다.


"바닷바람이 세더구나."


가슴께의 단추를 채워 주던 쏜튼은 꽤 놀랐으나 짐짓 태연한 척 턱을 당겼다.


"예, 곧 겨울이 아닙니까."


먼 공원으로부터 불어와 밀튼의 구석구석을 헤집고 다니는 바닷바람은, 이곳에 온지 얼마 되잖은 스란두일에게 분명 차갑고 매서우리라. 쏜튼은 지금 제 손에서 만져지는 스란두일의 정장 말고도 모직 코트를 하나 더 마련해 드릴까도 싶었다. 마지막으로 줄자를 꺼내어 양 쪽으로 당겼다. 각지고 단단한 어깨 양쪽에 맞춰 길이를 재는 동안, 스란두일의 숨결이 그의 코끝에 닿았다. 고개만 들면 입술이 닿을지도 모르는 거리, 쏜튼은 그러나 줄자를 접고 한 걸음을 물러섰다.


"다 되었습니다. 며칠 지나면 받아 보실 수 있으실 겁니다."


무심히 내뱉은 끝에 스란두일이 입 끝을 올려 웃었다.


"자네 옷은?"

"......예?"


예상 못한 물음에 눈썹을 치켜들며 되묻는 동안, 스란두일은 가봉한 겉옷을 재봉사가 벗기도록 팔을 뒤로 뻗었다.


"자네 옷도 같은 걸로 맞추지. 액세서리는 내가 알아봐 줄 수 있네."


쏜튼은 줄자 쥔 손에 눅눅히 땀 젖어가는 것을 느끼며 대답했네. 알겠습니다. 머릿속을 동동 떠다니는 말은 그게 아니었으나,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띠고 저를 보는 스란두일에게 무어라 길게 이야기할 수 없었다. 눈을 내려깔고 다소 오만하게 입 다문 그 표정은, 쏜튼만 읽을 수 있는 그의 수줍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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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샤] 어쩔 수 없이





아무로는 약에 쓰라린 통증을 참으며 다시 그의 손가락부터 떠올렸다. 그는 샤아 아즈나블이 곧 부서질 것처럼 여리고 예민하다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의 오만함에 고개를 저었다가, 다시 그 가늘고 흰 손가락을 떠올리기를 반복했다. 샤아 아즈나블은 아름다웠다. 아무로는 그의 벽안에 잠깐 떠올랐던 찬 웃음기를 기억해내려 애썼다. 보스는 좀처럼 웃지 않았다. 몸을 섞을 때에도 소리를 많이 내는 편이 아니었다. 밑에 들어온 지 몇 달이 지났는데도 아무로는 제 보스가 막막한 백지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샤아는 흰 것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어찌 보자면 짙은 색을 하고 부끄러운 줄 모르며 꽃잎을 떨구는 늙은 나무 같은 쪽에 가까웠다. 불투명한 투명함이라고 해야 할까. 아무로는 고개를 한 번 갸웃 기울였다. 붕대 끝을 이로 물고 잡아당겼다. 흰 천 위로 피가 빼곡이 배어났다.


죽을 고비를 겪고 돌아왔지만, 상처는 금방 나을 터였다. 문제는 구역이었다. 이미 빼앗긴 곳에 자신을 보낸 샤아의 의중을 짐작하기 어려웠다. 한 번 털린 데라면 굳이 수복해도 이후 내내 말썽일 터였다. 그런데 왜. 제 아무리 애송이라도 이 바닥의 기본 생태며 클리시에도 파악 못할 만큼 멍청하지는 않았다. 샤아의 앞에서, 책상을 사이에 두고 보고할 것을 생각하니 벌써 짜증이 솟구쳤다. 마지막으로 붕대 끝을 매듭짓고 있을 때 방문이 열렸다. 예측하고 쏘아본 곳에는 샤아가 서 있었다. 


"죽상이군."


샤아는 문 곁에 몸을 비스듬히 기대고 섰다. 아무로는 그가 방에 들어오지도, 돌아 나가지도 않을 것처렴 생각되었다. 


"죽을 곳까지는 아니더군요."


빈정대는 말에 샤아는 보일 듯 말 듯하게 웃었다. 눈에 어린 웃음기만은 감출 수가 없었다. 아무로는 붕대 감긴 팔을 이리저리 휘둘러 보곤 침대에서 일어나 그의 앞까지 큰 걸음으로 다가섰다. 


"보고 받으러 오신 것이라면 제가 한 시간 뒤에,"

"아, 아니. 아니야."


말이 단번에 끊겨 아연해진 아무로 앞에 샤아가 제 손에 들린 종이가방을 내밀었다. 받아 들고 열자 검은 정장이 한 벌 들어 있었다. 


"싸구려만 입고 다니더군. 입어 봐. 기성품이지만 네가 입고 다니는 것보단 편할 거다."


아무로는 팔짱 낀 샤아의 가슴팍에 시선을 두고 있다가, 거절 않고 옷을 꺼내 침대 위에 늘어 놓았다. 붕대 위에 그대로 입은 새 셔츠는 빳빳해서 살갗에 아팠다. 새것 냄새에 이질감을 느끼며 바지에 다리를 꿰고 버클을 올렸다. 내내 지켜 보던 샤아가 손을 허리 뒤로 감아 혁대를 끼워 주었다. 느리고 여유로운 손가락이었다. 하나하나 돌려 앞으로 당겨 채워준 후, 입으라는 투로 재킷을 펼쳐 들어 보였다. 아무로는 등을 보이며 뒤로 손을 뻗었다. 걸치는 것을 도와주고, 뒤에서 옷깃을 당겼다가 다시 털어주는 보스의 손길에서 어른스러움을 느꼈다. 아무로는 괜히 어린아이처럼 부끄러워졌다. 뒷목 언저리에 샤아의 손가락이 닿았다. 서늘하고 차가운 검지가 스치자 조금 소름이 돋았다. 보스의 손가락은 몇 번 더 등이며 허리를 오간 후 아무로를 뒤돌게 했다. 비로소 미소가 어렸다. 


"사이즈가 맞아서 다행이군."

"마음에 드십니까?"

"네가 마음에 들어야지."


라고 대답했으나, 휘적휘적 돌아보고 나서야 그는 아무로의 방에 전신거울이 없는 것을 깨달았다. 아무로는 제법 그 나이답게 쑥스러운 표정을 하고 섰으나, 또한 그 나이답잖게 말쑥하기도 했다. 그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워서 샤아는 슬그머니 다시 웃었다. 그리고 재킷 안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그가 꺼낸 것은 베레타 M92였다. 쓴 흔적이 역력하고 오래된 티가 나는 것을, 든 채로 잠깐 보다 아무로에게 쥐어 주었다. 아무로는 반질반질한 총신을 쓸며 베레타를 요리조리 돌려 보았다. 제가 쓰는 글록보다 샤아의 베레타는 더 크고 묵직했다.


"이건 뭡니까?"

"내가 처음 썼던 총이다."


라는 말에 왜, 하는 투로 마주했으나 샤아는 쥐어 보라는 듯 턱짓만 했다.


"따로 고칠 필요는 없을 거다. 그립감이 무거운 편이지만 익숙해지면 글록보다 나을 테고."


아무로는 충족되지 않은 대답에 다시 샤아를 마주했다가, 파랗게 뜬 눈이 곧아서 대답 듣기를 포기했다. 아무로는 지금보다 더 젊고 위험한 샤아 아즈나블을 상상했다. 검은 베레타를 들고 수많은 아수라장을 누볐을 샤아는 분명 그 존재감만으로도 큰 위압이 되었을 터였다. 그는 몇 번이나 이 총을 해체하고, 몇 번이나 이 앞에서 뉘우쳤을까. 혹은 자만했을까. 아무로는 베레타를 쥔 채 굳었고 그동안 샤아의 눈이 느리게 깜박였다. 아무로가 그를 마주했다. 독기 어린 듯도 하고 항상 날이 선 것도 같은 눈을 똑바로 마주할 수 있는 자는 조직 안에서 몇 없었다. 샤아는, 그 또한 만족스러웠다. 시선이 내려와 아무로의 어깨에 닿고, 이내 팔과 손목으로 떨어져 다리 라인을 훑었다. 


"불편하지는 않나?"


대답이 없기에 샤아는 다시 시선을 올렸다. 아무로는 역시, 그 나이답게 솔직했다. 좁힌 미간과 뚱하게 뜬 눈이 그러했고, 말해 보라는 듯 허리를 펴고 턱을 치켜 든 제 팔뚝을 사납게 쥐는 손이 그랬다. 


"굳이 저를 시험하는 이유가 뭡니까?"


코 끝이 서로 닿을 것처럼 가까웠다. 조절되지 않는 호흡을 맡으며 샤아는 아무로에게 향수까지 함께 줄 것을 그랬다고 후회했다. 


"시험이라고 생각한다니 실망인데."

"당신은 날 언제까지 우습게 보고,"


까지 내뱉어 놓고 아무로는 샤아를 놓았다. 빈 주먹을 쥐며 화를 누르고 후회하느라 고개를 저었다. 


"보스."

"샤아라고 불러 봐."


가느다랗고 하얀 손이 턱을 잡아 부드럽게 끌어올렸다. 입술이 짧게 닿았다 떨어졌다. 


"샤아."


어린 아이가 외국어를 따라하는 것 같은 목소리였다. 샤아는 그를 끌어안았다. 품에 꽉 찬 어깨는 분명 어리건만 막 단단해지고 있어서 닿을 때마다 그를 쉽게 흥분하게 했다. 아무로의 손이 뒤통수로 올라와 금발 사이를 함부로 헤집었다.


"무사히 돌아와 줘서 고마워, 아무로."


귀에 대고 속삭인 말이 좋았다. 아무로는 보스의 어깨에다 입술을 묻었다. 왼손에 들린 베레타의 무게에 어깨가 자꾸만 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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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BC셜록전력 60분] 처음 (단문)



(( 셜마 - 셜록 x 마이크로프트 성향이 있습니다 ))










어쩌면 나는 그의 만년필처럼 손에 끼울 수 있는 딱 한 자루만큼만 남아 있기를 바랐는지도 모른다. 하얗고 우아한 손가락 사이에, 마치 찻잔을 들 때처럼 고아한 동작으로 잡았다가 글자가 종이에서 끝나면 미련 없이 다시 놓을 수 있는, 딱 그만큼. 마이크로프트는, 내 형은, 언제든지 흐트러짐 없는 사람이었다. 가지런하고 네모난 손톱 하나까지 망가지거나 깨진 적이 없었다. 어릴 적 나는 Mi6의 요원들이란 모두 저렇게 결벽증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했다. 맨 처음 MI6에 불려갔을 때에 응접실에서 얼핏 잠깐 들여다 본 사무실은 분주하고 정신 없는 요원들의 모습, 그 와중에도 하나의 큰 체제를 이루고 있는 복잡한 구조의 탑 같은 광경을 띠고 있었다. 그리고 마이크로프트는 그 안에 버티고 선 또 하나의 탑이었다. 탄성을 가지고 흔들리는, 그러나 우아하게, 결코 무너지거나 구부러지지 않는 고아한 탑. 비록 거대한 정보기관에 대한 내 환상은 깨졌으나, 마이크로프트에 대한 내 생각만은 깨지지 않았다.


나는 그를 동경했다. 


어쩌면 나는 그가 먼저 태어난 것에 대해 질투했는지도 모른다. 나이차 많은 그를 올려다보지 않을 때까지 18년이 걸렸다. 성인이 되어도 키가 크는 경우가 있다더구나. 선심 쓰듯이 말한 그의 옆모습을 보고도 나는 듣지 못한 사람처럼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는 내 표정에 개의치 않고 넥타이를 고쳐 메고 소매를 털었다. 사춘기가 지날 때쯤, 나는 그가 가진 정장 재킷이나 구두 따위를 갖고 싶어했다. 형의 방에 몰래 들어가 물건을 만지고 옷을 입어 보며 그의 물건을 탐냈다. 어렵사리 부모님께 이야기를 꺼내면 같은 브랜드의 물건을 사주시곤 했다. 반질반질한 내 소유 물건을 처음 받고 새것 특유의 냄새를 맡고 나서야 깨달았다. 나는 형과 닮고 싶은 게 아니었다. 형을 가지고 싶었던 거였다.


마이크로프트는 내 기숙사에 단 한 번도 온 적 없었다. 자랑스러운 입학식 때도, 대학 대회에서 상을 받을 때도, 재미 삼아 같은 과 학생을 곤죽으로 만들어 놓았을 때도, 혹은 기숙사를 옮겨야 할 때도. 나는 기숙사의 창가에서 나뭇잎을 세며 가끔 형의 뒷모습을 떠올렸다. 대학 기숙사는 계절만 변할 뿐이었지 지극히 단순하게 흘러갔다. 그를 다시 볼 수 있는 것은 방학 때뿐이었다. 지루하고 긴 방학 동안 나는 MI6의 응접실을 애용했다. 마이크로프트가 구축해 놓은 인맥은 어마어마해서 손가락 끝을 모은 채 소파에 앉아 있다 보면 그의 동료로 짐작되는 사람을 하루에도 다섯 이상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마이크로프트는 응접실에 들르지 않았다. 내가 들어갈 수 없는 문 안에서 꾸준히 일을 하고 있었다. 내가 그를 원망했던가? 아니, 그를 미워했던가?


셜록, 너는 인내심이 필요해. 조금 더 착해져야 해. 너는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똑똑하지 않다는 걸 알아야 해.


마이크로프트는 내가 대학에 다니면 조금 달라질 것이라고 믿은 것 같았다. 안타까운 일이었다. 나는 실망했다. 지루한 대학의 시스템에, 그리고 이미 대학을 다녀 본 뒤 그렇게 말한 마이크로프트의 말에. 그가 혼자 지내는 방은 정말로, 정말로, 깨끗하고 섬세해서 따분할 지경이었다. 정리된 찻잔을 몇 개 섞어 놓고 하수구에 세제를 몽땅 들이부은 뒤 한소리를 듣고 소파에 앉았다. 몇 개월만에 마주친 마이크로프트는 여전히 우아했다. 형은 늙지를 않네. 그렇게 말하자 마이크로프트는 찻잔을 내려놓고 말했다. 홍차를 마시렴. 좋은 걸로. 나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래, 직장은 어때? 꼭 어른처럼 말하는구나, 셜록. 


나는 그의 재킷 주머니에 꽂힌 만년필을 바라보았다. 그가 항상 쓰던 것, 그의 몸에서 떨어지는 것을 본 적이 드문 것. 내가 가져도 되냐며 어릴 적 물었다가 외면당했던 것. 마이크로프트는 시계를 한 번 들여다본 뒤,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그의 앞에 서서 물었다. 


언제까지 나를 저 칙칙한 기숙사에다 가둬 둘 거지? 


마이크로프트는 미간을 구겼다. 안타깝다는 듯이. 


네 피해망상에 일일이 대답해 줄 생각은 들지 않는구나.


탑이 한 번 기울었다. 위태롭지만 쏟아짐 없는 동작으로 마이크로프트는 내 곱슬머리를 만져 주었다. 헝클어졌을 부분을 손가락 새에 넣고 쓸어 다듬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그의 목언저리를 보았다. 옷깃을 열고 무엇이든 쏟아내게 하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이런다고 이미 새기 시작한 댐이 고쳐지진 않아.


말하기까지 용기가 필요했으나 마이크로프트는 머리에서 손을 떼고 내게서 돌아섰다. 나는 긴 철골 같은 것이 그의 등에 파직파직 솟아 있는 환상을 보았다. 


문단속 잘 하고 가렴.


그가 나간 뒤, 나는 내 손에 들린 만년필을 내려다보았다. 처음으로 가진 형의 물건이었다. 몇 번 흔들고 손에 쥐어 보았다가 심을 뽑았다. 한 손으로 쥐고 으스러뜨렸다. 먼지 하나도 없을 것 같은 형네 카펫 위에 검은 잉크가 방울방울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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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캣님 리퀘 개리로난


티캣님의 리퀘!! 개리로난입니다!!!
(인투더스톰 개리 × 가디언즈오브갤럭시 로난)
이 크오... 케미 좋은데 같이 파실래요..? 개리로난 소곤소곤

리퀘 신청해 주신 티캣님 감사해요!!












이곳은 무엇이든 작고 여리고 동시에 생생했다. 로난은 지구의 탁한 환경만큼이나 손에 닿는 작은 것들에 적응하기 더 힘들었다. 그는 강했던 만큼 앓았다. 둥지를 벗어난 맹금은 부리와 발톱을 잃고 자존심만 남아 이 작은 별을 부수어 버리고 돌아가고픈 마음이 굴뚝 같았으나, 몸은 마음과 달랐다. 그는 개리가 내다 준 라운지 의자에 누운 채 눈을 찌푸리고 해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곳의 햇빛은 사납지 않았다. 따갑게 몇 시간을 쪼이고 있으면 금세 알아서 수그러들고 식었다. 로난은 눈을 길게 내려 감았다가 떴다. 방 안에는 개리의 둘째가 틀어놓은 소리가 잔잔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내려깐 눈, 가느다랗고 힘없는 시야에 하늘을 배경으로 도약하는 새가 보였다. 돌아갈 수 있을까, 의미를 모르고 계속 굴리기만 하던 생각은 저도 모르게 접어두었다.

개리가 돌아오기까지 이곳은 자주 비었다. 방학을 맞은 아이들까지 밖으로 나가면 로난은 빈 집에 있는 물건들을 하나씩 집어다 들여다보곤 했다. 지구는 복잡했다. 살기로 가득한가 싶으면 어느 날은 갑자기 잠에서 깬 아이처럼 언뜻언뜻 어지럽고 제멋대로여 보였다. 로난은 라운지의자에 깊이 누운 채 눈을 감았다. 그는 이 기분을 무어라 표현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이곳에 오고 앓다가 눈을 감았다 뜨면 어김없이 저를 간호하다 잠든 개리의 모습이 보였다. 가끔은 제 몸 위에 엎드려 자고 있었다. 그는 달빛 받은 채 불편하게 구부린 지구인의 넓은 어깨를 이해하지 못했다. 왜 나를, 무슨 이유로.

"밥을 먹어야 기운이 나죠."

개리의 첫째가 한 손에 축구공을 든 채 말했다. 로난은 대답 대신 아이를 빤히 바라보았다. 아이는 겁을 먹은 것인지 쭈뼛거리다 곧 사라졌다. 이름이 뭐랬던가, 로난은 잠깐 기억을 더듬다 말았다. 개리가 돌아온 것은 그로부터 십 분도 지나지 않아서였다. 아이들의 목소리와 개리의 목소리, 냉장고 문 여닫는 소리가 연이어 발코니까지 작게 들려왔다. 아빠, 뭘 이렇게 많이 사왔어요? 정리 좀 도와라. 시리얼은 거기, 그래. 그것 좀 건네 다오. 먼 수선스러움 속에서 로난은 다시 눈을 감았다. 그가 이곳에 오고부터 생긴 변화 중 하나는 졸음이 잦아졌다는 것이었다. 잠에 빠져들었다가 다시 일어났을 때 하늘은 저녁이 다 되어가고 있었고 노을의 붉은 색을 배경으로 개리가 화분에 물을 주고 있는 것이 보였다.

"오래 자는군요. 곧 저녁할 테니까 기다려요."

개리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시선은 화분에 고정한 채였다. 로난은 이 지구인의 말을 모두 알아들었으나 대답하지 않았다. 누군가가 제 시중을 드는 것이 어색할 리 없건만, 그는 이 작은 집에 머무는 내내 생소했다. 해 지는 발코니에 그를 내버려두고 개리는 금세 안으로 들어왔다. 로난이 입은 개리의 감색 티셔츠가 그의 몸에서 느리게 열을 빼내고 있었다.

개리는 젖은 손을 털고 요리를 시작했다. 소화가 잘 될 음식을 굳이 만들어 본 적이 언제던가. 건강한 아이들을 둔 탓에 먹을 사람의 속까지 신경쓸 일은 드물었다. 어찌된 일인지 저 자는 어마어마한 덩치에 단단한 몸을 갖고도 깊게 앓았다. 개리는 그것이 단순한 건강 문제가 아니라고 믿었다. 맛을 보고 간을 치는 손이 다급했다. 몇 번 고쳐도 마음에 들지 않는 요리란. 그에게는 애들 엄마처럼 고운 맛을 내는 재주가 없었다. 로난이 불쑥 부엌으로 들어왔을 때에 개리는 화난 얼굴을 숨기기 힘들었다.

"방해하지 말고 앉아서 기다려요."

개리는 내뱉어 놓고 몇 초가 지나서야 후회했으나 겉으로 내색하지는 않았다. 로난은 개리의 바쁜 손짓을 빤히 보고만 있을 뿐, 그 말에 개의치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항상 그랬다. 처참한 폭풍의 잔해더미 속에서 그를 건져 온 개리는 제 말이나 행동이 그에게 영향 주는 것을 본 적이 드물었다. 로난의 눈동자가 선명한 보라색인 것을 그가 보기까지 며칠이 걸렸다. 눈을 뜨자마자 개리를 잡아먹을 것처럼 멱살을 틀어쥐고, 알아듣기 힘든 말로 중얼댈 때에 개리가 그에게 느낀 바는 공포보다는 큰 연민에 가까웠다. 개리는 그에게 이름 외 다른 것을 묻지 않았다. 아이들이 가까이서 오래 말 섞지 않도록 주의 주었다. 탁한 자수정에 금이 가면 저런 모양새를 띨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떤 흠을 지녔는지까지는 개리가 상상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무엇도 묻지 않았다. 잠자리를 내어 주고 먹을 것을 주었다. 로난은 차갑고 제멋대로였다. 아이 같은 제멋대로임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개리는 몸에 밴 대로 그를 타이르고 잡아두었다.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그에게서 개리가 가장 강하게 떠올린 이미지는 칼날을 거꾸로 쥐고 흔들어대는 아이였다. 푸른 피부 위에는 이미 여러 개의 선연한 자국이 있었다. 그 또한 묻지 않았다.

"앉아요."

로난이 선 바로 앞에다 스프와 스푼을 내려 준 개리는 이어서 몇 가지 제각각 다른 음식을 담은 접시까지 내려 놓고 아이들의 이름을 큰 소리로 불렀다. 식사가 시작된 이후, 로난은 음식을 대충 입에 넣고 굴렸다. 그는 식사 중에도 항상 과묵했다. 먹고 나면 말없이 일어나 사라졌다. 라운지나 아직 복구 덜 된 작은 뜰에 선 뒷모습에서 개리는 그가 돌아가고 싶어 하는 것은 아닌가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 또한, 짐작 뿐이었다. 아랫입술을 씹어대던 개리는 결국 로난에게 다가가 팔을 낚아챘다. 끌어당겨 집 밖으로 나갔다.

"무슨 짓이지?"

밖에는 해 대신 달이 떠 있었다. 로난의 묵직한 목소리는 이 세상 것 같지 않았으나 개리는 겁 먹지 않았다. 조수석 차 문을 열고 큰 덩치를 밀어 넣었다.

"쇼핑이나 갑시다. 맞는 옷이 있어야 입히지."

반박할 틈을 주지 않고 문을 닫아 버렸다. 운전석으로 걸어가는 그를 앞창으로 바라본 로난은 표정을 일그러뜨리고 있었다. 이내 운전석에 들어온 개리가 시동을 걸며 뒤늦게 덧붙였다.

"죄다 부술 것 같은 그 표정 좀 하지 마요. 환자 주제에."
"환자?"

되묻는 말에 개리는 대답 대신 차를 움직였다. 로난은 한동안 그의 옆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개리는 기죽지 않고 운전했다. 차 안에는 묘하게 새콤한 향이 났다. 로난은 무어라 말을 꺼내고 싶었으나, 어지러워져서 이내 포기했다. 지구의 냄새는 이렇게 이따금 그를 몰아붙였다. 무엇이든 마음에 들지 않았다. 껍데기 탓에 속을 삭혀야 하는 분함에 입만 다물고 있을 때, 개리가 차량 오디오를 켰다. 흘러나오는 음악에 로난이 놀라 바라보았다.

I'm in love for the very first time
I'm like a shark in a general line

"로난."

놀라움으로 동그래진 로난의 보라색 눈이 개리를 향했다.

"조금만 참아요. 곧 낫겠죠. 당신, 강해 보이니까."

어영부영 말을 흐려 놓고 핸들을 돌리는 개리는 조금 불안해 보이기도 했다. 오디오에서는 선율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는 어깨를 한 번 움츠려 보이고 다시 말했다.

"오늘 말썽 부리지 않으면 바깥 외출도 허락해 줄게요. 나랑 같이 나가야 하겠지만."

말을 뱉어 놓고도 개리는 스스로가 우스웠다. 누구인지 알고 밤을 새가며 앓는 이를 간호한 것인지, 정말 어디다 신고라도 해야 하는 게 맞지 않나 싶은 생각은 내내 하고 있었다. 로난은 도로 앞을 보고 앉은 채, 곡의 막바지가 되어서야 푸른 입술을 느리게 움직였다.

"네 기준으로 말썽 부리지 않는다는 건 무엇이지?"

이번에 놀란 것은 개리였다. 그야 당연히, 하며 머릿속으로 리스트를 만들어내고 있을 때 로난이 덧붙였다.

"내게 가르쳐라."

개리는 먼저 고개를 끄덕이고, 그 다음에 대답했다. 그러죠. 로난의 눈은 차 옆으로 지나치는 가로등 불빛을 하나씩 담아냈다. 한 곡이 끝났지만 새로운 곡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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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폰즈] 열




스파키님 리퀘 스폰즈입니다!

근데 이게 아니었던 거 같은데 ..ㄴㅇㄻㄴㄻㄴㄻ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면목이 없네요...............어쩌지.........











몸은 통증에 반응하고 통증은 머리에서 반응한다. 눈을 감고 뜨는 동안에도 수만 번, 많게는 수십만 번 일어나는 일이다. 적어도 스팍이 알고 있는 매커니즘이란 그랬다. 특수한 상황에는 특수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한계이고, 그것은 스팍이 레너드를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하나의 논리였다. 아무리 불완전하고 금방 부서질 것 같더라도 아름답게 조각해 낸 유리잔을 보고 미완성품이라 부를 수는 없었다. 스팍은 레너드 맥코이를, 닥터 본즈를 그런 것으로 이해하려 했다. 이지러뜨리지 않도록 조심해서 숨결을 불어 넣으면, 레너드는 때로는 그가 예상한대로, 때로는 예상하지 못한대로 부풀거나 줄어들었다. 모두 레너드가 본래 갖고 있던 모습이었다. 감정을 담아낸 얼굴을 보면 만족스러웠다.


"닥터."


조용히 불렀으나 숙인 얼굴에 들릴까 싶었다. 하지만 용케도 레너드는 스팍을 마주해 주었다. 아드레날린이 과하게 분비된 그는 이미 10분이 넘도록 헐떡이고 있었다. 불안정한 호흡이라 간간이 끊겼다. 관자놀이부터 땀인지 피인지 모를 것이 흘러 레너드의 숙인 얼굴 아래로 똑, 똑, 떨어져 벌린 다리 사이에 점성 짙은 웅덩이를 작게 만들어냈다. 스팍은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등 뒤로 양 손목을 묶은 쇠사슬이 더걱더걱 끌렸다. 언제 얻어 맞은 것인지 등이며 허리가 끊어지는 것 같아서 스팍은 아랫입술을 바투 깨물었다. 반쯤 찌그러진 레너드의 눈이 스팍을 담아냈다가, 다시 감겼다. 스팍이 창살을 살펴보는 동안 그는 얼굴을 들어올리려는 기색까지는 보였으나, 금세 떨구고 처지길 반복했다. 


함장은 어디 있을까. 스팍은 몇 초간 고민하다가 그는 따로 끌려 갔지 않을까 싶었다. 다른 크루들도 어딘가 갇혀 있을 터였다. 그의 생각으로는, 이 행성의 우주인들은 분명 인간만큼의 지능은 갖고 있는 듯했다. 결코 조악하지 않은 이 쇠창살 감옥이나 레너드와 자신을 묶어 놓은 쇠사슬 또한 그러했다. 뭘로 만든 것일까, 스팍이 가만히 살피는 동안 레너드가 고개를 저었다. 힘겹고 느린 동작이었다. 


"그만 둬."


무슨 뜻인지 스팍은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차분히 응대했다.


"나갈 방법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레너드는 허탈히 웃으며 몇 번 고통스레 기침했다. 퉤, 피 섞인 침을 뱉어내는 투가 영 사나웠다. 


"하여튼 너는,"


까지 말한 그는 다시 기침했다. 방금과 소리가 영 달라 스팍이 그를 급히 마주했다. 급기야 상체가 바닥으로 쓰러졌다. 스팍은 혼란한 검은 눈을 굴리며 조금 더 다가섰다. 쇠창살에 이마가 겨우겨우 닿을 만했을 때 묵직한 쇠사슬의 길이가 다했다. 스팍은 창살 사이에 얼굴을 대고 레너드를 불렀다. 닥터, 닥터, 그리고 레너드. 


"정신 잃으시면 안 됩니다."


스팍은 창살 사이에 위치하던 얼굴을 내려 쓰러진 그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짧은 쇠사슬덕에 팔이 들어올려지고 손목이 뒤틀렸다. 깜박, 깜박, 눈빛이 희미하게나마 돌아오고 다시 숨 쉬는 레너드를 보고도 차마 안도할 수는 없었다.


"스팍, 나는 말이야."


부름은 짧고 연약해서 언뜻 들으면 한숨 같기도 했다. 


"나는 너무 약했어. 네 말이 맞아. 나는,"


다시 기침. 고통스레 미간을 구기며 쿨럭대는 레너드에게 보일 리 없건만, 스팍은 고개를 저었다. 자세를 더 낮추려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바닥의 냉기며 냄새에 숨막혔다. 


"말하지 마십시오."


레너드의 등이 들썩였다. 그의 크루 셔츠 목 언저리, 그리고 등에 묻은 피를 그제야 발견한 스팍은 누구의 혈흔인지 추측하고 싶었다. 머릿속이 새카매지는 것만 같았다. 시야가 흐트러졌다. 말을 뱉으면 더듬을 것 같아서 어금니를 한참 꾹, 물었다. 부자유스러운 제 팔에 화가 났다. 젖힌 어깨에 힘을 주고 힘껏 앞으로 당겨 보았다. 그의 입에서 앓는 소리까지 나왔으나 소용없었다. 어깨를 뒤틀며 화를 삭였다. 레너드는 그가 하는 양을 말없이 보고만 있다가, 결국 한 마디를 내뱉었다.


"힘 빼도 돼."


금방이라도 화가 뚝뚝 떨어질 것 같던 스팍이 천천히 가라앉고, 그의 뺨이 거의 바닥에 닿을 때까지 그는 기다려주었다. 그리고 남은 힘으로 기었다. 창살 사이에 두 이마가 마침내 닿았다. 


"알겠습니다."


레너드는 새삼 기억해냈다. 그래, 저 벌칸의 중저음에 내가 홀딱 맛이 간 적도 있었지. 헛웃음을 짓고 싶었으나 숨이 찼다. 몸을 조금 더 끌었다. 쇠사슬이 당겨진 끝에 그가 스팍에게 입 맞추었다. 입술 끝만 겨우 닿아서 숨이 달았다. 불규칙적으로 들이쉬었다 내뱉는 레너드의 입김에서마저 피 냄새가 났다. 


나는 네가 영원히 나를 못 읽었으면 좋겠어.


레너드는 목 끝까지 들어찬 말을 내뱉는 대신 애달프게 입술만 부벼댔다. 떨어지지 못하고 한참을 머물렀다. 불편하게 뒤틀린 두 몸이 겹친 곳은 좁았으나, 아슬아슬하게 뜨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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