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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린스란 중장편/달을 헤다(완결)

[소린스란] 달을 헤다 8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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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린이 보기에, 요정의 물건은 오랜 세월을 이어 온 자체로도 영험하고 신비로운 구석이 있었다. 왕이 가진 물건 중 몇 가지는 천 년이 넘도록 손때를 타기도 했다. 스란두일이 손수 한 장 한 장 그려 넣은 식물도감도 그 중 하나였다. 소린은 스란두일의 서재에서 그가 만든 수백 권의 식물도감을 읽기 시작했다. 왕이 그린 꽃잎과 나뭇잎은 요정의 성정답게 섬세하고 꼼꼼했다. 가느다란 필체로 기록한 방대한 자료 중 어떤 것은 몇 백 년을 이어 관찰한 기록이 빼곡히 적혀 있기도 했다. 소린은 이미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 고서가 되어 버린 스란두일의 책을 빼어 들고 먼지를 후, 후, 불어가며 공들여 읽었다. 종이는 가까이 들여다보기만 해도 기침이 날 정도로 먼지가 많았고, 요정어로 쓰여 있기에 소린이 모르는 단어 또한 많았으나 제 왕의 글자와 그림을 보고 있으면 하나 같이 예뻤다. 낯선 말을 입 속으로 작게 발음하다 보면 곁에 잎이며 풀뿌리 등을 늘어 놓고 기록에 집중하는 왕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는 지금보다 더 젊은 스란두일이 옷깃을 닳아가며 책을 쓰는 것을 상상해 보았다. 제가 알지 못하는 저 과거의 스란두일은 더 자주 웃고 더 묵직했을까, 혹은 지금보다 더 가볍고 부드러워서 숲의 깊은 곳에 자리한 봄맞이꽃의 흰 잎 같았을까. 잉크를 하나하나 찍어가며 손수 가져 온 잎과 뿌리를 책 위에 그렸을 젊은 스란두일은 소린이 상상하기에 멀지 않았다. 이제는, 결코, 멀지 않았다. 그는 종잇장 위를 엄지로 여러 번 쓸었다. 세월에 깎여나간 흔적이 희뿌옇게 지문 사이에 끼었다. 스란두일이 젊을 적 고였던 것일 터였다. 


소린이 제 식물도감에 관심을 가진 것을 안 스란두일은 시간이 날 때마다 궁 근방의 가까운 숲에서 함께 산책하며 풀의 종류와 쓰임새를 가르쳐주었다. 이것은 제비꽃이다, 이것은 살갈퀴이다, 이 붉은 열매는 함부로 먹지 마라. 소린은 스란두일의 손끝보다는 꽃잎 사이에 묻힌 곧은 콧날이나 내려 깐 눈매에 더 눈을 머물렸다. 나뭇가지 위에 머물던 스란두일의 손을 소린이 곱게 붙들었다. 잠깐 놀란 눈이, 재색의 동공이 저를 마주하고 살짝이 눈썹을 들어올리는 그 순간을 소린은 지독히도 사랑했다.


"이전에 먹어 본 적 있어서 압니다. 숲을 헤매다 며칠 아무 것도 못 먹어 되는대로 우겨 넣었더니 며칠 동안 배앓이를 한 적 있었지요."


또박또박 대답하면 스란두일은 손을 뻗어 소린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 손길이 애잔히도 달았다. 모자라고 애가 타서 부러 고생하던 때의 이야기를 더 하고 싶은 심보를 꾹, 눌러야 했다. 소린은 그의 뒤로 뻗은 나뭇잎 새, 면면히 이어질 것처럼 따사로운 햇살을 보았다. 밖의 숲은 어둠에 절어 있었으나 스란두일의 손이 닿는 이곳 후원은 달랐다. 소린은 이곳이 그와 닮아 있다 생각했다. 크게 뻗어 자라는 나무 사이에 잘게 낮은 키를 맞대고 있는 풀까지, 스란두일이 하나하나 가꾼 것임은 설명 없이도 상상 가능한 것이었다. 


"고생했겠구나."


제 아래 있을 때가 아니면 좀처럼 격한 감정을 보이지 않는 스란두일이었다. 그러나 소린은 슬며시 시선을 떼는 긴 속눈썹에서, 그 속눈썹 아래 드리운 광대 위 옅은 그림자 속에서, 백금발 새에 아찔한 과일향내에서 스란두일의 감정을 하나하나 읽어낼 수 있었다. 소린은 스란두일이 만지던 꽃을 따서 그에게 내밀었다. 받아 들고 코에 가져가는 손가락에 목을 뻗어 입을 맞추었다. 그는 단 한 번도, 스란두일의 앞에서 망설인 적 없었다. 


"저와 무엇을 하고 싶으십니까?"


말을 선뜻 알아 듣지 못하는 스란두일에게 그는 다시 말했다.


"저와 남기고 싶은 것이 있으시면 말씀해 주십시오. 함께 하고 싶으신 것이나."


그제야 의중을 읽은 왕은 고요히 웃었다. 


"생각해 보마."


아주 오래 뜸을 들이고 대답했다. 그 말이 꼭 곡을 짓듯 조심스러워서, 스란두일답잖게 여려서 소린은 굳이 더 보채지를 않았다. 


그 날 스란두일은 떨어진 꽃이며 나뭇가지들을 주워 와 소린과 함께 화관을 만들었다. 식물을 엮어 모양을 내는 것은 비록 금속을 다루는 일과 다를지언정, 소린은 제법 훌륭한 손재주로 제 왕의 화관을 엮어 주었다. 제철의 꽃이 유독 흰 색이 많은 계절이었다. 여름을 닮은 새하얗고 작은 꽃으로 자잘하게 장식하고 군데군데 초록잎을 세워 생기를 불어 넣었다. 소린은 제 손으로 스란두일의 머리에 화관을 씌워 주었다. 희고 푸른 화관은 숲의 요정왕과 어울렸다. 소린은 그의 모습이 마치 대관식을 마친 흰 숫사슴 같다 여겼다. 강인한 뿔 하나로 오래도록 초식한, 깊은 눈을 한 숫사슴. 











난쟁이의 성년식 준비는 스란두일이 생각했던 것보다 간소했다. 소린은 한사코, 제 성년식에 입을 옷을 직접 만들었다. 그것이 난쟁이의 풍습인지, 아니면 그가 유일하게 남은 난쟁이였기에 어쩔 수 없이 제 손으로 옷을 지어야 하는지 스란두일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굳이 묻지도 않았다. 


"피곤하지 않으냐?"


다만 달이 오래 기울면 걱정만 슬며시 내비칠 뿐이었다. 그러면 소린은 돌아 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별과 달이 들어찬 방에서 초를 켜 놓고 굽어 있는 소린의 등은 스란두일이 보기에 단단하고 뜨거워 보였다. 노랗게 타오르는 듯 일렁이는 소린을 보며 안타까움을 가슴 아래로 꾹꾹 누르다 잠들기를 여러 번이었고, 밤벌레 소리가 줄어들 때까지 작업하던 소린은 제 주인의 맨 가슴이 식지 않도록 이불을 끌어다 덮어 주고는 오래도록 그 머리맡에 머물러 있었다. 스란두일은 잠결에도 제 난쟁이가 곁에 머물다 품으로 파고드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소린의 생일이 되는 날은 지독하던 더위마저 한 풀 꺾여 아침에는 서늘하기까지 했다. 소린은 해가 뜨기 전에 일어나 몸을 씻고 머리를 빗었다. 요정 식으로 스란두일이 손수 땋아 준 머리를 하나하나, 풀고 거울 앞에서 다시 땋았다. 가느다랗게 막 자란 수염의 양쪽으로 땋아 내린 머리 가닥의 끝에는 철로 만든 머리 장식이 붙었다. 남은 머리에 기름을 발라 깔끔히 넘기고 있을 때에 스란두일이 방문을 두드렸다. 그는 거울 앞에 앉은 소린의 맨 등을 한 번, 그리고 옷장에 걸린 소린의 새 옷을 한 번 번갈아 보았다. 제 손으로 고집 피워 가며 만든 난쟁이의 성년식 옷은 제법 그럴싸한 모양새를 갖추고 있었다. 짙푸른 바탕에 은색으로 덧대고 중간중간 쇠 장식을 붙여 놓으니 요정의 옷감이라 해도 난쟁이의 느낌이 나서, 스란두일은 그 점이 신기해 가까이 다가가 한참을 들여다 보았다. 소매며 목 언저리까지 하나하나 작은 수를 놓은 것이 보통의 손재주가 아니었다.


"난쟁이에게는 쇠 만지는 재주만 있다 들었는데."


왕의 농에 소린은 가볍게 푸스스 웃음을 흘리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입혀 주시겠습니까?"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소린에게서는 예의 체향이 짙게 나고 있었다.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토록 오랜 기간 제 공간에서 키웠는데도 소린의 몸에서 나는 뜨거운 쇠 냄새만은 결코 바뀌지 않았다. 스란두일은 고개를 느리게 끄덕이곤 조심한 손길로 옷을 걷었다. 깃을 벌리고 등에서부터 입혀주었다. 앞의 끈을 여미고 짙은 회색의 바지까지 맞춰 입고 난 소린의 모습은, 그야말로, 난쟁이 같았다. 스란두일은 몰래 어금니를 깨물며 자책했다. 이것이 너의 모습이로구나. 이토록 단단하고, 굽을 일 없을 난쟁이의…….


"성년을 축하한다."


목소리가 떨릴까 작게 내뱉었으나 소린은 환히 웃어 주었다. 눈을 휘고 입꼬리를 올리며, 제 주인의 얼굴을 마주하다가 힘없이 늘어진 손등을 잡아 올려 그 위에 입 맞추었다. 입술이 오래도록 머물러서 스란두일의 소매에 소린의 숨결이 한참 뜨거웠다.


"감사합니다."


여름의 한가운데, 둘의 맞잡은 손 사이에 땀이 조금씩 차고 있었다. 소린이 제 주군을 이끌고 방을 나섰다. 곧은 소린의 어깨 위에 새로 떠오른 햇빛이 떨어지고 있었다.











손톱 끝에서 아리도록 나던 쇠 냄새 하나와 내 어깨에 함부로 맞닿던 곱슬머리 한 가닥 한 가닥의 검정까지, 되읊고 또 읊어서 네 이름이 닳지 않을까 실을 꿰듯 하나하나 기억하다 보면 너를 불멸 동안 담아둘 수 있으리라 여겼는데. 산 아래의 왕손, 아니, 나의 왕이라고 감히 칭하고 날 즈음 너는 오히려 흘러서 넘쳤다. 작은 필멸이 어찌 나를 이렇게 흐리는가. 달군 쇠붙이를 몸에 대듯 나는 자학했다. 너와의 기억이 그런 류였기에. 새기지 않고는 남지 않는 게 유한한 생 아니던가. 이곳을 지키는 일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나는 흐르기를 택했다. 나의 배는 작고 아늑했으며 너를 닮아 어두웠다. 안녕하라, 그리고 아직 모를 어딘가에서 다시 안녕히. 나의 난쟁이. 


-태양 제4시대를 흘려 보내는 스란두일이 소린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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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ㅠㅠ 드디어 완결입니다ㅠㅠ

린란 웹공개 장편은 이게 두 번째 완결이네요......


뭔가..... 후기를 적고 싶은데 생각나는 건 없고 그냥 시원섭섭하고 섭섭하고 그렇습니다 으앙 항상 소린이 떠난 뒤 남겨질 스란두일을 생각하면 넘 가슴 아픈 거시 바로 소린스란 아닐까 하는 ㅠㅠ


제가 하고 싶은 말은 한 가지 뿐......전하들 국혼해!!




(+ 재록본 퇴고해서 책 낼까요!!!!!! 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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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0. 17. 00:16

[소린스란] 달을 헤다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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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린스란 중장편/달을 헤다(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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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린스란] 달을 헤다 3

[소린스란] 달을 헤다 4

[소린스란] 달을 헤다 5





보호글 비번문의는 제 뒷계로만 받습니다 ㅠ













엘론드는 겉으로 내색 않았으나, 어린 난쟁이의 불 같은 기세에 크게 놀랐다. 그는 왕자가 말리는 것에도 개의치 않고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제게 덤벼들었다. 심지어 공용어도 아닌 난쟁이말로 몇 마디 욕을 뱉는 모습은 꼭 작은 맹수 같기도 했다. 영주님의 탓이 아니라고, 금방 나으실 것이라고 설명하면서 한참 왕자가 어르고 달래도 기세가 줄어들지 않던 소린은 제풀에 지치고 나서야 축 늘어져 말했다.


"전하를 살려 주십시오. 어떻게든, 제가 할 수 있는 것이면, 도와 드릴 테니."


숨을 고르며 생각나는대로 내뱉은 듯한 말과 목소리, 그리고 체념하고 땅을 보던 얼굴에서는 제법 어른스러움이 풍겼다. 


"부탁입니다."


갓 캔 보석 같다고 했던가, 그는 요정왕이 어린 난쟁이를 설명할 때에 보이던 달뜬 시선과 테이블 위를 연신 콕, 콕, 소리 내며 두들기던 그의 은반지를 떠올렸다. 식어가던 차를 앞에 두고서도 요정왕은 아이의 이야기를 제게 하느라 시선을 비스듬히 비켜 내려 두고 있었다. 그 아이가, 바로 이 아이구나. 파랗고 짙은 눈동자며 치켜 뜬 눈은 몇 백 년 전에 보았던 소린의 할아비와 꼭 빼닮아 있었다.


소린은 침상에서 벗어나질 않았다. 요정왕을 향해 굽은 어깨 위에 걱정이 한 가득이었다. 창백한 얼굴로 드러누운 스란두일과 그의 곁에 돌처럼 앉아 있는 소린은, 엘론드의 눈에 군주와 종이라기보다는 연인의 모습에 더 가깝게 보였다. 그는 소린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날을 세우고 있는 모습에다 다정하게 말해 주었다.


"금방 나을 것이네. 요정은 그리 쉽게 잘못되지 않아."


그에게는 자네가 있잖은가, 하는 말은 삼켜 두었다. 소린은 그에게 대답도 않았고 시선을 들지도 않았다. 올곧은 모습에 엘론드는 속으로 혀를 찼다. 스란두일, 자네가 무엇을 데려온 것인지 아는가. 속에 담기는 말을 놓고 돌아섰다. 











스란두일은 왕이기 이전에 뛰어난 검사였다. 소린도 익히 아는 바였다. 그런 그가 크게 다치게 된 연유에 대해서 엘론드는 말을 아꼈다. 숲으로 들어가던 중, 그가 무언가 본 것 같다고 추측인 듯이 이야기했으나 왕자의 표정과 엘론드의 표정은 소린이 보기에 무언가 감추고 있는 듯했다. 요정의 몸은 그리 쉽게 잘못 되지 않는다는 말 또한 그는 쉽사리 믿기 힘들었다. 당장에라도 흰 피부가 온기를 잃고 식을 것만 같아 왕의 곁을 단 한 번도 떠나지 않았다. 그는 애초에 요정이 이리 다칠 수 있는지부터 의심스러웠다. 화가 나고 울화통이 치밀어 올라서 스란두일이 덮은 이불깃을 말아 쥐었다. 그러나 이 화를 누구에게, 어떻게 풀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제 아비가 아끼는 난쟁이마저 혹여 잘못되지 않을까 싶어 레골라스는 소린을 걱정하기에 이르렀다. 


"전하께선 금방 일어나실 거예요."


소린은 왕자의 말이 저를 위로하려 한 의도가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되려 걱정이 깊은 것은 아들이 더했을 터. 리븐델의 영주가 말한 것처럼 스란두일은 시간이 지나면 도로 눈을 뜨고 저를 마주하고, 자애롭게 웃어 보일 터였다. 그러나 머리로 아는 것이 엉덩이를 움직이게 할 수는 없어서 끼니를 며칠 걸러가며 붉은 눈으로 왕의 곁을 지켰다. 그리고 이따금 제 그림을 펼쳐 보았다. 손을 이미 여러 번 타서 곳곳이 구겨진 그림에는 고쳐야 할 부분이 너무도 많이 보여 속이 상했다. 다시 말아서 화통에 꽂아 넣은 그는, 붓을 쥘 때에 떠올리던 왕의 모습과 누운 왕의 모습 사이 괴리에 고통스러워했다. 


난쟁이의 성정으로는 버티기 힘든 인내심으로 그가 주군의 곁을 지키고 또 지킨 후에, 스란두일은 겨우 깨어났다. 깨어난 그는 빛도 색도 잃은 것처럼 하얗게 들뜬 얼굴로 말이 없었다. 이전과 다른 모습에 소린은 불안히 그의 백금발을 손으로 쓸어 넘겨 주었다. 


"소린."


하고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그는 덜컥 겁이 났다. 이유를 알 수 없었으나 마음이 쓰렸다. 


"예. 여기 있습니다."


그러나 스란두일은 말을 잇지 않았다. 허공에 머물린 재색 눈이 소린에게 아득해 보였다. 그는 그 때서야 깨달았다. 스란두일은 어딘가에 머물러 있었고, 그가 닿을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린은 곁에 앉은 그대로 주군을 향해 있었다. 어둠숲의 밤이 오고 스란두일의 입술처럼 가느다란 달이 떠올라 창가를 옅게 비출 때까지도 스란두일은 아무 말이 없었다. 소린은 주군의 잠자리를 서툴게 봐 주고 그의 백금발을 빗겨 주었다. 조곤조곤 빗어 내리는 동안 비릿하면서도 풋풋한 풀내음 비슷한 것이 났다. 소린은 거기에서 위로 받았다. 체향만은 바뀌지 않은 것에 안도했기 때문이었다. 가느다란 백금발은 섬세한 소린의 손가락 사이에서 천천히 엉긴 올을 풀어 나갔다. 이따금 그의 손등이 스란두일의 너른 등 위에 닿았다. 얇은 옷으로 전해지는 체온이 더웠다. 


"리븐델의 영주와는 이야기를 잘 하셨습니까?"


긴 머리칼의 위에서 끝까지 빗어내릴 동안에도 답이 없기에 그는 슬쩍이 왕의 옆얼굴을 훔쳐 보았다. 맹탕한 시선은 허공에 머물러 있었다. 눈에 뵈지 않는 벽에 그는 마음이 쓰렸으나 아랫입술만 한 번 베어 물 뿐이었다. 그는 감히, 요정왕에게 화를 내고 저를 바라보라고, 대답을 하라고 소리 지를 수 없었다. 이전처럼 주인의 옷깃을 벗기고 멋대로 범할 생각도 들지 않았다. 스스로 낯설어하며 소린은 몇 마디를 더 덧붙였다. 전하께서 계시지 않을 때 좀 더 요정말을 공부해 둘 걸 그랬습니다. 아직도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으니. 왕자께서도 걱정을 많이 하셨지요. 그러나 금방 일어나실 거라 하시더군요. 그리고 소린은 문득, 구석에 놓아 둔 화통이 생각나 빗을 놓아두고 들고 왔다. 정성스레 말아둔 것을 펴서 스란두일의 앞에 내밀었다. 


"아직 그림은 더 공부해야 합니다만."


길이 없는 듯이 보이던 스란두일의 시선에 그제야 생기가 돌아왔다. 재색 눈이 옆으로 돌아서 그림을 내밀고 선 소린을 마주했다. 그는 놀라움과 대견함이 섞인 얼굴로 겨우 첫 마디를 내뱉었다.


"네가 그린 것이냐?"


소린이 고개를 끄덕이자 손을 뻗어 주었다. 뺨을 감싼 손목에, 얇은 잠옷 속에 드러난 뼈마디가 힘이 없어 보여 소린은 제게 닿은 왕의 손을 꼭 겹쳐 쥐었다. 


"고맙다."


스란두일은 한참을 더 그림을 내려다보았다. 소린은 그 표정이 어떤 것인지 읽어낼 수 없었다. 요정의 표정이란, 아니, 제 군주의 표정은 겹겹이 꼬인 요정의 문양과 닮아 있어서 그를 갑갑하게 하기도 했다. 스란두일은 그림을 소중히 말아 도로 화통에 넣어 두고는 침상에 기대어 앉았다. 곁에 소린이 비스듬히 앉았다. 방금 빗긴 백금발이 소린의 어깨 위에 가닥가닥 흩어져 검은 곱슬과 평화로이 뒤섞였다. 소린은 몇 가지를 물어 보고 싶었으나 참았다. 맞닿은 살의 온기로도 충분히 안심할 수 있었다. 머리맡을 맡긴 스란두일은 다행히도 금세 졸았다. 소린은 그를 제대로 눕혀 주고 곁에서 함께 잘 요량으로 침대에 파고 들었다. 잠에 빠진 스란두일은 난쟁이의 몸이 이불 속으로 들어오자 자연스레 손을 허리로 가져가 끌어안았다. 소린은 제 작은 몸을 주인이 안도록 내버려두고 조금씩, 아주 느리게 오랜만의 잠을 청했다. 


달이 슬슬 지기 시작할 무렵, 그러나 동이 틀 기미는 보이지 않을 때 소린은 잠에서 깨었다. 곁에서 열기가 돌아 일어나니 스란두일이 심하게 뒤척이고 있었다. 오랜만에 든 잠이 선뜻 달아나지 않아서 그는 몇 번이고 눈을 비벼댔다. 덜 깬 잠의 혼몽함에도 주군을 챙기려 끌어안으며 제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여린 달빛에 스란두일의 얼굴이 비쳤다. 땀에 온통 젖어 있었다. 요정왕은 마치 마지막 꽃을 떨구기 직전의 나무처럼 여리고 차가웠다. 소린은 손으로 그의 젖은 뺨을 쓸어내려 주었다. 그 동안에 스란두일은 입술을 달싹이며 무어라 몇 마디를 내뱉었다. 흐린 발음의 요정말을 소린이 모두 알아들을 수는 없었으나 몇 개의 단어는 용케도 알아들었다. 제발, 부디, 와 같은. 문장으로 이어지지 않더라도 소린은 더 읽어낼 필요가 없었다. 그는 주군의 몸을 세게 끌어 안았다. 


"무슨 일이십니까."


볼에 볼을 붙이고 물어도 대답이 없었다. 허리를 끌어안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소린은 어찌할 바를 몰라 손으로 그를 더듬을 뿐이었다. 난쟁이의 힘에 휘둘린 스란두일은 안쓰러울 정도로 살이 없었다. 결국 흔들어서 억지로 깨웠다. 재색 눈은 소린을 담아내고 한참 지나서야 안정을 찾았다. 와락 끌어안는 통에 소린의 상체가 요정왕의 가슴 위로 쏟아졌다. 스란두일은 그를 아무렇게나 바투 잡아당기고 쓸면서 말했다.


"미안하다."


그는 울 것처럼 몸을 들썩였으나 울지는 않았다. 


"내가 너를 차지해서 미안하다, 너를,"


소린은 스란두일의 품에 안긴 채 그의 가쁘고 불안정한 맥박만을 들었다. 이마를 댄 가슴이 한 번 크게 일렁이더니,


"영영 놓지 못할 것 같아서 미안하다. 소린."


결국 그의 얼굴 옆으로 긴 눈물선이 흘러내렸다. 소린은 그의 팔을 풀고 일어나 그에게 입 맞추었다. 입술로 열기가 전해 왔다. 두툼한 손바닥이 왕의 눈물자국을 지워냈다. 재색 눈은 아직도 젖어서 눈물을 다시 고여내고 있었다. 흘러 넘치기 전에 소린은 다시 한 번 더 입을 맞추었다. 오래 머물리고 나서야 떼었다.


"그러하시면 영영 놓지 말아 주십시오."


입맞춤이 짙어졌다. 혀가 섞여들 때에 소린은 꽃을 모두 떨구고 낙엽을 가득 편 나무를 떠올렸다. 제가 이 땅을 떠난 후의 스란두일의 모습은 아마 그러할 터였다. 포도주색의 짙은 옷을 입고, 조금 더 말라서, 조금 더 처연해서, 그러나 군주의 모습은 잃지 않은 채. 소린은 입을 맞추는 내내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리고 입술을 떼자마자 저와 모양 다른 귓바퀴에 입술을 가져가 자근자근 아프지 않도록 깨물었다. 스란두일은 전에 없이 잘게 떨고 있었다. 안정시키려는 듯 다정한 손을 들어 주군의 입술을 엄지로 찬찬히 쓸었다. 눈을 보고 이야기해 주었다.


"곁에 있겠습니다."


나의 왕이시여, 나의 왕이시여. 


멀리서 분 바람이 초여름밤의 온갖 향내를 쓸어다 궁 안까지 들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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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편이나 다다음편에서 완결나요!!!!!! 씬ㄴ난다다 ㅏ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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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린스란 중장편/달을 헤다(완결)

[소린스란] 달을 헤다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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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린스란] 달을 헤다 1

[소린스란] 달을 헤다 2

[소린스란] 달을 헤다 3

[소린스란] 달을 헤다 4















언젠가 스란두일이 소린에게 물은 적이 있었다. 내가 행여라도 떠나야 하면, 너는 어디서 어찌 지낼 셈이냐. 소린은 제 주인의 눈을 똑바로 보며 대답했다. 전하의 곁을 지키지 못하면 숲으로 도로 돌아갈 것입니다. 한치 망설임도 없이 나온 대답에 스란두일은 손을 뻗어 소린의 머리통을 따뜻하게 쓰다듬어 주었다. 눈은 차마 마주하지 못하고 단단한 이마께에 시선을 머물렸다. 그러하냐. 하고 대답했다. 저를 안고 있는 가슴, 이제 성년의 것이라 해도 무방할 그 큰 가슴의 거뭇한 체모를 만지작대며 평화롭게 숨결을 흩었다. 그러하냐. 지내기가 힘들 것인데. 정작 가슴에 오랫동안 넣고 있던 말은 내뱉지 못하고, 어깨를 감싼 체온을 느끼며 그리만 반복했다.











"목욕물이 준비되었습니다."


시중 드는 요정이 말했다. 스란두일은 무릎에 앉히고 있던 소린을 일으켜 주고 전라의 몸 위에 얇은 겉로브만 한 장 걸쳤다. 소린은 바지를 껴 입고 스란두일보다 먼저 욕탕으로 들어갔다. 물은 적당히 뜨거웠고, 몸을 섞느라 굳은 근육을 풀기에 알맞아 보였다. 먼저 들어간 소린이 손을 내밀었다. 스란두일이 맞잡으며 들어와 앉자 그는 뒤에 서서 왕의 넓은 어깨며 머리칼에 물을 끼얹어 주었다. 손으로 한 줌 한 줌 걷어 올려 부어주는 물이 따뜻해서 왕은 노곤하게 눈을 감았다. 소린의 손바닥이 언뜻언뜻 살에 닿았다. 물보다 더 뜨거운 듯이 느껴졌다. 스란두일은 탕 속에 몸이 올올이 풀려 나가는 기분을 느끼며 소린의 단단한 가슴에다 머리를 편히 기대었다. 다 자란 난쟁이 아이의 몸은 이제 만져도 말랑하지 않았고, 피부 색이 짙어졌으며, 어깨는 요정에 견주어도 결코 더 작다 하지 못할 정도로 넓어졌다. 스란두일은 물을 끼얹고 몸을 닦아주는 소린의 크고 두꺼운 손바닥을 살갗으로 온전히 느끼며 오랜만에 편안했다. 고개를 반 정도 돌리고 물었다.


"내가 사라지거든 너는 숲으로 간다 말한 적 있지 않느냐."


소린은 대답 대신 왕의 백금발을 모아 쥐며 그가 말을 이을 것을 기다렸다. 


"그러지 말고 리븐델로 가거라. 영주라면 너를 받아줄 것이다."


쥐고 있던 백금발이 흩어져 날개뼈 위에 처덕처덕 붙었다.


"왜 그런 말을 하십니까?"


소린의 목소리에 화가 담겨 있었다. 스란두일은 반쯤 돌렸던 고개를 온전히 돌고 소린을 보았다. 서서 왕을 감히 내려다보는 얼굴은 감정을 감출 줄 모르는 아이답게, 난쟁이의 성미답게 화를 담고 굳어 있었다. 그는 소린의 젖은 턱을 손으로 감싸 주었다. 물에 젖은 수염이 까슬했다. 


"이제 저는 이곳을 벗어나면 숲 말고 돌아갈 곳이 없는 걸 아시지 않습니까."


조곤조곤 내뱉은 그의 대답과 좀 전에 제 입으로 뱉은 물음이 따끔하게 돌아와 스란두일을 후회케 했다. 아프게 돋친 감정을 추스르며 스란두일은 아주 작게 말했다. 미안하다. 소린은 고개를 저었다. 


"전하께서 사과하시길 바라고 한 말은 아닙니다. 다만,"


큰 가슴이 숨을 고르느라 아래위로 한 번 오르내렸다.


"이제 이곳이 집인 것 같은데 또 벗어날 생각이 들지 않아서."


그리 말한 소린은 제 볼을 감싼 스란두일의 손을 겹쳐 잡았다. 왕의 손은 그에게 부드럽고 여리게만 느껴졌다. 고개를 틀어 손바닥에다 소리 내 입맞추었다. 습기 탓에 살 맞붙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제 주군은 이제 전하가 아닙니까."


스란두일은 그 말에 탕의 뜨거운 물이 순식간에 식는 것처럼 살이 아파왔다. 한때 왕손이었던, 고집 센 난쟁이가 이리 말하기까지 겪었을 심정은 왕의 가슴까지 전해지고 알알이 습기처럼 맺혀서 뚝, 뚝, 처연하게 떨어져 내렸다. 저를 내려보는 눈빛이 곧아서 더 아팠다. 스란두일은 그가 얼마나 제게 의지하고 있는지 상상하기 힘들었다. 그러나 한 길로 이루어진 사막을 걷는 것과 같으리라. 모두 무너지고 모래 밖에 없는 곳에서 자신은 소린에게 왕이자 아비이자 앞을 맡길 반려와도 같으리라. 아무 일이 없었더라면, 산 아래의 왕국이 지금까지 번성했더라면 난쟁이식의 제왕학을 공부하고 배우자를 맞을 준비까지 했을 소린이었다. 스란두일은 스로르의 왕좌 곁에 서 있을 소린을 상상하고 더 아파서 저도 모르게 그의 볼에 닿은 손을 힘주었다. 제가 만들어 입힌 요정옷이 아닌, 제대로 만든 난쟁이의 옷을 입고 머리를 땋아내려 손수 에레보르의 대장간에서 만든 장신구를 한 소린은 분명 지금처럼 아름다울 터였다. 혹은 지금보다 더. 상상 속 황금빛의 에레보르가 왕손의 모습을 갖춘 소린과 함께 무너지고, 스란두일은 눈을 내려 감았다. 그대로 오랫동안 있었다. 어지러웠다. 소린이 걱정 담긴 손길로 그의 턱을 조심히 들어올린 후에야 그는 다시 눈을 떴다.


"내일 리븐델에 좀 다녀오마. 영주가 부르는구나."

"언제 오십니까?"


순수하게 묻는 질문 또한 망설임 없이 바로 뱉어졌다. 스란두일은 제 난쟁이가 그리 묻는 마음을 알 것도 같았다. 몸을 따라 마음도 함께 더워졌다. 긴 속눈썹을 느리게 깜박였다.


"하루 자고 바로 올 것이다."

"저는 남겨 두고 가십니까? 무슨 일로 가십니까?"


다른 이였다면 왕의 움직임에 말이 많다며 엄하게 꾸짖음 당했을지도 모를 말이었다. 그러나 스란두일은 조금 놀라 입술만 벙긋대다가 차근차근 대답했다. 길이 멀어서 네가 함께 가기는 힘들 것 같구나. 정무를 논하러 가는 것이니 하루는 머물러야 하고. 그래야 내 친우도 서운하지 않을 게 아니냐. 소린은 왕의 대답을 듣고도 물음이 다 채워지지 않은 듯이 빤히 마주하고 있었다. 얼굴에 서운함이 드러났다. 스란두일은 젖은 팔을 들어올렸다. 물결이 일렁여서 소린의 배꼽을 간질였다. 그는 소린을 끌어당기고 잘생긴 콧날을 어루만졌다. 


"착하게 기다리고 있어야지."


소린은 스란두일의 말에 헛웃음을 흘렸다. 잡힌 어깨를 빼고 그를 등 돌리게 했다. 다소 제멋대로인 손길이어서 스란두일이 조금 미끄러졌다. 


"아이 취급을 그만 두시면 착해질지도 모르지요."


그리 말한 소린의 어투는 나지막이 울려서 습기 찬 탕 위에 깔리듯 했다. 미끄러져 허리를 반쯤 숙인 스란두일을, 그가 뒤에서 팔을 감아 끌어당겼다. 그대로 탕의 끝에 걸터 앉았다. 스란두일은 졸지에 소린에게 안긴 품새가 되었다. 그는 젖은 백금발을 어깨에서 치우고 입술을 가져갔다. 살갗을 달게 머금고 쪽, 쪽, 소리 내어 애무하자 스란두일이 노곤하게 신음했다. 소린은 곁에 놓인 목욕솔을 집어 그의 흰 등을 문질러 주기 시작했다. 요정의 피부가 그리 쉽게 다치는 것이 아니건만, 하얗고 깨끗한 위에 행여 흠이라도 날까 싶어서 손짓이 간질간질했다. 몸을 섞으며 그리 제멋대로 굴 때는 또 언제고 이리도 달게 대하는가 싶어 스란두일은 설핏 웃었다. 손길은 제법 꼼꼼하게 목이며 등을 빼놓지 않고 스쳐갔다.


"오늘이 며칠입니까?"


소린이 문득 물었다.


"내 기억이 맞으면 6월의 첫 날이다."


스란두일은 말하면서 여름이 오는 것에 기뻐했다. 찬란하고 성급한 계절은 제가 키우는 난쟁이와 몹시 닮아 있다 생각해서였다. 진하고 뜨거운 햇볕, 주변의 색을 바래게 하는 힘, 어리고 젊은. 그리고 뜨거운.


"돌아오시면 제 성년식을 고려해 주십시오. 8월에 저의 생일이 있습니다."


왕이 뒤돌아 앉았다. 난쟁이를 올려 보고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러나 나는 난쟁이가 성년을 어찌 치르는지 모르니 네가 가르쳐 주어야 한다."

"그래 주신다면 기꺼이 청하겠습니다."


다시 돌아 앉았다. 그의 양 팔에 소린의 두 무릎이 닿았다. 물은 여전히 더웠고, 오늘은 회의도 무엇도 없으니 시간은 넉넉했다. 오래 노닥거리다 보면 갈리온의 잔소리를 들을지 모르지만 스란두일은 이대로 몸이 축축히 불도록 소린과 있고 싶었다. 그는, 도통 관심 두지 않던 난쟁이의 성년식은 어떠할지 궁금해졌다. 그리고 성년을 맞은 소린의 모습이 어떠한 색을 띨지도 궁금했다. 아직 두 달이 남았건만, 제 난쟁이의 선물은 또 어떤 것을 주어야 할지 스란두일은 꽃을 화관으로 엮는 아이처럼 설레기 시작했다. 기분 좋은 고민을 이어가느라 손가락으로 소린의 젖은 무릎을 간질간질 만져댔다. 소린은 솔을 놓고 요정왕을 제 무릎 사이로 끌어당겼다.











리븐델로 향하는 왕의 행렬은 그리 호화롭지 않았다. 그가 탄 엘크를 호위하는 몇몇 요정들이 뒤따랐고, 왕자는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 남았다. 소린은 왕이 없는 궁을 굳이 떠돌아다니지 않고 거의 제 방에만 머물렀다. 날은 조금 더 더워져서 스란두일이 준 요정의 옷은 멋대로 풀어헤쳐지기 일쑤였다. 그는 가슴을 드러내 놓고 방에서 그림 그리는 일에 몰두했다. 그가 몇 주 동안 잡고 있던 큰 그림이 하나 있었다. 스란두일이 선 모습을 그린 것이었다. 먹으로만 그린 것인데 소린은 그의 큰 키와 용모에서 타고난 듯한 위엄을 어찌 묘사해야 할지 몰라 이미 여러 장의 종이를 버린 후였다. 그릴수록 욕심이 생겼다. 그릴수록 제 속에 있는 스란두일을 더 끌어내고 싶었다. 그릴수록, 그는 왕을 점점 더 연모하게 되었고 그만큼 제 그림이 성에 차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인내심을 갖고 붓을 가져갔다. 요정의 긴 머리칼과 잔 속눈썹까지, 옷깃 하나까지 한 올 한 올 소린의 힘을 얻고 뻗어 나갔다. 화폭에 담긴 스란두일의 모습은 요정다웠으나 그림에는 난쟁이의 성정이 그대로 서려서 선에 힘이 있고 과감했다. 그는 책상에 앉아 허리를 숙이고 해가 질 때까지 그림을 붙들고 있었다. 


다행히도, 왕이 돌아오기로 한 다음 날 아침에 맞추어 그림은 모두 완성되었다. 돌돌 말아 화통에 넣고 옆구리에 낀 뒤 소린은 급히 그를 맞이하러 나갔다. 궁 안은 제법 어수선했다. 입구에 몰린 요정들의 틈바구니를 작은 몸으로 비집어가며 겨우 문까지 당도했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왕자의 무거워 보이는 등이었고, 그 다음으로 본 것은 처음 마주한 리븐델의 영주였다. 신다르나 난도르가 아닌 듯한 요정들 사이에 스란두일이 보이지 않아서 소린은 정신 없이 시야를 옮겨댔다. 앞에 서 있던 레골라스가 영주 엘론드에게 다가갔다. 요정말로 무어라 하는데, 소린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신다르를 그리 열심히 배웠건만, 정작 듣고 싶을 때에는 꼭 다른 세계 말처럼 느껴져서 둔한 제 귀를 원망했다. 가까이 다가가고 싶었으나 요정말로만 주고받는 둘의 분위기에 벽이 쳐진 듯하여 소린은 옆구리에 낀 화통만 고쳐 쥐었다. 스란두일은, 내 주군은. 묻고 싶은 것을 참고 눈만 안타깝게 굴리고 있자니 리븐델의 영주가 말에서 내렸다. 그가 뒤로 걸어간 곳에 가마가 있었다. 엘론드가 가마에서 안아 들고 나온 힘 없는 스란두일을 레골라스가 받아 안았다. 대체 이게 무슨. 소린은 눈을 크게 뜨며 그에게 다가가려 발을 뻗었다. 


"무슨 일이오?"


결국 참던 말을 내뱉고 가까이 걸어가니 왕자는 침통한 얼굴로 고개만 가로저으며 그의 옆을 지나쳐 갔다. 스란두일의 얼굴이 많이 희어져 있었다. 늘 입던 은색 로브가 피에 젖은 것만 얼핏 보였다. 아들에게 안아 들린 왕이 궁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도, 소린은 요정들 사이에 밀려 따라갈 수 없었다. 다친 것인지, 죽은 것인지도 모르는 그의 얼굴을 다시 확인하고 싶었으나 정신 없이 밀려 드는 요정들 사이에 작은 몸은 밀리고 또 밀리다 결국 넘어졌다. 화통이 굴러 수많은 발에 채이는 것을 보고 이를 악물고 일어났다. 먼지 묻은 것을 도로 주워 들었다. 저 앞에 몰린 요정들 사이에서 왕자의 모습을 찾고 싶었으나 작은 키로는 역부족이었다. 갑갑함에 울화통이 치밀어 올라서 결국 가슴을 주먹으로 팡팡 두들겨댔다. 곁을 스쳐 지나가는 요정들이 신다린으로 무어라 이야기했으나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는 망연해졌다. 비통함이 울컥울컥 솟았다. 그가 잠깐 서 있는 동안 요정들은 제각기 흩어지고, 그제야 겹겹이 꼬인 요정왕의 궁이, 소린에게 너무도 익숙해진 집의 모습이 드러났다. 아비를 안아 든 왕자와 영주의 모습이 저 멀리 점처럼 보였다. 그는 개미집처럼 꼬인 궁의 길 중에서 그들에게 다가가는 길을 꿋꿋이 찾으며, 어미를 잃은 어린 범마냥 끙끙 소리를 내며 울음을 참았다. 그동안 아무도 작은 난쟁이에게 말을 걸고 상황을 설명해 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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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만약 쏜튼스란 원고를 무사히 마치면 동페 크오온리인 초차원에 린란 회지도 나올지 모릅니다 ㅠ 물론 원고를 무사히 하면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유력한 후보는 순흔...이 되지 않을까 싶네요. 회지 원고로 확정되면 연재는 중단됩니당 ㅠ 
그리고 달을 헤다는 조금만 더 쓰면 완결날 거 같은... 이건 웹공개로 끝낼 거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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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9. 1. 23:26

[소린스란] 달을 헤다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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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8. 13. 16:03

[소린스란] 달을 헤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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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린스란 중장편/달을 헤다(완결)

[소린스란] 달을 헤다 2


난쟁이 아이가 제 주인에게 덤벼들지 않을 때까지 꼬박 한 달이 걸렸다. 스란두일은 매일 감옥을 찾아가 소린과 대화했다. 처음에 아이는 벽을 마주하고 요정왕과 독대하지 않았다. 스란두일은 인내심을 가지고 그의 앞에 앉아 끝없이 말을 건넸다. 아이가 다시 음식을 입에 대기 시작할 때, 몇 마디 짧게 대답하던 것이 점차로 길어지고 이어졌다. 왕족의 공용어가 혀에 여태 남아, 소린의 낮고 묵직한 발음은 제법 깨끗하게 각 잡혀 있었다. 파란 눈에 시시때때로 품던 독기도 끈질기게 말을 거니 조금씩 녹아 없어졌다. 소린은 궁에 온 지 이 주가 지났을 때 사슬을 벗었고, 한 달이 되었을 때 제대로 된 방을 얻었다. 눈에 서린 독기는 제법 사라졌으나, 치켜 뜰 때 온도 낮은 광채가 선뜻선뜻 보이는 것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소린의 몸은 불에 달군 보석처럼 작고 단단하고 뜨거웠다. 스란두일은 서늘한 손으로 그를 더운 물에 씻겨 주며 어슴푸레하게 맺히는 감정을 애써 외면하고 감추었다. 허벅지를 조이고 아이의 몸에 살이 닿지 않으려 하니 요정왕의 자세가 어쩔 수 없이 어정쩡해졌다. 그는 소린의 나이를 대강 셈해 보았다. 아직 성년이 되지 않았다고 하나 제법 찬 나이여서인지, 몸은 어른과 크게 다를 바가 없는 모양새를 띠고 있었다. 어린 소린의 몸에 붙은 근육은 오로지 생존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 어떤 곳은 지나치게 굳어 있었고 어떤 곳은 나이답게 부드러웠다. 숲에 떠돌며 불편하게 자고 움직인 탓에 오래 뭉쳤을 곳을 주물러 주는 내내, 스란두일은 숲을 방문했던 어린 왕세손의 조막만한 손이 떠올라 자주 먹먹해졌다. 스라인의 옆에 붙어 있는 것을 고개 숙이고 마주하니 처음에는 무서워 떨고, 다음 해에는 제법 모양새까지 갖추어 인사를 하던 것도, 작은 무릎이 굽혀지던 것도 생각이 났다. 그는 소린의 덜 자란 몸을 입히는 일에 골몰했다. 옷감 하나를 고르는 데에도 몇 시간 내내 허리를 숙이고 엎드려 무늬며 재질을 하나하나 만져 보곤 했다. 완성되기까지 아이의 옷은 여러 번 요정왕에게 보였다. 목이 뻐근해질 지경이었으나 소린에게 입혀 놓으면 기분이 단번에 가벼워졌다. 물론, 옷깃을 여며 주고 입는 법을 가르쳐주는 것도 스란두일의 몫이었다. 신다르의 옷은 난쟁이가 보기에 단순하면서도 복잡하고, 더워 보이는 듯한데 가벼웠다. 


"숲에서는 무엇을 먹고 살았느냐."


스란두일의 말에 소린은 한참 고민했다. 목에서 가슴까지, 그리고 허리까지 요정왕의 손가락이 정성스레 옷깃을 여며 주는 동안 대답하지 못했다. 미간을 구기고 눈동자를 굴린 후에야 겨우 말했다.


"되는대로 주워 먹고 살았습니다. 전하의 짐승도 여럿 잡았습니다."


그리고 덧붙였다.


"용서해 주십시오."


아이치고는 제법 각이 잡힌 사과였다. 눈을 깔고 숙여 보이기에 스란두일은 개의치 말라고 이르며 고개를 저었다. 동그마니 숙인 곱슬머리를 차마 쓰다듬어 주지 못하고 아리게 보기만 했다. 이제 사냥 않아도 괜찮다, 이제 괜찮다. 하고 굳은살이 앉은 손은 차마 맞잡지 못했다. 난쟁이 왕손은, 왕손이었던 아이는, 깊은 밤 바다 색의 눈을 가지고 있었다. 속눈썹을 올리며 선한 모양의 눈을 치켜 뜨고 있으면 스란두일이 골라 준 잔 물결 무늬의 푸른 색 옷과 눈이 어울렸다. 제법 공들여 빗겨 놓은 곱슬머리도 마찬가지였다. 요정왕은 만족감을 담고 슬며시 웃었다. 미소 짓다가 돌연 소린과 눈이 마주쳤다. 놀라서 먼저 피한 것은 스란두일이었다. 티 내지 않고 돌아서서 방을 나갔다. 그러쥔 주먹에 제 맥박이 뛰는 게 여리게나마 느껴졌다.











소린은 뜰에 나가는 것을 두려워했다. 숲과 비슷하게 꾸며 놓은 나무며 풀을 보고, 그가 겁을 먹는 것이라고 스란두일은 여겼다. 소린은 이따금 스란두일이 입혀준 옷을 벗어 버리고 반 나신으로 찬 나무바닥에 누워 낮잠을 청했다. 방은 볕도, 그늘도 잘 들어서 소린의 이마 위에 반반씩 명암을 졌다. 스란두일이 소리를 죽이며 다가와 털이 거뭇한 발등을 조심히 쓸어주면 무릎을 접으며 뒤척였다. 그런 날에 스란두일은 오래도록 방에 머물며 잠든 소린의 머리칼을 만지거나 벗어 둔 옷을 개어 주었다. 스란두일이 여기기에, 그의 방은 내내 봄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리 따사롭고 녹녹할 리 없다 생각했다. 


"내가 너를 데려와 내내 덥구나."


들릴 리 없건만 그리 말하고 홀로 웃었다. 그림자가 기울 때까지 머물면 소린이 깨어났고, 이따금 요정왕은 기다리다 잠들었다. 제 옆에서 침대나 의자에 머리를 기댄 채 잠든 요정왕의 마른 어깨에 손을 올리면 피곤한 재색 눈을 다시 볼 수 있었다. 소린은 점차로 제 주인에게 익숙해졌다. 제 방에 머무는 주인의 체향에도 익숙해졌다. 수염이 올라온 뺨을 쓰다듬는 주인은, 소린이 보기에 이지러진 달처럼 처연했다. 












난쟁이의 성정이란 땅과 직결되어 있어서, 말갛게 밝기만 한 숲의 처소가 아쉬웠다. 한 번은 제가 겁내던 뜰로 기어코 나가 멋대로 헤집고 다니다가 스란두일에게 호되게 혼이 난 적 있었다. 요정왕은 그를 엄하게 질책하고 나가지 말라 명령했다. 소린은 날을 세우고 덤벼들었다. 제가 전하께 무엇을 해 드릴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까? 그 말에 스란두일은 가슴뼈가 시큰히 갈라지는 것 같았다. 돌아서서 나가는 소린을 잡을 수 없었다. 망연하게 주인 없는 방을 지키고 한참 서 있고서야 퍼뜩 정신이 들어 경비를 불렀다. 왕은 떨며 명령했다. 아이를 찾아라, 소린을, 찾아라. 검을 차고 엘크를 타고 숲으로 나갔다. 당일 해가 질 때까지도 작은 난쟁이 하나를 찾지 못한 경비들은 요정왕에게 심한 질책을 받았다. 제게 해야 할 꾸짖음이었다. 스란두일은 소린의 둥글고 큰 어깨를 떠올렸다. 이대로 사라진단 말이냐. 모두 물리고 방으로 돌아가서야 가슴이 한꺼번에 우르르 무너져 내렸다. 무너지고 불 탄 왕국에서 살아남은 아이가 들어갔을 숲은 무정하고 어두웠다. 왕은 잠들지 못했다. 그리고 날이 밝고 손수 찾아나선 숲에서 겨우 소린을 찾았다. 그새 다쳐서 피를 흘리고 있기에 다시 목 아래가 아렸다. 스란두일은 엘크에서 내려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돌아가자."


소린은 고개를 젓지도, 끄덕이지도 않았다. 수염이 엉망으로 자란 입가를 앙다물다가, 스란두일이 한 발 다가서니 말했다.


"궁은 제 집이 아닙니다."


스란두일의 눈이 커졌다. 뻗었던 손에 피가 멈추는 듯했다. 


"제 집은 이미 저 어릴 적 불타고 무너지지 않았습니까."


한참을 독대하고 있다가, 스란두일은 속을 긁어대는 통증을 달래려 눈을 길게 내려 감았다가, 떴다. 왕의 위엄이 도로 자리잡았다. 


"집을 잃고 떠도는 것을 내가 거두었으니 이제 네 집은 내 집이다."


반 걸음을 더 내디뎠다.


"소린, 그대는 왕손도 아니며 짐승도 아니다. 내 궁에서 사는 내 난쟁이다. 여태 모르겠느냐?"


소린은 특유의 눈으로 그의 표정을 읽었으나, 요정왕의 다문 입에서 감정을 읽지는 못했다. 눈을 내려 깔고 다가가 손을 잡았다. 스란두일은 그를 엘크에 태우고 가는 내내 피 냄새를 맡아야 했다. 도착하자마자 옷을 벗겨 보니 생채기가 수어 개 깊게 패여 있었다. 그는 손수 소린을 씻기고 약초를 개어 왔다.


"내게 복종하지 않아도 된다."


생채기 위에다 약초를 얹어준 요정왕은 무표정했으나, 소린은 그 옆모습을 차분히 바라보며 통증을 견뎌냈다. 


"그러나 다치지는 마라. 나는 내 곁이 다치고 죽는 일을 수만 번 겪었다." 


그는 그리 말하고 옅게 웃었다. 스란두일은 약초물이 든 손끝으로 그의 등을 쓸었다. 난쟁이의 몸이었으나 그 단단함이나 풍채 때문에라도 결코 작다고 할 수 없었다. 소린의 피부에는 일전에 제가 냈던 흉터가 이미 아물고 지워져 희미한 요철만이 남아 있었다. 


"필멸자가 불멸자의 곁이 될 수 있다 생각하십니까?" 


물으며 돌아본 젊은 난쟁이의 얼굴, 그림자가 짙었다. 약초의 비린 풀내음을 뚫고 묘하게 요정왕을 자극해대는 향이 있었다. 그는 그것이 소린의 몸에서 나는 사내의 체향이란 것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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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린스란 중장편/달을 헤다(완결)

[소린스란] 달을 헤다 1

너무 쓰고 싶었던 소린줍스란ㅋㅋㅋㅋㅋㅋㅋ 이게 다음 회지가 될지 동양풍AU가 다음 회지가 될지는 몰겠네요

여튼 소린스란입니다...

다음편은... 몰라요... 아이트랑 번갈아서 쓰니깐 으믈므음음르 ㅁㄴㅇㄻ











난쟁이 아이는 보석이라기보다는 땅에서 갓 튀어나온 불 같았다. 마주보는 눈만으로도 뜨거워서, 요정왕은 제 몸 주위 기온이 바뀌는 것을 느끼며 아이 몰래 마른침을 삼키곤 했다. 태어나 처음 가지는 소유욕은 스란두일을 앓게 했다. 요정의 나이로 5천 년이 넘게 산 그가 채 백 살도 되지 않은 소린에게 욕심 내는 것은, 마치 등에 날개가 돋치듯 아프고 열이 나는 일이었다.











난쟁이라 하기에 그는 잘못 들은 것인가 싶었다. 난쟁이는 멸종했잖은가. 빠르지만 곧은 걸음으로 다가가 눈여겨 보고서야, 스란두일은 그가 에레보르의 황금을 거머쥐었던 스로르의 손자라는 것을 깨달았다. 멸망으로부터 십 년이 지났으니 그 동안 숲을 떠돈 것이리라. 그 탓인지 아이는 거의 짐승처럼 보였다. 왕족이라. 그는 사로잡힌 아이에게 다가갔다. 제 군사 둘에게 양팔이 잡힌 채로 반항은 않았으나 표정이 말할 수 없이 사나웠다. 스란두일은 가슴 아래에 스물스물 도는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칼을 뽑아 난쟁이 아이의 목에 겨누어 보았다. 검날이 닿아도 아이는 눈을 파르라니 치켜뜬 채 요정왕을 대면하였다. 스란두일은 칼 끝으로 턱을 치켜 올리게 하곤 좀 더 자세히 보았다. 아이는 갓 캐낸 청옥처럼 뜨겁고 지저분하고 또한 빛났다. 불에다 던지면 불꽃을 튀기며 타오를지도 모른다고, 스란두일은 그리 생각했다. 칼을 도로 집어넣었다. 흙 묻은 곱슬머리를 쓰다듬으며 만족스레 웃었다. 아이는 넝마를 걸치고 있었고, 다 헤지고 찢어진 아래에 이미 살이 되고 흙에 묻힌 흉터가 여럿이었다. 스란두일의 얼굴에 못내 안타까움이 돌았다. 돌연 아이가 요정왕에게 이를 드러내고 소리를 질렀다. 포효였다. 가슴부터 목을 굵게 긁어내며 내는 소리는, 그 외에 달리 표현할 말도 없었다. 낮게 땅에 깔리듯 위협하는 그의 포효에 몇몇 요정들은 저도 모르게 발을 뒤로 물렸다. 짐승에게서 배운 것인가. 날 세운 눈이 빛나고 있었다. 스란두일은 빛나던 재색 눈을 한참 떨다가, 이내 내려깔았다. 


"다치지 않게 데려가라."


하고 돌아섰다. 등 뒤에 안타까움이 남아서, 그는 소린을 한 번 돌아보았다. 목 아래가 뭉근하게 쑤셨다.











물어 뜯기라도 할 듯이 스란두일을 위협하던 소린은 궁의 감옥에 갇힌 뒤에도 도통 기가 죽지 않았다. 아이는 쇠창살 속에서 내내 짐승처럼 소리를 질러대서, 목을 갉아대며 내는 그 끔찍한 포효에 요정들은 겁을 먹고 서로 보초를 서길 미루기까지 했다. 일부러 기를 죽이려 스란두일은 그를 굶기라 일렀다. 그리고 시간이 좀 흐른 뒤 다시 감옥을 찾았다. 며칠 굶은 난쟁이 아이는 바짝 독기가 올라 스란두일이 다가가기도 전에 팔목을 뒤로 매어 놓은 쇠사슬을 당기며 덤벼들었다. 왕은 소린의 목에 채운 쇠목걸이 아래 빼죽이 흐르는 피를 보고 역정이 일었으나 고요하게 한 발을 더 디뎠다. 


"내게 존대하면 먹을 것을 주겠다. 호칭을 제대로 부르면 사슬을 풀어주겠다. 그리고 신다린을 익히면 제대로 된 잠자리를 주마."


공용어로 말했으나 알아들을 수 있는지 짐작하기 힘들었다. 그저 눈을 보고 눈치만 읽어낼 뿐이었다. 소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해라."


다시 짧고 강하게 일렀으나, 왕을 보는 눈에 경외나 존경 그 비슷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스란두일은 문득, 그가 자신을 비웃고 있다 여겼다. 그는 채찍을 들고 와 감옥 문을 열게 했다. 쩍, 하고 살 찢어지는 소리가 돌벽 사이에 가득 울렸다. 갑작스레 날아온 통증에 소린은 놀란 눈을 동그마니 뜨고 스란두일을 쳐다보았다. 미처 화를 내기 전에 다시 한 대가 쩍, 하고 날아왔다. 피가 튀었다. 스란두일은 큰 키를 곧추세운 채 채찍을 바닥에 던졌다. 요정왕의 위엄이 흐트러지지 않아 내려보는 재색 눈이 감옥의 온도만큼이나 서늘했다.


"너는 왕손이 아니더냐. 고작 십 년을 떠돌았다고 짐승이 된 것인가?"


호령하는 어조는 단호하고 짧고 정확했다. 소린은 통증을 이기느라 물고 있던 어금니를 떼었다.


"지킬 왕국이 없으니 길 잃는 것은 당연한 바가 아닙니까, 요정왕이시여."


스란두일이 처음으로 들은 소린의 목소리였다. 공용어를 입 밖으로 내뱉은 지가 오래였을 텐데, 그럼에도 왕손의 단어는 정갈하고 발음은 깨끗했다. 


"나는 그대 말대로 이미 짐승이며 섬길 군주도 없으니 복종하지 못합니다. 존대도 할 필요 없습니다. 쓰고 싶은 대로 키우다가 버리십시오."


미처 성년이 되지 않은 아이의 말이라 보기에는 너무도 묵직하고 느린 어투였다. 스란두일은 가슴 한가운데 커다랗게 알이 맺히는 듯한 기분에 한동안을 먹먹하게 있었고, 소린은 그런 그에게 더 말하지 않고 묶인 채 바닥으로 시선을 떨구고만 있었다. 그의 넝마 아래 난 핏자국과 땟국물을 보던 스란두일은 감옥을 지키고 선 요정에게 목욕물을 대령하라 일렀다. 난쟁이의 몸이 보잘것없다 생각했으나 막상 넝마를 벗기고 보니 제법 근육이 자리잡고 있어, 곧 성년이 되는 나이에 걸맞아 보였다. 그는 너른 소린의 어깨에 정성스레 물을 끼얹고 솔을 문질러 주었다. 한가운데에 제가 때린 채찍 자국이 선명했다. 더운 물에 닿아 쓰릴 터인데 소린은 아무 말도, 내색도 없었다. 쇠목걸이가 있던 자리에 길게 생채기가 났기에 조심히 닦아내자 어깨만 잘게 떨 뿐, 반항하지 않았다. 


"네가 아주 어릴 때에 나를 본 적이 있다. 기억 못하겠지."


스란두일은 얇게 한 장 걸치고 있던 로브를 벗어 버리고 욕조에 함께 들어갔다. 무릎에다 소린을 앉혔다. 난쟁이의 체온은 요정보다 훨씬 높아, 더운 물이 춥지는 않을까 싶었다. 손가락으로 쓸어내린 소린의 어깨에 물자욱이 남는 것을 보며 스란두일은 어린 난쟁이가 숲에서 맨손으로 짐승을 잡고 풀을 뜯는 모습을 상상했다. 


"아비와 같이 온 너는 나를 무서워했다. 허나 너는 뒤로 숨지도 눈을 내려 깔지도 않고 나를 빤히 독대했다. 이제 막 걸음을 떼고 말을 하는 네가, 말이다."


요정왕은 말을 끊고 소린의 몸을 앞으로 돌렸다. 곧바로 눈이 마주했다. 그는 묘하게 몸이 더워지는 것을 느끼며 소린을 마주하지 못했다. 마저 씻겨주는 동안에도, 물기를 닦아 주고 머리를 말려 주는 동안에도 소린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요정왕은 그가 온전히 제게 복종하기를 바랐다. 감옥을 나오게 하지는 않았으나 더 이상 팔이며 목을 묶지는 않았다. 제대로 된 음식을 먹게 했다. 씻긴 후 새 옷까지 입혀 놓으니 왕족의 피가 흐르는 소린은 제법 태가 나 보였다. 검은 곱슬머리를 직접 빗겨주는 것 또한 스란두일이 직접 하였다. 비록 난쟁이식은 아니건만 까만 머리를 가닥가닥 빗기고 꼬고 땋아 가지런히 묶어 주었다. 요정의 옷을 입은 소린은 어린 나이에 비해 풍채가 좋아 요정들과는 또 다른 분위기를 냈다. 스란두일은 큰 거울 앞에 소린을 데려와 꾸민 모습을 보여주며, 낯설어하는 소린의 모습을 넋 놓고 한동안 바라보았다. 


다음 날 소린은 궁의 외딴 곳에 처소를 얻었다. 처소 앞에는 풀이 무성한 정원이 있었으며 소린은 그곳에서 나갈 수 없었다. 보드라운 침대를 한참 쓸어보던 소린은 제 뒤에 선 요정왕을 뒤돌아 보았다. 허락을 구하는 듯한 투는 아니었다. 그러나 스란두일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는 허락을 구하지 않을 소린에게 끝없이 허락해야 할 제 모습을 떠올렸다. 그러나, 앞에 선 단단한 어깨를 보니 제 고생이 제법 값어치가 되지 않을까 싶었다. 


스란두일은 그에게 천천히 요정의 생활을 가르치기로 마음 먹었다. 그는 제 소유가 남의 손을 타는 것을 원치 않았다. 따라서 입히고 가르치고 씻기는 것 모두 제 몫이었다. 그는 제것을 지키려 기꺼이 수발했다. 하나부터 끝까지 직접 하였다. 그 또한, 한 짐승을 키우는 데에 충분한 값어치가 되었다. 스란두일은 만족스러웠다.











성년을 갓 앞둔 소린은 이제 제법 신다린을 읽을 줄 알았다. 그는 굳은 어깨를 스란두일에게 붙여 오면서 몇 개 단어를 짚으며 물었다. 대부분은 발라들의 이름이거나 증오, 호의와 같은 말들이었다. 스란두일은 소린의 입에 손가락을 넣고 발음을 교정해 주었다. 스란두일이 만들어 준 소린의 신다린은 밀실을 만들듯 비밀스럽고 견고했다. 영민한 난쟁이가 요정왕에게서 배운 언어이므로 칼 하나 댈 곳 없이 정확했다. 그가 제 주인과 처음 몸 섞은 것도 그 즈음이었다. 신다린을 적어 놓은 종이들을 흐트러뜨리고 스란두일의 은빛 로브부터 성급하게 벗겨낼 때, 소린은 요정왕의 턱을 똑바로 쥐고 저를 보게 했다. 입을 맞추니 체향이 짙게 올라왔다. 그는 스란두일의 눈이 나이 든 요정의 것치고 맑다 생각하였다. 그러나 스란두일은 제 몸을 들쑤시는 소린의 얼굴에서 필멸을 읽었다. 제 손으로 주워 와 씻기고 가르친 소린은 눈깜짝할 새에 나이가 들고 훌륭한 중년으로 자랄 것이었다. 상상하기 힘들었다.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스란두일은 그저 눈을 감고 이종족의, 제가 키우는 짐승의 더운 체온만 오롯이 받아들였다. 언젠가는 이 기분 또한 그가 소린에게 가르쳐야 할 것이었으나 한없이 미루고만 싶어서 단단한 맨 어깨만 끌어당겼다. 그 이후로도 둘은 소린의 처소에서 자주 책상을 삐걱이며 몸 섞었다. 


소린은 순진하고 순수하게 요정왕을 탐했다. 한때 제게 채찍질을 하던 주인을 만지고 더듬는 것은 그 자체로 충분한 자극이 되었다. 다 자란 몸이 선뜻선뜻 닿을 때마다 요정왕은 아득해졌다. 소린에게 몸을 주고 나면 며칠 앓을 때도 있었으나 궁의 다른 곳에서 찾을 수 없는 향에 금방 취하고 홀렸다. 소린의 손은 방금 갠 흙처럼 따뜻하고 보드랍게 파고들어 이내 장마처럼 몰아쳤다. 그의 몸은 겹치기 전에도 금방 더워졌으므로 요정왕은 몸을 섞고 나면 창을 온통 열어 놓고 난쟁이의 품에서 잠들었다. 외딴 그의 거처에 경비가 없는 까닭도 이것이었다. 꿈이 황망해서 깨면 소린은 잠결에도 요정왕을 다독여 주었다. 묵직하게 두터운 손은 충분히 어른스러웠다. 그는 거리낌없이 소린의 체모에다 눈물을 부비고 다시 잠을 청했다. 도로 잠들지 못하는 날에는 별 닿는 검은 머리맡을 오래도록 쓸며 작게 노래해 주었다. 신다린으로 부르는 자장가였다. 볕 드는 창에 걸터앉아 스란두일이 가져다 준 보석을 깎던 소린이 콧소리로 그 노래를 흘렸을 때, 스란두일은 그가 잠결에 들은 것인가 싶어 내색 않았다. 그러나 손에 쥔 보석을 후, 불고 말하는 저음은 방금 세공한 것인 양 진중하고 고왔다.


"저를 곁에 두시고도 왜 홀로 마음을 다스리십니까."


다시 내리깐 속눈썹이 역광속에 느리게 깜박였다. 무심한 옆모습이 갓 씻어낸 칼날처럼 햇빛에 빛났다. 스란두일은 뭉근하게 아픈 가슴을 저도 모르게 손으로 눌렀다. 그는 소린으로부터 아팠고, 소린으로부터 위로 받았다. 소린은 제 주인을 오롯이 소유하길 원했다. 그는 스란두일을 앞에 두고도 그를 앓았다. 일종의 환지통처럼, 당장에 없는 스란두일을 찾다가 몸살이 날 지경이면 요정왕은 기척없이 찾아와 서늘한 손바닥을 그의 이마에 얹어주곤 했다. 그러면 소린은 요정왕의 가느다란 손목부터 끌어당겨 탐했다. 명령을 받으면 그에 따르거나, 혹은 배반하거나. 아비처럼 저를 다그치던 주인이 이내 제게 눌리고 달아올라 아이처럼 신음하면 소린은 더 피가 더워지고 급해져 그를 다치게도 했다. 











스란두일이 정무를 보는 시간에 소린은 처소에 머물러 있어야 했다. 나가지 말라는 이야기도 없었으나 그는 굳이 나갈 생각도 없었다. 할 것이 없으면 스란두일이 준 신다린 책을 더듬거리며 소리 내 읽었고, 그조차도 지겨워지면 보석을 깎으며 놀았으며, 그래도 지루하면 스란두일의 체향이 짙게 밴 제 이불에다 코를 묻고 반 나신으로 엎드려 낮잠을 자곤 했다. 스란두일은 불규칙하게 머물렀다. 그가 거처로 돌아가면 소린은 창가에 다가가 햇빛에 씻긴 정원을 망연히 바라보기만 하였다. 그는 남아서 매번 허망하게 쓸려나간 마음을 볕에 쪼였다. 이유도 모르고 기다렸다. 풀 냄새는 스란두일의 체향과 비슷한 듯 달랐다. 아픈지도 모르고 앓고 있으면 요정왕은 기척 없이 돌아왔다. 소린을 채우고 다시 비우는 것은 요정왕의 몫이었다. 소린은 단지 기다리는 것만으로 요정왕을 만족시킬 수 있었다. 


한 번은 그가 참지 못하고 제 주인을 찾으려 방을 나간 일이 있었다. 놀란 요정들을 밀쳐내고 마침내 왕의 방으로 갔을 때, 책상 위에 두던 스란두일의 재색 눈이 놀라움으로 동그마니 커져 저를 담을 때, 그리고 이내 눈을 휘며 미소를 지을 때, 넓디 넓은 왕의 방에는 오전의 달달한 햇살이 들어차 있었고 엷은 풀내음이 났다. 소린은 큰 걸음으로 다가가 그에게 입맞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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