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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릭찰스] 나를 찾아줘



악몽은 별 것 아니야. 너도 알잖아. 


에릭은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베개에서는 찰스의 냄새가 났다. 찰스의 냄새는 망가진 나무판자 따위를 떠올리게 했다. 눅눅하고 알싸한 이 냄새가 가짜인 줄 알고도 에릭은 매일 꿈의 끝마다 습관처럼 코를 묻었다. 찰스와 관련된 모든 것이 그러했다, 보잘것 없는 후각이 환상임을 알고도 쉽게 놓을 수가 없는,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조작된 증거 같은. 숨이 달아서 앓는 소리를 내고서야 에릭은 새빨개진 얼굴을 들어올렸다. 오전 5시 4분. 찰칵, 찰칵, 초침 소리가 쌓여갔다. 오래된 버릇처럼 혼자 사는 거처의 안위를 확인했다. 


내가 필요하면 불러.


그는 '필요하면'이라는 단어에서 찰스가 자신을 기만한다 여겼다. 


네가 필요하면 나를 찾아 와.


그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어디 있든 찾을 수 있는 사람. 그 자명함을 눈치 못챌 리 없는 찰스는 웃었으며, 에릭은 구두 앞코에 물든 흙먼지를 내려다보다가 뒤돌아섰다. 



결국 또 폴란드로 돌아왔다. 에릭은 이곳이 고향보다 더 한 의미를 갖고 있다고 여겼다. 뭐랄까, 구태여 형언한다면 끝의 시작이라고 해야 할까. 에릭은 수도꼭지를 틀며 이전에 찰스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찰스, 알고 있나? 어떤 끝은 시작과 닮아 있어. 그 말을 들은 찰스는 일순간 눈동자를 휘어 웃고 에릭이 아닌 앞을 보며 대답했다. 나도 알고 있어. 그의 '알고 있다'는 말은 깊은, 매우 깊은 위안을 주어서 에릭을 슬프게 만들었다. 수도꼭지에서는 간헐적으로 붉은 색의 녹물이 나왔다. 에릭은 뿌연 거울을 보았다. 입을 꾹 다물었다. 어떤 종류의 기억은 붉은 색 폭죽처럼 비현실적으로 화려하고, 형체 없이 아름다웠다.



빵을 굽고 크림을 만들고 작은 접시에 쿠키를 진열하는 일은 생각보다 재미 있었다. 제빵점의 주인은 젊은 여자였고, 능력은 약했으나 불을 조절할 줄 아는 뮤턴트였다. 맛있네요, 라고 그녀가 처음 말해주었을 때 에릭은 진심으로 기뻐하며 잔잔하게 웃었다. 가게를 내 보고 싶지 않아요? 라고, 제빵점에서 일한지 반년 되었을 때 그녀가 에릭에게 물었다. 재능이 있어 보여요, 조금만 더 연습하면, 이라고도 덧붙였다. 에릭은 고개를 저었다. 당신처럼 능력을 가진 뮤턴트도 아닌데요 뭐. 그렇게 대답한 그는 미스틱을 떠올렸다. 정확히 말하자면, 미스틱의 샛노란 눈동자와 붉은 머리칼을 떠올렸다. 그리고…….



모양이 일그러져 실패한 쿠키는 매일 저녁 에릭의 차지가 되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못생긴 쿠키를 씹으면서 그는 찰스의 저택을 떠올렸다. 학교가 되기 전의, 아이들과 레이븐과 찰스의, 자신의 공간이었던 그곳을. 노랗게 내려쬐던 햇살과 마룻바닥의 냄새와, 찰스의 속눈썹, 떨리던 눈꺼풀, 그의 목덜미에서 나던 바닐라 같은, 혹은 눅눅한 나무판자 같은 냄새.


에릭은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불 하나 켜지 않은 거처 위로 조금씩 빗소리가 들렸고, 그는 시계의 초침을 멈추었다. 철로 된 침대 헤드가 잠깐 흔들렸다. 집안의 금속이 파르르, 파르르, 약한 소리를 내며 주변과 부대꼈다. 히끅, 하고 그가 숨을 들이쉬었다. 사소한 소란이 멈추고 그는 베갯잇에 입술을 묻었다. 양쪽 속눈썹만은 소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오래 떨다가 천천히 침잠했다.


나를 찾아줘, 찰스.


빗소리가 거세졌다. 집 한 칸 만큼의 외로움이 거대한 짐승처럼 떨었다, 젖지 않으려고. 젖지 않으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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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스맨온리전(뮤앤프)에서 무료배포한 로건진 단문

로건진 단문(로건x어린 진)입니다.

엑스맨온리전이 끝난지가 좀 되어서 한 번 웹공개를 해 보아요.







너는 아직도 흘러내린다. 내 손톱 끝에서 알알이 맺혀 구슬로 흐른다. 네가 죽은 후로 나는 밤이 없는 듯이 내내 어둡고 아프다. 네가 책갈피인데 이곳에는 페이지가 없다.


진, 나는 아직도 네가 없다고 생각하지 못한다.


잃어버렸다 생각했던 군번줄을 로건에게 되찾아준 것은 놀랍게도 고작 열둘, 열셋 정도 되어 보이는 빨간 머리의 소녀였다. 나이답잖게 흐린 눈이어서 로건은 군번줄을 받아들고도 소녀를 한참 쳐다보았다.


“고맙다.”

“별말씀을요.”


소녀는 내밀었던 손을 접으며 새침하게 대답하고 돌아섰다. 로건은 서두르는 법 없이 곱게 걷는 빨간 구두 발뒤꿈치를 보았다. 머리칼 색에 맞추어 아이의 부모가 사준 것이리라. 소녀가 사라지고 나서야 로건은 시가를 빼어 물었다. 불을 붙이며 생각했다. 저 아이가 나를 어떻게 아는 거지? 다시 군번줄을 내려다보았다. 내내 쥐고 있던 것인지 따뜻했다.


소녀는 다음 날에도 같은 골목에 있었다. 술집이 늘어진 벽 사이에 동그마니 선 어린 빨간 머리는 꺼진 네온사인 사이에서 인간 아닌 다른 종처럼 보였다. 로건이 다가가도 소녀는 그를 마주해주지 않은 채 벽에 기대선 채 소리 내어 껌을 씹고 있었다. 딱, 딱, 하는 소리 사이로 차가 지나가면 시선이 따라갔다. 로건은 소녀의 흐린 눈을 곁눈으로 보면서 나란히 기대섰다. 시가에 불을 붙이고 몽글하게 연기를 내뱉었다.


“원래 그렇게 담배를 많이 펴요?”


뾰족하니 묻는 것이 황당해서 로건은 헛웃음을 쳤다.


“남이사.”


가만히 보니 소녀는 반대쪽 발목에 큰 상처를 갖고 있었다. 또래끼리 싸움이었나 싶어 보고 있자니 아닌 척 애쓰며 다리를 꼬는 게 안쓰러웠다. 선뜻선뜻 보이는 것만으로도 심각해 보일 만큼 생채기가 컸다.


“학교에서 다친 거냐?”


빨간 머리칼을 좌우로 흔들며 고개를 저었다. 다시 보니 여자아이 머리인데 리본이나 핀 하나 없이 엉망으로 흩어지고 헝클어져 있었다. 로건은 더 묻지 않고 자리를 벗어났다. 손에 반창고며 연고를 들고 다시 돌아왔을 때, 그는 담벼락이 그세 황망히 비어 있으면 어쩌나 싶었다. 다행히도 소녀는 고개를 숙이고 갈라진 아스팔트 땅을 구두코로 톡톡 차댔다. 앞에서 무릎을 꿇고 보니 상처는 생각보다 심각했다. 피가 흘러 흰 양말 위까지 젖어 있었다. 그가 연고를 바르고 반창고를 붙여주는 동안 하얗고 마른 발목은 용케 빼지도 놀라지도 않고 견뎌 주었다. 로건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소녀는 작게 말했다. 고마워요. 또 등을 보이고 총총 걸어가는 모습이 로건은 못내 아쉬웠으나, 굳이 붙들거나 부르지는 않았다.


소녀는 적어도 이 근처 주택가에 사는 것 같지는 않았다. 이곳은 밤이면 네온사인이 켜지고 취객들이 토하는 골목이었다. 어린애가 올 만한 곳은 아니건만, 소녀는 로건이 이곳에 오는 밤마다 비슷한 자리에서 비슷한 표정으로 담에 기대서 있었다. 다가가면 인사도 없었으나 그렇다고 로건을 피하지는 않았다. 껌을 오물대는 어린 옆선을 보고 있으면, 소녀의 빨간 머리는 차가운 골목과 묘하게 어울렸다.


“아저씨, 싸움꾼이에요?”

“뭐?”


놀라서 하마터면 반도 안 핀 시가를 떨어뜨릴 뻔했다. 두 손을 등 뒤로 댄 채 벽에 기대고 얼굴만 빼꼼히 돌려 올려보는 얼굴이 맹랑했다. 소녀는 여유롭게 어깨를 움츠려 보이곤 앞 건물에다 턱짓했다.


“저 술집 앞에서 싸우는 거 봤어요.”


놀라 망연하기만 하던 로건의 얼굴이 찬 물이라도 끼얹은 양 순식간에 진중해졌다. 행여 술집 앞에서 손톱을 빼어 들고 싸우던 때라면. 눈앞이 아득해졌다. 살이 날에 갈려 피가 튀고 살이 잘리던 감촉이, 어둠 한 구석에 웅크리고 지켜보았을 소녀의 모습이 생생하고 섬짓했다. 그는 몸을 돌려 퍼뜩 소녀의 어깨를 붙들었다.


“뭘 본 거냐.”


큰 손아귀에 여린 뼈가 잡혀 뒤틀리자 소녀는 얼굴로 온통 짜증을 밀어냈다.


“뭘 봤겠어요?”


로건이 할 말을 고르는 동안 꾹, 참고 한 번 감았다 뜬 눈꺼풀이 또렷하게 마주했다. 차분한 표정에 웃음기마저 돌았다.


“내가 신고라도 할까봐서요?”


한참 지지 않고 노려보다가, 어깨를 놓아주니 그제야 가느다란 손으로 옷깃을 탈탈 털어내었다. 나이에 비해 소녀의 손목만은 어른 것처럼 선이 잡혀 있고 손가락이 길어서 볼만 포동한 얼굴과 묘하게 대비되었다.


“나도 싸우고 싶을 때 싸울 수 있으면 좋겠어요.”


말은 아프게 뱉어 놓고 얼굴은 제법 의연했다. 로건은 한참 망설이다가 손을 뻗어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소녀는 로건의 목에 달린 군번줄을 바라보았다. 쇠는 어두운 밤에 작은 빛으로도 반짝였다.


“군인이에요?”


하는 질문에 고개를 가로젓자 소녀는 본디 궁금하지 않았다는 듯 어깨를 움츠려 보였다. 차가 몇 대 지나갈 때까지 둘은 말이 없었다. 소녀는 씹던 껌을 야무지게 종이에 싸고는 등을 담벼락에서 떼었다. 엄마가 기다릴 거 같아요. 무심히 던지곤 시선만 한 번 주고 걸어갔다. 소녀가 걸어간 자리에는 발자국이 남지 않았지만 로건은 바닥을 오래도록 보며 서 있었다. 고개를 들었다. 이 도시에서는 달이 보이지 않았다.


제법 선선했으나 바깥에서 자기 나쁜 날씨는 아니었다. 로건에게는 그나마 다행이라는 뜻이었다. 그는 거리 벤치에 몸을 누이고 방세를 대신해 팔아넘긴 제 따뜻한 소파며 침대를 떠올렸다. 적어도 며칠 안에는 새 일자리를 구해야 먹을 것이며 잘 곳을 구하고, 어디로 팔려갔는지도 모르는 살림살이도 다시 구할 수 있었다. 쓰기 좋은 몸을 가지고 있는 것과 일자리를 구하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로건은 차가운 벤치 등받이에 이마를 대고 눈을 감았다. 그는 어느 날 제 능력이 사라져 자다가 총이라도 맞아 피를 흘리며 죽어가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했다. 겨울에는 몸의 온도가 내려가 차갑게 식어가며 죽지 않을까, 쓸모없는 망상을 하다 보면 간혹, 정말로 피가 식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문득 가죽재킷 위에 포근한 감촉이 뒤덮였다. 로건은 감았던 눈을 떼고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아까 그 소녀였다. 말없이 담요만 덮어주고 종종 걸어가는 뒤에다 대고 로건이 말했다.


“늦은 시간에 다니면 큰일 난다.”

“배고프면 오후 4시에서 6시 사이에 19번지로 와요. 엄마 없으니까.”


로건은 순간 제 처지를 구차하게 변명해야 하는지 고민했으나, 소녀의 모습이 완전히 어둠에 묻히자 눈을 도로 감아 버렸다.



다음 날, 그는 정말로 주린 배를 쥐고 19번지로 향했다. 이 동네 저택은 비슷비슷해 보였으나 중산층들이 많은 곳이라, 자세히 보면 정원을 꾸며 놓은 것이나 페인트칠이 제법 고급스러운 곳이 여럿 있었다. 로건은 시가를 손에 쥐고 빼어 물까, 하다가 관두었다. 멀리 보이는 19번지 앞에는 차가 두 대 주차되어 있었다. 하나는 표지판이 다른 것을 보아 손님인 듯했다. 가까이 다가가지 않고 유심히 보는데 차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놀란 그가 손톱을 빼어 들 채비를 하고 걸음을 물렸다. 흔들리는 것은 차만이 아니었다. 지진처럼 지축이 흔들리고 표지판이 뒤집혔다. 등골이 서늘해졌다. 아이는, 이 시간에 혼자 집에 있다 하지 않았던가. 집 안으로 뛰어들려 마음먹은 순간 소란이 멈추었다. 잠시 후, 다시 숨은 시야에 소녀가 사내 둘과 함께 걸어 나왔다. 없을 거라던 부모의 배웅을 받으며 차에 타고 가는 것까지 지켜본 뒤에야 로건은 자리를 떴다. 여태 손에 쥐고만 있던 시가에 불을 붙이고 해 지려 하는 하늘을 언뜻 올려봤다. 날이 맑은 편이었다.



- End.



20140802 엑스맨 온리전 뮤턴트 앤 프라우드에서

애쉬릭이 무료배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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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크찰스] 저는 괜찮아요



하연님 리퀘 행크찰스입니다 :D

마음에 드셨...........으면...........좋겠다..........

리퀘 신청 감사합니다! ㅠ 늦어서 죄송해요 흑...









찰스는 최근 지하 창고에 있는 와인이며 양주들을 맛보기 시작했다. 이전에는 쌓아둔 지도 모르고, 손도 대지 않던 것들이었다. 비척이며 계단을 내려가 병 두어 개를 양손에 쥐고 나올 때, 그는 아직 덜 적응된 다리 탓에 자주 넘어지고 휘청였다. 음주가 새 취미가 된 후 그에게 술상대를 해주는 것은 어쩔 수 없이 행크의 몫이었다. 젊은 교수님이 오늘 꺼내 온 술은 버건디였다. 


"혹시 뗏목 타본 적 있어?"


행크는 고개를 저었다. 찰스는 고개를 뒤로 젖히며 소파에 몸을 깊이 묻었다. 다리를 꼬고 발목을 까딱까딱, 움직이며 생각에 집중하는 동안 오른손에 들린 와인은 금방 쏟아질 것처럼 찰랑였다. 행크가 그의 손을 불안하게 쳐다보았다. 


"어릴 때 캠프를 가서 장난삼아 선생들 몰래 타본 적이 있지. 뗏목을 타면 말이야, 나는 가만히 있고 밑의 물이 움직이는 것 같거든."


입으로 가져가는 동안 결국 가죽소파 위에 몇 방울이 흘렀다. 행크는 제 두 손에 쥔 와인을 내려다보았다. 


"그렇게 어지러웠던 적은 없었어."


빈 잔을 다시 채우는 동안 거실의 불이 흔들렸으나 찰스는 개의치 않는 것처럼 보였다. 버건디 병은 이미 절반이 비어 있었다. 남은 절반이 비면 다시 찰스는 어두운 지하창고로 비척이며 내려갈 것이었다. 


"그렇게 무서웠던 적은 없었어."


행크는 단번에 제 잔을 들이켰다. 그는 찰스가 취기로 소파에서 잠들기 전까지 기다렸다가, 그의 위에다 담요를 덮어 주었다. 소파 아래 빠져 나온 손도 담요 아래에 넣어 주었다. 내일은 거실등을 손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저택에서 가장 먼저 볕이 드는 곳은 행크의 방이었다. 빛이 방을 온통 채우기 전까지 행크는 면도를 하고, 씻고, 물방울을 머리칼에서 떨어뜨리며 침대를 정리했다. 교수님의 방을 치우는 것은 그 다음이었다. 먼지를 털고 환기를 하고. 그러나 찰스의 방에 사실상 치울 것이란 거의 없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근래 들어서 대부분의 밤을 거실에서 잠들었기 때문이었다. 행크는 어제 닦은 교수님 방 창틀을 다시 닦다가, 문득 새 소리가 들려 밖을 내다보았다. 두어 마리 새가 날아가는 게 보였다. 어딘가 집을 짓지 않았을까, 근처에는 나무도 많으니 새를 찾는 게 어렵지는 않았다. 행크는 며칠 동안 찰스가 쓰지 않은 찰스의 방에서, 한동안 그렇게 하늘을 내다보고 있었다. 계절 바뀌는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그는 깨끗하게 정돈된 방을 만족스레 둘러 보았다. 찰스의 이불을 바꾸어 주어야겠다 생각했다. 


그가 내려갔을 때 찰스는 언제 깬 것인지 거실에 없었다. 부엌에서 소리가 들려 들어가 보았다. 어설프게 계란을 깨고 있는 뒷모습, 셔츠자락이 바지 위로 반쯤 빼죽이 나와 있었다. 


"제가 할게요."


다가가서 그릇을 받아 들었다. 그새 뭘 잔뜩 꺼내 놨는지 벌써 부엌이 엉망이었다. 선뜻 조리대 앞에서 물러서지 않고 어물쩡대는 동안 행크가 거품기 들린 손을 부드럽게 잡았다. 손에 쥔 것을 건네 주니 행크가 한 번 웃어 보였다. 그제야 찰스는 한 발짝을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야무지게 하나하나 정리하는 것을 망연히 보고 있었다. 망연히, 보고 있기만 했다. 그는 행크가 요리를 하는 동안 식탁 앞에 앉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얼마든지 편하게 지내도 돼. 행크는 걸레를 물에다 적시며 처음 교수의 저택에 온 날을 떠올렸다. 양동이에다 쪼르르 물을 짜내고 지하실로 내려가는 계단에 엎드려 하나하나 닦기 시작했다. 층계마다 새카맣게 묻어 나오는 먼지에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손이 조금 더 부지런해졌다. 


이렇게 큰 저택에서 어떻게 살았어요? 교수님은 제 말에 대답 대신 그냥 웃었다. 방에 들어가서 살았지. 행크는 그 말에 크게 공감했다. 그래, 이렇게 큰 저택이더라도 칸을 나누고 혼자 있을 수 있는 곳이 있다면 슬프지는 않겠지 싶었다. 그러나 요즘의 교수님은 넓은 거실에 누워 소파에서 몸을 웅크린 채 잠드는 게 대부분이었다. 들어가서 주무세요, 하고 몇 번 말해 보았으나 찰스는 그를 마주하지 않고 담요에 볼을 파묻곤 했다. 귀찮아, 하는 목소리가 소파 틈에 묻혔다. 그러면 행크는 삐쭉 올라가 허리살을 드러낸 그의 티셔츠 위로 담요를 당겨 덮어 주고 제 방으로 올라갔다. 안녕히 주무세요. 인사하면 찰스는 소파 위로 손을 불쑥 내밀어 흔들어 주었다. 


"지금 뭐 하는 거야?"


교수님이 화를 내는 일은 좀처럼 드물었다. 행크는 들고 있던 걸레를 떨어뜨리며 계단 위에 엎드린 그대로 얼굴만 들었다. 안경을 고쳐 썼다. 네? 하고 되묻는 동안 찰스가 다가와 물양동이며 닦다 만 계단, 검댕이 그대로 묻은 행크의 옷을 황망히 내려다보았다.


"행크, 전에도 말한 것 같지만-"

"괜찮아요."


말을 자르는 어투가 사납지는 않았다. 찰스가 터덜터덜 걸어 내려와 젖은 계단 위에 앉았다. 몇 칸 아래서 꾸물꾸물 몸을 일으킨 행크에게 손을 내밀었다. 다가와 몸을 숙이자 뺨을 손바닥으로 쓸어 주었다. 따뜻하게 어루만지곤 안경을 벗겼다. 목을 감싸 끌어당겼다. 두 이마가 맞닿았다. 찰스가 오랫동안 제 뒤통수 머리칼 새를 손가락으로 부비는 동안 행크는 어른하게 흐려진 시야를 떨구고만 있었다. 교수의 청바지는 형편없이 더러워져 있었다. 속상함에 저도 모르게 어깨에다 손을 올렸다. 그럴 리 없건만, 머릿속으로 몇 마디 말이 들린 것만 같았다. 역시 그럴 리 없건만, 제 속에 있는 말은 닿은 이마로 전해지지 않길 내심 바랐다. 그는 흐린 눈을 아예 감아 버리고 이마에 닿은 온기만 말없이 읽었다. 


저는 정말 괜찮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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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릭찰스] 졸음

세오니님 리퀘로 쓴 에릭찰스입니다.

리퀘 신청 감사합니다 ㅠㅠㅠㅠ!












모두 실패하지는 않을까? 


그렇게 묻던 에릭은 얼굴을 계속 하늘로 고정한 채였다. 저택에서 보는 하늘은 보잘것없었다. 그게 찰스가 굳이 발코니로 나오지 않는 이유였다. 그 덕에 저택 안에 있는 십여 개의 발코니는 대부분 문 닫혀 있었고 덩굴이 자라 이런저런 벌레나 새들이 집을 짓고 살고 있을 만큼 방치되어 있었다. 집안이라 부르기도 애매한 그 공간에 아무리 풀이 자라난 여름이라 하더라도, 둘이 설 정도 자리는 있었다. 찰스는 발코니 문간에 비스듬히 기대 선 채 깜박, 깜박, 여닫기를 반복하는 에릭의 속눈썹을, 그리고 그 너머 석양을 보았다. 역광이 눈을 어른어른하게 했다. 시야를 내리고 덩굴 잎 위에 내려앉은 잠자리를 보았다. 에릭이 말을 이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너는, 나는, 살아남을 수 있을까?"


찰스는 대답할 수 없었다. 저를 향한 시선을 느끼면서도, 잠자리가 날아간 자리를 망연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에릭을 더 이상 읽고 싶지도, 잃고 싶지도 않았다. 할 수 있는 말을 겨우 쥐어 짜냈다.


"너는 그 수용소에서도 살아 나왔잖아."


쓰게 웃으면서 고개를 드니 마주 웃어주는 마음이 좋았다. 자세를 바로 하고 에릭에게 한 발 가까이 갔다. 


"적어도 포기하지는 말자고."


어깨를 감싸며 맞대었다. 에릭이 그의 뒤통수로 손을 뻗어 곱슬머리를 어루만져 주었다. 









그로부터 사흘 뒤, 모든 엑스맨은 붙잡혔다. 찰스는 내내 마취약에 찌들려야 했다. 감옥인가, 싶은 창살이 보이면 다시 누군가 팔을 붙들고 주사를 놓았다. 머리에 무언가 다닥다닥 붙는가 싶으면 픽, 하고 관자놀이를 관통해 전기가 올랐다. 고통스러웠으나 소리 지를 시간은 없었다. 오기로 눈을 뜨고 있으면 눈 뜬 채로 정신을 잃었다. 


실험은 지독했다. 아주 가끔씩 정신이 들면 아이들의 비명소리가 어른어른하게 들렸다. 멀어서 누구의 것인지만 겨우 알아들을 수 있었다. 찰스는 정신을 놓기 직전까지 비명소리의 주인을 입 속으로 내처 불렀다. 레이븐, 레이븐. 하보크, 하보크. 행크, 행크. 살아 있구나, 하고 마지막인 듯이 안도했다. 비명 사이에 에릭의 목소리가 없는 것을 눈치채기까지 몇 번이나 정신을 잃고 들기를 반복해야 했다. 


그가 간신히 제 힘으로 눈을 뜰 수 있을 때, 갇힌 곳은 사방이 막혀 있었다. 어깨로 벽까지 기어가서 겨우 시선을 더듬고 훑고서야, 사람 몸통 하나가 간신히 지나갈 수 있을 것 같은 문이 보였다. 몸 곳곳이 아리고 저렸다. 원인 모를 구토감이 일었다. 모로 누운 그대로 올라오는 것을 토해냈다. 누런 거품이 다였다. 죽지 말고 조금만 기다리고 버텨 달라고 머릿속으로 되뇌었으나 누구에게, 어떻게 전달해야 할지는 알 수 없었다. 겨우 상체를 일으키고 벽에다 이마를 맞대었다. 시멘트 냄새가 역했다. 어금니를 악물었다. 아이들의 이름을 머릿속에서 되는대로 불렀다. 그러나 단지 생각으로 머물 뿐이었다. 다시 머릿속에 되뇌이고, 


"에릭."


하고 마지막으로 소리 내서 불렀다.









저택이 아이들의 훈련으로 소란한 오후를 보내고 나면 이따금 에릭이 저녁을 차리곤 했다. 에릭이 만드는 유태식 음식은 담백하고 부드러우면서 향긋했다. 먹으면 배가 따뜻해졌다. 앞치마도 입지 않은 채 혼자 밀가루를 계량하고 소스를 만들고 불 조절을 하는 에릭을 찰스는 신기하다는 듯이 바라보곤 했다. 이런 건 어디서 배운 거야? 물으면 에릭은 얼버무렸다. 아주 가끔, 요리에 열중하는 동안 물으면 에릭은 어머니에게서 배운 레시피를 말하기도 했다. 레이븐이 그를 도우려 내려오면 둘은 곧잘 투닥거렸고, 찰스는 굳이 말리지 않았다. 향긋한 음식 냄새가 퍼지는 동안 찰스는 자주 생각했다. 이대로 아이들과 조용히 숨어 사는 것도 나쁘진 않을 거라고. 









누가 입혀 놓은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흰 천으로 만든 옷은 흡사 죄수복 같았다. 그는 모로 누운 채 금방 더러워진 소매를 다른 손으로 문질러 보았다. 에릭의 머릿속에서 보았던 유태인 수용소가 떠올랐으나, 떠올리는 순간 죄스러워서 눈을 감아 버렸다.


몸이 작던 어린 시절의 찰스는 식탁의자 아래에 들어가는 것을 좋아했다. 흰 식탁보를 빼내어 의자 위에 걸치고 있으면 사방은 하얗게 천을 걸러 들어오는 빛만 남기고 조용해졌다. 쪼그리고 앉아 있으면 제 몸에 딱 맞는 크기가 만족스러웠다. 그대로 숨어 있으면 엄마가 오는 소리도, 집에서 일하는 가정부의 한탄도 전혀 들리지 않았다. 그 또한 만족스러웠다. 고요하게 느린 오후의 빛을 받으며 식당 의자 아래서 그대로 잠들 때도 많았다. 그가 깰 때까지 누구도 찾지 않았다. 주린 배를 움켜 쥐며 저녁 느지막이 기어 나온 뒤에는 의자를 밟고 올라가 가정부가 숨겨 둔 과자 등을 꺼내 먹곤 했다. 찰스는 10년이 지나고서야 그게 능력을 조절하는 법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감옥인지 뭔지 모를 작은 방의 구석에 파고들었다. 모서리에 등을 한껏 박고는 무릎을 세운 채 앉았다.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그러나 머릿속에 들어찬 아이들의 비명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만 듣고 싶어 귀를 틀어 막았다가, 목소리 하나하나를 기억하려고 내버려 두길 반복했다. 높은 천정에 달린 노란 전구 하나만 꺼지지 않고 있을 뿐, 밤낮 구분이 가지 않는 곳에서 그는 몇십 시간인지 모를 동안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귀를 틀어 막고 있지 않으면 견디지 못할 정도가 되었을 때, 그는 자는 것도 깨어 있는 것도 아닌 상태로 한동안을 누워 있었다. 찬 곳에 오래 닿아 있던 몸은 금방 굳었다. 몇 시간이 지났을까, 지진처럼 더걱더걱 땅을 긁어내는 진동에 화들짝 눈 뜨고 상체를 일으켰다. 그러나 생각을 따르지 못하는 몸은 벽에 부딪치고 쓸리는 게 고작이었다. 더걱, 더걱, 벽을 뜯어내는 것 같은 소리에 몽롱한 정신을 끌어다 구석으로 움직였다. 앉은 채 웅크렸다. 어떤 예측도 하지 못한 채 몸만 말고 있는 동안, 작은 문이 먼저 떨어져 나갔다. 벽이 뜯기고 굉음 뒤에 먼지가 심하게 일어서 더러운 소매로 코를 막았다. 겨우 뜨고 있는 시야에 에릭이 보였다.


찰스, 하고 부르며 다가오는 동안 손을 뻗을 수도, 대답할 수도 없었다. 그저 희뿌옇게 날리는 먼지 사이에 에릭의 얼굴만 확인하고, 무너지듯이 안도했다. 


"애들은 먼저 내보냈어."


에릭은 그리 말하고 찰스를 안아 올렸다. 붕 뜨는 느낌에 찰스는 저도 모르게 앞에 닿는 옷깃을 말아 쥐었다. 에릭, 하고 속삭이듯 불렀다. 이어지는 굉음 속에서 에릭이 용케 알아듣고 아래로 시선을 설핏 던졌다가 다시 앞을 보았다.


"너무 고통스러워."

"그래."

"네가 살아 있을 줄 알았어."


에릭의 심각해진 얼굴이 걸음을 잠깐 멈추고 찰스를 마주했다. 그럴 줄 알았어, 하고 반복하는 동안 이미 눈은 반쯤 감기고 있었다.


"그래, 어서 나가자."


눈이 감겨 왔으나 옷을 쥔 손에 힘이 풀리지는 않았다. 고통스러워, 하고 다시 말했다. 며칠 새 마른 몸이 에릭의 걸음에 따라 쉽게 흔들렸다. 지독하게 머릿속에 들어차던 비명들이 조금씩 물러나고 있었다. 졸음이 몰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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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건찰스] M1893

이번 엑스맨온리에 회지로 내려다가 엎은 거 앞 부분... 쓰다 보니 재미 없어져서 엎었습니다.







수감번호 M1893. 회색 천 위에 푸른색으로 새긴 숫자는 정갈했다. 로건은 생소한 숫자를 몇 번이고 내려다보았다. 바지를 입고 웃옷을 걸칠 때에 기계음이 들렸다. 속이 빈 플라스틱 통의 소리였다. 차가운 흰색 팔 몇 개가 그의 팔을 붙들었다. 단추를 미처 다 꿰지도 못한 상태에서 밖으로 다시 끌려 나가야 했다. 사진을 찍는 곳은 지나치게 밝았다. 센티넬 여섯 기가 앞에서 지키고 있었다. 카메라가 몸 구석구석을 돌며 온전한 모습을 담고 나서야, 악독할 정도로 흰 조명을 쏘아대는 방에서 나올 수 있었다. 얼얼한 눈을 깜박이고 있자 좀 전 로건을 만졌던 기계팔이 그의 목에다 주사바늘을 꽂았다. 찌릿한 감각이 사지를 타고 흘러내렸다. 알려주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아다만티움 약화제였다. 현기증을 느낄 때 쯤 로건의 몸을 다른 기계팔이 넘겨받았다. 로건은 굳이 반항하지 않았다. 한 방에서 복도로, 복도에서 방으로 발이 닿지 않은 채 건네지고 건네져 마지막에는 한 평짜리 방에 던져졌다. 문이 닫히는 소리까지도 기계소리였다. 사람의 흔적은 없었다. 뮤턴트의 냄새는 그가 약하게나마 맡을 수 있었으나, 하나같이 생기가 없었다. 이곳을 관리하는 모든 것이 센티넬 혹은 센티넬의 변형형태 기계들이었다. 방은 어둡고 습한 곳이었다. 낯설었다. 로건은 저려오는 손발을 웅크렸다. 작은 몸이 둥글게 말린 채 앓는 소리를 냈다.


M1893, 수감완료. 


기계소리가 멀어졌다. 로건은 제 옆방에 있을 뮤턴트들이 누구인지 확인하고 싶었으나 눈이 점점 감겨 왔다. 끙, 끙 앓던 소리가 느리게 사그라들었다.





아다만티움 주입을 스스로 받으면서까지 미래를 바꾸려 했으나, 로건 일행은 결국 실패했다. 80년대의 북미는 단지 뮤턴트들을 막기 위한 목적만으로 놀라운 과학 발전을 보였고, 워싱턴 한가운데에 거대한 수용소를 만들어내었다. 


학교 전체가 국가에 압류당한 뒤, 행크가 지하에 몰래 새로 만든 세리브로는 불안정하고 서툴렀다. 땅 아래에서 센티넬의 감시망을 피하며 탐색을 하다 보니 뇌파 증폭 자체가 잘 되지 않아 세리브로를 사용한 뒤의 찰스는 항상 온몸이 땀으로 흥건했다. 그는 엉성하게 선에 엮인 세리브로 헬멧을 벗었다. 머리칼 끝에서 땀이 방울로 흘러내렸다. 행크가 그에게 수건을 건넸다. 찰스는 받아들고 얼굴만 대충 닦아내었다. 말 대신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켜보던 행크와 로건이 한숨 쉬었다.


“노력했잖아. 포기하지 않으면 돼.” 


둘을 번갈아본 뒤, 앞머리를 손가락으로 털며 말했다. 로건은 찰스의 그 말투를 싫어했다. 듣자마자 질렸다는 투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젊은 프로페서X는 나이 든 프로페서X보다 훨씬 순진했고, 착했고, 의욕 넘쳤다. 


“노력이라고요. 당신은 그걸로 위로가 됩니까?”


찰스의 머리칼은 어두운 곳에서 노랗고 옅은 불빛만 받아 거의 짙은 블론드처럼 보였다. 로건의 말에 젊은 프로페서X는 대답하지 못했다. 잠깐 마주했던 시선을 도로 치웠다. 로건은 그의 곱슬머리 아래 힘없이 내려깐 속눈썹을 보면서, 만약 나이 지긋한 프로페서X라면 어떻게 반응했을까 상상하려 애썼다. 그러나, 상상은 요원하기만 했다. 행크가 그에게 다가와 휠체어를 밀어주었다. 로건이 따라 걸었다. 흙 그대로의 바닥을 가진 암굴 같은 복도를 지나, 몇 겹으로 소재를 바꿔가며 겹친 문을 지나도 시멘트로 대충 바른 지하도를 걸어가야 했다. 로건이 킁킁, 소리 내어 코를 씰룩였다. 퀴퀴한 지하 냄새는 영 적응되지 않았다. 벽은 얇고 언제 부서질지 몰랐다. 로건은 그 복도를 걸을 때마다 벽을 부수고 들어오는 센티넬의 금속 팔을 상상했다.


위태로움은 언제부턴가 그들에게 옆구리에 끼고 살아야 하는 것이 되어 있었다. 떼어 놓지도, 버리지도 못하고 불안히 안은 채 걸어가야 하는 것. 로건은 긴장감을 풀지 않은 채 습기에 축축하게 젖어가는 구두코를 이따금 내려다보았다. 곁에서 찰스의 몸 냄새가 진하게 났다.


그 날이 찰스가 임시 세리브로를 마지막으로 사용한 날이었다. 정확히 이틀 뒤 센티넬의 침공이 있었다. 로건이 마지막으로 본 프로페서X의 모습은 휠체어에서 떨어져 센티넬에게 끌려가는 것이었다. 힘없이 부서진 바닥 위에 더걱더걱 끌리는 그의 발을 보다가 로건은 정신을 잃었다. 미안해, 로건. 젊은 교수가 마지막으로 머릿속에 전달해 준 메시지가 그것이었다. 반복해서 뇌리를 울리는 목소리, 미안해, 미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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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릭찰스] 네가 필요해


매그니토는 홀로 남았다. 뮤턴트들이 각자의 의지를 가지고 흩어진 후였다. 매그니토는, 에릭은, 어둠 찬 지하 방에 누워 이따금 수용소를 떠올렸다. 제 배 위로 기어다니던 쥐의 두 눈이나 곰팡이 냄새, 겹친 살이 썩는 냄새, 배설물 냄새. 그러나 제 어머니까지 생각이 이어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리고 그는 찰스를 떠올렸다. 손 끝에 감기던 곱슬머리의 감촉이나 고집 세게 다문 입매라든가. 그가 마지막으로 무어라 했던가, 에릭, 에릭, 나는 네가 돌아왔으면 좋겠어. 아니다. 에릭은 고개를 저었다. 그런 말이 아니었다. 멋대로 엉키고 원하는대로 모양을 바꾸는 기억에 화가 나 누운 소파에서 뒤척였다. 낡은 소리가 났으나 그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눈을 굴리며 한참 고민하던 그가 잠에 빠져들기까지 얼마 걸리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천정을 두드리는 빗소리를 언뜻 들은 듯도 했다. 듣고 싶은 목소리가 하나 있었다. 


지하에 만들어 놓은 열 평 남짓 크기의 거처는 지내기 힘들지 않았다. 적당히 포기하고 적당히 가지고 있다면. 침대 대신 큰 소파와 이불로도 충분했다. 티비를 가져오고 라디오를 가져왔다. 내내 틀어 놓고 지내면 사람의 소리도 기계의 소리도 아닌 것이 뒤섞여 지하는 왕왕 울렸다. 그러나 단지 소리일 뿐이었다. 무엇도 채우지 못했다. 곳곳에 알 수 없는 얼룩이 남은 벽은 항상 비어 있었다. 샤워를 하다 보면 이따금 물이 끊겼다. 그는 수도꼭지가 다시 제 기능을 하길 기다리는 동안 깨진 타일 사이 구석에 파고 들어 무릎을 세운 채 조용히 쪼그려 있었다. 여름이 가까웠으나 지하는 추웠다. 에릭은 추위에 적응하려 애썼다. 그리고 붉게 녹슨 철제 선반을 일그러뜨리지 않고 용서하기로 했다. 지하에서 위로 통하는 작은 창문 밖으로 뭘 모르고 놀러 온 아이들이 깔깔대는 소리가 들리는 날이 있었다. 날이 맑다는 뜻이었다. 그런 날에 그는 티비와 라디오를 끄고 낮부터 자주 이불 속으로 파고 들었다. 이불 속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에릭은 근처의 빵 가게에서 파는 크루아상을 좋아했다. 첫 입을 베어물 때 바사삭하고 부서져 입안으로 떨어지는 페스트리의 감촉을 특히 좋아했다. 매그니토를 알아보지 못한 빵 가게 아가씨가 이따금 몇 개를 더 얹어 주면 에릭은 남는 것을 거처 창문 밖에다 놓아 두었다. 간혹 위를 맴돌던 고양이나 들개를 위한 것이었다. 동물들은 에릭이 놓아 둔 음식을 먹었으나 지상에서 머물 뿐 결코 내려오지 않고 있었다. 


철문을 열고 들어가자 적막이 다시 밀려들었다. 열 평 짜리의 적막 속으로 발을 내딛은 에릭은 잠깐 멈춰 섰다. 어둠에 잠긴 몇 개 가구들을 바라보다가, 결국 크루아상이 가득 든 봉투를 놓쳤다.


네가 필요해.

나는 네가 필요해, 찰스.


얼룩진 시멘트 바닥에 뒹구는 크루아상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다시 한 번만 말해 줘, 찰스.


에릭의 목울대가 몇 번 위아래로 움직였다. 작게 난 창문은 딱 그만큼의 네모난 빛을 바닥에 만들고 있었다. 녹슨 철제 선반 위에 그의 헬멧이 놓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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