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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x강 크오 단편

[하피조윤] 그냥 단문


  영신은 깊이 앓았다. 그리고 살아남았다. 칼로 찔린 복부의 상처가 무려 한 뼘 길이였다. 영감은 이틀 내리 밤을 새서 사랑방을 지켰다. 조회장 댁은 으리으리하게 넓었고, 그 중 어느 한 방에 칼 맞은 자가 잠들어 있다 해도 알 바가 아니리라. 영감은 그렇게 믿어야 했다. 등잔밑이 어둡다고, 살부계의 시작을 끊고 죽은 서인의 집에, 살부계의 장이나 다름 없는 김영신이 숨어들 거라 누가 상상하겠는가. 영감은 파이프를 물고 작게 욕했다. 안채로부터 인기척이 들렸으나 무시했다. 조윤은 닫힌 사랑방 문을 한번 보고 영감을 흘긋 내려다봤다. 그 특유의 기다래지는 눈매가 달빛과 어울렸다. 


- 좀 어떻다고 합니까?

윤의 물음에 영감은 그저 고개만 저었다. 의사는 그렇게 찔리고 살아남은 게 기적이라고 했다. 여기를 빌려준 윤에게 감사를 해야 맞겠지만 그 악독하기로 소문난 조회장의 맏아들이니. 따지고 보면 살부계도 친일에 앞선 그의 아비 때문에 일어난 것이나 마찬가지였고, 영감이 떠올린 연결고리대로라면 이는 곧 조회장이 영신과 그의 부모의 원수나 다름이 없었다. 그는 헛기침으로 불쾌한 내색을 냈으나 윤은 그를 지나쳐 사랑방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땀에 흠뻑 젖은 영신이 누워 있었다.

윤이 스무살 때 서인과 함께 놀러 왔던 그를 본 적 있었다. 어린 것 답지 않은 총기와 붙임성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아 차갑게 눈짓하고 제 동생을 더러 나가 놀라 일렀었다. 윤은 영신의 옆에 앉았다. 십 년이 넘어 만난 아이는, 이제 아이랄 것도 없었지만, 저보다 큰 골격을 하고 자라 있었다. 사내의 선을 가진 턱선을 가만 훑어보고 콧등과 슬 벌어진 입술을 살폈다. 제 아비를 죽이기 위해 총을 잡았을 손은 무방비하게 놓여 있었고 붕대는 간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피에 젖어 있었다. 열을 앓느라 계속 끙끙하는 소리가 비음으로 터졌다. 윤은 손을 들어 그의 이마에 얹었다. 뜨거웠다.

서인은 아비를 죽이고 자살했다. 이 아이도 그럴 작정이었을까. 윤은 그것이 궁금했다. 사랑방을 내 주었으니 이 어린 범죄자와 공모했다 하여도 더 변명할 여지가 없었다. 왜 그랬는가 누가 물어도 답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윤은 미간을 구긴 채 오래도록 영신의 얼굴을 살폈다. 아비를 죽이고 온 아이는 악몽을 꾸는 것처럼 주기적으로 떨었다. 윤의 손가락이 그의 어깨 근처에서 오래 머물렀다. 노란 촛불이 병자의 어깨에 어른한 자국을 크게 내며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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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5. 17. 00:27

[영화조윤] 파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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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x강 크오 단편

[종성지원] 쇠


오덴지 말하면, 너가 알기는 하네? 


지원이 말없이 노려보니 동명수가 혀로 볼 안쪽을 긁으며 비죽이 웃었다. 


거, 형수랑 같이 갔어. 형님이 어이 말했는지 아네? 어떠한 일이 있어도 개인적인 연락을 말라. 인민영웅께서 차출된 데에 다 이유가 있지 않간? 


지원의 얼굴을 빤하게 보던 그가 급기야 허리를 굽히고 웃어댔다. 날이 서서 지원의 귀에 싸했다. 그는 말아쥐었던 주먹을 폈다. 입이 말랐다. 


그래서, 그게 어딘데? 


동명수가 웃음을 천천히 그치고서 혀로 입술을 핥았다. 


베를린. 


지원은 자켓을 집었다. 그는 카페를 나서며 가장 먼저 통역관 련정희를 떠올렸다. 희고 둥근 얼굴과 표종성의 약혼자답게 강단 있고 세련되던 말투가 기억났다. 몇 걸음 가지 못해서 행인 가득한 보도 한가운데에 걸음을 우뚝 멈췄다. 지나가던 몇몇이 지원을 흘끔 보았다. 지원은 그제야 16년 동안 함께 훈련 받았던 표종성의 얼굴이 전혀 기억나지 않는 것을 깨달았다. 베를린, 베를린이라고. 입 속으로 한번 말아물렸다가 나온 입술은 발갛게 처연한 색을 띠었다. 지원은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서울의 하늘을 올려다봤다. 독일의 하늘이 이와 다르지 않음을 알고 있었다. 그런 간지러운 감정이야 대학 나오기도 전에 버렸으니까. 다만......지원의 입술이 다시 앙다물렸다.










표종성 중좌가 표종성 소위였을 때, 지원은 딱 스무 살이었다. 표종성은 누구보다 단단했다. 철옹성 같은 사내라고, 지원은 생각했다. 철로 쌓고 지은 둑과 성을 의인화한다면 필경 표종성 같은 사내가 나올 거라 믿었다. 그는 차갑고 또 뜨거웠다. 그러므로 쇳덩이 같았다. 인간으로 만든 무기의 온상이 그에게 모두 뭉쳐 있는 것 같았다. 지원은 그가 다치는 것을 상상했다. 단단하기 그지없는 표종성이 다치고 아파 맥풀리는 것을 상상하면 묘한 쾌감이 일었다. 아랫배까지 간질간질해지는 감각이 곧 비밀스런 쾌감인지는 오래 지나고,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야 알았다. 


빌어먹을 아새끼, 그렇게 물러빠져서래 어케 살아남갔어? 


지원은 부은 입가를 훔치며 일어났다. 종성을 올려다보는 눈에 독기가 바짝 서 있었다. 그는 마음이 저릿저릿한 것을 느꼈다. 말이, 안된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마음이 저릴 수 있단 말인가. 그는 산탄총의 반동을 공부하고 낙법에서의 무릎 휘는 동작을 떠올리고 지혈법을 외웠다. 우겨넣을 것이 정해져있는 머릿속은 응당 소동이 일 이유가 없었다. 






조교 표종성이 딱 한번, 아픈 적 있었다. 몸살인지 감긴지 독하게 걸려서 도통 낫지 못하고 몇날 며칠 숙소에 틀어박혔던 때, 지원이 찾아갔다. 열에 달떠서 까무룩 감기는 눈꺼풀이 억지로 지원을 마주했다. 지원은 문 앞에서 거수경례하고 침대 곁 세 걸음만큼 떨어진 곳까지 걸어와 멈춰 섰다. 종성의 몸에서 나오는 열기가 눈에 보이는 것처럼 어른어른하게 심했다. 


좀 어떠십니까? 

별거 아니다. 하루 자면 말짱할 거.


엉망으로 뭉개진 목소리일지언정 말투는 영락없는 표종성의 것이라 다부지고 딱딱했다. 지원은 의자를 가져와 침대 옆에 자리잡았다. 종성의 숙소는 인민영웅을 보필하는 곳답게 언제 와도 깔끔하고 넓었으며 주인의 성정이 그대로 묻어서 쓸모없는 물건이란 단 하나도 없었다. 종성은 가래 끓는 소리를 내며 끙끙 앓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잠에 빠졌다. 그는 잠든 모습에서조차 무방비한 분위기를 지워냈다. 강함은 그에게 일종의, 태생 같았다. 지원의 시선이 그의 발치에 머물다가 바닥을 훑고 탁자 위로 올라갔다. 알약과 물잔이 놓여 있었다. 지원은 물잔을 들었다. 컵을 천천히 기울여 반쯤 차 있던 미지근한 물을 판자 바닥에 모두 쏟았다. 종이 위에 갯수 맞춰 놓인 알약을 손바닥으로 쭉 쓸었다. 모조리 굴러떨어졌다. 지원은 망가진 얼굴로 물과 알약으로 엉망이 된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표종성 앞에서 보였다간 필시 두들겨맞을 표정이었다. 


형님, 부르다 말고 목소리 끝이 뭉개졌다. 쏟은 물이 마르고 지원이 굳은 표정을 풀지 못하고 방을 나갈 때까지 표종성은 깨지 않았다. 그것이 지원이 딱 한번 보았던, '아픈' 표종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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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x강 크오 단편

[형배희철] 안녕히 가세요, 용강약국입니다

나는 항상 여기 있어요. 당신의 불안을 안고 침묵이 되어서.







불 하나만 켜놓은 약국은 특유의 어슴푸레한 흰 벽 때문에 밝을 때보다 침묵이 몇 배는 깊어졌다. 소독용 핀셋이 부딪치고 새 붕대를 풀어다가 허리에 감는 소리까지 들렸다. 이따금 살이 스쳤다. 그때마다 희철은 입술을 물었다. 약국 바닥엔 경계선 희미한 두 개 그림자가 졌다.


희철은 형배의 상처 위에 조심스레 입술을 올렸다. 어떤 타박상은 유독 낫지 않았다. 그 더딤이 꼭 무너지고 또 무너졌다가 다시 쌓을 수 없는 상처 같다고 희철은 생각했다. 그래서 더 안쓰러웠다. 


이건 뭐에 맞은 거예요? 참 희한하다. 꼭 장도리에 찍힌 것 같네. 

장도리 맞다.


허, 기가 차서 흘러나온 날숨이 먼저였고 두려움에 부르르 떠는 오한이 다음 순서였다. 장도리라니, 끔찍하게. 희철은 입꼬리를 꾹 내렸다. 이제 싸움은 안한다고 하지 않았어요? 뾰로통하게 물으면 형배는 대답 대신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줬다. 희철은 형배의 손목을 잡고, 끌어내려서 손날에 입맞췄다. 형배의 손날은 거칠고 딱딱했으며, 아물었다가 다시 다치고 또 아물길 반복한 흉터처럼 울퉁불퉁했다. 희철은 그의 울퉁불퉁한 손을 좋아했다. 요철을 손가락 끝으로 만지고 있으면 안정감이 들었다.


약사님요. 


형배가 불렀다. 희철이 흘끔거리며 그를 마주했다. 


마, 내 한동안 여 못올거 같은데.


한 마디에 가슴이 금방 무게를 지니고 가라앉았다. 형배는 늘 이런 식이었다. 잔뜩 다쳐 와서는 약사님요, 파스 하나 주이소.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말하고 담배를 빼 물었다. 연기가 약국에 꽉 차고 형배가 다시 한 대를 빼물어도 희철은 매번 물어볼 수 없었다.

이번엔 어디로 가요? 언제 가세요? 또 올 거죠? 

물음이 까끌까끌하게 입에 남았다. 그가 기침을 해도 형배는 담배를 끄지 않았다. 온통 울상을 지어야 겨우 담배를 끄는 심보도, 굳이 싫어하는 호칭을 불러대는 것도 그러려니 견딜 수 있었다. 다만 그는, 희철은, 형배의 침묵만은 버티기 힘들어했다. 부산에서 타고자라 주먹을 직업으로 삼는 그에게 침묵이 어떤 의미인지 적확하게는 짐작 못했지만 그것이 가지는 무게만은 절절하게 느꼈다. 다른 세계의 사람. 평행선의 거리를 실감하고 나면 닿는 일은 더 요원해졌다. 희철은 형배의 옆구리에 마지막 감은 붕대 끝을 꽉 매어 주고 그를 힐긋 올려다봤다. 눈이 마주쳐서 조금 주눅 들었다.


호랑이에 얼룩말 무늬 남겠네...하도 칼빵이 많아서.


그 말에 형배가 바람 빠진 웃음을 지었다. 웃으라고 한 이야기가 아닌데도 픽 터진 걸 보니 마음이 조금 풀려서, 희철도 웃고야 말았다. 그는 제가 감아놓은 붕대를 손가락으로 더듬어 보았다. 눈치를 보느라 형배를 연신 쳐다봤다. 두 대째 담배를 비벼 끈 형배가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희철이 시선을 비켰다. 돌아간 턱이 손에 잡혔다. 담배 냄새가 쎄하게 났다. 희철은 돌아간 얼굴에서 눈을 다시, 천천히 올려 떴다. 마주침, 안도. 그런 것은 이 사내와 영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지만......희철은 조금 슬프게 웃었고 형배는 조금 굳은 얼굴로 웃었다. 먼저 일어선 것은 희철이었다, 늘과 같이.


가세요. 몸 조심하시고요. ...또 오세요.


손님 대하듯 인사했고 형배는 등을 보인 채 옷을 입었다. 흰 셔츠 아래로 울긋불긋한 문신이 비쳤다. 방금 감은 붕대의 두툼한 두께감도 보였다. 소매 단추를 채우며 형배가 그에게 다가섰다. 희철이 한 걸음 물러섰다. 다만, 한 걸음일 뿐이었다. 형배가 그의 뺨에 검지를 가져다댔다. 희철은 숨을 참았다.


희철아.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애원하고 싶은 마음을 참느라 희철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형배의 검지가 뺨에서 턱선으로 내려갔다. 성적인 의도는 없었다. 담백했기에 더 서늘했다.


몸 조심해라이.


희철은 한참 지나서야 고개 끄덕였다. 약국문이 열리고, 형배가 나갔다. 돌아보지 않았다.

안녕히 가세요. 뒤늦은 인사가 따라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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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x강 크오 단편

[영화조윤] 연필 깎는 시간




문구용 커터날에는 어떤 제품이든 날에 기름이 엷게 발려 있었다. 윤은 그래서 연필을 깎기 전에 커터날을 티슈조각에 앞뒤로 네 번씩 문질렀다. 닦아낸 커터날은 약 3cm 정도 뽑는다. 연필 깎기의 정석이 어떻든 간에 윤에게 가장 편한 길이가 그 정도였다. 손때가 타기 시작한, 연필의 뻗은 몸체에서 처음으로 각도가 생기는 부분에 칼날을 박고 최대한 예각을 그리며 위로 민다. 살짝 당기는 기분으로 서두르지 않게 밀어야 깨끗하게 잘린다. 흑연에 날이 닿자마자 뗀다. 기실 연필을 깎는 데 제일 중요한 것은 기술보다는 나무의 질과 결이었다. 윤이 싸구려 연필을 혐오하는 까닭이 여기 있었다. 웬만큼 손재주가 좋은 자가 아니고서야 보통 커터날로 작은 나무조각을 세공하는 일이 쉬울 리 없었다. 그러나 부드럽고 질 좋은 나무는 연필 깎는 손을 즐겁게 만들었다. 따라서 윤이 최고급 연필만 쓰는 이유는 필기감의 만족도보다 연필을 깎을 때의 노고가 적다는 데 더 큰 무게가 실렸다. 공들여 십여 분 연필을 깎는 시간은 조윤에게 가장 평온을 바라는 시간이었기에 조금의 스트레스만치도 허용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명망 있는 방송작가인 조윤에게 최고급 연필을 선물하는 이들이 꽤 많은 이유도 그 탓이었다. 그의 서재 서랍장 하나에는 한 번도 깎지 않은 연필이 종류별로 수십 다스 블럭을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에 제 연인인 윤영화가 준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 야.



이제 막 흑연에 닿기까지 3mm 정도 남은 커터날이 멈췄다. 노크도 하지 않고 불쑥 들어와선 문도 닫지 않는, 저 수준 낮은 교양머리야 수십 번 말해도 고쳐지지 않는 부분이니 진작에 포기했다만, 들어오자마자 손바닥을 불쑥 내밀어보이는 저 성급함은 이쯤 고칠 때도 되지 않았나 싶었다. 윤은 먼저 커터날을 내려놓고 다음으로 연필을, 다음으로 코끝에 걸쳐 끼고 있던 안경을 차례로 내려놓았다. 속눈썹을 내려깐 뒤 나무 조각이 뒹구는 종이를 살짝 앞으로 밀었다. 



- 화요일.



애초 말했던 일정을 어기고 이렇게 들이밀면 곤란하단 부연설명을 하는 것도 윤의 타입은 아니었다. 영화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은 달랐다. 다시 손바닥을 흔들어 보였다.



- 초안 화요일. 말했잖아. 지금 못 줘.

- 쓴 거라도 달라고. 대강 러프라도 나왔을 거 아냐. 



윤은 대답 대신 오른손 검지를 느리게 제 관자놀이로 가져가 꾹, 꾹, 눌렀다. 늘 이런 식이었다. 머리가 아파왔다. 교양으로 무장하고 있어야 할 앵커가 깐깐하고 멋대로인데 무식하기까지 하다니.



- 화요일.

- 아 씨발, 내 놓으라고. 대강 워딩만 보게!



상스러운 말에 바로 미간이 좁혀졌다. 윤은 고개를 딱, 소리나게 꺾으며 입모양으로 읊었다. 미친. 천박한 새끼. 그리고 의자를 약간 돌려 얼굴 오른쪽에 있는 모니터를 마주했다. 



- 기다려. 지금 보낼게. 



그제야 영화는 길게 한숨 쉬며 안도했다. 윤이 덧붙였다, 기대는 하지 마. 그가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인 채 마우스를 움직이는 동안 영화는 윤의 '더럽게 큰' 책상을 돌아 그의 의자 곁으로 다가갔다. 어깨에 손을 얹어도 윤은 움직이지 않았다. 좀 더 용기 낸답시고 짚은 어깨를 은근히 주물러 보았다. 윤이 짧게 으음, 앓는 소릴 냈다. 영화는 아예 두 손으로 그의 양 어깨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주무르는 동작 따라 꼿꼿하던 윤의 몸이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기어코 마우스로 메일 전송버튼까지 누르고 나서야 윤은 그에게 몸을 맡기고 눈을 내려감았다. 낮은 목소리로 신음하는 걸 듣자니 묘하게 욕구가 동한 영화가 윤의 셔츠 위 가슴으로 손을 내렸다. 봉긋하게 살이 집힐 만한 곳까지 내려가기도 전에 윤이 그의 손목을 붙들었다. 포기하지 않고 그 어귀에서 손을 놀리던 영화가 윤의 의자 등받이에 턱을 얹고 말했다.



- 기대는 자동으로 하지, 조 작가님. 니가 쓴 게 제일 편해. 리딩도 그렇고, 너 쓰는 단어도 다 내거 같고.



다른 이였다면 휴식을 깬 데 대한 보상이랍시고 읊는 아부라고, 윤은 생각했을 터였다. 그러나 그가 아는 윤영화는 눈치 보는 일이나 지리멸렬한 아첨과는 결단코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최상급 방송인인 그에게 아부가 들어가면 들어갔을 테지. 입에 안 붙는 대본을 쥔 윤영화는 그것을 써낸 이가 애인이든 가족이든 그 자리에서 당장 찢어 버렸으리란 사실도 알았다. 까다로운 녀석이 제법 마음에 들어할 때마다 차오르는 뿌듯함은 온갖 짜증을 부리며 둘이 싸우더라도 기어코 윤이 영화의 대본을 맡을 수 있는 연원이었다. 윤은 속으로만 빙긋이 웃었다. 그러니까 너도 욕을 이렇게 먹어가며 내게 일감을 들이미는 거겠지. 간혹 섹스 중에 일 이야기가 나와 산통을 깨는 일이 있더라도 말이야.




- 알면 제대로 해.

- 뭐, 안마라도 더 해드릴까? 조 작가님?



손아귀에서 빠져나와 도로 어깨로 올라가려던 영화의 손을 윤이 다시 턱, 붙들었다. 그대로 당기는 투에 영화의 상체가 쏠렸다. 어깨 너머로 얼굴이 내려오자 윤이 그의 넥타이를 쥐고 가볍게 한 텀을 더 끌어당겼다. 이윽고 두 입술이 닿고, 살 부딪치는 소리와 물 소리가 뒤엉켰다. 여태 윤의 손에 잡혀 있던 넥타이가 모양을 일그러뜨리며 늘어졌다. 먼저 몸을 일으킨 것은 영화였다. 번들번들해진 입술을 손등으로 문지르고 고개를 뚝, 뚝 소리나게 양옆으로 꺾더니 아예 윤의 의자를 제게 돌리고 양 볼을 잡아 키스했다. 윤은 미친 새끼, 하는 말을 씹어 삼키며 뒤통수에 손을 가져가 머리칼을 손가락 새 움켜쥐었다. 그러고보니 마감, 하나 더 있는데. 그는 옮겨오는 숨과 함께 간질간질한 감정을 삼켰다. 자세를 고쳐쥐느라 키보드 옆에 쌓아 뒀던 종이들이 흐트러졌다. 깎다 만 윤의 연필이 굴러 바닥에 떨어졌다. 그제야 윤이 영화를 두 손바닥으로 힘껏 밀어냈다. 손에 닿은 몸에서도 열기를 읽을 수 있었다. 



- 값어치 받아냈으니까 더 방해하지 말고 비켜, 마감 치게.



가슴이 양손에 짚인 채 그대로 쭉, 밀려나자 영화의 입꼬리가 틀어졌다. 여기서 더 요구하지 않는 것 또한 둘의 불문율 중 하나였다. 한 걸음을 물러선 그에게서 윤이 시선을 떼고 다시 모니터를 보는 동안 영화는 넥타이를 고쳐맸다. 인사 없이 돌아선 그가 윤의 의자 등받이 뒤로 다시 돌아갔고, 잠깐 손길이 윤의 목 언저리에 스친 듯도 했다. 작업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서야 윤은 옆을 흘끔 내려다 보았다. 바닥에 떨어졌던 연필이 도로 종이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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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x강 크오 단편

[형배초인 조각글] 불면

거, 퍼뜩 눕어라. 11시다.


형배는 미간을 구긴 채 침실 안으로 한 걸음을 더 들였다. 파들짝 놀란 초인이 침대 아래 떨어진 몸을 일으키려 애썼다. 온전한 발목은 침대 발치와 묶여 있고 의족은 없었으며 안대까지 차 놓았으니 바닥에서 침대까지 올라가는 일만도 허겁지겁이고 힘이 들 수밖에. 형배는 그가 침대에 앉기까지 닫힌 문 옆에 비스듬히 기대 서서 담배를 물었다. 불을 붙이고 첫 연기를 삼켰다 뿜는 동안, 의족이 없는 초인에게는 딱 그만큼의 시간이 필요했다. 숨을 들이키고 눈을 가린 그대로 얌전히 멈춰 있으면 그제야 형배가 문 근처에 널브러진 의족을 들고 침대 곁으로 다가왔다. 침대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이미 닳고 낡은 의족을 빈 다리에 끼우면 수치심을 숨기지 못하는 손이 더러운 시트를 틀어쥐었다. 형배는 그때마다 제 보스의 취향이 독특하다 생각했다. 말라빠지고 독기 오른 사내를 보고 욕정이 일 거라고 쉽게 상상이 가질 않았다.


형배는 사내가, 초인이 처음 왔을 때부터 단 한번도 그의 눈을 본 적이 없었다. 형배의 보스는 이유가 있어 가려 두는 거라고만 했다. 이 작은 조직에서 이제 막 서열 서너 번째를 다투는 스물두 살의 어린 형배는 그렇게 보스의 깡마른 사내를 담당했다. 사내가 보스와 잠자리를 하고 난 뒤 눈 가리고 다리 없는 그를 씻기고 잠들 때까지 지키는 일은 형배의 몫이었다. 밑에 애들을 시키지 말라는, 특별한 지시가 있었다. 형배는 그것만으로도 보스가 얼마나 저를 신임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욕조에서, 혹은 옷을 갈아입힐 때에 형배의 손이 살에 닿으면 사내는 마른 몸을 웅크리고 입술을 바투 깨물었다. 그 모습이 곧 부서질 장작 같다고, 형배는 생각했다. 불 태우지 않았으나 금방 재가 될 것이라 여겼다. 사내의 이 불안정함을 보스도, 알고 있을까. 적어도 형배가 알기에 그는 이 자를 직접 씻기거나 입힌 적이 없었다. 비밀이 오롯해졌으나 헛헛했다. 품을 수 없는 비밀은 비밀이 아니었기에, 형배는 사내를 보면서도 사내를 지우려 했다. 


형배는 의족을 모두 끼운 뒤 초인의 무릎에 이불을 끌어 덮어 주었다. 이는 둘 사이 하나의 신호가 되어 초인이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하는 시작이 되었다. 형배는 그가 눕는 모습을 보고 담배를 바닥에 던져 비벼 껐다. 급히 핀 탓에 약한 현기증이 일었다. 한 걸음을 물러났다.


불을 끄고도 사내는 쉽게 잠드는 적이 드물었다. 때론 악몽을 꾸는 듯 작게 앓는 소리를 내기도 하고, 어떤 때엔 누구와 대화하는 듯 웅얼거리기도 했다. 그가 온전히 잠드는 모습을 확인하는 것도 형배의 몫이었다. 그는 왜 보스가 이런 일을 시키는지 납득하지 못했으나, 조직은 납득으로 성립되는 것이 아니었다. 깊은 밤까지 문간에 앉아 깜박 졸다 보면 사내는 고른 숨을 쉬며 몸을 웅크린 채 잠들어 있곤 했다. 그 모습을 확인하고야 형배는 사내의 침실을 벗어날 수 있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의자에 앉았던 그는 사내가 유독 오늘따라 잠들기 어려워한단 사실을 깨달았다. 담배 한대를 더 물고, 필터 끝까지 태운 형배는 침대에 다가섰다. 이것이 선 하나를 넘는 일임을, 발 내딛는 순간 알고 있었다.


와, 잠이 안 오나?


무심한 척 뱉는 말이 두 번째 선이었다. 어슴푸레한 중에 사내가 모아 쥔 손을 조금 떠는 것이 보였다. 형배는 마른침을 삼켰다. 둘이 존재하는 이 침실에서는 사내의 마른 몸이 떠는 소리마저 들릴 것 같았다. 형배가 손을 뻗었다, 사내의 안대를 벗겼다. 초인은 묵직한 눈꺼풀을 천천히 들어올렸다. 형배와 눈이 마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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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2. 23. 23:27

[종성지원] 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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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x강 크오 단편

형배준호, 형배조윤, 종성지원 단문들 백업



사령을 만나고 온 날에는 밤 깊도록 당신의 별에서 꿈을 앓았다. 희게 부서져 떨어지는 내 손을 당신이 받고, 나는 심연의 턱자락에서 손 뻗을 생각도 못한 채 가라앉고, 가라앉고, 다시 가라앉아……. 나의 박동이 나를 저주처럼 깨웠다. 새벽이 아파서 찬 휴대폰을 껐다가 다시 켜고, 모서리를 쓸며 당신의 쨍하던 눈썹 끝을 떠올리고, 목덜미에 닿던 짧은 손톱 감촉을 떠올렸다. 앓은 밤에 당신을 기억하면 반은 떠오르고 반은 문지른 사진처럼 기억나지 않았다. 생각이 저리게 아프면 기실 이것도 죄가 쌓여 남긴, 나의, 내가슴의 재 탓이라 여겼다. 당신은 나를 숲이라 여겼으나 나는 밤의 자락조차 잡지 못하는 몽돌이었다.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당신이 세례명 아닌 이름부터 내게 불러주었기 때문일까, 당신이 나를 부르는 발음은 늘 그러했다. 색으로 표현한다면 때 없는 산의 짙붉은 꽃일 테고 온도로 표현한다면 열 살 아이의 정수리에 떨어지는 햇빛일 터였다. 당신이 나를 불러 줄 때 나는 당신 안의 둥글고 흰 달을 보았다. 그 빛을 생각하면 이런 새벽도 괜찮았다. 우리가 더 둥글어질 수 있다는 믿음으로 시작했기에, 괜찮을 수 있었다. 이불로 턱을 감싸고 곁에 없는 당신을 곁에서 읽으려 눈 감으면 이따금 눈물이 흘렀다. 모자람보다 벅참으로 흘러내리는 것이었다. 당신이 좋았다. 당신의 사나움이 좋았다. 몸 섞은 후 죄를 뱉고 난 후의 기분처럼 허망하고 두려울 때 분분히 밀려오던 억울함조차도 사랑했다 말하면, 당신은 나를 두려워할까. 손가락 끝에도 기분을 모아 전할 수 있다면 수천 번 당신을 만졌을 것을. 


한없이 붉어지던 새벽, 돌아오지 못할 달콤함, 영영 내 손금에 남을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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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여, 최형배 씨. 우리 솔직하게 쫌 이야기해 보까요? 목격자는 그때 신부가 둘 있었다 캤어. 뭐, 자꾸 신부 아이고 부제다 그러는데 씨발 나는 그런 거 모리고, 형배 씨가 피해자 집에 도착한 게 9시야. 맞죠? 아니 씨발 흥분하지 말고. 앉아봐요. 하여튼 깡패새끼들은 하나같이 검사를, 어? 좆같이 보지? 씨발, 앉으라고. 누구는 눈깔이 없어서 안 부라리나. 그래. 저 뭐야, 어디까지 했어. 그래, 부제님이 흉기를 든 채로 발견된 게 8시. 목격자는 5시에 신부 둘을 봤다 캤어. 지금 사건 전말 알고 껴든 거 맞아요? 아니믄 그냥 들이대는 거야? 보자......강남에 나이트, 부산에 호텔 서너 개, 창원에 빌라 두 채, 기타 등등. 어? 나는 당신 같이 팔자 좋은 깡패 새끼가 이런 사건에 끼어드는 걸 본 적이 없거든. 형배 씨, 경력 몇년 됐으요?  96년도 인수건설 사건, 당신 새끼시절에 있던 데 맞지? 상당히 오랫동안 이 바닥에서 구르신, 형님이, 왜, 무슨 일 때문에? 난 그기 궁금하단 말이야. ...... ......니 영도파 김병식이 알지? 인수건설 사건 때 니가 쌔빠지게 똥 닦아주던. 모르긴 뭘 몰라. 니 거기 있다가 김판호하고 뒤통수 쌔리고 나온 거 아냐. 철천지 원수를 지고 나왔겠구만. 니, 김병식이가 지금 어디 대표인 줄, 알제? .....김병식이 피해자 아내랑 내연 관계인 거도 아나? ......담배 한 대 주까요? ......후, 그, 뭐야, 부제님은 저기 우리 계장님이 밥 시켜줘가 묵고 있을 거야. ......여기 털어요. 재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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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젖은 낙엽을 밟으며 동창의 결혼식에 갔다 온 날, 부제는 밤 내내 열에 앓았다. 베갯머리로 새가 팔락대는 것처럼 부산스러운 몸살이었다. 모로 누운 부제는 벽에 걸어 둔 제 수단을 보며 빗소리를 들었다. 열기를 느리게 뱉고 삼키며 여러 번 잠의 앞까지 다녀왔다. 선잠 속에서 붉은 물고기가 빗속을 헤엄쳤다. 새벽 되고서 종소리가 들렸다. 먹먹한 눈을 꾹꾹 누르고 약을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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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잔인한 게 뭔지 아네? 종성은 동명수의 손가락 끝에 잡힌 벌레 더듬이와, 그의 날 선 웃음과, 잔뜩 열오른 화약 냄새를 기억했다. 부싯돌이 몇 번 헛돌고서야 동명수는 벌레를 불 태웠다. 기름 냄새가 뒤섞여 났다. 종성은 고개를 틀어 지원을 바라보았다. 경추에서 으스러지는 소리가 났다. 눈에 핏자국이 비쳤다. 몇 가지 기억은 동공을 지우는 피처럼 어설프고 잔혹했다. 지원과 관련된 모든 기억이 그에게 그러한 형태로 남아 있었다. 얼룩 같기도 하고 불길 같기도 한 일종의, 기록보다는 감정에 가까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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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무를 출 때마다 윤은 묘한 해방감을 느꼈다. 검자루를 쥔 손가락마다 힘을 풀고 놓길 달리 하면 검인은 다른 각도로 빛을 쓸어 받았다. 눈으로 볼 수 있는 날카로움이, 삿됨이 좋았다. 제 손으로 끊는다면 끊을 수 있을 사나움을 확인하는 일이 즐거웠다. 열여덟 살의 조윤은 검무를 한번 추기 시작하면 한 시진을 꼬박 쉬지 않고 몸을 놀렸는데, 그때마다 반드시 검고 얇은 두루마기를 겹쳐 입었기에 땀에 젖은 머리칼이 흐트러지기 시작하고 열기가 오르면 묶어 둔 새가 펄럭이듯 고통스럽게 아름다워졌다. 기방의 기생들은 마당으로 나와 숨을 죽이고 그의 검무를 구경하곤 했다. 달 아래 검은 자락을 날리는 윤을 보고 이들 중 몇은 안타까움에 차마 참지 못하겠다는 듯 낮게 신음했다. 기방의 맏딸이나 다름없는 여자의 외아들이었다. 난 곳이 아깝도록 영민하고 유려했으므로 예쁨 받는 것이 당연했다. 그러나 다만 분내 나는 기생들 사이에서만이었다. 꽃잎이 짝짝이인데 그 향이 무어 중요하겠느냐. 친아들을 보고 혀를 차는 어미의 말버릇이 그러했다. 동년배 기생들이 퇴기 취급 받는 데 비하면 윤의 친어미를 탐내는 자들은 여전히 많았다. 그녀를 부르는 양반 중 하나가 최지사였다. 도두刀頭에 새까만 범을 새긴 검을 차고 다니는 그는 묵직한 동래 말투와 큰 풍채 덕에 어디서든 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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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덴지 말하면, 너가 알기는 하네? 지원이 말없이 노려보니 동명수가 혀로 볼 안쪽을 긁으며 비죽이 웃었다. 거, 형수랑 같이 갔어. 형님이 어이 말했는지 아네? 어떠한 일이 있어도 개인적인 연락을 말라. 인민영웅께서 차출된 데에 다 이유가 있지 않간? 지원의 얼굴을 빤하게 보던 그가 급기야 허리를 굽히고 웃어댔다. 날이 서서 지원의 귀에 싸했다. 그는 말아쥐었던 주먹을 폈다. 입이 말랐다. 그래서, 그게 어딘데? 동명수가 웃음을 천천히 그치고서 혀로 입술을 핥았다. 베를린. 지원은 자켓을 집었다. 그는 카페를 나서며 가장 먼저 통역관 련정희를 떠올렸다. 희고 둥근 얼굴과 표종성의 약혼자답게 강단 있고 세련되던 말투가 기억났다. 몇 걸음 가지 못해서 행인 가득한 보도 한가운데에 걸음을 우뚝 멈췄다. 지나가던 몇몇이 지원을 흘끔 보았다. 지원은 그제야 16년 동안 함께 훈련 받았던 표종성의 얼굴이 전혀 기억나지 않는 것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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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가 높은 밤이라 바다 소리가 지붕 위까지 들렸다. 준호는 엎드린 채 눈 감았다. 슬레이트 지붕에서는 썩은 감 냄새가 났다. 바람이 불면 바다 냄새가 날 터였다. 구름이 걷히고서야 준호는 스코프에 눈을 가져댔다. 실수가 없으려면 과감해야 한다. 그에게 배운 첫 법칙이었다. 내는 이런 거보담 쪼만한 놈을 쓰지만서도, 니는 이게 어울릴끼다. 처음 잡아 보았던 M76의 무게와 서늘한 감촉은 이후 최형배가 떠나던 날 보인 눈빛을 준호에게 연상시켰다. 그가 갈기갈기 찢겨 죽는 꿈을 꾸는 날에는 새벽 내내 지붕에 올라 있었다. 등에 닿던 무게가 기억났다, 귓바퀴에 대고 읊어주던 단어 또한. 떨지 마라. 생각을 하니 떠는 게 아이가. 없는 목소리가 유령처럼 들러붙었다. 준호는 아랫입술을 문 채 방아쇠를 당겼다. 바다에서는 파도가 한껏 높아지고 있었다. 바닷가의 축제가 돌연 끝나고 있었다. 준호는 반짝이는 조명들을 보며 아이일 때 보았던 고깃배 불빛을 기억했다. 사람들 사이에 비명이 일었다. 준호는 총을 메고 지붕을 뛰어내려왔다. 사라진 사람에 대한 증오가 독처럼 그를 좀먹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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