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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국연

[형배범신 수인AU] 흑호



앗쉬... 오그라듬 주의요...수인 주의...수인인데...유치함..오그라듬.....





*





흑호黑虎는 밤의 기운을 타고 도약하며

한번 달리기 시작하면 숲이 이지러지고 안개가 날렸기에

작은 포유류들은 밤이 오기 전에 굴로 기어들어갔다.





산에 불이 났다. 늦가을 쌓인 낙엽에 자연불이 붙는 일이야 한번씩 있다 해도 때가 한여름이었으니 인간이 놓은 불이 분명했다. 형배는 짐승의 태態로 넓바위에 올랐다. 치솟는 불을 보며 이를 드러낸 채 짧게 포효한 뒤 꼬리를 바짝 세워 기슭로 달렸다.


범신은 요지부동이었다. 이대로 있다간 산도 잃고 너와 나는 잡혀 팔려가 험한 꼴을 당할 거란 이야기에도 묵묵히 묵주알을 닦고 있었다. 그는 산으로 와서 신을 받고도 신부의 버릇 몇 가지를 버리지 못했다. 잘 때가 아니면 꼭 사제복을 입는 것과, 이제 기도할 일이 없는데도 매일 아침 저녁으로 묵주를 깨끗하게 닦아 놓는 이런 고집스럽고 소소한 동작뿐 아니라 사람을 믿는 방식에 있어서도 그러했다. 형배는 그가 자신과 떠나길 바랐다. 처음 신을 받을 때 분명 범신이 제 손을 잡고, 이제 돌이킬 수 없는 두 몸을 온전히 누일 곳을 찾으러 갈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범신은 피정하는 것처럼 가라앉았다. 정말 산의 일부라도 된 양, 사람 사는 곳과 고작 몇 킬로미터 떨어지지도 않은 여기에 머물려 했다. 형배는 그의 고집이 어디서 나오는 줄 알았다. 나고 자라서 자신을 만났던 도시를 버리지 못하는 게 분명했다. 쓸 데 없는 고집이었다. 이곳은 병들어 망가질 것이었다. 형배는 그것을 알고 있었고, 그는 범신 또한 그 사실을 알고 있다 여겼다. 


니, 내캉 같이 살자 안 했드나.


20년도 더 전, 김범신이 아직 신부가 아니던 시절, 처음 몸 섞으며 범신은 분명 그렇게 이야기했었다. 내가, 신부 지겨워지면, 물론 그럴 일은 내가 뒈지기 전엔 없겠지만, 그 때 되면 데리고 살든가. 아무리 몸을 섞고 밀어를 주고받고 생사를 넘기는 꼴을 보았어도 범신은 결코 자신의 것이 된 적 없었다. 범신은 쥐고 흔들수록 멀어졌다. 응당 법칙이 그래야만 한다는 듯. 


내 말 안 들리나.


김범신. 이름 끝에 맹수 특유의 위협음이 섞였다. 형배가 범신의 팔을 사납게 끌어당겼다. 말없이 묵주를 쥐고 있던 범신이 팔을 뿌리치고 대번 송곳니를 드러내 보였다. 그러나 으르렁거리는 소리는 형배가 먼저였다. 낮게 폣속 긁는 소리를 낸 그가 범신을 짓눌렀다. 앞니로 목덜미를 물고 발톱만 짐승의 그것인 손으로 검은 하의를 찢고 자세를 고쳐 올라탔다. 흉하게 찢어져 옆에 널브러진 사제복은, 범신이 늘 그랬듯이 또 어딘가에서 새것으로 구해 올 것이었다. 그의 아래서 범신이 긴 울음을 냈다. 고양이과들이 위협할 때 으레 내는 소리였다. 형배는 하체를 바싹 붙인 채 그 소리마저 먹으려 다른 손으로 범신의 머리를 짓눌렀다. 하체가 겹치고 형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동작이 느렸기에 되려 위압적이었다. 끙, 앓는 소리를 내며 범신은 한쪽 손을 바닥에 긁어 버텼다. 비슷한 시기에 현신한 흑호라 해도 형배의 덩치가 한참 더 컸으며 이는 사람일 때도 마찬가지였다. 덩치로 짓눌려 이길 수 없음을 알았던 범신은 엉덩이를 들썩이며 그릉, 그릉 하고 긁는 듯이 울었다. 삽입의 전희가 거의 없이 이뤄지는 교합은 간간이 피마저 보였다. 형배는 그를 사납게 대함으로써 위로 받았다. 범신은 결코 그를 위로하는 법이 없었고, 형배는 앞으로도 그가 결코 자신을 위로할 리 없다 믿었기에 이렇게 사나움으로 보상 받는 것이었다. 비록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다 해도.


두 마리 범의 교합은 반드시 누군가 하나를 다치게 했다. 실상 그 주가 형배고 타가 범신이 되는 구색이었으나 막상 엎치고 뒤친 뒤에 짐승의 모습을 띠고 서로를 핥아줄 때에는 상처의 갯수나 깊이가 비슷했다. 서로의 피와 털을 혓바닥에 엉기며 어느 날은 밤이 한 번 깊었다가 사라질 때까지 서로의 몸을 핥는 일에만 전념하기도 했다. 범신은 여전히 말이 적었고 형배는 여전히 무심했다. 두 흑호는 서로의 말이나 몸짓보다 당장 닿는 혓바닥을 믿기로 결심한 것처럼, 혹은 서로의 자식이 되어 주기로 한 것처럼 그렇게 오래 공들여 쓸어주었다.






아침이 되고 범신은 형배가 사라진 걸 깨달았다. 온기 남은 자리를 가만히 쓸어보던 그는 굴 밖을 나섰다. 형배의 기척은 어디도 보이질 않았다. 산불의 여파로 새까맣게 그을린 숲은 이곳에서도 보일 만큼 그 지역이 넓었다. 범신은 다시 굴로 들어갔다. 무릎을 꿇고 앉아서, 손에 묵주를 쥐었다. 기도문은 단 한번도 잊은 적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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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식 달




많이 좋아하는 내 신부님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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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호는 다친 새끼손가락에 감긴 붕대를 이로 잘근잘근 물어 보았다. 안의 살갗이 가려운 것은 그러나 영 풀리질 않았다. 그는 붕대 탓에 두 배는 굵어진 제 손가락을 위아래 앞니 사이에다 물고 한참 끙끙거리고서야 지독한 가려움을 포기했다. 이번에는 제법 독하게 다쳤다. 그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잇자국 따라 뚝뚝 떨어지던 핏방울이 바로 지금인 양 눈앞에 아찔하게 떠올랐다.



아그네스 수녀는 치료해 주는 내내 작정했다는 양 그를 몰아붙였다. 대체 어떻게 장난을 치면 손가락이 이 지경이 되도록, 응? 한두 번도 아니구요. 전에는 손목이었죠. 김신부님은 뭐라고 안 하셔요? 하긴, 그 양반두, 뭐. 안타까워서 잔뜩 구긴 얼굴에다 그저 배시시 웃어 보이는 외에는 도리가 없었다, 매번 그랬듯이.



병원 나온 길에는 날이 맑았다. 준호는 걸음을 멈추고 벤치에 앉았다. 성당 첨탑이 보이는 거리였으나 빨리 들어가기가 싫었다. 곧 봄이라 했던가, 날짜가 영 와닿질 않았다. 소금으로 친 결계 안을 넘었다 온 다음에는 특히 그랬다. 수요일이 토요일 같고 아침 해를 받으면서도 저녁인 양 쓸쓸해졌다. 때때로 길 잃은 천치처럼 멍해지기도 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악몽도, 공포도, 독한 저주도 없었다. 준호는 괜찮았다. 말 그대로, 그저 괜찮았다. 성당 일은 이제 제법 적응되었고, 편백향이 은은하게 나는 사제관도 전혀 불편하지 않았다. 그러나 걱정은 곁에 있는 이의 몫이었다. 너, 저, 뭐야, 신경정신과 같은 데라도 가 보는 게 어떠냐. 김신부는 이제 막 사제 서품을 받은 지 1년 된 어린 신부가 그 삿된 일들을 모두 보고도 말갛게 바른 것이 영 걱정되었다. 준호가 그 마음을 모를 리 없었다. 급히 고향으로 내려갔던 마태오 수사에게도 주기적으로 연락하는 것을 곁에서 직접 지켜 봤던 터였다. 평생 술 없으면 잠도 못 잘 거라 장담하던 그는, 구태여 아침마다 전화를 걸어 준호의 안위를 확인하곤 했다. 졸음을 참으며 괜찮다는 말을 하고 나면 마음이 괜하게 싱숭생숭해져서 정인의 번호에다 메시지를 넣어 놓곤 했다. 예식 탓에 며칠을 연락 않더라도 그 투박한 사투리로 불만 한 번 내비치지 않을 만큼 무심한 사람이어서, 또 다행이라고, 그는 안도했다. 머리맡에서 덜컹거리던 창문 소리며, 생전 처음인 양 낯설게, 또 곱게 들리던 심장 소리가 떠올라 그는 붕 뜬 뒷머리를 긁고 입술을 비죽이며 웃기도 했다.



준호는 가방을 뒤져 초콜릿바를 꺼냈다. 포장지를 뜯자마자 절반만큼 입에 베어 물었다. 단내가 코를 막고 목을 간질였다. 우적우적 씹어 삼키고 나머지 남은 덩이도 단숨에 먹어 해치웠다. 속이 달아지자 기분이 녹녹해졌다. 손가락의 간지러움과 통증도 좀 나은가 싶었다.



어린 동생은 나이답잖게 단 걸 싫어했다. 어쩌다 받은 군것질거리는 모두 오빠인 그의 몫이 되었다. 준호는 그래서, 동생이 죽은 뒤 한동안 단 것을 입에 대지 않았다. 신학교를 다니고, 부제 서품을 받을 때까지만 해도 그랬다. 다시 단 걸 먹기 시작한 것은 고작해야 사제 서품을 받은 후부터였다. 동생의 장례 직후 몇 년간은 꿈에 나온 동생이 동그란 머리를 숙이고 땅에 떨어진 사탕 조각을 주웠다. 날카로운 조각에 어린 동생의 손가락이 찢어져 피가 흘렀다. 어린 준호는 동생의 꿈을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못했다. 자라지 않는 여동생의 모습은 먹지 못하고 늘러붙어 녹아가는 사탕 조각처럼 겹겹이 쌓여갔다. 동생의 꿈을 안 꾼 지가 일 년이 훨씬 넘었음을, 준호는 성당의 첨탑 근처로 날던 새를 보다 문득 깨달았다.



뭐, 괜찮습니다. 다 지난 일을요.



일부러 말투를 흉내내며 허공에 뱉어 보았다. 금방 헛헛하고 면구스러워져서 초콜릿 포장지를 구겨 쥐었다. 느리게 먹을 것을, 속이 어쩐지 좋지 않았다. 푸르르 고개를 흔들고 하늘을 멀리 올려다 보았다. 첨탑 근처의 새는 사라지고 없었다. 구름의 흔적이 그 대신인 양 이지러져 있었다. 준호는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는 난분분히 떠도는 꽃잎을 상상했다. 지난 봄에 눈이 많이 오지 않았으니 흩날리는 것은 꽃으로 족하리라 싶었다. 그는 문득 웃음을 흘렸다. 미소기를 지우지 않은 채 일어나서 가방을 도로 메고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크게 숨을 삼켰다가 내뱉었다. 나무와 풀 향이 뒤엉키자 속이 조금씩 편해졌다. 봄의 냄새인 줄 깨닫자 얼굴색이 조금 더 밝아졌다. 가방을 고쳐 쥐던 그가 다친 손을 한 번 털었다. 고작해야 새끼손가락일 뿐인데 어째 영 불편한 것이, 어깻죽지까지 근질근질한 착각마저 들었다. 그러나 물어뜯기고 부러진 상처도 길어야 몇 달이면 나을 터였고, 붕대를 벗고 새 살이 돋아 퉁퉁 불고 땀내나는 맨살을 금방 다시 볼 수 있을 것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나은 살이 또 언제 다칠지는, 알 수 없었다. 그는 한 손으로 쥐고 있던 가방끈을 단단히 어깨에 걸치곤 걸음의 속도를 바삐 했다. 사제관의 편백향을 맡으며 제 키에는 조금 좁은 침대에 드러누워 책을 읽고 싶었다. 아직 순이 돋지 않은 가로수가 걸음과 바람 따라 사제의 얼굴에다 제각기의 그림자를 그려냈다. 입에 단내가 남아 있었다. 침이 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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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초식이 좋아요. 거기 계셔 주셔서 고마워요. 신부님은 항상 제 기도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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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배범신 단문] 역광


적나라하지는 않지만 대략적인 성애묘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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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신은 내려깔았던 눈을 뜬 뒤 성호를 그었다. 형배는 그의 맞은편 의자에서 다리를 꼬고 앉은 채 담배를 막 피워 문 터였다. 여관방의 창 밖으로 새 그림자가 후두둑 지나갔다. 옆방에서 켜 놓은 티비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기도할 때부터 살금살금 들리던 앵커의 목소리는 김일성의 사망 소식을 몇십 분에 걸쳐 다급하게 전하고 있었다. 범신은 묵주를 정리해 넣곤 형배의 입에 물린 담배를 집었다. 그대로 제 입으로 가져가 두어 모금을 빨고 뱉는 동안, 형배의 시선이 범신의 로만칼라에 머물렀다. 그의 눈빛을 읽은 범신은 로만칼라를 손끝으로 잡아 늘리고 싶었으나 애꿎은 담배만 고쳐 쥐었다. 형배가 새 담배 하나를 꺼냈다. 범신이 담배를 문 채로 형배에게 고개 숙였다. 불 붙인 담배 끝에서 새 담배로 불이 이어 붙었다.


“성당은 언제 가노?”

“두 시간 뒤에 출발하려고.”


말을 꺼내 놓자 금세 피로가 밀려 와 어깨를 두드리고 고개를 꺾었다. 이제 성당에 부임된 지 2년 지난 젊은 신부는 할 일이 많았다. 지역에선 제법 큰 성당에 본당신부를 제외하면 범신이 혼자였으니 그럴 만도 했다. 신부가 부족한 시기였다. 제법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범신이 들어간 곳은 내내 일이 쌓여 있었다. 범신은 피로를 감추지 않았고, 때로 최형배를 만나는 것으로 쌓인 피로를 풀어냈다. 그와 몸을 섞거나 사소하게 말싸움 하는 일이 좋았다. 무엇보다, 구마 직후 너덜너덜해진 마음을 끌고 찾아가더라도 아무 것도 묻지 않아 주는 점이 고마웠다. 범신이 형배의 정수리에 손을 올렸다. 깨끗하게 빗어넘긴 머리칼을 흐트러뜨리고 싶은 충동을 참고 뒤통수를 쓸어 주었다. 형배가 입 속에 연기를 머금은 채 그를 올려다 보았다. 제 정수리를 멋대로 쓸고 만지도록 내버려 두는 자가 몇인지, 저와 동갑인 신부가 알 리 없으리라 여겼다. 다시 새 그림자가, 이번엔 두어 마리가 지나갔다. 흰 범신의 얼굴 절반에 그림자가 빠르게 스쳤다. 형배가 손을 들어 그의 귀를 어루만졌다. 범신이 살짝이 인상을 구겼다. 밤에 얼핏 보았던 귀 근처 상처가 햇볕 아래 확연히 보였다. 며칠 지방에 다녀온다더니, 이전 본 적 없던 상처였다. 


“두 시간 동안 뭐 하꼬?”


형배의 물음에 범신의 깨끗한 아래턱이 말을 뱉을 듯 말 듯 움직였다. 그리고 뒤통수에 손 댄 그대로 입술을 가져왔다. 금세 혀가 엉켰다. 범신의 손이 형배가 앉은 의자 팔걸이를 더듬었다. 다른 한손은 등받이를 붙들었다. 한참 숨이 섞이고 나서 범신이 먼저 몸을 일으켰다. 그는 형배를 쳐다보지 않고 안경을 꺼내 썼다. 머리를 쓸어 넘겨 정돈하고, 단추가 잠긴 것을 확인하며 깃을 정리했다. 다시 로만칼라를 잡아끌고픈 짧은 충동. 수단 아래는 최형배가 남긴 순흔이 아직 선연할 터였다. 


“아니, 그냥 일찍 갈래. 나 좀 태워 줘라.”


여관방 건너를 지키고 있을 녀석을 부르려는 것인지, 범신의 말이 끝나자 형배가 의자 옆 방문 쪽으로 고개를 꺾었다. 범신이 고개를 저었다.


“창우 말고, 네가 데려다 줘.”


형배의 미간이 살풋 구겨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여관방으로 들어오는 햇빛은 역광으로 바뀌어 있었다. 더 희어 보이는 범신의 얼굴이 불안정했다. 형배가 그의 손목을 붙들었다. 소스라치게 놀라는 모습을 보고 형배의 눈이 순식간에 사나워졌다.


“김범신.”

“니가, 데려다 줘.”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형배는 그러나 그의 시선을 좇았다, 제 무릎과 의자와 다시 마룻바닥, 그리고 의미 없는 허공을 헤매는 정인의 눈동자를.











차에 타고서도 범신은 말이 없었다. 창가에 기댄 머리칼이 언제나처럼 말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안경테가 날카롭게 빛났다. 형배는 범신의 안경을 싫어했다. 안경 낀 범신은 오롯한 성직자였다. 입을 맞추거나 살을 맞댈 때 좀처럼 끼지 않던 안경이 얼굴에 자리 잡으면, 그가 아는 동갑내기의 김범신은 베드로 신부의 모습으로만 남았다. 형배는 자신이 범신을 오역하고 있다 믿었다. 이따금, 범신을 읽는 일은 배운 적 없는 단어로 이루어진 문장을 더듬는 것 같았다. 그는 범신을 떠올리고 설명할 수 있는 몇 개의 단어들이 그의 안경 빛 아래로 사라지는 기분을 혐오했다. 차 속도가 빨라졌다. 운전이 거칠어짐을 눈치 챈 범신이 짜증 섞인 투로 형배를 바라보았다. 길에서 죽기 싫다는 말이 입끝까지 올라올 때에야 차는 신호등 앞에서 멈춰서고, 오전의 햇빛만큼이나 먹먹한 침묵이 가득 들어찼다. 형배가 라디오를 켰다. 아니나 다를까, 라디오에서도 김일성의 사망 소식이 쨍한 목소리로 흘러나왔다. 다시 라디오를 끈 것은 형배가 아니라 범신이었다.


“주말에 성당 와라.”

“내가 뭐한다고 거기 가노?”

“미사 끝나고 오라고. 저녁에.”


형배는 잠깐 대답이 없었고, 그의 옆얼굴을 보던 범신이 헛웃음을 픽 흘렸다. 다시 차가 움직였다. 성당의 첨탑이 보이기 시작했다. 형배는 그제야 등이 따갑게 가려운 것을 느꼈다. 밤 내내 사납게 긁어대었던 제 등 위의 손톱을, 시야 너머 있었을 범신의 사나움을 상상하자 아랫배께에서 경박한 즐거움이 고개를 쳐들었다. 그는 한 손으로 핸들을 잡은 채 다른 손으로 넥타이를 늘어뜨렸다.


“토요일에 가꾸마.”


차가 멈추고, 범신은 인사도 입맞춤도 없이 내렸다. 뒤라도 돌아봐 주면 좋으련만, 형배는 가려운 등을 시트에다 깊게 묻고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수단 입은 검은 등이 조금씩 작아졌다. 강단 있는 걸음은 느린 법도, 멈춰서는 법도 없었다. 제게 올 때에 그랬으니 벗어날 때에도 마찬가지라 생각 들자 형배는 비죽이 웃었다. 잠이 모자라고, 담배가 고픈 오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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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1. 6. 22:11

형배범신 중년부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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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국연

중년 부부 형배범신


* 약한 정도의 수위묘사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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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 째 눈이 오더니 형배네 집앞은 쓸지 않고는 걸을 수도 없게 쌓였다. 범신은 2층 3층에 사는 젊은 애들에게 윽박이라도 지를까 싶어 건물 창문들을 노려보았다. 형배가 1층에 사는 작은 3층짜리 주택에 집주인은 도통 오는 법이 없었으며 2층과 3층에는 젊은 대학생, 회사원들이 사는데, 같이 사는 건물에 어린 놈들이 비질 하나 인색한 게 매번 속상했다. 형배마저 바지런한 성격이 아니라 필시 올라오는 경사길을 저는 다리로 걷다가 몇 번 넘어지기도 하리라, 생각하면 울화통이 터졌다. 범신은 담배 필터만 애꿎게 씹다가 던져 버렸다. 낮게 욕을 씹어 뱉었다. 걸음을 헤매던 그는 결국 언덕 아래까지 조심조심하게 도로 내려가 철물점에서 청소 빗자루며 삽을 사 들고 걸어왔다. 기어이 얼음을 깨고 눈을 쓴 뒤 제설 모래까지 뿌려 놓았다. 뭉툭한 손 마디마디가 때묻고 붉어졌다. 그는 얼얼한 손을 주무르곤 화단에 주저앉아 담배 한 대를 더 피웠다. 형배가 오려면 그래도 십여 분을 더 기다려야 했다. 그가 공장에 갔다 오는 날이면 이렇게 밖에서 기다리는 게 버릇이 되어 있었다. 언젠가 형배가 비밀번호도 알려주었겠다 왜 미련하게 밖을 지키고 섰냐고 했을 때 범신은 그의 눈을 보잖고 툭 던지듯 대답했다. 너 없는 방에서 내가 뭘 하냐. 청승맞게. 


담배를 참고 기도 올리는 동안 형배가 저 아래서 걸어왔다. 절뚝, 절뚝 지팡이를 땅에 꽂으며 걷는 걸음이 버스 정류장 내려 10여 분, 아니, 저는 걸음으로 20분은 넘었다. 하늘은 해가 져서 벌써 어둑했다. 범신이 느린 걸음으로 다가갔다. 그의 손에 들린 비닐봉투를 받아들었다. 


"늦는다 싶더만 뭘 또 사 왔냐."

"니 온다 캐가 소주나 사왔지."

"좋은 거 좀 사오지."

"새끼, 카믄 니가 사오든가."

"다리병신 새끼가 마트까지 갔다 오느라 수고 많았다."


김신부가 비죽이 웃었다. 똑같은 웃음이 형배의 얼굴에 마주 떴다.







교자상에다 라면 냄비를 올려 둔 김신부는 탁상 앞에 앉은 형배의 굽은 등을 바라보았다. 또 웅크리고 뭔갈 적고 있었다. 공장에 다니기 시작한 뒤로 형배는 작은 수첩을 사서 뭔가 적기 시작했다. 끄적이는 뒷모습을 보고 어깨너머로 시선을 던지면 팩하니 덮고 괜한 역정을 내는 꼴이 우스워서, 김신부는 구태여 뭘 적느냐 묻진 않았다. 그래 보았자 나이 들고 적적해서 적는 일기나, 장 볼 거리나 그런 거겠지 하고 넘겨 짚었다. 


"뭘 해? 술이나 먹지."


하고 보채자 형배는 그제야 느릿느릿 몸을 돌렸다.


공장 일은 쉽다고 했다. 떡이 되도록 피흘리고 주먹질 하는 거, 이제 나는 몬한다. 마, 여기서는 배리어만 째깍 맞추믄 되고, 잘몬해가 혼나면 혼이 나믄 되고. 누캉 와가 내한테 뭐라 카는 사람도 없고. 뭣보담도 씨잘데기 없는 정치질 안해도 된다 아이가. 김신부는 술잔을 들여다보며 말하던 형배의 얼굴을 보고 깊이 안도했다. 녀석을 처음 만났을 때가 부제 과정 밟고 있을 때였으니 이제 햇수로 25년이었다. 공장에 나간 지 일주일 넘어 집에서 소주를 마시며 보았던 형배의 얼굴은 김신부가 보았던 그의 얼굴 중 가장 편안해 보였다.그는 서른 초반의 형배를 기억했다. 독기가 바짝 올라 피 냄새에 헐떡대는 들개 같은 모습이었다. 그때 범신은 쉽게 부서질 것 같던 그의 모습을 동정했다. 누군가 건드리면 산산조각이 나고 날을 세워 피아를 모두 찌를 것 같던 최형배를 진심으로 동정했다. 그때 비해 최형배의 날이 무뎌졌나 묻는다면 범신은 결코 아니라 대답할 터였다. 무뎌진 게 아니었다. 나이 들고서 감추는 법을 배웠을 뿐이었다. 형배가 자세를 고치자 빈 소주병이 두어 개 걸려 넘어졌다. 그가 허벅지를 손꿈치로 꾹꾹 눌렀다. 몇 년 동안 통증이 조금씩 자란다 싶더니 급기야 그는 절기 시작했고, 어떤 밤에는 통증으로 깨기까지 했다.


"다리는?" 


김신부가 턱짓으로 물으니 형배는 가볍게 웃었다. 


"평소랑 같지. 약을 묵어도 이제는 안 듣는다."


소주를 먹고 둘은 오랜만에 몸을 섞었다. 범신은 숨을 삼키며 형배의 머리칼을 손가락 새 감아 쥐었다. 많이 길어 있는 머리칼 사이 새치가 언뜻언뜻 비쳤다. 범신의 발 끝에 밀어둔 교자상이 걸려 규칙적으로 덜걱거렸다. 그는 형배의 목덜미에 코를 묻었다. 이 냄새가 좋았다. 매캐하면서도 몸이 편해지게 하는 최형배의 몸냄새는 25년 전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섹스중에 이 냄새를 맡으면, 범신은 마음이 깊게 가라앉았다. 최형배를 곁에 두고, 만지고, 안고, 안기면, 평소보다 한 층계 더 아래로 가라앉는 기분이 들었다. 


젊을 적의 둘은 각자의 싸움을 마치고 피투성이로 만나 마주앉은 채 함께 상처를 치료해 주곤 했다. 상처 위에 상처가 덮이고 몇몇 자국은 흉으로 남을 때쯤에는 어찌 다친 것인지 서로 묻지 않은 채 붕대를 감아주고 등의 자상 위에 연고를 발라주었다. 여관방에서 만나 서로의 몸에 붕대를 감기고 다시 그 위로 피가 배어나올 때까지 불 붙인 듯 섹스를 하고 나면, 같은 침대에 나란히 누운 둘만이 느낄 수 있는 하나의 선이 생겼다. 처음으로 구마사제가 된 후 내내 잠을 자지 못하던 범신은 그를 만난 뒤부터 간간이 꿈을 꾸지 않고 잘 수 있었다. 남의 상처에서 위로 받는 일을 고해하고 싶은 감정은 없었다. 그것은, 위로보다 조금 더 깊고 둥근 형태를 띠고 있었다. 


씻고 나온 형배가 범신에게 티셔츠를 던져 주었다. 범신이 그것을 받아들고 런닝셔츠 위에 덧입었다. 나이 들수록 형배의 몸집은 점점 더 커졌으므로 그의 옷은 범신이 입으면 품이 남아돌았다. 형배가 창문을 열고 옆에 기대 섰다. 범신이 옆에 다가섰다. 한 라이터 불로 둘의 담뱃불이 동시에 타들었다.


"성당 좀 나와라."

"됐다. 구찮구로."


오래도록 버릇처럼 한 말이었으므로 더 보채고픈 마음은 없었다. 둘은 말없이 담배를 태웠다. 눈이 그친 뒤라 별이 보일 만큼 밤하늘이 맑았다. 약속한 것마냥 둘의 꽁초는 모두 필터 끝까지 바짝 타들어가 있었다.


형배가 잠든 뒤에 범신은 먹은 자리를 대강 치우고 기도를 올렸다. 이부자리를 펴는데 형배의 수첩이 눈에 띄었다. 잠든 그의 얼굴을 보던 범신이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수첩을 펼쳐 들었다. 맨 앞장에는 형배의 번호가, 그 바로 뒤에는 범신의 번호가 이름과 함께 적혀 있었다. 어쩐지 보호자가 된 기분에 범신은 비죽이 웃었다. 빈 두어 장을 넘기자 두부, 계란, 라면 따위의 장 볼 목록이 휘날린 글자로 써 있었다. 다시 한 번 피식 웃었다. 몇 장을 더 넘기던 범신의 눈이 돌연 커졌다. 기도문이 형배의 글씨로, 그것도 정성들여 눌러 쓴 글자로 몇 장을 빼곡이 채우고 있었다. 대부분 그가 많이 아프거나 위험할 때 해주었던 기도였다. 25년 간 못 만난 때도 많았으나 만날 때마다 읊어댔으니 외울 만도 하잖느냐고, 그를 타박했던 게 후회가 되었다. 이걸, 정말 외우고 있었단 말인가. 작게 소리내어 푸스스 웃어 버렸다. 그는 수첩을 도로 놓아두곤 형배의 곁에 앉았다. 허벅지 위에 손을 올리고 천천히, 깨지 않을 만큼 부드럽게 주물러 주었다. 어슴푸레한 중에 범신의 묵주반지가 빛났다. 형배가 잠결에 끙, 끙 소리를 내었다. 범신이 입속으로 몇 마디 짧은 기도문을 읊었다. 바람이 부는지 창틀이 작게 덜걱거렸다. 둘이 먹다 남은 라면이 싱크대 속에서 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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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국연

형배범신 교도소에서 만나는

새 신부가 부임되었을 때는 1997년의 한여름이었다. 밖은 한보사태 이후의 연이은 대기업 부도로 매우 시끄러웠고, 한보와 연결되어 있던 연줄 또한 한둘이 아니었으므로 교도소 또한 겨울부터 내내 분위기가 어수선했다. 


새로 오는 신부는 성질이 더럽단 소식이 있었다. 근데, 그래봤자 신부 새끼 아닙니까, 형님? 빳데리가 형배에게 비죽이 웃으며 이야기했다. 수녀는 안오나? 그럼 나두 착실히 성당 나갈 건데. 운동화 속 모래를 털던 일칠칠이 녀석 뒤통수를 갈기며 미친 놈이라고 욕을 퍼부었다. 시끄럽다, 하고 형배가 돌아눕자 녀석들은 서로 어깨를 부대끼고 눈짓하며 운동장으로 걸어갔다. 벌써 차가 도착하고 있었다. 공을 차던 죄수들이 정문으로 걸어들어오는 신부를 흘끔흘끔 구경했다. 몇몇 놈들이 돌연 괴성을 질렀다. 외부인이 오면 으레 하는 행사였다. 그늘에 홀로 누워 있던 최형배가 상체를 느지막이 일으켰다. 운동장 왼쪽 통로께, 긴 수단자락이 철망 너머로 보였다. 형배가 다시 드러누웠다. 가벼운 갈증이 일었다. 등이 땀으로 축축하고 모래 냄새가 콧속에 그득했다. 한여름에 시커멓게 긴 신부복이라니. 


베드로 김범신은 눈을 내려깐 채 죄수 중 어느 누구에게도 시선을 맞추잖고 걸었다. 키에 비해 성큼성큼 큰 걸음 따라 수단 아랫자락에 모래가 엉겨붙었다. 해가 사나웠다. 범신은 본건물의 입구로 들어가기 전에 멈춰서서 성호를 그었다. 갑작스런 그늘에 눈이 아려 안경을 고쳐썼다. 외딴 곳에 있는 이 교도소는 젊은 베드로에게 마치 거대한 성 같이 느껴졌다. 










죄수들의 땀내는 살이 썩을 때 나는 그것과 비슷했고 욕을 섞으며 떠드는 말들은 사령의 그것과 비슷했다. 범신은 정신부를 떠올리며 비죽이 웃었다. 너, 거기 가서 괜한 성질 부리지 말어라. 사나움에 물들지 말어. 정신부의 타박을 웃어넘겼다만, 이 정도여서야. 교탁 앞에 선 범신은 성서를 내려놓고 죄수들을 바라보았다. 도무지 조용할 것 같지 않은 그들에게 간수가 빽 소리를 질렀으나 요지부동이었다. 범신은 강단을 내려왔다. 맨 앞줄의 죄수들을 하나씩 눈여겨 보며 훑듯이 느리게, 맨 좌측의 좌석부터 우측까지 걸었다. 범신이 앞에 오자 몇몇 죄수들은 망측한 손짓까지 해보였다. 맨 우측 좌석까지 훑은 범신은 다시 강단으로 올라섰다. 교탁 위 성서를 집어들곤 교탁을 발로 차서 넘어뜨렸다. 와장창, 나무 부서지는 소리에 몇몇은 놀랐고 몇몇은 환호성을 질렀다. 


뭐가 재밌냐, 씨발새끼들아? 


범신의 첫마디에 좌석 사이사이 질려 하는 눈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쓰레기 같은 새끼들, 그리고 다시 좌석을 쳐다보았다가, 손에 든 성서를 펼쳐들고 주머니에서 묵주를 꺼내었다. 짧은 한숨, 그리고 능청스럽게도 깨끗해진 얼굴의 범신이 앞을 바라보았다. 표정 하나 변하지 않는 새하얀 얼굴이 재밌어서 형배는 비죽이 웃었다. 











상담 안 받습니다. 


눈도 안 맞추고 말하기에 조금 울화통이 일었다. 형배는 바지에 손을 찔러넣은 채로 범신의 걸음을 따라 강당을 나섰다. 두어 걸음을 둔 채 복도를 함께 걸었다. 창문 너머로 해가 들어와 범신의 발꿈치마다 뽀얗게 이는 먼지들이 보였다. 그의 검은 수단은 흠집 하나 없다 싶게 말끔했다. 신부님, 부르자 예, 대답은 하길래 또 속으로만 비죽이 웃었다. 말없이 따라 걷기만 하는데 갑자기 범신이 멈춰서선 뒤를 돌아보았다. 형배가 함께 멈췄다. 그제야 형배는 범신의 얼굴을 똑바로 볼 수 있었다. 뭡니까? 묻는 갈색 눈에 독기가 어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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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조윤] 연



관상 수양...(ㅅ ㅔ 조)과 조윤입니다.....












왕은 이따금 제 것의 손톱을 손수 깎아 주었다. 무릎에 앉히고 느긋하게 또각, 또각, 소리를 내고 있으면 윤의 손은 무관의 것 답잖게 길고 부드러워서 한참 들여다보곤 했다. 이대로 사납게 휘어잡아 꺾어 버리면 다시 검을 잡지 못하리라. 묘하게 삐뚤어져 올라오는 정복욕은 차마 숨지 못하고 입가에 웃음으로 드러나 머물렀다.

"좋은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윤이 고개를 틀어 위를 보며 물었다. 아침댓바람부터 왕에게 안기고 뒤엉킨 뒤, 맨 몸에 곤룡포를 걸치게 하고 침소에 앉혀 놓아도 그는 부끄러움을 모른 채 오히려 야살스레 웃어 보이곤 했다. 왕은 버릇없게 치켜 올라가는 윤의 눈매를 마음에 들어 했다.

"고양이가 분수를 모르고 주인을 할퀴어대니 내 손이 바쁘구나 싶어서 웃었다."

윤은 손을 왕에게 맡긴 그대로 자세만 조금 고쳐 앉았다. 그의 몸에 걸친 곤룡포가 멋대로 구겨졌다. 왕은 제 어깨에 기대는 윤의 볼 온기를 느끼고 내려다보았다. 벌어진 옷깃 새 판판하게 근육 잡힌 가슴만은 무관의 것이 맞았다. 왕은 윤의 손톱을 깎아주던 가위를 내던지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를 안아올렸다. 갑작스런 동작에 곤룡포 자락이 늘어져 윤의 속살이 모조리 드러났다. 계집아이를 안아드는 것 같은 형국과 다를 바 없었으나 윤은 오히려 즐기는 듯이 왕의 목에다 팔을 감았다.

"전하께서 제 주인을 자처하신단 말씀이십니까?"
"내가 네 주인이 아니면 무엇이냐?"

윤은 왕의 말에 불편한 심기를 감추고 시선을 피했다. 크고 곧은 발걸음으로 주군이 걸어 나가자 나인들은 놀라 소스라치는 손으로 바삐 문을 열어주었다. 감히 마주하지 못하고 고개 숙인 사이로 걸어, 급기야 앞뜰까지 나간 왕의 차림새는 간소한 천 몇 장 뿐이었다. 윤은 왕의 턱을 바라보았다. 어디로 가는지, 옷도 제대로 입히지 않은 저를 이대로 둘 것인지 날을 세우고 물을 수도 있었다. 감히 주군에게 물음을 던질 수 있는 몇 안 되는 자가 자신이란 사실을 윤이 모르는 바 아니었다. 그러나 윤은 눈을 느리게 깜빡이며 성큼성큼한 왕의 걸음에 맞춰 느긋이 몸을 맡길 뿐이었다. 제 몸에서 흘러내린 곤룡포 자락이 흙에 닿지 않도록 한 손만 끌어내려 살며시 잡아당겼다.

왕이 그를 데려간 곳은 침소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작은 뜰이었다. 낮은 나무들이 자라고 작은 연못이 있었으며, 인적이 드문지 뜰을 관리하는 정원사도 이곳만은 멋대로 풀을 자라게 놓아두고 있는 듯했다. 왕은 윤을 연못가 바위 위에 내려 주었다. 계절꽃이 손 닿으면 뻗을 곳에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어떤 것은 붉고 어떤 것은 노랬으며 색은 잡풀 사이에 뒤엉켜 있었다. 순서도 규칙도 없는 뜰이었다. 윤은 발을 뻗어 엄지 끝으로 연못 수면을 살짝이 건드려 보았다. 평화가 깨진 작은 벌레들이 혼절하듯 도망가는 것이 보였다. 왕은 그의 뒤에 섰다. 멋대로 흘러내린 곤룡포를 어깨까지 추켜 올려주고, 목덜미에 입을 맞추었다. 윤이 허리를 조금 휘었다. 몸을 맞닿은 그대로 왕은 윤의 상투에 손대었다. 그대로 풀어 버렸다. 치렁치렁한 긴 머리가 물결을 잠깐 그려내며 흩어졌다. 다 자란 사내의 머리칼인데도 곱고 보드라왔다. 왕의 큰 손이 그의 머리를 빗겨주기 시작했다.

"네가 계집이었으면 궁에 들여 내 아이를 낳게 했을 터인데."

윤은 왕의 말에 앞을 본 채 웃었다. 왕에게 보이지 않을 것을 알기에 지을 수 있는 웃음이었다.

"아쉬우십니까."

왕은 고개를 저었다. 그 역시 윤에게 보이지 않는 바 알고 한 행동이었다. 손 끝에서 새로 만든 상투가 곱게 올라가 정수리에 자리잡았다.

"아쉬울 것이야 있겠느냐."

왕의 말에는 많은 것이 내포되어 있었다. 윤은 묘한 공포감에 소름이 잘게 돋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등에 맞닿은 살갗만은 마음과 달리 달아오르고 있었다. 눈치 챈 왕이 그의 턱을 뒤로 잡아끌었다. 섬세하지도 다정하지도 않은 손짓이었으나 윤은 이내 겹쳐오는 입술에 눈을 내려깔았다. 까슬한 수염이 스쳤다. 귀한 이의 숨이 엷은 윤의 입술 위에 한참 달뜨게 머물렀다.

"윤아."

왕이 부르는 이름은 묵직한 저음이어서, 맞닿은 윤의 몸까지 찌르르하게 울렸다.

"내가 무서우냐?"

윤은 왕의 말 앞에 '너도'라는 말이 빠져 있음을 영민하게 깨달았다. 그는 주군을 마주하고 기꺼이 웃었다. 꾸며낸 기방의 웃음 같은 것과 달리 진짜로 눈을 휘며 웃는 모양새였다. 손을 올려 용안을 쓰다듬었다.

"무서울 것이야 있겠습니까."

이번에는 윤이 먼저 입술을 가져갔다. 숨이 뒤엉키는 동안 바람이 꽃잎을 몰고 불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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