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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킨-기타

[엘로마글] 용과 계약자 AU (커미션)

팥님께서 커미션 주신 엘로스 x 마글로르 용(마글로르)과 계약자(엘로스) AU입니다!

배경 및 컨셉은 팥님께서 설정해 주신 것을 기반으로 합니다.


애매하게 끝내기가 거시기해서 뒤이어 쓸지도 모릅니다.....언제 쓸지 모르지만...요.....

애컾 커미션은 언제나 즐거워요ㅠㅠㅠㅠㅠㅠ 진짜 행복하게 썼습니다! 앵슷 배틀호모 역키잡 엘로마글 파세요 여러분!
















어지럼증은 쉽게 와서 깊게 머물렀다. 밤이 되면 버릇처럼 헛구역질이 났다. 용의 둥지에 발린 독은 그렇게 독했다. 갓 성년을 앞둔 아이가 견딜 수 있을 만큼 녹녹한 것이 아니었다. 어른들도 대부분 이 독을 견디지 못하고 계약자가 되길 포기하거나, 며칠 앓아눕기 일쑤였다. 엘로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일 용의 둥지를 찾아갔다. 부모가 있었다면 말렸을 것이고, 형제가 있었다면 걱정했을 터였으나 엘로스에게는 발에 채일 것이 없었다. 그는 단 하나만 생각했다. 용의 단단한 목덜미, 물빛 비늘로 덮인 몸체에 거대한 호박석 같은, 그 끔찍하게 아름다운 황금색 눈. 나의 용, 아름답고 성스러운 마글로르.


용은 무리를 짓지 않는다. 그리고 마리당 하나의 둥지를 가진다. 그것이 법칙이었다. 이 땅의 몇몇 군데에 용의 둥지가 있었고 마글로르가 가진 둥지는, 둥지라고 부르기는 했으나, 돌로 만든 성채에 가까웠다. 성의 모습을 띠고 있으나 화려하지 않았고, 큰 벽과 높게 솟은 지붕 탓에 아름다움보다 위용이 앞섰다. 이 기세를 두려워 해서 대부분의 인간은 그 근처에 다가가는 것을 꺼렸고, 그나마 발을 들인 자들은 성벽에서 뿜어져 나오는 독 탓에 아파했다. 마글로르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이겨내면 용의 계약자가 될 수 있었다. 혼으로 맺은 서약은 계약자에게 힘을 주었다. 오직 용을 차지하는 자만이 가질 수 있는 힘이었다. 


엘로스는 용의 둥지를 둘러싼 숲을 좋아했다. 고즈넉한 이곳만은 위험과 거리가 멀어 보였다. 풀 비린내와 작고 작은 것들이 내는 악의 없는 기척, 사소한 생의 소리들, 샌달 신은 맨 발등 위로 튀어 오르는 촉촉한 흙의 부드러움. 나뭇잎 사이로 올려다보면 저 멀리 용의 둥지가 있었다. 


그는 처음 이 숲에서 마글로르를 만났을 때를 기억했다. 일 년도 더 전이었다. 이곳의 흙을 밟다 익숙지 않은 기척에 온 감각을 세우고, 허리춤에 찬 단검을 뽑고,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다시 몇 걸음 걷고서야 그는 제가 들은 게 노랫소리임을 깨달았었다. 큰 키를 가진 남성에게서 나오는 것이라 믿기 힘들 정도로 청량한 목소리에 엘로스는 홀린 듯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고, 한 마디를 차분히 다 부른 후에야 천천히 돌아선 그의 턱과 목덜미, 검고 긴 머리칼, 아래로 살며시 내려깐 황금색 눈동자를 마주하고는 굳어 버렸다. 비록 온전한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으나 온몸에 흐르는 신비로움이나 사람과 다른 광채의 피부를 보고 엘로스는 그가 용족임을 알 수 있었다. 비늘과 날개가 달린 성체로 있지 않고 인간의 모습을 한 용족을, 익히 들어 알고는 있었으나 실제로 처음 보는 것이었다. 경이로움에 몸이 굳고 입술이 동그마니 열렸다. 마글로르는 손가락을 들어, 살며시 제 입술에다 가져가 보였다. 


"화답가를 들어 보고 싶지 않나요?"


화답가? 엘로스는 영문을 모르고 눈을 끔벅댔다. 마글로르가 가까이 오란 손짓을 했다. 손가락 끝을 보며 홀린 듯 다가갔다. 엘로스는 기억했다. 눈을 감아 보라는 그의 말, 눈꺼풀을 내려 감자마자 들려오던 새 소리들, 나뭇잎 스치는 소리들, 그리고 제 손에 닿아 있던 용의 차갑고, 부드럽고, 촉촉하던 손가락. 엘로스는 또한 기억했다. 화려한 금안과 그 위를 덮던 가느다란 속눈썹들, 눈꺼풀, 하얀 콧등, 멈춘 시간. 내 몸에 당신의 문신을 새길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각오. 


그러나 용과의 계약은 결코 녹녹치 않았다. 엘로스는 그 날 이후 마글로르를 제 용으로 만들기 위해, 독에 고통스러워하면서도 매일 같이 용의 둥지를 찾았다. 계약의 시기는 오로지 용이 정하는 것이었고, 계약자가 될 자는 그 전까지 용과 함께 훈련했다. 이 시기에 용이 사람에게 전수해 주는 것은 용족어와 몇 가지 간단한 체술, 그리고 용의 힘을 받아 쓰는 방법이었다. 자격이 갖추어지면 계약의 시기가 정해졌다. 그러나 계약의 날은 둘의 대면 후 다음 날일 수도 있었고 혹은 기한 없이 미뤄질 수도 있었다. 


엘로스는 요즘 안달 나고 있었다. 제 마음대로 계약의 시기를 정할 수 있는 게 아니건만 자꾸 마음이 갑갑해지고 화가 났다. 하루에도 몇 번씩 물음을 삼켜야 했다. 인내하며 그를 바라보고 있자면 하얀 옆얼굴, 용족 특유의 은은한 피부 광채를 가진 뺨은 늘 아득하게 아름다웠다. 몸이 닿는 체술을 가르쳐 줄 때도 결코 서두르는 일이 없는 손짓과, 이야기를 하다가 습관처럼 내려까는 눈꺼풀 또한 마찬가지였다. 어른, 그것이 엘로스가 느끼는 마글로르에 대한 인상이었다. 온정과 부드러움만 가득한 듯하다가도 어느 때 보면 결연하고 묵직했다. 엘로스는 그의 무게를 탐냈다. 그가 제게 줄 힘은 분명 주인을 닮아 무겁고 따스할 터였다. 그 어느 것보다, 체감할 수 있는 온기와 그의 아름다운 용모보다 더욱. 마글로르의 둥지는 하얀 대리석으로 만들어져 들어오는 광채를 남김 없이 비추곤 했다. 어둠 또한 마찬가지였다. 날씨도, 밤낮도 이곳에서는 왜곡되는 바 없이 모든 것이 솔직했다. 엘로스는 이곳의 오후에 드리는 그림자를 싫어했다. 그림자가 내려온다는 것은 그 날의 훈련이 끝나가고 있다는 뜻이었고, 마글로르는 그의 심정을 아는 것인 양 가끔 해가 내려오는 오후에 노래를 불렀다. 노랫말은 용족어로 되어 있어 그가 알아듣기 어려웠다. 태양, 노을, 꽃 같은 쉬운 단어 몇 개만 따로 읽힐 뿐이었다. 종잡을 수 없는 가사마냥 그의 표정도 읽어내기 어려웠다. 늘 온화하게 떠올랐다가도 어딘가 날을 세우고 있는 것 같이 보이는 미소가, 그저 용족의 특성 중 하나인가 싶다가도 저도 모르게 그 위험성에 팔뚝에 자잘히 소름이 돋는 것이었다. 고개를 떨구면 대리석에 제 얼굴이 검게 비쳤다.


당신을 새기고 싶어요,

당신을 묶고 싶어요.


목 끝까지 차오른 말을 내뱉고 싶다가도 노을에 젖은 옆모습을 보면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마글로르는 한결 같이 아름다웠으며, 엘로스는 그를 조금씩 앓기 시작했다. 상사相思는 작은 파도 같았다. 그를 조금씩 적시며 상념의 해안을 줄게 하는 동시에 깊게 만드는 것이었다. 마글로르를 깊이 생각하는 딱 그만큼 엘로스는 여유를 잃었다. 


언젠가 그가 마글로르에게 물은 적 있었다. 만약 우리가 계약을 맺게 되면, 나는 당신에게 얼마나 오랫동안 머물 수 있나요? 마글로르는 예의 미소를 보이며 대답했다. 당신이 내게 머무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당신에게 의탁하는 것이지요, 당신이 허하는 만큼. 엘로스는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렸다. 용이 사람에게 의탁한다고요? 이 땅에서 가장 강하다는 당신들이? 마글로르는 가까이 다가온 엘로스의 어깨를 짚었다. 손바닥의 온기가 그에게 더웠다. 우리에 대해서 더 가르쳐 드려야 할 것 같군요, 엘로스.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엘로스는 제 어깨 위 놓인 손을 감싸 쥐었다. 제법 힘 있는 동작이었다. 모두 알려 주십시오, 부디. 눈이 빛났다. 총기가 가득했다. 











아이는 이따금 작은 자투리 보석이나 청동으로 만든 세공품을 둥지에 들고 왔다. 마글로르는 그게 무어냐고 물었고, 아이는 직접 만든 것이라며 때로 그의 손가락에 직접 반지 따위를 끼워 주기도 했다. 그것이 인간에게서 받는 선물이 처음임을 깨달았을 때, 제 손을 내려다보는 아이의 곧은 이마뼈와 눈썹에 정을 주지 않을 수 없었다. 고마워요, 하고 말하면 엘로스는 어김없이 웃어 보였다. 평소 잘 웃지 않는 아이였다. 그러나 가끔 휘어지는 눈꼬리며 다정하게 올라가는 입술이 나이답게 예뻤다. 마글로르는 아이가 제게 매달리는 것을 알았다. 집요한 눈빛이나 닿을 때의 손 끝에서 충분히 읽고도 남았다. 엘로스가 가까운 거리에서 저를 빤히 담아낼 때, 제 황금색 눈에 아이의 얼굴이 어떻게 비칠지 그는 늘 궁금해했다. 때때로 그는 아이의 고아한 재색 눈동자 뒤에 있는 어둠을 보았다. 나이답잖은, 혹은 그 나이다운 잔악함 또한 의도치 않고 읽었다. 부모가 어릴 때 죽었다고 했던가, 감히 추측할 수는 없었으므로 생각을 길게 잇지는 않았다. 


계약은 오래지 않아 이루어졌다. 엘로스는 몹시 고통스러워했다. 이종족의 힘은 몸 속을 부수고 다시 구축하길 반복했기에 그는 온몸의 구멍에서 체액과 피를 쏟으며 비명을 질러댔다. 원시적이고 솔직한 힘의 법칙이었다. 굴복하지 마십시오. 마글로르는 계약의 말을 입으로 읊으며 속으로 그리 타일렀다. 부디, 타이름이 들리길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가슴을 튕기고 허리를 휘며 고통스러워하는 계약자에게 용이 줄 것은 힘 외에 아무 것도 없었다. 깊게 엮어 잡은 두 팔이 덜걱댔다. 마글로르의 팔뚝께에 엘로스의 손톱이 깊게 박혀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그의 입에서 문장이 하나 끝날 때마다 엘로스의 등에는 문신이 한 가닥씩 나타났다. 마글로르는 그를 힘 줘 눌렀다. 엘로스는 반발하듯이 요동쳤다. 결국 마글로르는 그의 위에 올라탔다. 아이의 몸을 짓눌러 덮어 버렸다. 낯선 상황에 스스로도 모를 힘을 내뿜는 엘로스였으나, 저보다 작은 인간의 몸집을 제압하는 것쯤 마글로르에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여전히 팔딱이는 몸을 짓누르고 있는 동안 마글로르의 얼굴은 흐트러짐 하나 없이 의연했다. 요동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마글로르는 귀에 댄 속삭임으로 주문을 마무리 지었다. 귓바퀴에 입술이 언뜻 닿을 때마다 열기가 끼쳤다. 제 숨결도 함께 번졌다. 아이는 비록 숨이 끊어질 것처럼 고통스러워했으나, 이마저도 잘 견디고 있는 것임을 그는 알고 있었다. 비명이 줄어들고 숨이 제 박자를 고르게 찾아갔다. 마글로르는 몸을 일으켰다. 이 다음은 엘로스의 몫이었다.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이대로 눈 뜨지 못하리라. 그러나 아이는 그가 기다릴 틈도 주잖고 재색 눈동자를 도로 보여주었다. 마글로르는 빙긋이 웃었다.


"고맙습니다."


그것이 다시 눈 뜬 그에게 건넨 마글로르의 첫 마디였다. 잘 했다는 격려도, 괜찮냐는 물음도 아닌 감사의 말. 엘로스는 어두워지는 제 머릿속을 억지로 붙들었다. 의식의 끄트머리를 잡고 마글로르를 빤히 마주했다. 낯설었다. 그제야 제 용의 금안 위에 글자가 나타난 것을 깨달았다. 용족어로 된 계약의 말이었다. 그는 제 등에도 똑같은 문장이 새겨졌을 것을 알았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힘 풀린 다리를 끌어 거울 앞까지 걸어갔다. 몸이, 놀랍게도 가벼웠다. 맨 등을 거울에 비추자 아니나 다를까, 검정색 화려한 문양과 그 한가운데를 둥글게 두른 계약의 말이 새겨져 있었다. 엘로스는 다시 뒤돌았다. 가슴에 퍼지는 흥분을 주체치 못하고 제 용을 마주하곤 입술을 떨었다. 마글로르가 느린 동작으로 그의 앞에 무릎 꿇었다. 긴 로브 자락, 검은 천 위에 붉게 자수 놓은 끝자락이 흰 대리석 위에 넓게 퍼졌다.


"물과 바람의 말로 바위와 흙의 의지를 전합니다. 나의 계약자시여."


엘로스가 그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따스하고 달콤한 공기가 온 성 안에 흐르고 있었다.


"창공과 구름의 시간으로 불과 철의 힘을 섬기겠습니다. 나의,"


아주 잠깐, 검은 머리칼 새에 묻은 손 끝이 떨렸다. 날숨을 길게 뱉었다.


"나의 용이시여."


마글로르는 보았다, 아이의 한층 깊고 짙어진 눈을. 목적이 뚜렷한 손은 서슴지 않고 제 귓가까지 다가와 머리칼을 넘겨 주었다. 그는 엘로스가 제 오른쪽 동공을 따라 둥글게 새겨진 맹세의 글귀를, 용족어로 된 작은 글자들을 읽고 있는 것을 알았다. 계약자와 용의 결속이 짙어지면 글자는 더 선명해지고, 계약자가 가진 힘 또한 증폭된다. 계약자의 등에 새겨진 문신은 이제 둘의 모든 관계가 흔적 없이 끊길 때에야 사라질 것이었다. 마글로르는 손을 뻗어 제 계약자의 뺨을 쓸어 주었다. 옆을 지나쳐서 전면이 트인 발코니로 향했다. 발을 뻗을 때마다 창공에 가까워졌다. 마글로르의 성은, 이곳은, 몇 발자국으로 쉽게 하늘과 닿을 수 있는 곳이었다. 엘로스는 트인 하늘을 배경으로 한 그의 등을 바라보았다. 옷자락이 한 가닥 팔락이더니, 마글로르가 돌연 바깥으로 몸을 던졌다. 엘로스의 동공이 커졌다. 순식간에 발코니까지 달려갔다. 쨍한 바깥 햇볕에 눈썹을 손날로 가리고 밖을 겨우 더듬어 보는데, 커다란 날갯짓 소리와 함께 용의 모습이 아래서 위로 드러났다. 물빛 비늘이 햇빛을 그대로 반사해서 파도처럼 반짝였다. 거대한 성체는 그 크기에 맞도록 날갯짓마저 압도적이었다. 한 번 펄럭일 때마다 엘로스의 머리칼이 죄다 날릴 만큼 바람이 불었다. 성체의 눈동자는 여전히 형형한 호박색이었는데, 그 크기가 엘로스의 머리통만했으며 동공을 둥글게 둘러싼 글자는 더욱 선명했다. 마글로르는 날갯짓의 속도를 줄이더니 발코니 안쪽으로 들어섰다. 큰 발톱이 대리석 위에 사뿐히 안착할 때에는 소리도 거의 나지 않았다. 마글로르는 그의 앞에 머리를 숙였다. 땅에 배가 닿을 정도로 낮게 숙인 자세를 보고 엘로스는 제가 해야 할 일을 깨달았다. 그의 목 쪽으로 조심히 손을 뻗어, 누르고, 올라탔다. 그가 마글로르의 목을 껴안자마자 날개가 다시 움직였다. 순식간에 창공 한가운데를 가로질렀다. 엘로스는 숨이 막혔다. 온몸을 스치는 바람과 뺨을 식히는 높은 곳의 선선한 공기, 구름의 신선한 냄새, 그리고 모든 것을 스쳐가는 빠른 속도까지. 


"어디로 가는 거죠?"


있는 힘을 다해 소리 질렀으나 제 목소리도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바위산과 숲, 눈부시게 푸른 하늘, 모든 것이 작게 보였고, 또한 너무 빨랐다. 자칫 떨어지지 않을까 싶어 온 팔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위를 보십시오."


마글로르의 말에 엘로스는 고개 들었다. 시야 가득 하늘과 구름이 비쳤다. 창공은 때마침 몹시 맑고 환한 탓에 온몸이 푸름 속에 젖어 있는 것만 같았다. 처음 날아 본 하늘은 엘로스에게 바다처럼 광대하고 또 관대했다. 마글로르의 등은 결코 서툴거나 서두르지 않았다. 제 계약자를 얹고 나는 동안 흐트러짐 하나 없이 크게 펄럭이는 거대한 날개, 이따금 저를 확인하려 돌아보는 커다란 두 눈동자. 계약자가 된 첫날은 모든 것이 완벽하고 선연했다.


"당신에게 고백할 게 있어요."


상체를 바짝 숙여 마글로르의 목에 붙이며, 엘로스는 제 용의 비늘을 찬찬히 쓸어 보았다. 평범한 화살이나 검이 들어가지 않을 단단함, 직선을 그리며 겹겹이 뻗어 있는 물빛 비늘의 무늬. 이 견고함은 분명, 자신이 깨뜨리지 못하리라. 그는 말을 이었다.


"내 부모는 용족에게 죽었습니다."


잡은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으나, 마글로르는 대답이 없었다. 


"언젠가 내가 당신 목을 조를지도 몰라요."


여전한 침묵. 엘로스는 아랫입술을 깨문 채 오래도록 고개를 떨구고 있다가, 그의 목을 끌어안고 바싹 엎드렸다. 성체가 되었어도 체온은 여전했다. 당신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나는 당신네들에 대해서 아직도, 하나도 모르겠는데. 그는 고맙다고 말하던 마글로르의 말을 되씹었다. 왜, 당신이 나에게……. 옆으로 누운 창공을 보며 눈 감았다. 











마글로르의 둥지에 기르던 나무들이 노랗고 붉게 색을 입었다. 혼으로 이루어진 계약은 하나의 계절이 지나며 둘의 색을 입고 점점 깊어졌다. 엘로스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는 나무처럼 단단해졌다. 마글로르는 아이가 어른이 되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다. 엘로스는 힘을 받아들이며 순식간에 자랐던 것이다. 간혹 계약자에게 떨어지는 의뢰가 있었다. 용과 함께 해야만 해낼 수 있는 몇 가지 일은 때로 몹시 위험했다. 


깊은 계곡에서 의뢰를 받고 오크 떼와 싸우다 엘로스가 심하게 다친 날, 마글로르는 밤을 새워 가며 그의 곁에서 간호했다. 둥지는 멀고 불은 피우기 여의찮아서 그는 달과 별에 의존해 풀을 헤쳐가며 약초를 구해다가 직접 입으로 씹어 뭉개서 엘로스에게 먹였다. 피투성이가 된 엘로스는 도통 깨어나지 못하고 간간이 신음 비슷한 것을 희미하게 흘리기만 했다. 동굴은 어둡고, 주변은 음산했으나 마글로르는 의연했다. 몇 마리 맹수가 근처에서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무리를 지은 것을 보아 늑대인 것 같았다. 날 버리고 도망치시는 게 어떻습니까? 언제 당신을 배반할지 알지도 못하는데. 엘로스가 깨자마자 한 말에는 날이 잔뜩 서 있었다. 마글로르는 간단히 무시하고 대신 검을 뽑았다. 몇 마리가 감히 가까이 다가섰다. 늑대들은 이를 드러내고 눈을 빛내다가, 마글로르의 형형한 눈과 마주치자 점차로 뒷걸음질쳤다. 용족을 알아보는 것이었다. 지켜보는 눈들이 온전히 사라지고서 마글로르는 다시 엘로스의 곁에 앉았다. 동굴 밖을 보느라 등을 돌린 채였다. 


"용에게 주인을 버리라고 하시는 겁니까?"


엘로스는 헛웃음을 지었으나 마글로르는 웃지 않았다. 전에 없이 엄한 옆모습이었다. 무표정한 얼굴, 특유의 묵직함, 달빛에 어슴푸레하게 비친 뺨에는 용족 특유의 광채가 은은하게 감돌았다. 엘로스는 먹먹해졌다. 한참 침묵이 감돌았다. 벌레 소리, 나뭇잎 스치는 바람 소리가 연이어 들렸다. 풀 냄새가 동굴 안까지 번졌다. 엘로스는 길게 눈을 감았다 떴다. 오크에게 찔린 옆구리가 몹시 쓰렸다. 약기운이 돌고 마글로르의 성체에 올라탈 수 있는 기운까지 차리려면 새벽이 깊을 때까지 기다려야 할 터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바람은 잦아들고 풀 내음은 짙어졌다. 숲 새벽 특유의 습기가 나뭇잎마다 내려앉고 있던 터였다. 달이 선명하게 보였다. 어둠을 먹어대는 작은 구멍 같이 보이기도 했다. 위를 향한 엘로스의 눈이 한층 깊어졌다. 제 등 가득 새겨진 문신을 떠올렸다. 골똘하게 눈을 굴리다 마글로르, 하고 그가 불렀다. 


"고마워요."


작게, 그러나 힘 줘 내뱉었다. 마글로르는 그를 돌아보지 않았고, 엘로스 또한 그의 옆얼굴만 볼 수 있었으나 표정만은 선명히 알 수 있었다. 마글로르의 넓은 등이 동굴 밖으로 보이는 밤하늘을 반쯤 가리고 있었다. 엘로스는 다치지도 않은 무릎이 몹시 저린 것을 깨달았다. 뒤늦게 온 성장통이었다. 


다시 바람이 불었다. 밤이 맑았다. 별이 기울자 용의 노랫소리가 동굴을 벗어나 찬찬히 퍼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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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킨-기타

prince azure



성아님과의 연성트레이드로 쓴 어린 킬리 일상 이야기입니다!
성아님 트레이드 신청해 주셔서 감사해요 ^0^






삼촌이 없는 날은 모두 조용하다. 마치 그것이 법칙인 양, 누구나 원래 조용했다는 양. 산맥이 낮에도 어두운 양. 그런 날이면 어릴 때부터 나와 형은 방에서 나오지 않고도 지루함 달래는 법을 찾는다. 대부분 시시하다.

오랫동안 무두질을 하고 온 아저씨들에게서는 산양 발굽 냄새가 난다. 매캐하고 날카로운 냄새. 흙을 개고 뛰어 노는 맑은 산양의 울음소리를 상상하면서 나는 아저씨들에게 매달린다. 대장간에서 나오는 아저씨들은 더운 몸을 갖고 있다. 어깨는 목욕탕의 뜨거운 돌 같기도 하다. 대장간에서 나오는 드왈린은 가끔 나를 번쩍 들기도 한다. 내가 아직 조그마한 어린애인 것처럼, 던질 수 있는 작은 난쟁이인 것처럼.

활을 잡는 것은 내 팔과 손과 눈을 하나도 빠짐없이 내 것으로 만드는 일이라고 삼촌이 말했다. 시위를 당기기 전에 나는 눈을 감는다. 눈이 어둠을 안으면 손이 검어지는 기분이 든다. 손이 검어진다는 것은 곧 가벼워진다는 것이다. 나는 끓는 냄비를 바라보듯 눈을 뜨고 팔을 들어올린다. 화살깃은 보드랍다. 촉은 단단하다. 삼촌의 손이 팔꿈치에 없어도 이제 괜찮다. 눈으로 보고, 맞추어서, 당기고, 놓는다.

엄마가 바쁠 때 형은 종종 내 머리를 빗겨준다. 엄마가 바쁠 때에는 형의 손이 더 많아진다. 형의 손은 하나같이 크고 하얗고, 대장간을 오가는 아저씨들보다 부드럽다. 나는 형으로 인해 처음으로 어른의 손을 갖고 싶다고 생각한다. 형의 손은 반지 여러 개를 껴도 빨랐으며, 단검을 쥐고 휘두를 줄도 알았다. 단검 역시 엄마가 바쁠 때에만 볼 수 있다. 때로는 형이 숨겨둔 귀한 돌을 볼 수도 있다. 형은 파란 돌을 좋아한다. 나는 붉은 돌을 좋아한다. 붉은 돌은 아빠를 상상하게 만든다. 삼촌은 붉은 색을 싫어했다.

삼촌이 돌아왔다. 이번에는 나흘만이다. 난쟁이들이 모인 틈바구니를 뚫고 나는 형과 함께 다가간다. 삼촌의 커다란 손바닥이 무겁게 이마에 놓이고 우리에게 차례로 익숙한 웃음이 닿는다. 오늘은 삼촌의 옷에서 추운 냄새가 난다. 며칠 다녀오실 때마다 늘 다른 냄새다. 삼촌은 산양 고삐를 넘기고 무기를 푼다. 난쟁이들이 삼촌에게 묻는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삼촌은 말이 없다. 들어가서 이야기하지. 들어가는 것은 어른들의 일이다. 들어가야 할 수 있는 말이 있다. 그것은 어른들의 말이고, 어른들의 말은 저녁해가 저 멀리 항구 너머 바닷자락에 걸릴 때까지 이어질 만큼 길다. 형은 어른이지만 들어가지 않는다. 대신 내 팔뚝을 친다. 열매 따러 가자. 나도 형의 팔뚝을 친다. 오늘은 토끼라도 잡길 바라며 나는 활을 챙긴다. 산의 먼 곳까지 갔다오는 날이면 간혹 하늘 위로 붉은 색이 흩어지는 꿈을 꾼다. 노을은 뜨겁지 않다. 뜨거운 쇠를 두들겨 보면 알게 된다. 하늘에 번지는 붉은 색은, 뜨거운 색이 아니다. 차가운 색이다. 물을 끼얹는 것 같은.

산은 우리가 갈 수 있는 곳과 갈 수 없는 곳으로 나뉜다. 갈 수 없는 곳은 삼촌조차도 발 들이지 않는다고 했다. 나는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은 적 있다. 형도 나도 가지 못하는 곳을 궁금해하고 할아버지를 궁금해하지만 알면서 티내지 않는다. 다만 산딸기 몇 개에 기뻐한다. 눈썰미 좋은 형은 오늘도 쓸만 한 돌을 줍는다. 이건 어머니께 드리는 게 좋겠어. 나는 형의 손바닥 위 하늘색 돌을 보고 끄덕인다. 응, 딱 엄마 거네. 엄마는 돌을 좋아한다. 그러나 역시 티내지 않는다. 우리가 티내지 않는 것과 엄마가 티내지 않는 것은 다르다. 알고 있다. 엄마가 아빠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도, 옷을 고치며 검은 머리를 의자에 대고 자주 조는 것도.

오래 산에서 놀다가 저녁이 되고 돌아가면 삼촌의 회의가 끝나 있다. 삼촌보다 먼저 나오는 난쟁이들은 고개를 젓거나 고개를 끄덕이며 저마다 소매를 만진다. 나는 그것이 어른들이 안도하는 법이라고 생각한다. 어른들끼리 말한다. 이만하면 풍족해. 이만하면 됐습니다. 우리는 괜찮지요. 그리고 끄덕인다. 삼촌의 얼굴이 가장 늦게 드러난다. 나와 형은 앞서 달려가 삼촌의 앞에다 화살과 단검을 들이민다. 삼촌은 피로한 눈을 둥글게 휘며 우리 무기를 봐 준다. 화살깃이 너무 가늘지 않느냐. 필리, 멋 부리느라 날을 뭉그러뜨렸구나. 삼촌의 말은 서두르는 법이 없고 묵직하다. 나는 그것이 좋다.

엄마가 온다. 엄마의 걸음 또한 서두르는 법이 없다. 원 모질이 수염들두, 방금 여행 다녀온 치를 그렇게 잡아둘 게 뭐야. 삼촌은 웃으며 엄마의 어깨를 감싸 준다. 삼촌과 엄마를 앞질러 우리는 식당으로 간다. 밤이 다가오는 이곳은 아름답다. 전당을 걷는 발소리가 묵직해지고 어둠이 거대한 기둥 사이로 물들면 깊은 광산은 끝을 모르게 더 침잠한다. 우리는 안도감을 느낀다. 나는 형의 어깨에 손 올린다. 청색산맥이 검게 잠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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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킨-기타

레골아라레골 회지 내려다 엎은 엑소시스트AU


멐온에 회지 내려다 엎었던 레골아라레골...

엑소시스트신부 아라곤과 죄수 레골라스 AU







그는 저에게 하나의 구원이었고, 세계였고, 하늘이었고, 사랑이었습니다. 


사제복의 깃을 세우고, 다듬고, 아래부터 채우는 단추가 마지막 맨 위까지 풀린 뒤에 거울을 보고, 다시 머리를 다듬고, 허리를 펴서 바로 선다. 또렷하게 비친 두 눈을 보며 죄를 되새긴다. 마지막으로 앞에 놓인 성경을 오른손에 쥔다. 사제복 깃 안에 있는 흉터가 오늘 여전히 선연하다. 방을 나가는 걸음이 정갈하다.


그리고 그는 악마였습니다.











나이 지긋한 감옥지기는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그는 아라곤에게 할 수 있겠느냐 물었다. 아직 젊은 그대가, 기라성 같은 신부들도 포기한 저자의 악을 감당할 수 있겠느냐 했다. 아라곤은 마른침을 삼키고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만나 보겠습니다. 


“그의 머리칼을 만지지 마시오. 아주 차갑고, 가라앉은 색의 금발이오. 절대 만지지 마시오.”


걸어가는 제 등에 대고 말하는 것에 알겠습니다, 짧고 공손한 대답을 남겨 놓았다. 시선이 한참동안 발걸음 뒤로 따라왔다.











남자의 이름은 레골라스였다. 쳐들어 묶인 손목, 휘감긴 쇠사슬이 뒤틀리는 소리가 아라곤의 첫 번째 공포심이었다. 마주치지 않았으나 눈이 사나웠다. 살얼음 같은 푸른색이었다. 감옥으로 들어오는 빛에 남자의 - 레골라스의 - 얼굴 반은 어두웠고 반은 밝았다. 밝은 얼굴에 피가 흐르고 있었다. 찢긴 이마부터 턱까지 이어진 핏자욱에 아라곤은 두 번째 공포심을 느꼈다. 레골라스가 아닌, 잔악함에 대한 공포심이었다.


“레골라스.”


대답하지 않았다. 천정에서 내려온 쇠사슬, 아래에 묶인 손목, 그리고 몸 전체가 천천히 흔들리고 있었다. 아라곤은 웃지 못했다. 무릎까지 내려오는 길이의 튜닉은 찢어지고 피 묻었으나 이곳에 끌려오기 전에는 분명 흰색이었으리라. 로스로리엔에서 나는 명주로 다듬은 천을 자르고 잇고 수놓아 만든 것 같은 튜닉을 바라보다가, 없는 사람을 대하는 양 자신을 향하고 있지 않은 푸른 눈을 보다가, 속으로 짧게 기도했다. 

악마입니다. 악마가 깃든 것이 아니라, 악마입니다. 


엑소시즘을 여러 번 지켜본 감옥지기조차도 그리 말했더랬다. 가닥가닥 뭉치고 헝클어진 레골라스의 금발을 보며, 영영 얼어 붙은 듯한 눈을 보며, 그 피부 위에 사선으로 떨어지는 햇빛을 보며, 아라곤은 경계심을 세웠다. 성경책을 폈다가, 기도문을 찾다가, 닫았다. 다시 삐걱이는 철소리. 아까부터 고요한 때에 물방울 소리가 들린다 싶더니 레골라스의 발 아래로 길게 흐른 피가 방울씩 고이고 있었다. 피와 검댕으로 더러워져서 본디 피부가 희었던 것을 알 수 없는 발이었다. 발톱 몇 개가 부러져 썩고 있었다. 아라곤은 숨을 들이켰다. 그를 내버려두고 도로 나왔다. 문을 닫고 나온 아라곤에게 감옥지기는 질책하지 않았다. 오히려 말을 먼저 꺼낸 것은 아라곤이었다.


“누가 고문한 것입니까?”


대답하지 않는 늙은이의 어깨를 붙들었다.


“피가 흘러서 고이고 있었습니다. 보셨나요? 그가 고통으로 인해 악해진 것은 아닙니까?”

“……저자와 대화를 하셨소?”


지금 그게 중요하냔 말을 삼키고, 늙은 어깨를 쥐고 있던 손을 살며시 떼었다. 


“누구의 권능으로 저자에게 고통을 주는 것인지 대답해 주십시오. 그전까지는, 다시는 저 끔찍한 방에 들어가지 않겠습니다.”


감옥지기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라곤이 덧붙였다.


“제가 엑소시즘을 마칠 때까지 고문하지 말아 주십시오. 악은 피로 씻어낼 수 있는 게 아닙니다.”


한참 뒤,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고서야 돌아섰다. 다시 들어간 감옥에서 레골라스의 앞으로 조금 더 가까이 다가섰다. 숨소리가 들릴 거리였건만, 매달린 채 고개만 떨구고 있었다. 앞으로 흩어진 금발의 장막을 넘겨주려 손을 뻗었다가, 문득 감옥지기의 말이 생각나 도로 주먹 쥐었다.


“레골라스, 당신은 누구입니까?”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라곤은 한참 기다렸다. 미동 않는 레골라스의 앞에 앉았다. 바닥은 차가웠고 그는 레골라스의 발에 닿은 차가운 돌 감촉을 상상했다. 그의 몸에서 흘러나온 피는 아라곤의 발 앞까지 왔으나 더 다가와서 적시지는 않았다. 해가 지고 나서 아라곤은 인사 없이 감옥을 나갔다. 











이후 며칠이 걸렸다. 매일 감옥을 방문하나 어떤 기도 소리도, 비명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에 대해 감옥지기는 의문을 표하지 않았다. 아라곤은 하루 종일 감옥의 찬 바닥에 엉덩이를 붙이고 그보다 더 찬 눈을 마주하고 있었다. 차갑다. 깊지 않다. 그래서 깨질 것 같다. 그렇게 바라만 보며 말을 이따금 걸었으나, 돌아오는 대답을 들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반쯤 뜬 눈동자를 아라곤은 자주 꿈꾸었다. 감옥으로 들어오는 햇빛은 창백했으나 따스하지는 않았다. 


“저는 기도하지 않겠습니다. 성수를 뿌리는 짓도 하지 않을 겁니다. 레골라스, 당신이 누군지 알게 해주십시오.”


그제야 다시 눈이 마주했는데, 아라곤은 거기에서 공허함이나 포기보다는 갈구심을 읽어냈다.


“내 이름을 아시잖아요.”

“이름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 이름을 하늘로 돌려보내 줄 수 있나요?”

“지금 제게 성경을 든 손으로 생명을 거두라 하시는 겁니까?”

“성경에서는 자비를 가르치지 않던가요? 제 목숨을 거두어 주실 게 아니라면 저도 할 말이 없어요, 신부님.”


고개를 저었다. 말을 섞으면 안 된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 굳게 입술을 닫는 것을 보고 레골라스가 웃었다. 아라곤은 문득 의아했다. 타의로 묶인 자가 어떻게 저리 해사히 웃을 수 있는가. 휘어지는 눈꺼풀을 보면서 다시 정신을 다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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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1. 12. 23:56

소린스란 길스란 밴드A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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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1. 7. 15:51

레골아라 썰 백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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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킨-기타

[톨킨전력60분] 대박 늦은 전력이지만 후안과 베렌, 루시엔 메모



넘나 늦은 전력이지만 일단은 올려봅니다 ㅠ_ㅠ 지각왕지각 이힝히잏ㅇㅎ읗ㅎ

근데 이건 연성이라기보단 진짜 그냥 메모 수준이네요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어쨌든 오로메의 사냥개이니 요정룩변스킬 하나 정도는 있지 않을까 하는 망상으로...

이전부터 정말 써보고 싶던 건데 이제야 쓰네요ㅠ


후안 같이 파주세요 제 실마릴 최애캐.... 축생차별 규탄한다

사랑해요 후안멍멍이 복슬복슬 후안멍멍이








바작바작한 낙엽에 코를 묻고 있던 후안은 발자국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제 배를 베고 누운 주인이 깨지 않도록 조심스러웠다. 콧등에 머무르던 몇 잎이 소리 내며 흰 앞발 위에 떨어졌다. 멀리서 베렌이 다가오고 있었다. 칭찬을 바라고서 쳐다본 것이 아닌데도 베렌은 그의 머리를 다정히 쓰다듬어 주었다. 목덜미까지 툭툭 두들겨 준 뒤에, 잠든 아내의 얼굴 위로 몸을 숙였다. 나무 그늘 안인데도 불구하고, 귀한 뺨이 늦은 노을에 물들어서 발갛게 익어 있었다. 그 위로 서늘한 손가락이 닿았다. 잠에서 깬 눈은 남편을 보자마자 금세 웃었다. 


"당신 때문에 후안이 뛰어놀지도 못하겠어."


루시엔은 남편의 목에다 팔을 감고 엉겨들었다. 베렌은 제 반려를 들어 안아다 무릎에 앉혔다. 귀한 아가씨를 맨 처음으로 안았을 때에, 베렌은 그녀의 육체가 비현실적이라고 여겼다. 가느다란 허리를 감아 당기자마자 휙하니 끌려오는 그 무게는 흑발에 대비되는, 진주처럼 뽀얀 피부 만큼이나 그에게 낯선 기분을 주었다. 낯섦에 그가 한 걸음 물러나면 그만큼 다가오는 것이 루시엔이었다. 그녀가 베렌의 목덜미에 이마를 대었다. 


"너무 졸렸어. 후안도 그랬을 걸."


그녀의 목소리 탓인지 나른한 동작이 옮은 듯한 베렌은 그대로 나무등걸에 기대 앉았다. 품에서 열매 몇 개를 꺼내어 루시엔에게 나누어 주었다. 작고 빨갛게 잘 익은 열매 하나는 후안의 몫으로 주어졌다. 사각, 사각, 즐겁게 부서지는 과일향을 맡으며 후안은 그들에게 등을 보인 채 엎드려 있었다. 그의 꼬리쪽 반은 주인들이 앉은 그늘에, 머리쪽 반은 아직 해가 누렇게 드는 양지에 있어 흰 털이 몇 가지 색으로 그림자 져 있었다. 루시엔의 노랫소리가 들렸다. 새가 우는 것 같았으나 그보다는 맑았고, 물이 흐르는 듯했으나 그보다는 청아했다. 후안은 누운 채로 귀를 세우고 해처럼 느리고 따스한 곡조를 하나하나 새겨 들었다. 슬프다는 것이 이런 것일까, 싶기도 했다. 후안은 떨어지는 해를 보며 이곳이 너무 덥다고 여겼다. 건조하고, 메마르고, 제 발이나 이로 순식간에 부서지는 것 투성이에, 하루하루가 너무도 빨랐다. 


아내를 안고 있다가 어느새 아내의 어깨에 고개를 기댄 필멸자는 조금씩 잠에 빠져들고 있었다. 아내의 노래도 그의 잠과 함께 끝났다. 후안의 몸은 밤그늘에 덮였다. 그는 엎드려 있던 몸을 일으키고 뒤를 돌아 보았다. 두 주인은 나무에 나란히 기댄 채 잠들어 있었다. 몸을 한 번 털었다. 





귀한 혈통의 아가씨는 아주 어릴 때부터 숲에 관한 꿈을 자주 꾸었다. 아가씨는 숲에서 새가 되기도 했으며 바람이 되기도 했다. 꿈의 깊이만큼 자유롭고 광활하게 잎 사이를 뛰어 놀다가 날개를 접고 몸을 숨기고 있으면 온갖 생물들을 다 볼 수 있었다. 어떤 것은 아름답고 고와서 꿈인 줄도 모르고 한참을 구경하곤 했다. 아가씨는 희고 긴 머리칼을 가진 남자를 만났다. 꿀색의 마른 등은 조각처럼 아름답고 강인해 보였다. 아가씨는 부리를 숨긴 채 나뭇잎 너머로 조금 더 욕심 내서 다가갔다. 옆모습으로 본 남자의 눈은 가늘고 길었으며 검은 색이었다. 그가 요정도 인간도 아닌 것을 그제야 알았다. 루시엔은 꿀색의 가느다랗고 강한 손가락이 이불을 여며 주는 것을 잠결에 눈치 채었다. 익숙하고 따뜻했다. 이른 새벽, 뒤척이다가 남편의 품에 파고들며, 등에 닿는 보드라운 털의 감촉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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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킨-기타

[톨킨전력60분] 에스텔



톨킨전력 60분, 소년소녀시절 주제 - 에스텔로 참가합니다.











"꽃을 함부로 꺾으면 안 돼요."


어린 에스텔은 린디르의 말에 뒤돌았다. 이미 아이의 품에 한 아름 안겨 있는 색색의 꽃은 흐드러지게 펴서 마음이 아플 정도로 아름다웠다. 


"왜요?"


린디르는 에스텔의 새파란 눈동자를 마주하고 키를 맞춰 앉았다. 에스텔의 눈동자는 처음 이곳에 왔을 때에는 희미하게 푸른 색이었건만, 점점 진해지고 모양을 갖추어서 이제는 제법 총기를 갖추고 있었다. 머리칼에 붙은 나뭇잎을 린디르가 떼어 주었다.


"꽃도 생명이니까요. 나무의 일부니까요."

"아다께 드리고 싶었어요."


기특한 말에 손을 뻗어 뒤통수를 쓰다듬어 주었다. 햇빛에 오래 서 있던 탓인지 작은 머리통이 따뜻했다. 다시 보니 역광을 받은 에스텔의 얼굴도 많이 붉어져 있었다. 린디르는 조금 겁이 났다. 요정 아이들은 몰라도 이 아이는, 서늘한 손가락을 뺨에 가져다 대고 다시 이마로 옮기니 다행히도 이마에는 열이 없었다. 작게 한숨 쉬고 말했다.


"영주님께서는 한 송이만 가져다 드려도 좋아하실 거예요."


어린 얼굴이 금세 난색을 표하며 제 품에 안긴 꽃더미를 내려다 보았다. 깜빡, 깜빡, 생각을 담아내느라 긴 속눈썹이 홍조 띤 볼 위에다 그림자를 내고 있었다. 쉽게 다치고 상처 받고 아파하는 것은 몸만이 아니리라. 린디르는 아이에게서 꽃을 살며시 받아 들었다. 


"내가 영주님 방에 꽂아 놓을게요."


그제야 조금 안심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린디르가 일어나 걷는 동안 에스텔이 뒤를 따라왔다. 이제 겨우 그의 허리까지 오는 키였다. 그렇다 하더라도 인간 아이치고는 키가 큰 편이었다. 자라나는 속도를 맞추기 힘들어서 옷을 짓는 요정들은 일부러 소매며 밑단을 길게 잡아 입히곤 했다. 그 탓에 소매가 남고 장화는 컸으나 에스텔이 입은 놀도르의 옷태는 정갈하고 고왔다. 청색에 가까운 녹색의 로브는 잘게 은사로 수를 놓아서 길게 늘어뜨린 검은 곱슬머리와 제법 어울렸다. 뛰어놀기 편하라고 목 언저리 단추를 몇 개 풀어 주었는데 그 사이로 마른 쇄골뼈가 보였다. 아이는 빨리 크는 만큼 몸에 축적하지 못하고 길게만 자라는 것 같이 느껴졌다. 타고 난 골격이 커서 조금 지나면 금세 어른 요정의 키를 따라잡을지도 몰랐다. 


"꽃도 아버지께서 다스리시는 건가요?"


꽃 더미 너머로 본 에스텔은 조심스럽지만 곧아 보였다. 어린 아이의 눈치고는 깊었다. 린디르는 살풋 고개를 저었다. 


"꽃은 알아서 피고 알아서 자라지요. 땅을 내어주면 그곳의 영주가 누구이든 상관 않고 뿌리를 뻗으며 자란답니다."

"그럼 누구도 지키지 않아도 되는 건가요?"

"그렇답니다."

"나도 그랬으면 좋겠어요."


에스텔은 말을 던져 놓고 앞을 보았으나, 린디르는 곁눈으로 오래도록 아이의 흰 이마에 시선을 놓고 있었다. 미처 떼어 주지 못한 꽃잎 몇 개가 에스텔의 옷자락에서 팔랑팔랑 날려 흔적처럼 발자국 뒤에 떨어지고 있었다. 꽃향은 독하고 짙게 올라왔다. 문득 먹먹했다. 











사춘기는 백지를 적시고 유린하는 검은 잉크처럼 선명하고 고통스러웠다. 에스텔은 열여섯, 열일곱, 혹은 그보다 조금 전 즈음부터 제 몸을 읽기 시작했다. 점점 잡혀가는 근육의 모양새를 손 끝으로 더듬고 쓸어보는 모습은 누군가 보았다면 자기애로 보일 터였다. 그는 거울 앞에 한 번 서면 오래도록 말없이 몸 곳곳을 살폈다. 곳곳에 체모가 나기 시작한 후로는 그 시간이 더 길어졌다. 그러나 거울 앞에 선 소년의 형상은 저를 따라 움직일 뿐, 어떠한 읽을 거리도 주지 못했다. 김 서린 욕조에 혼자 들어간 첫 날 이후로 내내 두렵기 시작했다. 눈으로 보는 것을 포기하고 웅크린 채 무릎을 감싸 안으면 입술에 닿는 제 살결이 낯설었다. 


밖에서 그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쌍둥이 중 하나인 것 같았다. 일어나 몸을 닦고, 옷을 입었다. 에스텔의 검은 머리는 젖어서 조금 더 곱슬거렸다. 길게 허리까지 내려온 끝이 로브를 적시고 있었다. 물방울이 발자국 뒤에 흔적을 남기며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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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킨전력60분] 스란두일



가운데땅의 왕, 요정왕 스란두일로 톨킨전력 60분 참가합니다.








길게 부는 바람은 누구의 이름을 부르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스란두일은 바람에 속살대는 이름 중에 어떤 것을 귀에 담아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들으려고 하면 누구의 이름도 될 수 있었다. 그리고 어디의 추억도 될 수 있었다. 그는 맨발로 천천히 이끼 위를 걸었다. 정화된 숲은 예전처럼 위험하지도, 어둡지도 않았다. 엘크도 호위병도 없이 얇은 로브 하나만 걸치고 흙에다 맨발을 적시는 것은 요정왕의 새로운 산책이 되었다. 맑은 흙 알갱이는 걷은 로브 아래 종아리까지도 튀어 올라왔다가 다시 떨어졌고, 바람 자락에 흩날려 스친 흰 옷자락은 간간이 풀물이 들었다. 누구에게 보여 줄 양도 아니니 스란두일은 개의치 않았다. 작은 짐승들이 왕의 행차를 몰래 따랐다. 몇몇 짐승들은 겁없이 뒤꿈치까지 따라왔다가 스란두일의 온화한 재색 눈을 보고서야 돌아서기도 했다. 


숲이 빛을 잃은 시절에는 궁인들 몰래 나와 병든 지역까지 맨 몸으로 가 보기도 하였다. 그는 다친 제 숲을 굳이 눈으로 확인하고, 손바닥으로 나무 줄기를 짚은 채 제 고통을 확인하길 자처했다. 처음 아비를 따라 왔을 때에 말발굽에 채이던 건강한 흙내음은 그의 몸 속, 버석버석하게 오래도록 남아 있었다. 그는 채 숙성되지 않은 포도주를 시커먼 땅에 뿌리며 야반나의 이름을 속으로 담았다. 밤에 나가 취한 눈물로 흙을 적시다 보면 도망가지 않고 남아 있던 날벌레들이 숲 주인의 머리 위를 안타깝게 맴돌았다. 밤 내내 악몽을 꾸어 늘어져 젖었던 백금발을 추스르고 빗는 것은 결코 아픈 일이 아니었다. 제 옆에서 지던 꽃 하나 하나를 기억하는 것은 스란두일의 자의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제 옷깃을 스치고 간 것이면 단 하나도 버리지 않았다. 모두 기꺼이 끌어 안았다. 전쟁을 거치고 죽음을 보면서 스란두일의 가슴이 두터워질수록 눈동자는 색이 더 옅어졌다. 아스라지는 꽃잎을 들고 제 체온에 상하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는 어린 아이가 될 수는 없었다. 스란두일은 왕이었다. 나쁜 꿈을 꾸는 것도, 숲에 어둠이 들끓는 것도 그는 기꺼이 제 몫으로 받아들였다. 몇 천 년을 산 요정의 가슴은 왕좌의 손잡이를 쓰다듬는 것만으로도 한도 없이 두터워지고 넓어질 수 있었다.


그는 나무 사이, 길도 아닌 곳에 서서 위를 올려다 보았다. 울창한 잎 사이로 겨우겨우 드러난 하늘은 아래서 위로 보기에 조각나 보였으나 불안하지도, 병들지도 않아 있었다. 이제 잠을 이루지 못하는 일도 없었다. 숲에 사는 누구도 왕이 불면에 시달린다 알지 못했으니 그걸로 다행이었다. 스란두일은 눈이 부셔 긴 속눈썹을 느리게 내리깔았다가 뜨길 반복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앞으로도 이곳은 한동안 탈없이 고울 것이다."


레골라스가 은신을 포기하고 근처 나무에서 내려왔다. 


"제가 따라오는 줄은 어떻게 아셨어요?"

"너를 가르친 게 나인데 어찌 모르겠느냐."


왕이 뒤돌아 다시 걷자 왕자가 그 뒤를 따랐다. 왕은 제 발가락 새로 파고드는 간질간질한 흙을 느끼며, 비릿하게 숲을 채운 건강한 풀 냄새를 맡으며 왕자가 어릴 적 둘 모두 맨발로 숲을 장난 치며 다니던 때를 떠올렸다. 머릿속에서 몽글몽글하게 어린 아이의 머리통처럼 모양을 갖추는 추억들 탓에 스란두일은 제풀에 미소를 지었다. 검과 활을 처음 잡게 할 때만 하더라도, 그는 제 아들이 왕이 된다는 실감을 해본 적 없었다. 무릎에 앉히고 위대한 요정왕의 이름들을 하나하나 짚어가며 알려줄 때에도 그러했다. 작은 손발이 제 것만큼 커진 후에는 업어주는 일도, 품에 끼는 일도 없었으나 여전히 그는 제 칼날을 세워 지켜야 할 왕자였다. 스란두일은 곁에 있는 나뭇가지를 빼곡히 채워 흐드러지게 핀 꽃을 손바닥으로 훑어 몇 송이 땄다. 꽃향은 달았고, 잠깐이었다. 그가 힘을 주지 않으니 붉은 색은 금세 바람에 날렸다.


"이실리엔으로는 언제 떠날 예정이라고?"


알면서도 물은 것이었다. 작은 기억, 전쟁 중에 적의 몸놀림 하나하나와 천 년 전 왕자의 생일 저녁에 먹은 것까지 기억하는 요정왕이 잊을 리 없건만, 레골라스는 따지지 않고 금세 대답해 주었다.


"난도르들이 조금 더 모이면 갈 것입니다. 오래 지체하지 않고 한 달 가량……."


까지 이야기하고 그는 제 아비의 반의 반도 드러나지 않은 옆얼굴에서 표정을 읽으려 애썼다. 소용 없는 일이었다. 요정왕이 가벼이 감정을 담아 보이는 일은 없었다. 익히 알고 있었으나 매번 아비의 가슴 속이 궁금한 아들이었다. 이번만은 말을 잇지도, 더 발걸음을 좁히지도 못한 채 아비의 뒤에 머물러 있었다. 풀지 못한 끈 같은 것이 목 아래에 걸려 있는 것 같았다. 


"잘 해낼 것이다."


너는 내 아들이 아니냐, 걱정 말아라, 하는 말은 굳이 달지 않았다. 스란두일은 레골라스를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 걸었다. 나이 든 요정의 걸음은 가볍고 희었다. 레골라스는 아비의 맨 뒤꿈치를 가만히 서서 내려다 보다가 곧 걸음을 따랐다. 나뭇잎이 바람으로 부대끼는 소리가 오래된 신다르의 노래처럼 시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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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8. 14. 21:20

[필리킬리] 핑거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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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킨-기타

[톨킨전력60분] 소린과 오크리스트



글자를 채 배우지 않은 어린 아이들은 침략이나 고향 같은 것을 모르고 금방 컸다. 흙에 심어 놓은 화초가 따로 나라를 생각하고 뿌리를 내리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소린은 난쟁이 아이들이 화초처럼 크지는 않기를 바랐다. 나무나 풀, 꽃보다는 바위나 뜨거운 모래를 닮으려 하는 것이 난쟁이의 성정이었다. 백부가 바라는 조카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소린은 필리와 킬리가 왕손의 단단함과 자애로움을 모두 가지길 바랐다. 당연한 일이었다. 검술을 배우거나 학문을 익히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소린은 어린 필리의 검술과 제왕학을, 킬리의 궁술을 직접 가르쳤다. 형제는 어린 손으로도 제법 진지하게 집고 휘두를 줄 알았다. 그러나 아이들의 등 뒤에서 무기 잡은 손을 고쳐 쥐어 주며 누군가를 베거나 찔러야 하는 것을 가르치는 일은 결코 보람차다 할 수 없었다. 아이들의 어미는 자식들이 무기를 들 때마다 곁에 서서 가슴을 작은 손으로 짚은 채 지켜 보았다. 소린은 조카들이 깊은 말까지 알아들을 쯤 되었을 때에 앞에 앉히고 두 눈을 보며 이야기했다. 


누군가를, 혹은 무엇을 죽이는 일은 평생 가슴에 돌로 남아서 그 무게만큼을 지고 가야 한단다. 그 무게를 다른 말로 죄라고도 한다.


기억해라, 하고 작은 네 개의 눈을 번갈아 보며 되짚어 주었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그 외 소린이 삼촌으로서 달리 엄하게 질책한 것은 없었다. 척박한 청색산맥에서도 아이들은 냇물처럼 명랑하게 커 나갔다. 그리고 다 자란 형제는 삼촌을 위해 목숨을 내 놓아야 할 원정에 올랐다. 








곧 새벽이었다. 동굴은 춥지 않았고 야생동물이나 와르그의 울음도 들리지 않았다. 소린은 검날을 손으로 만족스럽게 훑었다. 깨끗하게 닦아 놓은 오크리스트에 제 얼굴이 비쳤다. 곁에 피워 둔 모닥불 덕분에 춤추듯 어른어른했다. 무릇 오래된 검이란 주인의 피를 함께 뒤집어쓰기도 해서 날에 새긴 문자며 흠에 고이기도 하였다. 전투가 오래되고 주인에게 여력이 없어 계속 갈무리를 하지 못한 채 내버려 두면 아무리 좋은 검이라 해도 날이 상해서 대장장이의 손을 타야 했다. 그러나 오크리스트는 달랐다. 저 먼 옛날의 요정들이 만든 것인데도 여태 날이 상하지 않았고 닦아 놓으면 항상 얼굴이 비칠 정도로 빛났다. 좋은 무기는 오래 쓰면 쓴 그대로 흔적이 무늬로 남는다고 했다. 소린은 제 오크리스트를 보며 그 말을 믿었다. 수많은 오크를 죽일 테고 어쩌면 그 주인의 피도, 또 어쩌면 이 원정대 난쟁이의 피도 곁에서 함께 뒤집어쓸지 몰랐다. 그는 제 손으로 직접 일궈 낸 청색산맥의 모습을 잊으려 했다. 돌아가지 않을 양으로 발 끝으로 길을 지우며 떠나 온 곳이었다. 그러나 에레보르 또한 그에게 가깝지는 않았다. 손에 쥔 오크리스트는 아직 그곳의 광명을 본 적 없었다. 그리고 소린은 이 검을 마지막으로 꽂아 넣을 곳은 정해져 있다 믿었다.


소린은, 아직도 눈을 감으면 난쟁이의 비명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몇몇은 너무 익숙하고 또렷했다. 나라를 되찾아야 할 왕손은 원정 중에 깜빡깜빡 드는 선잠 속에서 제 가슴에 얹은 돌을 떨궈내려 용써야 했다. 귀를 비우고 고통을 비워냈으나 부디 잊지는 않으려 아울레께 빌었다. 두 손으로 죄가 될 살생을 한 적은 없었건만, 제 옆에서 뿌려진 동족의 피는 이미 그에게 고이고 고여 무게만큼의 짐을 주고 있었다. 나이 많은 왕손은 이를 자신의 죄라고 여겼다. 


드왈린이 보초를 교대하러 다가왔다. 소린은 자리를 비켜 주고 모닥불이 꺼지지 않게 지켜 달라 일렀다. 곧 지나면 달이 지기 시작할 테니 오늘도 잠은 자지 못할 것 같았다. 그럼에도 조카들의 곁으로 가서 눈을 감았다. 알고도 해야만 하는 일이 있었다. 그래서 손은 잠을 잘 때에도 결코 비어 있지 않았다. 왕손은 누워서 지친 어깨를 움츠렸다. 마지막으로 눈을 뜨고, 희미하게 보이는 드왈린의 등 그림자를 보며 한 마디를 덧붙였다. 와르그 소리가 들리면 깨워라. 누웠으면 눈이나 붙이시라는 시큰둥한 가신의 대답에 왕손은 안심했다. 모닥불 타는 소리가 고요했다. 바로 곁에 누운 필리와 킬리의 몸 냄새는 집에서 떨어져 나와 있어도 여전했다. 아이들의 둥그런 어깨 위 내려앉은 어둠이 짙었다. 오크리스트를 감싸 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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