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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최김

[최김] 서울 천사의 시 (프롤로그)

(아마도) 2.5D 통합온 쩜오어워드에 나올 것 같은 최김입니다.

연재하다가 책으로 낼게요. 첫 편은 프롤로그니까 짧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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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의 생각은 늘 범람했고 대부분이 그에게 아팠다. 하나하나 새기기 고통스러울 때 아가토는 성당의 첨탑에 올라섰다. 검은 코트를 입은 천사에게는 날개가 없었으나 향수처럼 높은 곳을 찾았다. 


어떤 자는 몇날 며칠을 울었고 어떤 자는 울음마저도 귀했다. 아가토의 마음은 그런 자를 위해 있었다. 천사들은 기뻐하고 분노할 수 있었으나 노래를 들을 수 없었고 색을 구분할 수 없었고 사랑을 할 수 없었다. 아가토는 첨탑 위를 가장 좋아했고, 그곳에서 절망의 목소리를 찾으며 구름이 흐르는 모양을 구경했다. 


천사가 가장 먼저 다가가는 자들은 가장 아픈 자들이다, 그러므로 천사의 기도는 찾아가는 길에서부터 시작한다. 아가토는 가장 정성 들인 기도가 무엇인지 알았다. 그것은 기도하는 당사자가 모르게 하는 기도였다. 도착했을 때 여자는 이미 살아날 가망성이 없었고, 아가토는 여자의 피 묻은 이마를 제 어깨에 닿게 했다. 봄, 10시 햇빛, 꽃무늬, 시장의 시원한 물냉면. 단어 하나씩 읊자 여자의 숨이 천천히 잦아들었다. 석양을 볼 수 있는 벤치, 어릴 적 집앞 공원, 헤밍웨이, 아몬드, 아버지의 웃음, 어머니의 손. 아가토의 목소리가 멈췄다. 여자가 숨을 온전히 거둘 때까지 천사는 곁을 떠나지 않았다. 


여름이나 겨울이나 검은 코트를 입은 천사들은 큰 재해가 있을 때마다 깃을 꽁꽁 여미고 하나 둘씩 모여들었다. 천사들은 죽어가는 자들의 관자놀이를 감싸 주었다. 그들이 망자가 되어가는 육신에게 가장 사랑스러운 기억들을 읊어주면 눈 감을 때만큼은 편안할 수 있었다. 그때마다 아가토는 범신을 찾았다. 행여 피가 낭자하는 곳에 우두커니 서 있지 않을까 덜컥 겁이 나기도 했다. 색을 구분치 못하는 그에게 그러한 범신의 모습은 그저 검고 흴 뿐이었다. 흑과 백으로 이루어진 세상의, 날개 없는 모든 이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이 보살펴야 할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천사가 어찌 인간을 특별히 여긴단 말인가. 아가토는 첨탑 지붕에 서서 제 손바닥을 내려다보며 자책했다. 범신이 노래하는 것을 듣고 싶었다. 범신의 눈동자 색이 궁금했다.












어린 범신이 처음 세례명을 얻었을 때 아가토는 몇 번이고 그 이름을 입속에 담았다. 베드로, 베드로라니. 아이의 고집 찬 눈매와 웃을 때 예상치 못하게 퍼지는 선연함에 잘 어울리는 이름이라 여겼다. 범신이 태어나고 며칠 지나지 않아 친모가 죽었다. 아들이 아내를 잡아먹었단 생각을 떨치지 못한 친부는 윗목에 누인 아이가 우는 것을 아랫목에 웅크린 채 보고만 있었다. 새빨개진 이마에 아가토가 입을 맞추었다. 내가 당신을 선케 하리다. 아이가 울음을 그치자 친부의 자책하는 마음이 들렸다. 눅눅한 장판을 발바닥으로 비비며 결국 눈물을 손등으로 찍어내는 그에게도, 아가토는 이마를 맞대 주었다. 당신의 잘못이 아닙니다. 아이의 잘못도 아니고요. 천사의 숨이 방에 느리게 들어찼다. 범신의 친부는 자책을 관두고 벽을 타고 스르르 누웠다. 아가토의 시선이 다시 아기를 향했다. 어린 범신은 온기를 찾는 양 포대기 밖으로 손을 빼었다. 아가토의 검지 끝과 범신의 손바닥이 마주치고, 그가 쓰게 웃었다. 당신은 아직 나를 볼 수 있겠네요. 커다란 손바닥이 이마 위를 덮었다가, 비져나온 팔을 넣어 주었다. 곁에 있겠습니다. 


범신이 자라는 것을 보며 아가토는 처음으로 시간을 궁금해했다. 아이가 새로 가진 크레파스에 들떠 그린 그림을 보고 처음으로 색을 궁금해했다. 아이가 본 적 없이 그린 바다와 섬을 그는 오래도록 쓸어 보았다. 감각 없는 손끝은 그래도, 그저 깨끗했다. 


아이가 고등학교에 들어간 첫 해의 어느날, 집안에서는 큰 싸움이 있었다. 친부는 아이의 꿈을 이해할 수 없었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아 했다. 신부라니. 그게 얼마나 어려운 길인 줄 알고. 얼마나 외롭고, 얼마나 고단할 일을. 왜. 아비는 아들을 말리거나 질책할 수 없었다. 두 부자를 지켜보던 아가토는 눈가를 늘어뜨린 채 서로에 대한 미안함만을 듣고 있었다. 어린 범신의 표정은 그의 어른스러움만큼이나 단단하고 틈이 없었다. 아가토는 그것이 속상했다. 틈이 없고 나약하지 않은 자에게 천사가 끼어들 곳이란 없으니까. 집에서 나와 자전거를 타고 학교로 가는 그를 아가토가 천천히 뒤따랐다. 여름이 시작되었기에 길가에는 유채꽃이 샛노랗게 피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가토는 검은 코트를 입은 그대로였다. 성큼, 성큼 걷다가 어느 순간 겅중겅중 뛰어서 자전거를 따라잡은 그는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범신의 옆얼굴을 보았다. 머리가 굵어질 대로 굵어졌으니 이제 제 얼굴이 보일 리는 만무했다. 속상한 범신의 마음이 아가토에게로 전해졌다. 어금니를 앙다물고 속도를 내는 녀석의 얼굴에 고집이 만연했다. 아버지가 미우십니까? 들릴 리 없건만 물었다. 너무 미워하지 마세요, 얼마나 당신을 걱정하는데. 여전히 들릴 리가 없을 테지만 범신의 표정이 조금 풀어졌다. 다친 마음도 얼마간은 추슬렀다. 소년의 이름은 범신이었으나, 아가토는 그를 보면서 무리에 결코 속하지 못할 들개의 이미지를 떠올렸다. 어린 범신은 그만큼 단단하고 또 거칠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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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뒷편은 포스타입에서 연재됩니다. >> http://ashlick.postyp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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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최김

김최 단문 여러 가지 백업


나의 부끄러움은 당신의 손에서부터 시작합니다. 뭉툭한 손등 위에다 이미 성모께 헌정한 입술을 올리고파 당신의 묵주반지를 오래 내려다보았습니다. 쓰다듬어주셨던 살갗마다 열이 오르고 어지러워서 병인가 싶었습니다. 세례명을 불러주시는 당신의 무게가 좋아서 그 아래 짓눌리고 싶었습니다. 어쩐지 함께 맞는 봄은 느리고 느려 꽃마저 드물었잖습니까, 기억하십니까, 베드로,  처음 제가 당신께 고해했던 날의 달밤은 꽃그림자가 없어 다행이었습니다. 눈두덩을 꾹꾹 누르며 봄을 참던 저는 당신이 차라리 돌아서시길 바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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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부제의 앵스트 연성 소재는 작성되지 않은 삶, 약기운, 손을 뻗었으나 닿을 수 없다. 입니다.

깨자마자 노곤한 담배냄새를 맡았다. 준호는 겨우 뒤척였다. 움직임 하나마다 기침이 크게 터져 온몸이 들썩였다. 이불 닿는 것만도 손끝이 아렸다. 김신부의 검은 등이 보였다. 벗어놓은 그의 안경이 협탁 위에서 누런 햇빛을 반사했다. 언제 오셨습니까. 겨우 짜낸 목소리마저 갈라져 있었다. 돌아앉은 김신부의 손이 그의 이마에 닿았다. 바깥 냉기가 남아 서늘한 무게감이 좋아서 준호는 다시 눈 감았다. 이탈리아에 좀 갔다와야겠다. 김신부의 손에서 나는 옅은 담배내에 안도하며 또 까무룩 잠들려던 때, 느지막한 목소리가 그를 도로 깨웠다. 혼자 가십니까? 김신부는 고개를 끄덕였다. 빛을 절반 받은 스승의 얼굴이 약기운에 자꾸 흐렸다. 언제 오시냐 묻고팠다. 물음이 잔기침처럼 간지러웠다. 더 자라, 하는 말에 준호는 눈을 감았다. 속삭이는 것 같은 목소리, 당신의 무게가 얼마나 위안되는지 적어두고 싶었던 적이 있었다. 백지로 남은 상처는 차라리 찢어내지도 못한다. 침대 한켠이 가벼워지는 것을 느끼며 준호는 눈 감은 채 그의 뒷모습을 떠올렸다. 바로 앞에 두고 상상하는 일이 버릇되어 먹먹했다. 적어 두었어야 했을까, 어떻게든 새겼어야 했을까. 방문이 열리고, 다시 닫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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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지나고 부제는 앓아누웠다. 빨갛게 달떠서 열 오른 숨만 몰아쉬는 그의 곁을 김신부가 지켰다. 독을 죄 품기엔 아직 어린 범이었다. 불을 끈 채 침대 옆에 앉아 있던 김신부는 준호의 사제복 소매 아래 새겨진 상흔을 보았다. 번개 모양으로 뻗은 자국이, 어제의 구마 중 입은 게 분명했다. 사령이 소멸하면 독기도 사라져야 했을 것을, 예민한 녀석이라 앓아누우며 흉까지 얻은 듯 싶었다. 상흔을 확인하려 김신부는 준호의 상체를 벗겼다. 가슴과 등짝에 가지 혹은 번개 같이 잘게 뻗은 악의 맹독이 한눈에도 끔찍했다. 묵주를 꺼내 들어 입 맞추고, 기도문을 읊었다. 성유에 적신 검지로 상흔 위를 꼼꼼히 훑었다. 준호는 그의 손이 살에 닿을 때마다 낮게 끙끙거렸다. 김신부는 기도문 사이사이마다 자책했다. 온몸이 번들번들해진 준호를 내려다보며 결국 한숨 지었다. 미안하다. 널 데려가는 게 아니었는데, 그래선 안 되었는데. 성유 닿은 곳마다 상흔은 더 붉게 일어나서 꼭 준호의 몸에 붉은 뿌리가 내린 것 같이 보였다. 구긴 미간을 보니 김신부의 마음이 먹먹해졌다. 그는 한때 도망쳤다 돌아온 녀석의 흙 묻은 양말을 떠올렸다. 다시 기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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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스승의 닳은 뒤꿈치 뒤를 따르다 보면 불쑥 멈춰서거나 문득 빨라지는 걸음에 익숙해져야 했다. 범신은 그렇듯 열여덟의 준호가 종잡기 힘든 어른이었다. 준호는 멈춰 선 범신의 발이 제게 향하는 것을 보았다. 운동장 흙먼지가 뽀얗게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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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강앵초는 말릴수록 색이 검붉어져 과부를 떠올리게 했다. 준호는 그것이 불경스럽다고 여겼다. 베드로의 꽃이라 했다. 김신부는 먹지도 못하는 걸 주느냐고 핀잔 주고서도 영신에게 꽃 말리는 법을 물어 벽에다 걸어 두었다. 붉은 꽃 옆으로 문이 열리고 김신부가 목발을 짚고 들어왔다. 준호는 이 병실이 싫었다. 아그네스는 김신부가 재활을 거부한다며 그에게 도움 청했으나 제 말이라고 들을 사람이 아니라고, 준호는 괜시리 그녀에게 화냈었다. 뭘 멀뚱히 섰냐. 담배 사왔어? 김신부가 침대에 걸터앉았다. 뻣뻣한 다리를 두어 번 주먹으로 두들겼다. 다시 감각 없을 거란 김신부의 오른다리는 몇달 새 티가 나게 가늘어졌다. 준호는 피로한 눈두덩을 손등으로 문질렀다. 겹겹이 쌓인 짜증과 피로가 시야를 뿌옇게 만들고 있었다. 담배 피고 싶으심 나가서 직접 사 오시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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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12. 16. 23:16

[최김] 좋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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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최김

왕겜 au 벽너머에서 돌아온 마에스터 베드로와 젊은 나이트워치 사령관 아가토



아가토가 나이트워치의 새 사령관으로 부임하고 두어 달 지났을 때, 와이들링 차림을 한 사내가 바늘 같은 눈발을 뚫고 북으로부터 다가왔다. 온 벽이 발칵 뒤집혔다. 소란 중에 나이 많은 나이트워치들이 외쳤다. 베드로, 베드로다. 정말 베드로인가? 그럴 리가, 그가 살아 있을 리가. 신을 찾는 탄식이 여기저기 들렸다. 아가토는 벽 위로 올라가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그닥 크지 않은 덩치의 중년이 곰 머리로 만든 모자를 벗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왼쪽 뺨에 난 기다란 흉터가 가장 먼저 보였다. 마침내 베드로가 성벽 안으로 들어왔을 때, 처음 마주친 눈동자를 아가토는 이후로도 오래 잊지 못했다. 북녘의 얼음이 서린 시선이었다. 어린 대장 까마귀의 깃털이 쭈뼛하게 섰다.

벽의 젊은 현자였던 베드로는 이곳의 마에스터를 오랫동안 보좌했다. 그리고 아가토가 검을 막 잡을 나이일 때쯤 숲으로 나갔다가 와이들링에게 납치되었다. 말이 납치다 뿐이지 당시 나이트워치 초소에서는 온갖 불길한 추측이 이어졌다. 와이들링이 그를 토막 내 죽였을 것이다, 그리즐리베어에게 잡아 먹혔을 테다 하는 말들이 아무렇지 않게 떠돌았다. 그래서 나이 든 까마귀들은 살아온 베드로의 모습에 더더욱 경악했다. 사지를 멀쩡하게 달고 돌아온 베드로는 무덤덤한 얼굴로 무기를 풀었다. 그의 검 또한 와이들링의 것이었다.

- 베드로, 꼴이 와이들링과 분간이 안 가는구만.

중년의 나이트워치 하나가 그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베드로가 무덤덤히 그를 껴안았다.

- 어떻게 살아남았나?
- 와이들링과 짐승을 죽이며 살았지.

나이트워치는 소리 내어 웃었다. 역시 북벽의 현자군. 다른 중년들이 베드로를 둘러쌌다. 아가토는 사령관 처소의 발코니에 서서 그를 내려다 보았다. 베드로의 허리춤에 달린 은색 와이들링 장검을 보며 아가토는 그 사내를 떠올렸다. 억센 억양과 눈발에 그을린 검은 손, 제 얼굴을 붙들고 노려보던 눈동자, 뒤틀린 웃음, 모두 눈발 같이 흐리게 느껴졌다. 사내의 거친 손 감촉이 기억나지 않았다. 불 앞에 다리를 꼬고 느긋이 앉아 저를 보던 얼굴의 색도 희미했다. 까마귀, 라고 저를 불렀다. 그것만은 기억났다. 여유롭고 낮아서 아래로, 아래로만 깔리던 목소리. 아가토는 돌아섰다. 사령관실로 들어가고서도 베드로가 가진 검날 위에 사내가 갖고 있던 검날이 교차되어 떠올랐다. 기억을 새것처럼 제련할 수만 있다면 그러고 싶었다.






아가토는 베드로를 사령관실로 부르자마자 비어 있던 마에스터의 자리를 맡아 달라고 청했다. 베드로는 사령관실을 낯설어하는 표정으로 둘러 보고, 아가토를 아래위로 훑어 보았다.

- 귀족 자제님께서 어째 여기까지 오셨소?

베드로의 목소리는 던지듯 도발적이었고 거침이 없었다. 묵직한 도발이라고 아가토는 생각했다.

- 저희 가문에는 검을 쥔 채 죽은 조상들이 많습니다. 다만 저는 제 검으로 누구를 지킬 기사가 되고 싶진 않았을 뿐입니다.
- 웃기는군. 벽을 지키는 것은 괜찮단 말인가?
- 사람이 아니니까요. 저를 바칠 자는 오로지 신입니다.
- 사령관이라고 앉혀 놓은 놈이 벽을 지키는 의미가 뭔지도 모르는군. 마에스터 자리가 여태 비어 있던 이유도 알 것 같다.
- 그러는 새 마에스터께선 검을 잡아 보아 아십니까?

베드로는 슬며시 웃었다. 그제야 붉은 불빛에 비친 아가토의 얼굴이 자세히 보였다. 귀족으로 자란 얼굴은 까마귀답잖게 티 하나 없이 깨끗했다. 구김 없이 맑은 얼굴이었다. 팽팽하게 두 시선이 부딪쳤다. 오래 노려보고서야 베드로는 생각을 고쳤다. 젊은 범과 같은 얼굴이다. 아직 상처 하나 입지 않은, 패기롭고 단단한.


- 마에스터.

아가토가 눈을 내려깐 채 그를 불렀다. 베드로에게 낯선 호칭이었다.

-벽 너머의 지도가 필요합니다. 와이들링의 거처가 표시된 지도말입니다. 


그가 베드로의 앞에 가까이 다가왔다. 덩치보다 좀 더 큰 인영이 시커멓게 베드로의 이마를 넘나들었다. 아가토는 제 망토 자락을 털고 바로 섰다. 나이트워치의 칼자루가 빛났다. 


- 도와주십시오. 찾아야 할 게 있습니다.

새파랗게 어린 나이트워치 대장은 나이답게 곧은 눈을 갖고 있었다. 베드로는 안경을 벗어 내려놓았다. 오랜만에 쓴 것이 통 적응되지 않았다. 아가토의 얼굴이 잠깐 흐렸다.

- 어이, 잘 들어라. 뭘 찾는진 몰라도 벽 밖에 까마귀가 탐낼 만한 물건은 없다.
- 와이들링과 오래 뒹굴어 아시는 게 많은가 봅니다. 소용은 제가 판단합니다.

얼굴색에 부서진 자존심조차 감추지 못하는 어린애였다.

- 너는 추위를 모른다. 밤과 밤을 잇는 심연도, 살에 붙는 눈 결정의 차가움과 걸음마다 남는 제 몸의 고름 냄새도 모르지. 알 거라 생각하나?

베드로는 쏟아내듯 말하고도 제 격양된 모습이 부끄럽지 않았다. 촛불이 일렁여 아가토의 얼굴 그림자가 깊어졌다. 검은 밍크와 곰가죽으로 둘러싼 아가토는 초 하나를 더 켜는 손짓에도 버릇처럼 우아함을 갖고 있었다. 우아한 까마귀라니, 베드로는 입술을 틀어 웃었다.

- 찾아야 할 게 아니라, 찾아야 할 사람인가?

금세 굳는 표정을 보니 베드로는 벽 너머에다 기둥서방이라도 둔거냐고 천박한 농을 던지고 싶어졌다. 제법 진지한 얼굴의 코앞까지 들이대고 부러 빈정댈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사령관을 빤히 볼 뿐이었다. 이어질 말을 기다렸으나 아가토는 되려 그가 입을 열길 기다리는 듯했다. 아가토가 장갑을 벗었다. 지루하고 갑갑한 표정 위에 마른세수를 했다. 주무르다 만 반죽처럼 엉망인 살덩이가 긴 손등 위에 흉터로 덧붙어 있었다.

- 고운 손에 어울리지 않는 이빨 자국이구만.
- 개에게 물어 뜯긴 적이 있습니다.
- 개?
- 지도, 그려 주십시오. 보상을 드리겠습니다.

둘의 호흡이 잠깐 긴장을 담고 멈췄다. 이내 베드로가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말을 끊고 덤비듯 '보상'을 이야기하는 어린 사령관의 고집에 날이 서 있었다. 아이는 아이구나, 싶을 수밖에 없었다.

- 보상이 뭘지 기대되는구만.

검은 매의 깃으로 장식된 아가토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들겨 주고 돌아섰다. 아가토는 남은 채 그의 책상 위 남겨진 안경을 내려다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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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최김

[김최] 갇힌



루코님께서 풀어주신 퇴행 아가토 썰을 기반으로 썼습니다! 훌륭한 썰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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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호는 다시 범신의 손을 쥐었다. 서른 살의 아이는 또 도리질을 치다가, 커다란 손으로 범신의 손목을 틀어잡고 멋대로 당기다가, 끙끙 앓는 소리를 냈다. 몸은 서른 그대로의 녀석인지라 당기면 당기는 대로 범신의 상체가 흔들렸다. 준호야, 하고 부르니 아이는 듣지 않겠다는 양 눈을 꽉 감아 버렸다. 큰 덩치를 웅크렸다. 등이 둥글게 말렸다. 그대로 병실 바닥에 주저앉자 환자복 바지에 누렇게 먼지 자국이 남았다. 범신의 팔이 따라서 아래로 끌려갔다. 준호는 씩씩거리며 김신부의 정강이께를 주먹으로 쳤다. 아이고, 그는 급기야 탄식을 뱉었다. 


- 어이, 아그네스! 아그네스!


결국 그녀의 도움이 있어야 했다. 고집불통인 녀석이 아그네스의 말은 또 듣는 게 신통했다. 아기들을 많이 봐서 그렇다고, 덩치만 서른이지 지금 최신부님은 애나 다름 없잖아요, 하고 씁쓸하게 웃던 그녀 얼굴을 떠올렸다. 멋대로 병원 복도에 대고 질러댄 소리를 듣고 용케 달려와준 게 고마웠다. 


- 신부님, 왜 또 화가 났어요. 응?


그녀가 등을 도닥이고 안아다 일으키자 저보다 절반은 작아 보일 아그네스에게 매달린 녀석이 뾰족하게 범신을 노려보았다. 질질 끌린 발 아래 슬리퍼는 벗겨지고 짧둥하게 올라간 바짓부리 아래로 복숭아뼈가 드러났다. 발목을 멋대로 꺾고 뭉개는 모양새가 딱 대엿 살 가량 아이의 응석질이었다. 이전이라면 헛웃음 지었을 테지만 범신은 도저히 웃을 수 없었다. 텁텁한 입에다 마른침을 삼켰다. 아그네스가 겨우 녀석을 끌어다 침대에 앉혔다. 주먹으로 눈두덩을 비빈 준호가 그녀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 김신부님 따라갈래요.


퇴행증상이라고 했다. 아이나 다름 없는 사고방식으로 바뀌고, 커서 겪은 일 대부분을 기억 못한다 했다. 일종의 방어기제란 의사의 말에 김신부는 속에서 홧기가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핏덩이를 데리고 다니는 게 아녔다. 새파란 녀석은 역시 안된다. 날을 세우고 녀석을 병원에 집어 넣어 버리라고 했다. 범띠 사제는 또 찾으면 된다고. 


준호의 증상은 지난 가을, 사제 서품을 받고서 처음 한 구마예식이 끝나고부터 나타났다. 지독한 사령이었다. 어린 여자아이를 숙주로 삼은 것만 보아도 그러했다. 며칠을 싸워가며 힘들게 구마에 성공했을 때 아이가 뿜은 피를 그대로 맞은 준호는 지나치리만치 무딘 모습을 보였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준호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범신은 그제야 부마자가 그의 어린 여동생이 죽었을 나이와 비슷한 또래였음을 깨달았다. 사제관을 찾아갔을 때, 준호는 범신을 보자마자 빽 소리를 지르고 매달렸다. 신부님, 도망쳐요, 도망쳐요, 개가, 무서워요. 범신의 머릿속이 희게 지워졌다. 피를 맞고 멍하니 서 있던 녀석을 보고 알았어야 했다. 미리 읽어냈어야 했다. 화가 치솟아 빈 주먹을 쥐었다. 


대엿 살 아이의 수준으로 멈춰 버린 준호는 그 시간대를 살고 있는 듯 했다. 아이의 시간은 범신과 있는 낮동안 느리게 흘렀다. 이따금 창밖을 보고 멍하니 있는 준호는 스스로를 가둔 것처럼 말을 걸기도 어려워 보였다. 밤이 되어 범신이 돌아가려고 하면 떼를 쓰고 매달렸다. 범신은 저를 올려다보는 녀석의 눈이 싫었다. 자신이 알지 못하는 시간대에 갇혀서 저를 부르고 저를 당기는 그 눈이 싫었다. 


- 얼른 다녀오세요. 제가 보고 있을게요.


아그네스가 고개를 끄덕여 보이길래 미련 없이 돌아섰다. 가지 말라고, 서른 살 아이의 징징대는 목소리가 따라붙었다.


고작 그게 뭐 그리 힘들었다고, 뭐가 힘들었다고. 멍청한 녀석이, 제게 말도 않고.









나오자마자 담배에 불부터 붙이고 병원 건물을 올려다 보았다. 5층 창문에 매달려서 환자복 입은 상체를 절반이나 내고서 신부님, 신부님, 하고 부르는 소리가 길가까지 쩌렁쩌렁했다. 범신은 담배 연기를 삼키고 돌아섰다. 


여동생은 애를 보느라 고깃집을 그만두었다. 산후우울증이 있는 것 같아 요즘 바짝 신경이 쓰였다. 들를 때마다 동생은 조금씩 말라가고 있었다. 조금만 내버려두면 우는데, 아이 울음 소리가 요즘은 그렇게 듣기 싫다고, 고해처럼 제게 고백했다. 범신은 안겨 울고 있는 조카를 보면서 퇴행한 준호의 눈빛을 떠올렸다. 내버려두면 운다고. 먹먹함을 안고 여동생의 집을 나서는데 아그네스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범신이 돌아갔을 때 준호는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병실이 아비규환이었다. 커튼은 잡아뜯기고 꽃병들은 깨져 물과 사금파리가 엎어진 과자 조각들과 함께 바닥에 뒤엉켜 있었다. 범신은 물자국을 내며 준호에게 다가갔다. 새빨간 눈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 그만 하자, 준호야.


제발 그만 하자. 무릎을 감싸고 있는 손을 풀어 보았다. 녀석의 손바닥에 온통 피가 고여 있었다. 부서진 꽃병에 대고 뒹군 탓인지, 이제 보니 얼굴에도 잔 상처가 보였다. 준호가 범신의 무릎 위를 가만히 더듬었다. 눈치를 보느라 처진 눈꼬리로 힐긋힐긋 범신의 얼굴을 훔쳐 보았다. 범신이 아이의 팔을 끌어다 품에 안았다. 저보다 큰 덩치가 폭하니 안겼다. 


- 저도 데려가세요. 


여태 안심치 못하고 등을 더듬어다 옷깃을 늘어쥐는 투가 안타까웠다. 범신은 준호의 뒤통수를 쓰다듬어 주었다. 준호가 그의 어깨에다 코를 묻었다. 품을 맞대고서도 모자란지 옷깃 당기는 손을 더 보챘다. 


- 앞으로 실수 안할게요. 데려가 주세요.


범신의 마음 한가운데가 가라앉았다. 뻥 뚫린 것 같았다. 아가토. 탄식처럼 내뱉었다. 세례명을 기억하지 못한다 했는데도 준호는 고개를 끄덕이듯 그의 어깨에다 얼굴을 부볐다. 


녀석은 잠들고서도 한참 끙끙거렸다. 앓는 동안 잠꼬대를 하는 듯도 했으나 범신이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시계를 보자 자정이 넘어 있었다. 범신은 담배냄새 배긴 제 자켓을 벗어다 준호의 이불 위에 덮어 주었다. 아이의 끙끙거림이 천천히 줄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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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최김

[최김] 겨울 바다



범신은 뽀얗게 김 서린 안경을 벗어두고 첫 젓가락을 들었다. 녀석이 끓인 라면은 정말, 억울하다 싶을 만큼 맛있었다. 고개를 한 번 옆으로 기울이고 맞은편에 앉은 녀석을 빤하게 보았다. 


"너 뭐 나 몰래 딴 거 넣었냐?"

"맛있으면 그냥 맛있다고 하십시오."

"그래, 졸라게 맛있다. 뭐 넣고 끓였냐?"

"사랑이 들어가서 그래요."


또 까분다 싶어서 헛웃음을 지었다. 조금만 틈을 주면 좋다고 방방 날뛰고 덤비는 꼴이 개나 토끼와 다를 진배 없는데 법사놈은 녀석의 무얼 보고 제대로 된 범이라고 호들갑 떨었는지, 범신은 잘 이해가 가질 않았다. 여수로 출장 간다니까 바닷가라며 신나서 좋아하기에 한번 크게 혼을 냈고, 기차간에서도 신나서 달떠 있기에 머리를 쥐어박았는데도 뭐가 아직도 이리 신났는지. 핏덩이는 핏덩이구나 싶기도 했다. 장엄구마는 내일 밤으로 예정되어 있었다. 부마자는 늙은 어부였고, 이야기를 들으면 별것 아닌 사령이라고 예상되었다. 그러나 구마란 의식이 그리 간단하기만 하면 얼마나 좋을 텐가. 김신부는 준호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녀석은 밥그릇 하나만큼 덜어간 면발을 그새 다 먹고 또 젓가락 가득 집고 있었다. 볼을 부풀려가며 먹는 모양새가 아직 영락없는 어린애였다. 범신이 생각을 떨치는 동안 준호는 무언가 생각났는지 땀 젖은 이마를 문지르며 베시시 웃었다.


"신부님, 우리 이거 먹고 밤바다 보러 가요."


급기야는 화가 치솟고 말았다. 범신은 젓가락을 소리 나게 놓았다. 


"임마, 놀러왔어?"


혼난 강아지마냥 어깨를 움츠리고 빈 젓가락을 빨더니 그제야 풀이 죽어서 죄송합니다, 하는 녀석을 두고 범신은 일어섰다. 자켓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저를 부르는 녀석의 목소리가 문 닫힐 때까지 따라붙었다.








부러 민박을 외딴 곳으로 잡은 이유는 사령 때문이었다. 하루 묵고 부마자를 보러 갈 요량인데 굳이 노출시킬 이유가 없었다. 때문에 민박집 근처는 불빛이 하나도 없었다. 바다 비린내를 따라 범신은 한참 걸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모래가 밟혔다. 벌어진 구두코로 젖은 모래 알갱이들이 들어와 양말이 금세 축축해졌다. 신발, 사야 하는데. 또 잊었다. 갑갑해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라이터 켜는 동안 달빛만 남은 바닷가에 잠깐 불꽃이 일었다. 바람 탓에 여러 번 부싯돌이 헛돌았다. 겨우 불 붙이고서 작게 욕을 내뱉었다. 바닷바람이 한 번 불자 추위에 볼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날 세운 겨울 바다 바람을 무시한 제 안일함에 또 화가 났다. 몇 걸음을 더 걷다가 멈춰섰다. 뒤를 돌아보자 준호의 기다란 인영이 보였다. 범신은 도로 돌아서서 걸었으나 준호가 금세 따라잡았다. 헥헥대는 숨소리가 가까워지자마자 어깨에 패딩코트가 걸쳐졌다. 무시하고 걸음을 떼려는데, 뒤에서 어깨가 휘감겼다. 준호의 차가운 뺨이 범신의 귓불에 닿았다.


"죄송해요."


죄송해요, 정말 죄송해요. 여러 번 반복하는 말에다 뭐가 죄송하냐 되묻고 싶은 뾰족함을 억누르고 범신은 뒤로 손 뻗어 녀석의 뒤통수만 벅벅 쓰다듬어 주었다. 얼마나 뛰었는지 머리 밑까지 땀이 차 있었다. 


"조금만 걷자."


누그러진 말투에 그제야 안심한 듯 팔이 풀렸다. 범신은 준호를 힐끗 바라보았다. 달에 비친 코 끝이 새빨개져 있었다. 


"예민한 놈이 추위까지 많이 타는구만."

"신부님 몸이 너무 차가워요. 들어가요."

"조금만 걷자고, 새끼야. 밤바다 보자며."


시무룩해질 얼굴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딱 이런 바닷가 마을에 살던 초등학교 교사가 하나 있었어. 독실하고 착실하고, 니 나이쯤 되는 여자."


범신이 다시 걷기 시작하자 준호는 곁에 붙어 따라 걸었다. 바람은 조금 줄어 있었다.


"부마 증세를 보인다길래 가브리엘 신부님이랑 찾아갔는데, 첫날은 실패하고. 음기 약한 절기니까 일주일만 더 기다렸다가 예식을 하자고 우겼지, 내가."


범신의 걸음이 느려졌다. 준호는 그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틀 뒤에 목 매달아서 죽었다."


말을 끝내고 범신은 눈을 들어 하늘을 보았다. 바닷가 위에 뜬 보름달이 제법 환했다. 내일도 맑으면 좋으련만 싶었다. 그는 걸음을 멈추고 준호를 향해 섰다. 


"동생 기일 얼마 안 남았지? 그 전에 끝내고 가자."


손을 뻗어서 녀석의 어깨를 두들겨 주었다. 울상 짓던 얼굴이 조금 풀리더니, 긴 속눈썹을 내려깐 채 잠깐 떨고, 다시 눈 뜨고선 범신을 향했다. 범신은 아이의 그 시선을 좋아했다. 온전히 저를 보는 시선은 어리고 가시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예, 하고 대답하는 녀석의 손을 찾아 쥐었다. 잡은 채로 민박집을 향했다. 내 몸이 차갑다고? 니가 더 냉골인 거 같은데 확인해 볼까? 물으니 아니, 아뇨, 하고 말을 더듬기에 소리 내서 껄껄 웃어 버렸다. 두 사람의 발자국은 파도에 쓸리기 전까지 오래 달빛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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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최김

[김최전력60분] 첫눈





포로로 떨어지다가 다시 위로 흩날리고, 내려올 듯하다가도 또 도망가는 눈송이들 모양새를 보니 한참은 더 바람이 불 것 같았다. 멀리서 온 버스들은 천정에 하얗게 이미 눈을 쌓아 놓고 있었다. 준호는 머그잔에 코를 박고 커피 냄새를 맡았다. 사제관에 늘 틀어박혀 있다 이렇게 가끔 나오는 일이 달고 따뜻하고 고와서 한없이 재밌었다. 김신부는 신난 준호에게 눈 맞은 강아지 같다 했다. 하다 못해 개를 비교하십니까. 뾰로통하게 맞받아쳐도 기분 좋은 것은 사실이었다. 눈은 거센 바람을 타고도 용케 나렸다. 준호는 눈을 감고 흩어진 눈송이들이 쌓일 곳을 상상했다. 잃어버린 우산이 모인 지하철 칸, 펜뚜껑들이 모인 학교 마룻바닥 아래, 쌓이지 못하고 흩날리고 또 날리다가 모인 눈송이들의 섬.


- 너는 참, 나이도 안 든다.


김신부의 말이 영 갑작스러워서 준호는 마주보고 앉은 그를 동그마니 쳐다보았다. 스승의 말을 해석하느라 고개까지 기울였다.


- 신부님, 신부님 저 보신 지 아직 1년도 안 되었습니다.


김신부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 나도 안다, 이 녀석아. 어려 보인단 말이다.

- 예에.


부러 말을 끌며 끄덕였다. 뒤로 말끔하게 빗어넘긴 김신부의 머리칼에 카페의 주홍 불빛이 반들반들 비쳤다. 영신의 구마가 끝나고 김신부는 다시 머리를 빗었고 안경을 새로 맞췄으며 사제복을 다렸다. 준호가 말끔해진 그의 모습에 적응하는 데에도 시간이 걸렸다. 언제부턴가 이렇게 김신부와 함께 밖에 나올 때 그는 마음이 뿌듯해졌다. 하루는 학교 동기가 있는 성당엘 김신부와 함께 간 적이 있었다. 저희 신부님입니다, 하는 말이 뱉어 놓고도 간지러웠다. 일을 보고 돌아나오는 길에도 자꾸 입에 감돌았다. 저희 신부님입니다, 저희 신부님입니다.


카페에는 성가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연말에 흔한 일이나 어쩐지 이마저 기분이 좋았다. 


- 눈이 쌓일까요?

- 두고 봐야지. 


설탕 깐 종이가 테이블 위에 뒹굴고 있었다. 몇 개는 준호 손에서 찢겨나가고 또 접혀 본래 형태가 없었다. 김신부는 쓴 커피를 싫어했다. 카페 들어오자마자 창가에 앉으시더니 아무 거나 시키래서 저 마시는 아메리카노를 시켰다. 한 입 대자마자 넌 뭐 이런 걸 마시냐고, 또 시럽은 싫다고 우겨서 각설탕을 반 주먹 받아다 들이부었더랬다. 준호는 마지막 종이를 끌어다 꼬물꼬물 손을 놀렸다. 각설탕 종이는 서른의 남자 손에 곰살맞게 작았다. 


- 나오니까 좋다. 눈 오니까 좋고.

- 예.


정말 좋네요, 하는 말은 꺼내지 않았다. 종이를 내려다본 채 미소를 짓자 볼이 살포시 부풀었다. 조금이나마 눈이 쌓였으면 싶었다. 손때 탄 종이학이 컵받침 위에 자리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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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최김

[최김/김최] 빨강앵초




아침까지 쌓였던 눈이 노을 지기도 전에 벌써 녹아 질척질척했다. 준호는 목도리를 풀고 위를 보았다. 가톨릭병원의 푸른 간판 위에도 눈이 녹아 묽게 흐르고 있었다. 새벽 내내 눈 내린 탓인지 하늘이 몹시 맑았다. 시린 코끝을 찡그리고 바삐 발 옮겼다. 며칠만에 오는 것이니 마음이 달았다.



김신부님께서 어쩐지 어제는, 좋은 꿈 꾸신 거 같아요. 병원 복도를 함께 걷는 동안 아그네스가 웃었다. 왜요? 하고 준호가 물으니 그녀는 생각을 이으려 고개를 기울였다가, 다시 준호를 마주하고 대답했다. 그냥 그런 기분이 들 때가 있어요. 최신부님 오시는 날이기도 하잖아요? 눈을 휘며 웃는 수녀에게 준호는 손을 내저어 보였다. 그러면 악몽 아니면 다행인 걸요. 문고리를 잡고서 가볍게 목례하고, 멀어지는 아그네스의 뒷모습을 보고, 심호흡을 한 번 하고서야 병실로 들어섰다. 



그는 들어가자마자 가습기를 켜고 커튼을 쳤다. 아그네스는 꼼꼼하고 정성스러웠다. 준호가 자주 오지 못해도 이 병실은 흐트러진 적이 없었다. 그가 보았던 김신부의 모든 거처들 중 가장 깨끗하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달라진 온도에 앞머리 아래 땀이 맺혔다. 준호는 손가락 끝으로 로만칼라를 살짝 늘어뜨렸다. 시선이 침대 옆 협탁으로 향했다. 병실에 둔 빨강앵초는 철이 지나고 겨울이 깊는 동안 붉은 꽃을 지우고 죽은 것처럼 색 없이 고요했다. 구마신부의 병실에는 아무나 들어올 수 없었으니, 빨강앵초가 봄에 가졌던 붉은 색을 기억하는 자 또한 드물었다. 준호는 빨강앵초의 마른 대를 쓸어 보았다. 내내 가습하는 병실인데도 습기 하나 먹지 못하고 뻣뻣하게 굳어 있는 가지가 속상했다. 식물 키우는 데 재주가 없는데, 영신이 어렵게 구해온 것이라 거절할 수도 없어 여기 놓아둔 게 벌써 반 년이 넘어 있었다. 그 때만 하더라도 그는, 김신부가 깨어날 거라 믿었다. 



영신이, 남자친구 생긴 것 같아요. 좀 말려 봐요. 화분과 침대는 붙어 있으나 언제부턴가 병자를 옆에 두고 화분에 대신 말 거는 일이 버릇 되었다. 준호는 누운 김신부에게 말 걸 자신이 없었다. 대답 없음보다 제 말 뒤에 이어지는 고요가 더 고통스러웠던 탓이다. 화분 흙에다 말을 묻으면 고요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을 수 있었다. 검은 흙은 침묵을 당연하게 만들었다. 이게 베드로의 꽃이라 했던가, 영신의 깊은 마음에 위로 받는 것은 세상 모르고 누운 김신부가 아니라 그의 곁을 지키는 최준호 자신이었다. 커튼 너머 걸러 온 누런 빛이 링거 튜브를 비췄다. 겨울의 병실은 아무리 난방을 해도 지워지지 않는 한기가 있었다. 오래 있으면 코가 시리고 발이 저렸다. 숨을 참으면 수액 떨어지는 소리마저 들릴 것 같이 조용한 일인실이, 그는 마침 질리던 참이었다. 준호는 병실 반대쪽 벽 보호자 의자에 앉았다. 이불 밖으로 나온 김신부의 검은 두 발바닥이 보였다. 학장신부님이 안부 전하라십니다. 요즘 많이 바쁘세요. 마태오 수사님도 저번 주에 다시 서울 오셨어요. 조만간 뵈러 온다고 하시네요. 다시 똑, 똑, 끊어지는 물방울 소리 속에서 준호는 무릎 위 목도리를 구겨 쥐었다. 성모상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차라리 죽지 그랬어요.



내뱉지 못하고 품은 말이 스스로를 마른 가지처럼 찔러댔다. 준호는 품에서 붉은 알의 묵주를 꺼냈다. 손에 쥔 채 김신부의 두 발바닥을 노려보았다. 한참을 있고서야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 곁으로 다가갔다. 누운 김신부의 얼굴을 내려다 보았다. 그래서 어제, 무슨 꿈 꾸셨는데요? 물음 끝은 여전히 고요였고, 준호는 때로 이 무게 속에 함께 가라앉길 원했다. 혹은 작은 화분 속에 묻힐 수 있다면, 하고 바랐다. 눈두덩을 손가락으로 꾹꾹 누른 준호가 김신부의 손에 묵주를 쥐어 주었다. 이불을 끌어다 발도 덮어 주었다. 기도문은 짧고 나가는 발자국은 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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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최김

[검은 사제들] 낮은 곳으로



- 신부님께서도 그런 적 있지 않으십니까? 기억에 무게가 더해지면 그건 더 이상 기억이 아닙니다.


준호는 말을 멈추고 장작 몇 개를 모닥불에 집어 넣었다. 불꽃이 화르륵 일어 김신부의 얼굴을 환하게 밝혔다. 잠깐 드러났다 다시 어두워진 그의 얼굴을, 부제는 한참 들여다보고 있었다. 할 말은 많은데 취기로 혀가 얼얼했다. 


- 가라앉고 싶었습니다. 한도 끝도 없이 가장 낮은 곳으로……. 그곳에는 뭐가 있을까요…….


고개를 떨궜다. 불의 열기가 사라진 얼굴에 서늘한 흙 냄새가 와 닿았다. 구토감까지 함께였다. 그러나 준호는 얼굴을 들지 않았다. 김신부는 모닥불을 향했던 철망을 거두었다. 망 사이에 끼워 둔 오징어는 고소한 냄새를 풍기며 적당히 그을어 있었다. 뜨거워 몇 번을 땅에 놓치고서야 기어이 몸통을 찢어 입에 물었다. 짭쪼릅해서 침이 돌았다. 


- 고통이 있겠지. 구천을 떠도는 영들과, 음, 그래, 그리고 네 놈 노리는 개의 울부짖음?


질겅거리며 입꼬리 한 쪽으로 웃었다. 무릎 새에 고개를 파묻고 있던 준호가 어느새 얼굴을 들고 저를 노려보고 있었다. 어린 범의 독기 어린 눈을 보고 신부는 다시 한 번 웃었다. 얼굴이 붉어진 것이 영 이 동네 소주가 독했나보다, 취기 탓에 제 말의 무게가 더했나보다, 기억이니 뭐니 쓸데없이 주절거리는 것을 보니 녀석 정말 많이 취했나보다, 싶었다. 준호의 얼굴이 다시 아래로 떨어졌다. 무언가 웅얼거리는 듯도 하고, 슬퍼하는 듯도 하는 정수리를 김신부가 한참 바라보았다. 


- 야, 아가토.


대답이 없었다.


- 준호야.


그제야 얼굴을 들었다. 가장 큰 오징어 다리 하나를 떼어다 내밀었다. 부제는 오징어 다리를 받아 들고도 생전 처음 보는 것마냥 빤히 손바닥에 놓고 있다가, 얼마 지나고서야 입에 넣고 우물거렸다.


- 생각을 깊게 하지 마. 너무 깊으면 맑지 못한다.


준호는 미간을 구겼다. 이제는 구토감 대신 한기가 들고 있었다. 부르르, 한 번 어깨를 떨고 팔뚝을 감싸며 웅크리자 김신부가 제 엉덩이 아래 깔고 있던 담요를 꺼내서 건네 주었다. 준호는 담요를 어깨에 감싼 채 코를 한 번 훌쩍이고 모닥불을 응시했다. 장작 하나를 더 집어 넣었다. 타오르는 불을 보며, 김신부는 이곳 시골에 온 것이 어째 출장 아닌 휴가 같다 여겼다. 어린 범과 보내는 산골 밤은 충분히 고즈넉했다. 숙소로 잡은 산장도 마음에 들었다. 바로 이런 것이 영적이라 할 수 있잖은가, 싶어 속으로 헛웃음이 났다. 문득 다음에는 영신을 데려올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녀석이 수능 본 뒤에 넉넉한 시간 동안 셋이 다니는 것도 꽤 재밌을 터였다. 김신부는 불 너머 준호를 바라보았다. 누그러진 눈매만큼, 취기가 조금 식은 듯도 했다. 취한 두 범이 마주보고서 한동안 말이 없었다. 이번에는 몸통 조각을 내밀었다. 준호는 김신부의 손에 묻은 그을음을 한번 보고, 제 손에도 옮은 그을음을 문질러 보았다. 


- 항상 맑아야 합니까? 우리는?


핏덩이의 목소리에 무게가 실려 있었다. 김신부는 대답하지 못했다. 우리는 항상 맑아야 하느냐고. 그러하다면 나는 어떠냐고, 네 녀석 보기에 맑아 보이느냐고 묻고팠다. 필시 요 녀석을 먹인답시고 제게도 취기가 많이 오른 것이라고 여겼다. 붉은 부제의 얼굴을 보며 김신부는 오징어를 사납게 씹었다. 잇새로 끼는 지루함. 


- 꼰대 새끼. 술이나 먹어라.


잘박하게 술이 남은 소주병을 그가 들어 보이자 준호는 순순히 종이컵을 내밀었다. 잇자국이 가득하고 종이벽이 눅눅한 컵에 소주가 절반 찼다. 김신부는 영신을 생각했다. 아이는 서울 꽤 유명한 대학의 사회복지학과에 가고 싶다 했다. 머리도 이제 제법 길어 단정한 커트를 유지하고 있었다. 아가토 부제님요, 되게 사람이 먹먹해 보여요. 밝은데, 뭔가 먹먹해요. 언젠가 아이가 스치듯 했던 말이 계속 맴돌았다. 김신부는 안에 무엇이 가라앉아 있을지 모를, 검고 깊은 물을 떠올렸다. 물은 물일 뿐이었다. 강바닥도 물이 빠지면 드러나게 마련이다. 빛이 없으면 탁해 보이고, 그 깊이를 두려워하면 속이 보이질 않는다. 아가토의 작은 머리통이 아래로 규칙 없이 주억거리는 것을 보며, 그에게 들어찬 물은 얼마일지 가늠하고 싶다 생각했다. 그가 소주병 째로 입에 가져가 들이키는 동안 아가토는 컵에 남은 소주를 홀짝였다. 모닥불이 얼얼하게 붉었다. 


- 저 진짜 술 안 마신다고요 원래.


말투는 의도와 달리 어물어물하고, 자꾸 뾰로통해졌다. 이 지역의 소주는 풀 냄새 같은 은은한 비린내가 나는 것 같았다. 그것이 산장을 둘러싼 풀 내음과 구분 가지 않았다. 붉은 불이 점점 검어지더니 결국 잠에 빠졌다. 야, 아가토, 아가토, 하고 부르는 김신부 목소리가 멀었다. 손길이 가까운가 싶더니 서늘하고 큰 손이 제 몸을 감싸 들어올렸다. 무슨 서른 먹은 남자놈이 이렇게 가벼워, 하는 소리가 들렸다. 김신부의 등에 업혀 산장 안으로 들어가는 동안 볼 닿은 어깨가 낮게 울렸다. 그 소리가 낮게 부른 성가인 줄 깨달은 것은 산장 안으로 들어가고서였다. 보드라운 시트가 볼에 닿자 준호는 얼굴을 부비며 잠에 빠져들었다. 신부님, 하고 입속으로 불렀다. 할 말이 더 있었던 것 같은데, 도통 어지러워 생각이 나질 않았다. 김신부가 그의 어깨까지 이불을 끌어올려 주었다. 담배 냄새가 은은히 났다.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이 있었다. 나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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