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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린스란 중장편/필연의 날개

필연의 날개 1






소린은 눈 뜨자마자 본 것이 안개라고 생각했다. 그는 꺼져 가는 의식 속에서 한때 에레보르를 멀리 벗어난 외딴 숲, 한여름에 보았던 짙은 안개를 떠올렸다. 사냥은 요원했고 이른 아침이지만 어둑하기 그지없는 숲을 벗어날 때에, 어린 소린은 어른 난쟁이들의 호위를 받아야 했다. 갈가마귀를 타고 에레보르까지 가는 길은 매우 멀었다. 그는 갈가마귀의 목덜미를 힘껏 쥔 채 안장 앞으로 바짝 당겨 앉고 속도를 냈다. 곧 어른들을 앞질러 나갔다. 선두에서 나는 스라인의 날개는 그의 키 세 배가 넘는 길이였으며, 활짝 편 크기는 웬만한 맹수들도 그 크기만으로 압도할 정도로 거대했다. 두린의 피를 받은 난쟁이들은 유독 아름답고 커다란 날개를 가지곤 했다. 소린은 부친의 진갈색 날개를 보며 늘 제 날개를 상상하곤 했다. 곧 돋을 제 몫의 날개 색을 상상하면 마음이 간질간질하고 다급해졌다. 빨리 성년이 되고 싶었다. 빨리 날개를 갖고 싶었다. 날갯짓에 익숙해져 갈가마귀를 풀어주고 맨몸으로 활공하는 안개 속은 분명 지금보다 더 상쾌하고 부드러우리라.


"일어나라."


물을 끼얹는 것처럼 차가운 목소리였다. 소린은 순식간에 정신이 드는 것을 느끼며 눈을 뜨고 앞을 보았다. 그제야 제가 안개라 생각했던 것이 요정의 흰 날개라는 사실도 깨달았다. 깜빡, 깜빡, 두 번 눈을 감았다 뜨는 동안 머릿속이 맑아지고 상황이 읽혔다. 자신이 무릎 꿇고 앉은 곳이 요정왕의 궁전이라는 사실과 온몸이 묶였다는 것, 누군가 제 등을 붙들어 세우고 있다는 것까지 깨닫자 앞에 선 요정의 무표정한 듯 차가운 얼굴도 상황과 맞물리기 시작했다. 요정의 큰 키와, 그 키의 두 배는 넘을 것 같은 거대한 날개는 왕의 것답게 윤기가 넘치고 웅장했으나, 소린이 안개라고 착각할 만큼 보드랍고 섬세해 보였다. 소린은 스란두일, 이라고 속으로 발음했다. 그를 모를 리 없었다. 적어도, 두린의, 왕손의 피를 받은 난쟁이라면. 


"스란두일."


입으로 내뱉자 단번에 목에 칼이 들어왔다. 날 끝이 차가울 정도로 목이 탔으나 소린은 서두르지 않고 마른 침을 삼킨 뒤에야 뱉은 말을 고쳤다.


"요정왕이시여, 저는 스로르의 손자 소린입니다. 난쟁이왕의 친서를 들고 왔습니다."


스란두일이 그의 앞으로 한 걸음 내딛자 어두운 은색 로브 자락이 뒤의 날개를 쓸며 사락대는 소리를 냈다. 소린은 그가 제 코앞까지 다가와 고개를 숙여 눈을 맞출 때에 기묘한 냄새를 맡았고, 그것이 요정왕의 체향임을 깨달았다.


"난쟁이는 왕의 친서를 전달하기 위해 남의 땅에 함부로 침입하는가?"

"발각될 것을 알고 온 것입니다. 침입이 아닙니다."


그제야 가슴께 통증이 느껴졌다. 숨 쉬기가 힘들었다. 아까 맞은 화살 탓이리라 여겼다. 


소린은 저를 바라보는 요정왕의 얼굴에서 그 어떤 표정이나 감정도 읽어낼 수 없었다. 그의 말은 반은 맞고 반은 거짓이었다. 왕을 직접 만나 친서를 전하려 했던 것은 사실이나 혼자 요정의 숲에 몰래 들어온 것은 숲의 주인에게 침입과 다를 바 없었다. 스란두일의 손이 소린의 턱을 낚아챘다. 짙푸른 눈을 빤히 들여다보는 눈동자의 맑은 회색이 너무도 또렷해서, 소린은 제 속을 읽히는 것처럼 부끄럽기까지 했다. 난쟁이를 놓고 다시 반 걸음 물러선 요정왕의 자세는 흐트러짐이 없었다. 커다랗고 흰 날개가 한 번 펼쳐졌다가 다시 접혔다. 그가 짧게 손짓하자 옆에 선 요정 중 하나가 소린의 품을 뒤져 친서를 꺼냈다. 스란두일은 친서에 찍힌 두린 가의 낙인을 유심히 살펴보곤, 길고 흰 손가락으로 단번에 두 조각을 냈다. 소린은 제 아비의 친서가 두 갈래로, 다시 네 갈래로 찢겨 바닥에 흩어지는 것을 보고 놀라 일어나려 했으나 등 뒤의 손이 그를 짓눌렀다.


"날개도 나지 않은 미성년 난쟁이를 홀로 보낼 정도라면 너희 왕도 무사치 못한 모양이군."


소린은 입술을 씹었다. 


"스로르가 죽었다는 소문이 돌고 있어. 그게 사실인지 네가 확인해 주어야 할 것 같구나, 왕손이여."


둘 사이 잠깐 들어찬 침묵이 몹시 날카로웠다. 소린은 요정왕을 똑바로 올려다 본 채 말했다. 


"할아버지께서는 몇 년 전에 반란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저와 아버지, 두린 왕가를 따르는 난쟁이는 에레보르에서 모두 쫓겨나 청색산맥 근처에 숨어 지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정식으로 방문치 못하고 저 혼자 온 것입니다."


그제야 스란두일의 얼굴에 표정이 생기기 시작했다. 호기심에 가까운 의아함이었다. 소린은 말을 이었다.


"아버지께서는 검은 날개가 흰 날개와 어우르던 때를 생각하시고 전하께 도움을 요청하겠다 했습니다. 그리고 저희의 처지나 약속하는 보상을 모두 적어 저에게 맡기셨습니다. 방금 찢어 버리신 그 친서 안에 말입니다."


어린 목소리 끝에 날이 서 있었다. 소린의 목소리는 성년을 앞둔 두린의 난쟁이답게 힘 있고 묵직해서 소리 지르지 않아도 호통치는 느낌까지 들었으나 스란두일은 도리어 빙긋이 웃었다. 옆으로 걸음하자 찢어진 스라인의 친서가 그의 발 아래 뒹굴었다.


"스라인이 잘못 골라도 한참 잘못 골랐군."


왕은 다시 손짓했다. 소린은 저를 잡아 일으키는 손길이 거칠어 몸을 틀었으나, 날개도 없는 작은 난쟁이가 묶인 채로 요정 호위병 두엇을 이길 리 만무했다. 멀어지는 동안 돌아선 스란두일의 등, 흰 날개가 빛을 뿌려낼 듯이 느리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마저도 소린에게는 차가워 보였다. 그의 작은 몸이 호위병들에게 끌려 모퉁이 하나를 돌아 더 보이지 않을 때까지 스란두일은 고개를 돌린 채 소린을 마주하고 있었다. 발꿈치가 끌리고 다친 가슴께가 몹시 아파, 소린은 어금니를 악물어야 했다. 











요정의 활공은 숲을 결코 벗어나지 않는다. 동료와 짝지어 날며, 결코 서로의 눈을 벗어날 때까지 떨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스란두일의 선대부터, 즉 난쟁이와 지내기 전부터 지켜온 법칙이었다. 그렇게 해야 날짐승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을 수 있었고, 행여 날개 달린 다른 것과 부딪치더라도 생명을 잃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난쟁이와 달리 오래 활공하지 못했다. 다만 가벼운 몸을 높이 띄우고 빠르게 나는 것만은 웬만한 맹금을 능가할 정도였다. 스란두일은 특히 높은 창공에서 새를 사냥하는 것을 좋아했다. 왕인 스란두일이 사냥을 직접 나서거나 숲을 시찰할 때면 따라나선 호위병들은 군주의 새하얀 안개 같은 날개에 넋을 잃기 일쑤였다. 흰 날개는 요정 모두가 갖고 있는 것이었으나 스란두일처럼 아주 새하얀 색을 가진 요정은 드물었다. 더군다나 왕의 깃털은 화사한 흰색이 아니라 손 대면 녹아 버릴 것처럼 아스라하게 가라앉은 흰색이었기에, 더더욱 보는 이를 홀리게 했다.


스란두일은 느리게 날갯짓하며 공중에서 한 바퀴를 돌았다. 활시위를 당기고, 쏘았다. 새 하나가 맞아 떨어지는 것을 다른 요정이 아래로 튀어나가 낚아챘다. 스란두일의 사냥복은 항상 검은색이었다. 날개를 방해치 않도록 등을 없애고 목과 허리에서 앞으로 걸어 입은 검은 옷은 얇고 가벼워서 그의 움직임마다 솔직하게 흔들리곤 했다. 섬세하게 세공된 긴 활을 든 요정왕은 아래서 보았을 때 흰 날개를 지닌 흑로 같아 보였다. 


갈리온이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지친 날개를 쉴 시간이었기에 스란두일은 그에게 눈짓하고는 아래로 날갯짓했다. 숲이 한눈에 보일 정도로 높이 올라온 이곳은 사냥하기 좋은 곳은 아니었으나, 왕으로서의 책임을 다해야 할 땅을 굽어보기에 더할나위 없는 곳이었다. 숲은 울창했다. 사시사철 푸르지는 않았으나 계절에 맞춰 색 바꾸며 요정들을 보살피기 충분하고, 안온했다. 한참 그의 곁에서 뜸 들이던 갈리온이 입 열었을 때에는 사냥 무리가 모두 숲의 나무에 닿을 듯 가까워진 때였다.


"저 난쟁이는 어찌하실 겁니까?"


잎과 꽃을 화려하게 단 나무는 분명 오래 숲을 지킨 요정에게 친숙하기 그지없었으나, 활공을 하다 내려올 때에는 땅에 날 세우고 꽂아 놓은 비수 더미와 다를 바 없었다. 공중에서 사냥하는 버릇이 오래 든 요정들은 빠르게 하강하면서도 빼곡한 숲의 나무를 피하는 법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스란두일은 발이 땅에 닿자 갈리온에게 활을 건넸다.


"스로르를 죽였다는 난쟁이들에게 팔아 볼까 생각 중이네."

"전하,"


갈리온의 부름에 벌써 잔소리가 섞인 듯해서 스란두일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바람에 헝클어진 백금발을 하나로 모아 높이 당겨 끈으로 묶은 그는 제 충신에게 여유로이 웃어 보였다.


"내가 그럴 리 없지 않은가."


여전히 뚱한 갈리온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고 걸어가며 스란두일은 슬며시 웃었다. 얇은 장화발에 닿는 흙이 곱고 부드러웠다. 묘하게 들뜨는 기분이 발을 가볍게 하고 있었다.











감옥은 어둡고 습했다. 그리고 간수 하나 없이 적막했다. 소린은 가슴께 상처가 어찌 되었는지 확인하고팠다. 몹시 쓰라리고 갈수록 숨이 가빠오고 있었다. 적어도 이곳에 가둔 걸 보니 당장 죽이지는 않을 것 같았으나 그걸로 자위할 수는 없었다. 묶인 손이라도 풀면 나을 것을, 겨우 벽에 기댄 채 잠에 빠지지 않으려 버티고 있는 것이 다라서 화가 치밀었다. 상처야 저들이 죽일 작정을 하지 않는다면 치료해 주고 나을 터였다. 문제는 친서였다. 인장을 박은 친서가 찢어졌으니 왕손으로서의 몸뚱아리가 그 역할을 해야 했다. 그러나 요정왕이 제 말을 들을 거라는 기대도 전혀 들지 않았다. 차라리, 하는 생각과 함께 소린은 감기는 눈을 억지로 들어 작게 난 창문을 보았다. 일어서려 차가운 벽에 몸을 비벼댔다. 꽉 맞물린 어금니 새 신음이 절로 새어나왔다. 겨우 다가갔으나 창문은 제 키에 전혀 닿지 않을 만큼 높았다. 좌절감이 화로 바뀌며 소린은 낮은 목소리로 욕을 뱉고 도로 주저앉았다. 물이 고인 것인지 허벅지께가 축축하게 젖는 것이 느껴졌으나 이제는 어찌되어도 좋았다. 목이 탔다. 작게 들어오는 햇빛도 원망스러웠다. 


방법이 없는 것인가, 부은 눈을 감고 정신을 가다듬으려 애쓰고 있을 때 열쇠 소리가 들렸다. 감옥 바깥 문이었다. 까무룩 감기는 눈을 억지로 뜨자 검은 옷을 입은 요정왕이 보였다. 함께 따라온 호위병이 창살을 열고, 스란두일이 안으로 들어왔으나 소린은 꼼짝 않았다. 다만 감기는 눈꺼풀에 애써 힘주고 그를 치켜 볼 뿐이었다. 스란두일이 곁의 요정에게 손바닥을 펴 보이자 채찍이 주어졌다. 하얀 손가락 위 까맣고 굵은 채찍줄이 판판하게 감기더니 긴장을 잔뜩 머금었다. 양손으로 당기자 가죽 펼치는 소리가 짝, 하고 울렸다. 뺨을 때리는 것과 흡사한 소리였다. 손에 든 채찍이 소린에게 날아가기까지 얼마 걸리지 않았다. 소린은 어깨부터 등까지 길게 찢는 듯한 감각에 결국 비명 질러야 했다. 간신히 벽에 기대고 있던 몸이 쓰러지고 통증에 오한이 들었다. 그는 온몸을 떨었다. 옆으로 누운 시야에 요정왕의 까만 장화발이 보였다.


"네 작은 조상들이 이곳을 멋대로 떠나고 나서 나는 오래도록 생각했다. 난쟁이는 어떤 족속인가, 내가 그들을 몰랐던 것인가, 알지도 못하며 친화를 하겠다 나선 것인가."


다시 한 대. 이번에 소린은 비명을 목 안으로 삼켰다. 뒤로 묶인 팔과 등을 휘며 목을 젖히는 중에 혀를 깨물지 않으려 어금니를 대신 힘 줘 씹어야 했다.


"우리를 죽이고 떠나 놓고서 이제 와 다시 손 내미는 그 뻔뻔함이 대견하구나. 너희 족속은 원래 그런 것이었어."


세 대. 소린은 가슴을 찬 바닥에 대고 정신 없이 숨 몰아쉬었다. 등의 감각이 저릿하게 둔해지고 있었다. 스란두일이 다가와 그의 머리채를 잡았다. 마주보게 하니 독기가 여전히 서려 있어서, 스란두일은 울컥 올라오는 불만족에 얼굴을 구겼다. 


"내가 놓을 때까지 너는 여기서 내 소유로 지내라. 네 조상들이 못 치른 죄값을 네가 치른다면 두린 가를 도와주겠다."


요정왕의 손이 떨어지고 소린은 볼과 입술을 바닥에 댄 채 그의 까만 장화가 멀어지는 것을 무력히 보았다. 생각도, 감정도 없이 통증만 머릿속이며 온 몸에 가득했다. 그는 다친 등을 크게 들썩이도록 기침하고서 몸을 파고드는 한기를 느꼈다. 느리게 정신을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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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연의 날개 Prologue




요정은 고대부터 숲을 지켰다. 흰 날개로 숲 위를 활공하는 요정은 내려다볼 수 있는 모든 것을 사랑하려 애썼다. 그들은 나무 뿌리의 힘보다 나무를 있게 하는 햇빛의 풍요로움을 더 숭배했다. 난쟁이는 숲의 나무가 가장 색 짙고 울창하던 시기에 그들과 함께 했다. 난쟁이는 나무의 향기보다 바위 속에 숨겨진 힘을 더 믿었다. 그들의 날개는 흙 색에 가까웠으며, 높은 곳을 잠깐씩 활공하는 요정과 달리 절벽 사이사이를 오래 날 수 있게 작은 몸보다 훨씬 컸다. 요정의 영생과 비할 바 못 되더라도 난쟁이는 절벽을 뚫고 돌을 옮길 수 있게 단단한 몸을 가졌다. 숲 근처 절벽을 요정들이 내어 주고, 난쟁이들은 그들에게 살 집과 아름다운 보석을 주었다. 아주 오랜 시간 동안 다른 색의 날개가 점차 섞이고 긴밀해져 두 종족의 두 왕은 같은 숲을 공유하기에 이르렀다. 


두 날개가 한 하늘을 모시는 때가 그리 길지는 않았다. 난쟁이들이 숲을 떠났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더 많은 지식과 기술을 갈구했다. 손 안에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일은 이기기 힘든 갈증을 안겨주었으며, 이는 보이지 않는 것을 더 숭배하는 요정들이 보기에 욕심일 뿐이었다. 요정은 그들을 보내지 않으려 했고, 난쟁이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결국 내전이 일어나고 길지 않은 전쟁 동안 사상자는 수도 없이 많았다. 난쟁이들이 떠나고 두 왕이 다스리던 숲은 전쟁이 끝난 후에도 오래 뒤숭숭했다. 둘이 만든 것에 하나가 빠진 것은 단순한 뺄셈으로 칠 수 없었다. 절벽에는 뻥 뚫린 구멍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이로서 내면을 보려 하는 요정과 텅 빈 곳을 채우는 난쟁이의 공생은 끝났다. 신의를 잃고 슬퍼한 요정왕은 다시는 이 숲에 난쟁이가 들어오지 못할 것이라 선언했다. 











성년이 되는 네 생일 전에 돌아와야 한다. 반드시, 그때까지 잡혀 있어선 안 된다. 


소린은 부친의 말을 새기고 또 새겼다. 마지막 남은 물 몇 방울을 한참 아쉽도록 입에다 털어 넣은 다음, 텅 빈 수통을 허리에 도로 차고 바위에 걸터앉았다. 몇 주 동안 제대로 쉬지도 않고 걸었더니 눈이 금방이라도 감길 것 같고 어질어질했다. 배도 고프고 목도 몹시 말랐다. 모래바람을 오래 맞은 피부가 아렸다. 무릎은 의지와 달리 자꾸 삐걱거렸고, 발톱도 두어 개 빠진 거 같았다. 그러나 날개가 돋는 성장통에 비할 바는 아닐 터였다. 성년이 되는 날부터 몸에 열이 나기 시작할 것이고 날짜가 며칠 더 지나면 등에 날개가 돋을 터였다. 날개가 돋기 시작하면 일어나지도, 말을 하지도 못할 정도로 앓고 성장통이 심하면 반쯤 자란 날개를 단 채 그대로 죽어 버리는 난쟁이도 있었다. 이는 어떤 난쟁이도 피할 수 없는 단계였다. 소린은 제 머리칼의 색과 비슷하게 짙은 날개를 가지고 싶었다. 대부분의 난쟁이는 갈색이거나 짙은 고동색의 날개를 가졌으나, 아주 검은 색이라도 나쁘지 않을 것이었다. 그것이 요정왕의 감옥에서 나는 것만 아니라면, 그 통증 정도는 참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숲에 쳐진 요정왕의 결계는 난쟁이들이 통과할 수 없었다. 그러나 성년이 되지 않은 어린 아이라면, 날개가 없는 난쟁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졌다. 소린은 다시 일어섰다. 숲은 이제 짙은 초록이 완연히 보일 정도로 가까워 있었다. 새파란 하늘과 누런 황야에 대비되어서, 꼭 장막을 드리우고 안으로 잠식하는 거대한 동굴처럼 보였다. 소린은 자신이 태어나기 전 선조들이 저 음험한 숲속에서 허여멀건 요정들과 살을 맞대고 살았다는 것이 아직 믿기지 않았다. 저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사실도, 아직 믿기지 않았다.


지금부터 빨리 걸으면 한 시간 안에 결계 앞에 도착할 수 있을 터였다. 숲 앞의 황야에는 나무도 무엇도 없어 모습이 금방 노출되겠지만, 숲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는 요정의 생태를 생각하면 그도 위험한 일은 아닐 거 같았다. 되려 누런 땅에 기어다니는 전갈 같은 것들이 더 위험할지도 몰랐다. 소린은 마지막으로 장화끈을 단단히 고쳐 묶고 바위에서 일어났다. 로브에 달린 검은 후드를 뒤집어쓰고, 독하게 내리쬐는 태양을 올려다보았다. 들어가서 요정왕을 만나고, 아버지의 친서를 전한다. 회의 자리에 자신 또한 함께 있었으므로 그 내용이야 뻔했다. 그러나 실패한다면. 소린은 어금니를 물었다. 날이 더웠으나 로브를 단단히 여몄다. 빠른 걸음으로 마침내 결계 앞에 다다랐을 때, 소린은 숨을 한 번 가다듬고는 발을 안쪽으로 내디뎠다.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다행이다, 참은 날숨을 단번에 내뱉고 주변을 경계하며 더 어두운 숲 안쪽으로 걸었다. 


숲 속은 겉에서 보는 것과 달리 환하고 싱그러웠다. 살살 불어오는 바람은 여태 황야의 독한 햇빛과 매캐한 바람에 찌든 폣속과 피부가 씻겨나가는 것 같았다. 소린은 경계를 유지하면서도 처음 보는 경치를 마음껏 눈에 담았다. 이런 곳이라면, 이렇게 깨끗하고 조용한 곳이라면.


키 낮은 풀꽃들 사이에 흐르는 냇물은 냄새도 나지 않고 흙도 안 섞여서 속이 비칠 정도로 맑았다. 소린이 고개를 숙이고 들여다보니 작은 물고기도 떠다니고 있었다. 난쟁이들이 떠난 후에도 요정은 이 숲을 오래 지켰다고 했다. 그는 그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먼저 손바닥 한 가득 떠서 조금씩 입술을 축인 다음, 얼굴을 씻었다. 싸하게 시원한 감촉이 좋아서 눈을 감았다. 그때였다. 뒤에서 느리게 접근하는 기척은 누구인지 알 필요도 없었다. 품의 단검을 빼어 들고 돌아섰다. 가로로 긋고, 목을 겨냥해 찔렀다. 흰 날개를 가진 요정이 쓰러지는 것을 막 확인할 때, 소린은 뒤에서 등으로 별안간 꽂히는 감각을 이기지 못하고 앞으로 꼬꾸라졌다. 도로 일어날 의지와 달리 눈이 풀리고 몸의 힘이 빠졌다. 느려지는 숨결을 타고 숲의 맑은 흙 알갱이가 입 속으로 들어왔다.










여름 톨킨온리전을 목표로 연재합니다.

프롤로그라 짧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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