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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린스란 중장편/Eid

Eid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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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과 나무 없이 돌이 대부분인 지대는 먹을 것을 구하기가 영 힘들었다. 이 지역이 가진 상처를, 왕손인 둘이 모를 리 없었다. 한때 오르크와 다른 종족들의 격전을 벌이고 수없이 피아의 시체가 널려 몇날 며칠을 태운 뒤, 나무가 듬성듬성 자라고 짐승도 꼬이지 않게 된 곳이었다. 여기서 동쪽으로 얼마 멀지 않은 곳에 이전 인간 왕국이 있었다. 번영하던 돌길과 빛나던 건물들은 암흑에 싸이고 살아남은 인간들은 겨우 추슬러 강의 남쪽으로 건너서 가파른 산 속에 숨어 버렸다. 스란두일을 납치해 간 인간들이 있는 마을은 그들의 잔당이 남은 곳이었다. 전쟁 후 미처 돌아가지 못하고 남은 자들, 부상을 입고 버려졌던 자들의 자손, 그리고 같은 종족에게마저 내버려질 만큼 사악했던 범죄자들. 


소린의 머릿속으로 지도가 그려지고 있었다. 더 북으로 간다면 책에서만 보았던 보랏빛 호수 - 오르크와 연합군이 가장 격전했던 곳도 볼 수 있을 터였다. 그는 쩍쩍 갈라진 바닥과 그늘 없이 달궈져 뜨거운 바위를 내려다보았다. 앞에 스란두일의 발꿈치가 보였다. 로브 없이 걷고 있는 그는 걸음마저도 요정다웠다. 소린은 이 땅에서의 전쟁 이전, 선량한 자들이 터를 빼앗기기 훨씬 전, 에레보르가 세워지기도 더 전을 감감히 떠올려 보았다. 글로만 배운 것이라 그려지지 않고 막연했다. 그 때 이 땅의 종족이라곤 용과 요정 밖에 없었을 터, 그 중에서 스란두일을 낳은 선대도 있으리라. 용과 요정은 오래 친교했으나 용과 난쟁이는 오래 반목했다는 것도 배워서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한때 전쟁까지 일었을 정도로 손깍지가 맞지 않는 종족이었다. 소린은 헛웃음을 흘렸다. 스란두일의 모습은 용보다는 요정에 가까웠다. 그러나 분명 용족의 분위기가 흘렀다. 행여 종족의 반목이 지금까지로 길었더라면, 선조들의 불가침조약이 없었더라면 영영 만나지도 못했을 모습이었으리라 생각 들어서 새삼 생경했다. 


그는 문득 손바닥을 펴 보았다. 아직도 열기가 화하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스란두일에게 묻고 싶었다. 그대가 준 힘이 이게, 맞느냐고. 내가 제대로 받은 것이, 맞느냐고.


숲을 지나오며 열매를 따온 것으로 며칠은 버틸 수 있을 터였으나 물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 돌 사이 흐르는 가느다란 물줄기나마 한참을 걸은 뒤에야 찾아 다행이었다. 바위에 앉은 소린은 제 목을 양껏 축인 다음에 물주머니도 최대한 채웠다. 가죽으로 만든 주머니가 부푸는 동안 스란두일은 옆에 서서 전경을 바라보았다. 먼 계곡부터 시작해 내려온 물길은 아래로 가는 동안 점차 굵어지고 힘이 붙어 물고기들이 헤엄칠 깊이를 만들어낼 것이었다. 단단한 돌을 닳게 하며 만들어낸 물길이 이윽고 제가 가진 모든 힘을 안고 이내 물을 이끌던 땅이 끝나면, 폭포로 떨어질 터였다. 소린은 떠나온 길을 돌아다보았다. 그리고 제 짐에 넣어 둔 열매의 개수도 가늠해 보았다. 척박한 북쪽을 거닐려면 든든해야 했다. 더 나무가 안 보이기 전에 열매 몇 개나마 더 따오겠소, 하고 언질한 소린은 스란두일에게 물 주머니를 내밀었다. 그리고 과일 담을 천 하나만 든 채 그나마 듬성듬성하게 나무가 보이는 쪽으로 걸었다. 


스란두일은 그가 멀어진 뒤에도 가만히 서서 남쪽으로 뻗은 물줄기를 응시했다. 북으로 물을 거슬러 올라간 곳 절벽 위에서 쏟아질 물소리, 그 뒤의 은밀한 동굴에 용족 하나가 살고 있을 터였다. 용의 성에 살지 않고 은둔하는, 고대용의 자손. 스란두일은 별안간, 꿈속에서 제 모습을 담아내던 고대용의 호박색 눈을 떠올리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숨을 몰아쉬었다. 빈 손바닥을 들어 얼굴을 감쌌다. 소린이 자리를 비운 지금에서야, 이제야 공포심이 밀려들어 몸을 무너뜨렸다. 그는 얼굴을 떨구고 어깨를 떨며 소리 내어 울었다. 여태 참아내며 한 번도 티내지 않고 담아두기만 했던 공포심이, 쌓이고 쌓였던 불안감이 눈물과 울음소리로 주체 없이 흘러 나왔다. 태어나 처음 온 낯선 길의 한 지점에서 그는 용의 성을 그리워했다. 두고 온 책과 차가운 대리석과 흰 돌로 된 기둥들, 아름다운 은발의 아버지, 그리고 제 친어미. 그러나 그는 이제 누구를 믿어야 할지 몰랐다. 용의 성은 내 집이 아니었나, 느리게 나는 성체들이 지켜주어 깊게 잠들 수 있는 곳이 아니었나, 그러나 지금은 장담할 수 없었다. 그는 누구에게 칼을 겨누어야 하고 누구에게 도움을 청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간절히 답을 원했으나 어디에 빌어야 할지도 몰랐다. 모든 것이 혼란스러워, 그는 그저 눈물방울을 무릎 위로 떨구면서 고개 저었다. 


한참 울던 스란두일은 퍼뜩 든 하나의 생각에 몸을 떨며 억지로 추슬렀다. 일어나서 소린의 짐을 더듬었다. 엉망이 된 시야에 손까지 떨려 물건들이 소리 내며 흐트러졌다. 믿지 말라 했던가, 그를. 그리고 스란두일은 그의 짐에서 먹빛 날을 가진 검을 하나 찾아낼 수 있었다. 굽이단검. 소실되었다고 알려진 검이, 소린의 짐에 들어 있었다. 손을 놓쳐 떨어뜨린 뒤 한 발자국을 물러났다. 어째서 소린이. 빈 주먹을 쥐고 파도 같이 거세게 밀려드는 생각을 정리하고 있을 때에, 숲에서 기척이 들렸다. 


“스란두일?”


소린은 붉게 붓고 눈물에 젖어 엉망 된 스란두일의 얼굴과, 풀어헤쳐친 제 짐을 번갈아 바라보고 어찌 상황을 판단해야 할지 읽어내려 했다. 스란두일은 허리에 찼던 검을 뽑아들었다.


“온 길로 돌아가시오.”


울음을 채 못 그친 목소리는 반쯤 잠겨 있었다.


“스란두일, 무슨 일인지 말해 주시오.”


소린이 조심히 한 걸음을 좁히자 그는 두 걸음을 물러났다.


“굽이단검을 왜 그대가 갖고 있소?”


더 다가서지 않았다. 대답을 고르느라 혀로 입술을 급히 축였다. 두 손바닥을 펴 보이며 대답했다.


“여행에 필요할지 모른다 하며 내 조부께서 챙겨 주었소.”


울음 탓에 소스라치게 떨리는 손일지언정, 몸에 익은 검을 고쳐 잡는 데에는 큰 무리가 없었다. 스란두일은 한 바퀴를 돌려서 소린의 목에 겨누었다.


“그대들의 탐욕으로 만든 굽이단검을 왜 용족이 금하였는지 알고 계시오?”


발음만은 정확하였으나 목소리의 떨림까지 어찌할 수는 없었다. 소린은 붉어진 그의 눈을 마주한 채 고개를 끄덕이지도, 부정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칼날이 반 걸음 더 다가와 소린이 목울대에 닿았다. 어쩔 수 없이 입 열었다.


“용의 성 바로 아래에서만 재료를 구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알려져’ 있소.”


알려져, 라는 말이 가진 의중에 스란두일은 비소를 보이며 고개 저었다. 아니, 아니야. 속삭이듯 부정했다.


“굽이단검은 용의 비늘을 뚫을 수 있는 유일한 무기이기 때문이오. 그래서 우리의 선조들이, 그대들을,”


붉던 눈에 눈물이 맺혔다. 날 세워 겨눈 검이 여리게 떨리기 시작했다.


“그대도 알고 있었지.”

“스란두일.”


변명은 요원하고 말은 한 단어도 생각나지 않았다. 조부가 챙겨 주는 것을 끝까지 거절했어야 했나, 아니면, 지금 당장이라도 나는 모르는 사실이라며 거짓말했어야 했나, 어떤 말로 제 용을 달래고 이해시켜야 할지 감도 오지 않아, 소린은 그저 입만 다문 채 속으로 안달냈다. 스란두일은 검을 치웠다. 눈을 한 번 감았다가, 떴다. 눈물을 그친 듯한 혼혈의 왕족은 예의 위엄을 되찾고 있었다.


“다시는 나를 따라오지 마시오.”


뒤돌았다. 손목을 휘둘러 검을 허리에 꽂은 뒤 여태 쓴 적 없던 붉은 로브의 모자를 뒤집어 썼다. 하늘이 흐렸다. 비가 한 방울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소린은 마른 침만 삼키고 서 있다가 퍼뜩 따라 나섰다. 서두르느라 가져 온 과일 몇 개가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스란두일, 하며 부르자 앞에서 걷는 걸음은 더 빨라졌다. 빗줄기가 순식간에 굵어졌다. 소린은 미끄러워진 돌을 힘겹게 밟아가며 그를 따라 쫓았다. 마침내 따라잡아, 옷자락을 잡아채고 뒤돌렸다. 스란두일은 온몸을 떨고 있었다. 얼굴빛이 어두웠다.


“나는 누구를 믿어야 하는 거요?”


무표정한 뺨 가득 젖어 있는 슬픔, 바삭바삭 부서질 것 같은 목소리에 소린은 무어라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그저 손을 뻗었다. 그는 스란두일의 젖은 얼굴을 닦아 주고 싶었다. 스란두일은 그가 뻗은 손바닥에서 검은 기운이 연기처럼 솟아오르는 것을 보았다. 공포는 순식간에 밀려와 몸을 지배했다. 검을 뽑아들어, 옆구리를 찔렀다. 날을 빼고 한 걸음을 물러나자 소린이 천천히 몸을 숙였다. 


“……스란두일?”


알 수 없다는 표정, 벌린 입과 커진 동공과, 옆구리를 짚었다가 떼니 검은 연기는 사라지고 피로 흥건히 젖은 소린의 손바닥을 보고서야 스란두일은 머릿속이 조금씩 차가워지는 것을 느꼈다. 빗줄기 너머 소린은 무릎을 꿇고, 제게서 입은 상처를 손으로 감싼 채 버티다가 쓰러지고 있었다. 스란두일은 제 손에 들린 검을 내려다보았다. 검날에 묻은 피가 비에 지워지고 있었다. 


소린.


속삭이듯 이름을 읊었다. 검이 떨어져 바위에 부닥쳤다. 달려가 끌어 안았다. 죽지 마시오, 여기서 죽지 마시오, 오열하며 백금발을 비에 적셨다.


나는 그대를 믿어야만 하오, 부디 일어나 곁을…….











비 오는 경사는 난폭하기 그지없었다. 닿는 발걸음마다 밀려나고 넘어지길 반복해서 스란두일의 무릎은 상처와 진흙으로 엉망이 되었다. 그는 소린을 다시 한 번 고쳐 업고, 앞으로 걸었다. 젖어서 생명체가 닿기를 거부하는 길을, 길이라고 부르기도 힘든 돌 위를 기듯이 인내하며 지나갔다. 작은 난쟁이의 몸은 움직일 때마다 그의 등에 걸쳐져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미끄러져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서 소린을 고쳐 업고 빗길을 내달렸다. 내달리다 보면 다시 다쳤다. 이가 악물렸다. 부디, 죽지 말라고 속으로 되뇌었다. 그가 죽는다면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해서 생각하기조차도 힘들었다. 제 목숨을 노리는 자가 있을지도 모르는 용의 성으로? 다른 길잡이를 택하러? 그도 아니면 성체를 얻길 포기하고 또 다른 어떤 곳으로? 답은 요원하고 머릿속까지 빗물로 들어차서 일렁이고 어지러웠다. 


동굴은 생각보다 멀지 않은 곳에 있었으나, 가는 동안에만 수어 군데를 다친 스란두일은 도착하자마자 주저앉았다. 쓰러진 소린을 끌어안은 채 젖은 돌바닥에 무릎 꿇고, 절벽 위에 위치한 동굴 입구를 향해 용족어로 소리 질렀다.


“나는 요정이자 용인 스란두일입니다. 그대에게 도움을 요청하러 왔습니다.”


비를 뚫고 지른 용족어가 갈라져 절벽 위로 왕왕 울려댔다. 스란두일은 젖은 얼굴을 들고, 숨을 가다듬었다. 가슴 아래 깔려 있는, 형체도 없고 원인도 모를 분노에 밀려나온 목소리는 아까보다 크고, 또렷하고, 당당했다. 


“형제여, 저는 길의 끝을 보고자 합니다.”


동굴에서 누더기를 걸친 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스란두일은 소린을 안은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힘 빠진 무릎을 억지로 세우고 서서 한숨처럼 말을 덧붙였다.


“부디 도와주십시오.”













독일어; Eid [ait]  
[남성] 선서;(신 또는 성스러운 것에 대한) 맹세, 서약, 서언(誓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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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린스란 중장편/Eid

Eid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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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서진 파란색 대문은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열자마자 여럿의 살기가 달려들었다. 소린은 인간이 한 말이 거짓이 아님에 오히려 안도했다. 몇을 정신없이 쓰러뜨렸다. 잔악성이 손 끝으로 나와 검을 휘두르고 보이는 족족 숨을 끊어 놓았다. 그러나 어지럽고 아득한 와중에 자꾸 둔해지는 움직임은 몇 번이고 죽을 고비를 가져왔다. 싸우는 내내 그는 묘한 향을 맡을 수 있었다. 기분 나쁘게 가라앉는 것이 안개처럼 끈적했고, 무언가를 태운 연기처럼 독하기도 했다. 소린은 스란두일의 모습을 찾으려 핏발 선 눈을 굴렸다. 한동안 쓰지 않은 집인지 곳곳에 낡은 흔적이 티났다. 실내는 몹시 어두웠다. 앞에 보이는 방문을 부수고 들어갔다. 기묘한 향은 이 방에서부터 나온 듯했다. 한층 독해진 기운에 그는 숨을 크게 한 번 들이마시고 코를 소매로 가렸다. 맨 바닥에 스란두일이 누워 있었다. 차마 손으로는 더듬지 못하고 눈으로만 몸을 확인했다. 육안으로는 묶이거나 다친 곳이 보이지 않았다. 


“눈 떠보시오.”


명령도, 절규도 아닌 목소리는 스란두일에게 전혀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폐가에 가득 찬 향이 그 원인임은 깊이 생각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용케 살아남았던 인간 하나가 소린을 뒤에서 덮쳤다. 기척을 읽고 돌아섰기에 망정이지 등에 칼이 꽂힐 뻔했다. 반격하고 칼을 떨구게 했다. 몸 안에 가득 차 있던 피로가 분노로 바뀌는 데 얼마 걸리지 않았다. 바닥에 엎어져 있는 인간을 끌어다 멱살 잡았다. 


“누가 보냈는가?”


그것이 소린의 결론이었다. 성년식을 하러 떠난 용족을 누군가 탐냈고 인간에게 사주한 것이다. 탐욕이 난쟁이보다 심한 그들이라면 대가에 따라 목숨 걸고 움직였을 것이다. 인간의 얼굴은 공포로 엉망이 되었다. 죽음을 앞두어서가 아니라, 온통 붉게 핏발 선 채 형형하게 노려보는 소린의 눈빛 때문이었다. 눈이라도 뽑아 버릴 생각으로 소린이 인간의 얼굴 위에 큰 손바닥을 겹친 순간, 손바닥 아래서 약한 빛이 흘러나오더니 강한 열기가 돌았다. 인간의 얼굴이 순식간에 검게 변했다. 마치 불에 탄 것 같았다. 찢어지는 비명 끝에 황급히 손 떼고서야 소린은 상황을 눈으로 볼 수 있었다. 피로가 깨고 현기증이 몰렸다. 제 손바닥과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검게 탄 인간의 얼굴을 번갈아보아도 무슨 일인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뒷걸음질 치다가 스란두일의 몸에 걸려 넘어지고서야 그는 본분을 기억해 냈다. 여태 깨지 못한 스란두일을 들쳐 업으려 했으나, 선뜻 손대지 못하고 한참 망설였다. 결국 어깨에 들메고 집을 나섰다. 


부서진 대문을 나서고, 골목으로 들어서고, 어둠으로, 더 어둠으로 몸을 숨기려 걸어가는 동안 걸음은 한 발마다 무게를 더한 것처럼 묵직해졌다. 스란두일은 한참 지나서야 눈 떴다. 그리고 별안간 소리 지르며 발버둥 쳤다. 소린은 갑작스러운 소란을 어찌 하지 못하고 그의 다리만 세게 붙들었다. 요지부동이었다. 억지로 차대는 그를 거듭 고쳐 붙들었다. 내달리는 내내 그의 허벅지에 소린의 손톱으로 생채기가 생겼다. 소린의 어깨에는 스란두일이 손으로 낸 상처가 여럿 겹쳤다. 그는 못 볼 것을 보기라도 한 것처럼, 공포에 질린 목소리로 몇 번이고 내려달라고 소리 질렀다.











마을을 벗어나고 얼마나 달렸는지 짐작도 하기 힘들 때에야 소린은 스란두일을 내려놓았다. 어딘지 알 수 없었으나 길은 마을보다 황망했다. 소린은 허망함을 느끼고 스란두일의 옆에 주저앉았다. 


“모두 죽였단 말입니까?”


스란두일의 말에 소린은 어처구니가 없어 헛웃음만 지었다.


“지금 살려준 자에게 그걸 말이라고 하시는가?”

“우리를 쫓는 연유라도 알아내야 할 것이 아닙니까.”


단호한 얼굴에다 대고, 나 또한 연유를 물으려 했으나 내 손바닥 아래 새까맣게 타 버렸는데, 그대는 영문을 아느냐고, 이것이 그대가 말한 힘이고 각성이냐고 쏘아 붙이는 것을 참았다. 스란두일은 몇 번 기침을 했다. 숨이 벅찼다. 그제야 허벅지께에 남은 소린의 손톱자국이 아파왔다. 그는 제 꿈을 기억하려 애썼다. 안개 속에서 노란 불처럼 제 온몸을 담아내던 고대용의 눈동자를 떠올렸다. 소리보다 진동으로 와닿던 용족어가 아직 생생했다. 소린을 믿지 말라던 말도 선연했다. 그는 소린의 옆모습을 슬쩍이 보았다. 살기가 여태 가라앉지 않고 있었다. 어둠 속에도 분간 갈 정도로 더러워져 있는 그의 몸이 숨 몰아쉬는 것을 보고, 스란두일은 조금 몸을 움츠렸다. 한참 말없이 숨만 돌리던 소린이 먼저 몸을 일으켰다. 손을 내밀었다. 스란두일은 그의 손을 맞잡지 않았다. 알 수 없는 공포가 그를 부자유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망연히 빈 손을 거둔 소린이 먼저 걸음했다.


“잘 곳을 찾아보도록 하지.”


스란두일은 몇 걸음 떨어져서 그를 따라 걸었다. 소린은 금방이라도 고꾸라져 땅에 아무렇게나 눕고 싶은 것을 참고 억지로 걷느라 몹시 휘청댔다. 


“왕손께서도, 우리가 평범한 길을 가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눈치 챘을 거라 생각합니다.”


한참 망설이다 뱉은 듯한 스란두일의 목소리가 뒤에서 아득했다. 몇 가지 대답이 떠올랐으나 소린은 목소리를 뱉을 기력이 없었다. 











눈을 감는다. 한동안을 인내하고 기다리면 성 바깥으로 다니는 성체 용의 거대한 날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멀리서부터 차례로, 후득, 후득, 휴지를 길게 두며 점차 커지는 바람 소리와 거대한 근육들이 움직여 내는 소리, 가구들을 하나하나 덮으며 짙어졌다가 서서히 옅여지며 떠나가는 그늘은 스란두일의 마음을 편하게 했다. 용의 날개 소리가 제 청각에서 온전히 멀어지고 나면 자리에서 일어나 촛불을 끈다. 매캐한 냄새가 잠깐 남는다. 서랍에서 말린 진깨비꽃잎을 꺼내어 머리맡에 둔다. 과하면 오래도록 정신을 잃을 터이니 아주 조금만 덜어내고 남은 꽃잎은 도로 넣어 둔다. 잠을 쉽게 이루지 못하는 날 스란두일은 이것으로 버텨냈다. 어미의 도움 없이 혼자 베개를 챙기고 이불을 덮으면 어린 혼혈의 피는 밤 기운에 식었다가 자는 내내 아주 느리게 더워졌다. 


그는 이따금 밖으로 나갈 때에 말을 타고 달리다 잠시금 다른 종족들과 마주치곤 하였다. 어린 스란두일은 속도를 줄이며 웃어 주었다. 로브의 모자 아래, 그늘에 싸인 미소를 보고 몇몇은 넋을 잃은듯 따라 붙기도 하였다. 어느 날, 홀린듯이 다가와 망연하게 제 얼굴만 바라보는 자에게 어린 스란두일은 로브의 모자를 벗고 손을 뻗어 옷자락을 잡기도 하였다. 그 날, 함께 달리던 어미는 스란두일을 뒤로 낚아채며 심하게 책망했다. 


“저 자는 이제 네 독으로 인해 곧 눈이 멀고 피를 토하며 죽을 것이다. 네가 무슨 짓을 한 건지 알겠느냐?”


어린 스란두일은 그 날 이후로 다른 종족과 눈 마주치지 않았다. 











깨어날 때부터 소린은 온몸이 쑤시듯 아파오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두린 직계 혈통이 가진 몸은 며칠의 혹사로 쉽게 무너질 것이 아니었다. 그는 근육을 부지런히 움직여 풀어내고 먼 곳을 살폈다. 둘은 나무가 듬성듬성한 숲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아무것도 염두에 둘 새 없이 급히 뛰어 온 뒤, 쫓는 흔적이 없는 것만 확인하고는 대충 자리를 펴고 누웠더랬다. 동쪽으로는 넘어온 산이 있었다. 햇볕 아래 보니 검은 색이 위로 갈수록 짙어지는 것이 확연하게 보였다. 거대한 산세가 하늘을 이길 듯 솟아 있었으나 그 웅장함이 아니라 음산함 때문에 소린은 위화감을 느꼈다. 동남쪽으로는 그가 스란두일을 업고 달려 온 들판이 이어져 있었다. 풀이 듬성듬성하여 회갈색 땅이 얼룩진 것마냥 드러나 있었다. 나무 사이에 가려진 시야가 자유롭다면 도망 나온 마을로 가는 길을 볼 수 있을 터였다. 그는 용의 섬이 어느 방향인지 알 수 없었으니 스란두일이 깨기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모로 누운 채 하반신에 햇빛을 고스란히 받고 있는 그를 내려다보고, 소린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입 속으로 몇 가지 물음이 맴돌았다. 묻지 못할 것이 많아 갑갑해져왔다. 하얀 이마 위로 닿은 그늘은 스란두일을 창백하게 보이게 했다. 소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빈 손을 내려다보았다. 망연하게 생각을 굴리며 옆에 주저앉았다.


스란두일이 일어난 것은 그 뒤로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잠자리 갈무리를 하고 그늘에서 벗어났을 때, 그제야 소린은 스란두일의 소매 근처며 목 언저리 옷깃 아래에 난 자잘한 상처들을 볼 수 있었다. 어떤 것은 부딪친 것처럼 멍이 들어 있었고 어떤 것은 손톱 자국처럼 붉게 부어 있었다. 틀어 잡힌 듯한 손자욱도 보였다. 몸을 집요하게 훑는 시선이 불편해 스란두일은 옷깃을 여미며 조금 앞서 걸었다. 소린은 따라 붙으며 짐을 고쳐 메고 해가 오르는 위치를 가늠했다. 스란두일은 북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소린은 이 근방의 지리를 자세하게는 몰랐으나, 적어도 이 북쪽으로 가면 예전 오르크와 연합군이 전쟁한 후 폐허가 된 땅들이 나온다는 정도는 알고 있었다.


끝자락이 땅에 끌리는 스란두일의 붉은 색 겉로브는 이제 조금씩 닳고 있었다. 소린은 그 로브를 제 손으로 빨아주던 것을 기억했다. 흙먼지 색을 입고 자잘하게 닳은 로브 자락에 시선을 고정한 채 물었다.


“북으로 가면 폐허만 나오지 않소?”

“그렇습니다.”

“섬으로 가는 길이 아니지 않소? 내 듣기로 바다는 더 서쪽으로 가야 한다고 알고 있소만.”

“예, 섬으로 가는 길은 아닙니다.” 


소린은 스란두일의 대답을 선뜻 이해 못하고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그러면 왜 이리로 가는 것이오?”


발자국 소리가 끊겼기에 스란두일 또한 멈춰 섰으나, 소린을 돌아보지는 않았다. 


“내 여행길이니 그저 따라와 주시지요.”


단호한 어투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 결국 참지 못하고 걸음을 도로 좁히고 다가가 손목을 낚아챘다. 스란두일은 통증에 신음이라도 할 듯이 미간을 찌푸렸으나 소린은 되려 힘을 줘 끌어당겨서 큰 키의 그를 제 쪽으로 고개 숙이게 만들었다. 시선이 가까워졌다. 


“닥치고 따라오라는 말씀인가?”

“소린.”


손바닥이 스란두일의 상처를 짓누르는 줄 알고도 소린은 더 끌어당겼다. 이제 숨이 닿을 정도로 바짝 끌려 온 얼굴에 가까이 대고 읊듯이 말했다.


“내 아비는 오르크에게 사지가 찢겨 죽었다. 응당한 이유 없이 내 발로 죽을 게 뻔한 곳에 가지는 않을 것이니 지금 대답해라.”

“……”


그가 보는 스란두일의 얼굴은 역광으로 어두웠다. 바람도 없는 고요한 숲이었다. 동물 소리 하나도 쉽게 들리지 않았다.


“진깨비꽃이었습니다.”


말을 던져 놓고, 저를 잡은 팔을 풀어낸 뒤 스란두일이 발끝을 돌렸다. 소린에게서 뒤돌아 향한 방향은 다시 북쪽이었다. 


“당신도 맡았을 겁니다. 그 집에 퍼져 있던 향이 진깨비꽃 향입니다. 용들이 잠을 이루지 못할 때에 쓰는 진정제이나…… 과하면 정신을 잃는 식물이지요. 행여 들어보신 적 있으십니까?”


반쯤 고개를 돌려 묻기에 소린은 망연히 있다가 고개 저었다.


“당연히 들어봤을 리 없을 테지요. 용들끼리만 쓰는 비기이니.”


소린은 생각을 애써 정리했다. 가다듬은 생각의 지점을 하나로 모은 뒤 입으로 뱉었다.


“같은 용이 그대를 해하려 한다는 것이오? 그들은 인간이 아니었소?”


스란두일은 대답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소린이 황급히 따라붙었다.


“나는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아무 것도 모르겠습니다. 입 밖으로 낼 수 있는 것도 없고 추측할 수 있는 것도 없습니다. 성년식을 치르지 못할 수도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방법은 모두 찾으려 하는 것입니다.”

“그게 무슨,”

“그러니 소린, 당신이 원하신다면 이제 돌아가셔도 좋습니다.”


걸음을 따라잡고 옆으로 바라본 스란두일의 표정에서 소린은 무엇이라도 읽고 싶었다. 그러나 용의 감정은 얼굴 바깥으로 쉽사리 보이지 않았다. 


“이 여행은 생각보다 위험합니다. 그대도 아시다시피 그냥 성년식 길은 아니지요. 나는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위험하다는 것만 알 뿐, 누가 나를 노리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니 돌아가란 말이오? 이제 와서?”


스란두일은 더 말을 섞지 않겠다는 듯 속눈썹만 내려 깔았다. 소린은 저도 모르게 안달 냈다.


“왕손으로서 이 길에 오르는 게 어떤 의미인지 스란두일, 그대는 알 거라 생각하오. 나는 그대를 지켜 섬에 다다라 힘을 나눠 받기 전까지는 돌아갈 수 없소.”


그러나 스란두일은 여전히 침묵했다. 소린도 포기하고 땅만 내려다보았다. 북쪽으로 걸을수록 점점 나무들이 줄어들고 바닥의 돌이 많아졌다. 더 걸으면 끔찍한 전쟁 이후 아무도 살지 않는 땅이 펼쳐질 터였다. 오래 걸어 태양 빛에 정수리가 훈훈해질 때쯤 소린이 침묵을 깼다.


“스란두일, 나는 그대의 길잡이가 아니오?”

“……”

“내가 그대를 지키려 한다는 것만 알아주었으면 하오.”


스란두일은 대답하는 대신, 예의 고고한 시선만 정방향으로 고정해 있을 뿐이었다. 소린은 더 말을 잇고 싶었으나 다시 앞을 향했다. 바람이 선선했다. 빈주먹을 쥐었다.











독일어; Eid [ait]  
[남성] 선서;(신 또는 성스러운 것에 대한) 맹세, 서약, 서언(誓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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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린스란 중장편/Eid

Eid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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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마을은, 마을이라 일컫기에 면구스러울 정도로 많이 망가져 있었다. 길 전체에 악취가 진동하고 담장들은 여기저기 부서진 채 방치되어 있었으며, 근원을 알 수 없는 불쾌하고 미적지근한 바람이 불었다. 소린은 온통 진흙을 묻힌 몰골로 골목을 두리번대며 걸었으나 길에 몇 없는 인간들 중 누구 하나 난쟁이를 신기하게 여기는 자도, 빤히 쳐다보는 자도 없었다. 길은 황망하고 건물들은 형태가 이지러져 있는 이곳에서, 스란두일을 찾아낼 수 있을지 그는 장담할 수 없었다. 결국 지나가던 인간 하나를 붙들었다. 


“키가 큰 요정을 혹시 본 적 있소?”


소린의 모습을 뒤늦게 찬찬히 훑은 인간은 난쟁이를 처음 보는 듯, 그제야 호기심을 드러냈다. 고개를 저었다. 소린은 피로가 몰려오는 혼몽한 정신을 뿌리치려 눈을 잠깐 감았다가, 떴다. 눈 아래와 미간으로 열이 올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피로가 혀까지 먹어 들어갔는지, 둔하게 굴러가는 머리만큼 입 속도 둔해졌다. 이마를 짚은 채 자책하는 동안 인간은 돌아서 가 버리고, 소린은 벽에 손 짚은 채로 몇 분을 꼼짝 않고 서 있었다. 몸을 저릿저릿하게 만드는 피로감 속에서 그는 스란두일의 백금발을 환상인 양 여러 번 떠올렸다. 그리하지 않으면 제 용의 모습마저 잊을 것 같았다.











꿈은 스란두일의 손발뿐만 아니라 머리와 뼛속까지 노곤하게 만들었다. 온몸이 공중에 떠 있는 듯하고 피부에 닿는 감각도 흐렸다. 그를 향한 시선이 하나 있었다. 온몸을 휘감아도는, 크고 올곧은 시선이었다. 사방 가려진 곳 없이 몸이며 생각까지 드러난 기분에 스란두일은 알몸이라도 된 양 불안해졌다. 


- 그 자를 믿지 마라.


고대용의 목소리였다. 머릿속을 채우고 가슴을 울렁이게 하는 용의 그것은 목소리라기보다는 진동에 가까웠다. 스란두일은 혼몽한 와중에 약한 구토감을 느꼈다. 


- 용의 성에 살지 않는 용을 찾아가라. 내 아들이다. 여행을 관두거라.

“지금 저더러, 성년식을 하지 말라는 말씀이십니까?”


간신히 쥐어짜내 말했다. 그는 그제야 제게 말 거는 고대용의 눈동자를 똑바로 볼 수 있었다. 짙은 호박색을 띤 노란 눈동자에 제 모습이 그대로 맑게 비쳤다. 용은 눈을 한 번 깜빡이고 느리게 그의 곁을 스쳤다. 새까만 비늘로 덮인 몸통과 거대한 날개가 스란두일의 가슴에 닿을 듯 그 앞을 아슬하게 지나쳤다. 느린 움직임에 맞춰 지축이 쿵, 쿵, 하고 흔들렸다.


- 너는 성년이 될 수 없다.


스란두일은 그의 말을 단 하나도 이해할 수 없었다. 고개를 젓고 해명을 요구하려 노란 눈동자를 도로 찾았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 가련한 피여. 누가 너를 가로막고 있다 생각하는가.


힘주어 말하는 고대용의 발음은 그의 작은 몸을 떨게 했다. 스란두일은 발아래가 빈 것처럼 불안했다. 꿈의 혼몽함에 짓눌린 머릿속을 필사적으로 굴렸다. 조금씩 의식이 깨어나고 있었다. 소린, 이름을 떠올리고 그 다음으로 기억난 것은 숲에서 자신을 들쳐메고 가던 인간의 체취였다. 대체 어떤 인간이 무슨 이유로 용을 탐한단 말인가, 누가 감히 용의 성년식을 방해한단 말인가. 그리고 분명 그 향은,


“누구입니까?”


스란두일이 물었으나 용은 그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 내 아들을 찾아가라. 여행을 관두어라. 네 길잡이를 믿지 마라. 


소린을? 되물으려던 차에 용은 몸체를 완전히 뒤로 돌렸다. 


- 그는 두 가지 운명을 가졌다. 


꼬리 끝 형형하게 빛을 반사하며 바짝 날 서 있는 비늘을 보고 스란두일은 한 걸음 물러섰다.


- 너는, 네 몸에 무엇이 담겼는지 모르나보구나. 


아이야, 라는 탄식 같은 말을 마지막으로 용은 발걸음도 없이 사라졌다. 거대한 존재감은 멀어지는 것만으로도 혼을 빼앗았다. 균형을 잃고 휘청대는 중에 눈앞에 흰 안개가 밀려들었다. 스란두일은 이것이 꿈이라는 것을 알았고, 깨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고, 꿈이 아니라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허나 눈을 뜨려 해도 갑갑한 몸은 갇힌 채 통 열리지 않았다. 정신을 두드리고, 또 두드리며 스란두일은 제 길잡이의 이름을 불렀다.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안개가 목 끝까지 차올랐다.











소린은 골목과 골목 사이를 오가며 간 곳과 가지 않은 곳을 분간해 내는 와중에 숲의 빼곡한 나무를 떠올렸다. 스란두일과 걸었던 숲은 끝이 없을 듯해 보였고, 모든 것이 느린 곳이었다. 걸음 또한 느긋했다. 여행은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 길을 아는 용과 그의 증표가 될 길잡이가 있으면 언젠가는 용의 섬에 닿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한도 끝도 없을 것 같던 숲의 푸름 속에 멈춰 청량한 풀내음을 들이마시며 쉬던 때도 있었다. 겨우 며칠 전인데 피로 속에서 돌이켜보니 몇 달은 지난 것처럼 아득했다. 소린은 스란두일이 비스듬히 누워 작은 풀벌레를 손에 얹고 노는 것을 바라보았었다. 그 때 스란두일은 속에 입던 옷을 빤 터라, 맨 몸에다 겉 로브만 아슬하게 걸치고 있어 바람 부는대로 속살이 드러나고 있었다. 시선은 온통 작은 벌레 하나에 빼앗긴 채였다. 간혹 얼굴 위로 옅게 미소가 떴다. 소린은 방금 냇가에서 가져온 빨랫감을 바위에 내려놓고는 하나하나 차례로 펴서 나뭇가지에 걸었다. 활엽수가 적어 바람이 많은 곳이라 밤이 되기 전에는 입을 수 있을 만큼 마르리라고 생각했다.


“대견하지 않습니까?”


돌연 던진 말에 소린은 영문을 모르고 돌아보았다. 소린의 키에는 높은 나무라 옆으로 돌아가 돌을 딛고 서서야 스란두일의 옷까지 널 수 있었다. 스란두일의 옷은 물에 젖어서도 반짝반짝하고 은은한 광채를 내고 있었다. 용족이 요정과 어울려 만든 옷감이란 신비하고 고와서 귀하게 취급 받았다. 소린은 그의 옷에서 나는 광채가 스란두일에게 어울린다 생각했다.


“이 작은 것들도 살아남는 법을 알고, 해를 끼치지 않는 것을 구분하지 않습니까.”

“자연의 이치가 그러하지.”


그는 마지막으로 제 젖은 신발을 벗어 대충 던져 놓고는 넓은 바위 위에 누웠다. 햇빛이 내려와 몸의 절반은 땡볕이었으나 그 나름대로 괜찮았다. 빨래를 하느라 젖어 있던 맨가슴이며 팔뚝이 기분 좋게 데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눈을 감자 햇빛이 어지럽게 붉은 얼룩을 그려댔다.


“소린.”

“말씀하시오.”


스란두일의 손 위를 뛰놀던 벌레는 어느새 기어내려온 것인지 이미 풀 사이로 사라지고 없었다. 스란두일은 굳이 눈으로 쫓지 않았다.


“나를 가까이 두는 것이 두렵지 않으십니까?”


팔 베고 누웠던 고개를 옆으로 틀었다. 스란두일의 얼굴은 온전히 그늘 안에 있었다. 빛의 잔상이 남아서 시야가 어른어른 붉었다. 


“두렵지 않소.”


땅을 보던 스란두일은 굳이 웃지도, 그를 마주하지도 않았다. 다만 작게 대답했다. 고맙소, 라고. 소린은 풀 위에 닿은 그의 맨 종아리를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폐허에 가까운 마을에 어둠이 지자 인간들은 집으로 숨어들었다. 그나마 밖을 다니던 몇몇이 황급히 골목 속으로 들어가는 형국은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확실히 숨는 것에 가까운 동작이었다. 소린은 하나 둘씩 문이 걸어 잠기는 골목 사이를 걷고 있었다. 식은땀이 흘러 선선한 저녁 공기에 차갑게 식었다. 허나 머릿속의 온도는 여전하였다. 


스란두일.


당장이고 몸이 무너질 것처럼 어지러운 와중에 그의 이름이 지침인 양 되새겼다. 밖으로 내뱉지는 않고 입 속에 머물렸다. 소린은 큰 골목에서 작은 골목으로 걸음을 바투 옮겼다. 이따금 비척거렸다. 손과 발에는 피가 돌지 않는데 정수리에는 머리털이 곤두서고 있었다. 이미 어둠이 진 골목 어귀, 인간의 눈으로는 보기 힘들 성 싶은 사위에서 그는 몇몇 수상한 거동을 보았다. 둘, 혹은 셋. 무리 지어 조용히 이동하는 것이 낌새가 확실해서, 칼을 뽑고 달려갔다. 난쟁이의 시력과 무력이 인간 두어 명을 상대치 못할 리는 없었다. 조용히 하나를 뒤에서 잡아채고 목에다 칼을 겨누었다. 동료가 사라진 것을 눈치 챈 인간들이 어둠을 더듬다가, 소린의 안광을 마주했다.


“키가 큰 요정을 본 적이 있소?”


대답 없었다. 날에 힘을 주고 들이밀자 비명소리를 내었다. 소린은 개의치 않고 더 기다렸다. 지체되기에 그대로 목을 그었다. 달아나려는 인간 중 하나를 잡아채어 벽으로 밀어 붙였다. 


“어디 있나?”


공포심이나 불안감은 시야로만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 옆 골목 부서진 파란색 대문…….”


진실을 이야기하는 것 또한, 눈으로만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공포에 떠는 몸과 목소리에서 진위를 구분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소린은 검 손잡이를 고쳐 쥐었다.


“너는 누구냐?”


대답하지 못하고 눈만 겁먹은 채 마주하였다.


“용족을 어쩐 연유로 쫓는 것이냐?”


여전히 답이 없기에 겨눈 날을 그으려는 찰나, 다른 기척이 가까워서 시선만 뒤로 던졌다.


“소린? 소린이십니까?”


뒤에서 들린 목소리는 난쟁이의 것이었다. 소린은 익숙한 얼굴에 머리가 맑아지는 것을 느꼈다. 어쩌지 못하고 잠깐 생각을 놓친 틈으로 붙들렸던 인간이 팔을 풀고 달아났다. 소린이 쫓으려 하자 난쟁이는 가까이 다가왔다. 팔을 붙들었다. 발린, 어릴 적부터 아비를 따르던 자였고, 소린에게는 먼 친척에 가까운 자였다. 고개를 세차게 젓는 그의 앞에서도 발린은 예를 잃지 않고 왕손에게 걸맞는 인사를 건네었다.


“네가 어떻게 이곳에 있나?”

“근처 철산에 회의가 있어 사절로 다녀오는 길입니다.”


발린은 바닥의 시체와, 흐린 달빛에 비친 소린의 때 묻은 모습과, 그의 검에서 아직 흐르는 피를 보고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용의 길잡이로 떠나시지 않으셨습니까? 용은…….”


소린은 대답하지 못했다. 발린은 갑갑함에 한 걸음을 다가섰다. 소린의 몸에서 악취가 훅하니 끼쳤다. 단순한 몸 냄새가 아니었다. 끔찍하고 섬짓한 기운은 평범한 난쟁이마저도 겁먹게 만들었다. 제가 알던 난쟁이왕손이 맞는가 싶어서, 발린은 몸을 떨었다. 거의 무릎을 꿇을 기세로 소린의 손을 쥐었다.


“소린, 왕손이시여, 부디 설명해 주십시오.”


발린은 소린의 두 손을 쥔 채 급기야 눈물까지 글썽이기 시작했고, 소린은 그를 부드럽게 뿌리치고는 검을 집어넣었다. 이성을 더듬더듬 찾으며 입 열었다. 그의 이야기는 여행 중에 처음 느꼈던 불안감부터 시작하여 스란두일을 잃기까지 간결히 이어졌고, 발린은 소린의 손을 놓지 않은 채 힘을 주었다 풀며 경청했다.


“제발, 이 여행을 그만 두십시오. 예감이 좋지 않습니다. 떠나시기 전부터 그랬어요. 전하께서도 얼마나 걱정하시는지 알고 계십니까?”

“그리 쉽게 엎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소린은 고개를 저었다. 그는 어릴 적 에레보르의 대장간을 떠올렸다. 작고 어린 왕자에게 대장간은 들어서자마자 숨이 막히는 곳이었다. 풀무도 틀도 모두 하나같이 커다랬다. 쇠 냄새는 열기만큼이나 목을 조여오고, 쿵, 쿵, 연달아 터지는 굉음 속에서 어린 소린은 저 이글대는 불길을 똑바로 보겠다고 각오하고선 작은 몸을 곧추세웠었다. 소린은 피로 탓에 밀려오는 열 속에서, 몹시 외로워졌다. 제 용을 찾고 성년식이 끝나 힘을 나누어 받을 때까지 열은 없어지지 않을 것 같았다. 묵직한 조바심이 들었다. 발린이 다시 첨언하려 할 때, 소린은 제 등 뒤로부터 기척을 느끼고 돌아섰다. 바로 검을 뽑고 목을 겨눠 찔렀다. 적의 손에서 무기가 떨어져 대리석 바닥에 요란하게 굴렀다. 소린의 검이 뽑히자 달려들었던 이는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쓰러졌다. 발린은 방금 숨 끊어졌을 인간과, 어둠에 반쯤 가린 왕손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소린이 제 쪽으로 돌아서자 저도 모르게 한 걸음을 물러섰다. 그의 발끝에 소린의 시선이 머물렀다.


스란두일은, 저를 가까이 두는 것이 두렵지 않냐 물었더랬다. 소린은 무심히 내려깔던 스란두일의 속눈썹이 떠올라서 먹먹해졌다. 그 마음을 백분 이해 못한다 하더라도 일부나마 읽고 싶어졌다. 스란두일은 그가 가진 용의 힘을 차치하고서라도 충분히 강한 전사였다. 적어도, 소린이 생각하기에는 그러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소린은 허리를 숙이고 시체 얼굴을 들어올렸다. 안면 있을 리 없는 자들이었다. 갑갑함에 제 입술을 사납게 씹다가 발린에게 말했다. 


“내가 그를 찾아 와야 한다.”


소린의 말은 변명이 아니라 단언이었다.


“그는 나를 선택해 준 내 용이다.”


소린은 돌아섰다. 시체를 지나 걸었다. 말아 쥔 손바닥에 땀이 들어찼다. 발린은 제가 모시던 왕손의 모습을 다시 찾을 수 있을지 걱정되어, 걸어간 골목 끝까지 잠깐 뒤쫓았다가 이내 포기했다. 뒤돌아서 불안스레 시체를 내려다보았다. 마른 침을 삼켰다. 어릴 적부터 모신 왕손의 눈이 그렇게 광기로 형형한 것을, 그는 본 적이 없었다.











독일어; Eid [ait]  
[남성] 선서;(신 또는 성스러운 것에 대한) 맹세, 서약, 서언(誓言)








'아이트'라고 읽으시면 됩니당


그... 스란두일도 왕자인데 왜 소린에게 극존칭을 쓰냐면

스란두일은 용과 요정 혼혈인데 요정들은 대부분 용의 독성에 내성이 없잖아요 (오로파파는 아주 예외)

그 때문에 왕위를 못 잇는 왕자이기 때문에... 그래서 첫편인가 2편에서 소린한테 자기도 엄연한 왕손이라 그런다는..

그냥 사족을 덧붙여 보았습니다ㅠㅠ 

굳이 덧붙이긴 그런데 헷갈리실까봐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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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린스란 중장편/Eid

Eid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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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울음을 울며 새 한 마리가 숲 위를 날았다. 둘의 뒤에서 온 새의 울음은 앞으로 지나는 것이 아니라 위로 솟았다. 숲의 끝이 높은 산으로 이어져 있기 때문이었다. 소린은 앞을 보았다. 거대한 산은 색이 검었고 미끄러워 보였다. 경사를 앞두고 길은 갈수록 험해졌다. 스란두일은 겉에 걸쳤던 긴 로브와 안에 덧입었던 얇은 로브까지 벗어내어, 튜닉과 바지만 입은 채 산을 올랐다. 소린은 보이는 열매를 따서 짐에 넣으려 하다가 포기하고 그의 뒤를 따랐다. 경사를 오르다 넘어지고 짐을 쏟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다. 비가 오지 않아도 흙은 발 딛는 대로 무너져 내려서 몹시 위험했다. 동물 것 아닌 발자국이 오래 찍히지 않는 숲은 모두 그러했다. 스란두일은 걸음을 멈추고 허리 숙여 흙을 한 줌 쥐었다. 그대로 얼굴로 가져가 냄새 맡았다. 오랫동안 동물의 흔적과 나뭇잎들만 섞였던 흙은 평화로웠다, 적어도 이곳까지는 말이다. 


안심하는 그의 표정만으로도 소린은 그가 무엇을 하는지 물을 필요가 없었다. 둘이 숲을 가로질러 걸어오는 데까지 거의 사흘이 걸렸다. 그 내내 스란두일은 이따금 나뭇가지나 나무줄기에 손을 대었다. 잎 사이 이슬을 흩뿌리고 스치는 흰 손길은 소린이 옆에서 보기에 경건하기도 하고 조용하니 선득하기도 했다. 식물을 보듬는 스란두일의 눈이나 손은 마치 기도하는 것마냥 진중하고 고요했다. 그는 스란두일을 이해하기보다 적응하려 애썼다. 


가파른 경사를 소린이 먼저 올랐다. 돌산을 파고 지내는 난쟁이에게 산행은 어려운 것이 아니었으나, 좀처럼 성 밖에 나오지 않는 어린 용족에게는 달랐다. 소린은 자주 그를 잡아주었다. 뒤따라오는 모습을 확인하려 연신 고개를 돌리고 내려 보았다.


“용족의 몸에는 문신이 있다 들었소.”

“그렇소만.”


대답 끝, 소린이 손을 내밀자 스란두일은 망설였다. 소린이 팔을 뻗은 채 위에서 기다리자 별 수 없이 맞잡았다. 소린의 손바닥은 훈훈하게 더웠다. 그는 경사를 오르는 동안 스란두일을 자주 잡아 주었다. 손을 내밀 때마다 스란두일은 그의 몸이 제 독기로 굳는 상상을 했다. 어느 순간 움켜쥐었던 손가락마저 풀리지는 않을까 겁이 났으나, 뻗어 맞잡아 체온을 나누는 것은 또 다른 이야기였다.


“붉은 문양이라 들었소. 그게 어떤 의미가 있는 거요?”


스란두일은 대답하지 않았다. 소린은 한 걸음을 더 위로 딛기 위해 나무뿌리를 손으로 잡으며 올랐다. 장화 밑창이 땅을 끌며 뒤로 밀려났다. 그는 잡은 나무뿌리가 단단한지 확인하려 몇 번 잡아당겼다. 걸음을 옮긴 뒤에야 다시 스란두일을 내려다보았다.


“어찌 생긴 것인지 궁금하군. 낙인 같은 것인가?”

“날 때부터 있는 것이고 이종족은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왜지?”


다시 대답하지 않았다. 소린은 문득 갑갑하다 여겼지만 내색 않았다. 그가 또 한 걸음을 내뻗던 순간, 파사삭하고 위태로운 소리가 들렸다. 스란두일이 반 걸음 아래서 발을 헛디딘 것이었다. 소린이 급히 손을 뻗어 붙들었다. 손목을 끌어주자 경사를 올라오기는 하였으나 몸짓이 힘들었다. 스란두일은 표정으로는 아픈 내색을 않고 발목만 흙 위에 끌었다. 땅에 딛고 누르자 그제야 통증이 밀려왔다. 앞으로 올라오지 않고 가만히 멈춘 것을 보던 소린이, 희고 단단한 용족의 손목을 한층 더 힘줘 당겼다. 스란두일의 몸이 딸려가나 싶더니 허리가 들렸다. 그대로 몸은 소린의 어깨 위에 안착했다. 하체는 소린의 앞으로, 상체는 소린의 등으로 하고 반 접히듯 들메어진 그는, 갑작스레 뜬 발에 적응하지 못하고 몸을 틀었다. 움직이는 허리를 소린이 힘줘 붙들었다.


“무슨 짓입니까, 소린?”

“이 상황에서 체면을 따지고 싶소?”


허리를 붙든 손에 살과 뼈가 눌려 몹시 아파, 스란두일은 비명을 목 가득 채웠다. 수치심과 피가 쏠려 이미 얼굴은 달아올라 있었다. 소린의 등 뒤로 경사가 까마득했다. 저도 모르게 앞의 목에다 팔을 감고 붙들었다. 눈을 꼭, 감았다가 떠도 수치심과 두려움이 뒤섞여 사라지질 않았다. 가슴보다 얼굴이 낮은 탓에 피가 쏠리고 제 심장이 뛰는 소리가 들렸다. 


“난쟁이 남자들은 어릴 때에 아비와 시간을 많이 보내지. 보통은 세공이나 철을 다루는 법을 배우지만 어린 아이들이 별 수 있겠소? 아비에게도 장난을 거는 게지. 내 또래 난쟁이 중 하나가 특히 제 아비의 어깨에 이리 매달리는 것을 좋아했소.”


한 걸음씩 딛는 게 아까보다 확연히 느렸다. 땅을 스치는 난쟁이의 발 소리는 느리고 안정적이었다. 스란두일은 그것이 제 몸무게가 실려서인지, 혹은 어지러울 저를 배려한 것인지 궁금했다.


“별 것 아닌 것인데, 그게 왜 그리 부러웠는지 모르겠소. ……다른 아이들에게 놀이는 단지 놀이지만, 왕세손에게는 그게 아니지 않소?”


소린의 말에 스란두일은 어린 난쟁이왕손의 모습을 상상하였다. 또래와 어울리는 일이 크게 없이 아래형제들과는 다른 교육을 받고 자랐으리라. 작고 귀한 의자에 앉아 제왕학을 더듬더듬 읽고 무슨 뜻인지도 모르며 암기하였을 어린 난쟁이의 모습은 지금의 소린과 쉬이 겹쳐 생각하기 어려웠다. 스란두일은 그의 어리던 손에 몇 살부터 망치가 쥐어졌을지 문득 궁금해졌다. 어릴 때부터 장난감 대신 책임감을 작고 도톰한 손 한가득 쥐고 있었으리라. 그는 소린이 이 여행에 가진 애착을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작은 검 하나를 벼르는 데에도 모두의 기대치를 채워야 했을 왕세손이었을 터인데, 하물며 인생을 걸고 하는 여행이라면. 


스란두일은 이어서 제 어릴 적 용의 성이 가졌던 모습을 떠올리려 애썼다. 스란두일의 아비는 요정왕이었다. 요정왕은 숲요정국의 왕좌를 지키느라 용의 성에 들어온 적이 드물어, 어린 그는 어미 곁에서만 자랐다. 어미가 왜 제게 차가웠는지, 스란두일은 성년이 다 된 지금까지 알 수 없었다. 그가 모친과 관련해 기억할 수 있는 것은 일부였다. 그러나 책을 읽어주거나 살갑게 대하던 기억이 없는 것은 확실했다. 떠올리려 하면 할수록 유년은 흐리기만 했다. 혼탁한 기억은 피다 만 꽃처럼 닫혀서 시들지도, 꽃잎을 펴지도 않고 언제까지고 실제의 향과 색을 드러내지 않은 그대로일 것 같았다. 스란두일은 제 유년의 기억이 온전하지 않은 이유가 차가운 모친 때문이라고 넘겨짚었다. 상처를 받고 아팠다면 기억할 연유가 없으므로 굳이 돌이키지 않았다.


생각을 잇던 스란두일은 제 입술이 소린의 어깨를 누르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저도 모르게 놀라 화들짝 떼었다. 내색 않으려 했으나 가슴 뛰는 것이 업힌 등에 전해지지는 않을까 싶었다. 소린의 발이 조금 느려지는가 싶더니 그를 내려주었다. 아까보다는 경사가 낮고 제법 넓은 평지였다. 스란두일은 여태 가시지 않은 발목 통증을 내색 않으며 바로 서려 했으나 못내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어설프게 발꿈치를 공중에 띄웠다. 소린이 그 모습을 놓치지 않고 훑었다.


“왕가에 태어난 것이 다 그렇지 않습니까.”


스란두일의 말에 소린은 나쁜 뜻 없는 실소를 가볍게 흘렸다. 그는 스란두일의 앞에 한 쪽 무릎을 굽히고 앉아 가만히 발목을 보다가, 이번에는 어깨와 다리 아래에 제 손을 집어넣어 번쩍 안아 들었다. 몸이 화들짝 들리는 통에 스란두일은 급히 숨을 들이쉬었다. 소린은 그를 풀이 자란 땅 위에 내려놓고 장화를 벗겨 주었다. 제 발목을 드러내게 해놓고 짐을 뒤지는 소린의 등에다 무어라 말하려다가, 그는 입을 다물었다. 소린은 붕대를 꺼내어 그의 다친 발에다 힘 있게 당겨 감아 주었다. 고귀한 타국의 왕손이 제 앞에 무릎 꿇은 채 장화를 신겨 주려 하기에 그것만은 제가 하겠다 했다.











산은 굉장히 어두웠다. 그제야 소린은 둘이 지나온 숲과 이곳 산이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들어올 때 없던 죽은 나무들이 곳곳에 검게 말라 붙어 있었다. 


“주위를 함께 경계해 주십시오. 오르크들이 요즘 들어 이 근처에 자주 나타난다 들었습니다. 이미 지나온 아래는 흙이 깨끗하지만 여기서 더 깊이 들어갈수록 냄새가 진동할 것입니다.”


스란두일의 말에 소린은 다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찢긴 채로 거무죽죽하게 흩어져 있던 제 아비의 시신이 떠오르지 않은 바 아니었으나, 금방 떨쳐내었다. 그리고 이 산의 다른 지명을 떠올렸다. 비탄의 산. 슬픔과 한탄이 쌓여 산을 이루고 있는 듯, 검고 어두운 곳이었다. 위로 올라갈수록 흙은 더 검어지고 산 생물은 보기 힘들어질 것이었다. 정신을 잃고 떠도는 광인들이 유독 많은 곳이라고도 알려져 있으나, 성년식을 치르러 가는 용족이 아니고서는 들르는 이들도 없어서 이곳 산의 위에 무엇이 사는지 정확히 아는 자들은 드물었다. 


“걸을 수 있겠소?”

“덕분에 좀 편합니다.”


다행히, 한동안의 앞은 평지에 가까웠다. 먼저 소린이 걸음을 떼었고 스란두일이 절뚝이며 따라갔다. 허나 평지는 짧았고 산은 오를수록 험했다. 촉촉하고 매끄럽던 흙은 진흙탕이 되어 둘의 장화에 엉겨 붙었다. 발이 지치니 몸도 금방 따라 지쳤다. 이따금 가시를 단 식물들이 보였고, 산지 죽은지 눈으로 구분 가지 않았다. 힘없이 늘어진 나뭇가지들 사이에 움직이는 것은 거의 없었다. 마치, 누군가 생명의 흔적을 산 정상에서 이곳까지 쓸어서 지운 것 같다고 소린은 생각했다. 뒤를 보니 스란두일의 표정은 내색 않으려 하더라도 못내 굳어 있었다.


“산을 돌아가는 방법은 생각해 보지 못한 것이오?”


원망조가 섞인 소린의 말에 스란두일은 고개를 저었다.


“양쪽으로 계곡이 높아 아예 오를 수가 없는 곳입니다. 더 돌아간다면 일주일은 걸어야 할 테고.”


거기에 대고 마땅히 답변할 것이 없어 소린은 입을 다물었다.


“산을 넘어가면 인간들이 지내는 마을이 하나 있습니다. 이런 진창보다는 낫겠지요.”


머물 수 있는 곳이 없을 듯해 보일 때에 밤이 깊었고, 아래의 숲과 달리 산은 누울 풀도 마땅찮아 보였다. 그나마 넓어 보이는 바위를 겨우겨우 찾는 데에도 달빛이 옅어 오래 걸렸다. 둘은 지쳐 있었다. 서로 등을 맞대고 좁은 바위 위에 누웠다. 맞댄 등이 불편하였으나 둘 모두 떼지 않았다. 음산한 기운에 오래 잠들지 못했으나 이야기를 나누지는 않았다. 달도, 별도 옅어 무엇이 다가오는지 볼 수 없었다. 소린은 깨어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였다. 그러나 산의 위로부터 내려오는 듯한 불쾌한 기분은 어찌된 것인지 졸음까지 가져왔다. 눈이 감길 때까지 그는 스란두일의 등에서 전해지는 체온의 감각을 불안히 붙들고 있었다.











스치는 듯, 혹은 무언가를 긁는 듯한 소리에 까무룩 잠들었던 것을 겨우 깨었다. 붙이고 있던 등이 허전해서 뒤를 돌았다. 스란두일의 몸이 팔에 걸리지 않아 의아했다. 온전히 몸을 돌리고 겨우 시야를 떴을 때, 소린은 어둠 속 몇 걸음 앞, 힘없이 위에서 아래로 늘어지는 백금발을 분간할 수 있었다. 눈 감은 흰 얼굴도 공중에 뜬 듯 어슴푸레하게 보였다. 누군가 그를 데려가고 있었다.


“스란두일……?”


꿈인지 분간하기도 전에 몸이 먼저 튀어 나갔다. 그러나 따라잡지 못했다. 어두운 와중에도 한 가지의 형체만은 더 분간해 낼 수 있었다. 인간이었다. 몇 걸음 따라가지 못하고 놓쳐 버렸다. 이미 보이지 않는 것을 따라 방향만 곧게 내달리다가, 퍼뜩 정신이 들어 주변을 돌아보았다. 어둠 속에서 몇 그루의 죽은 나무만 겨우 보일 뿐이었다. 


스란두일. 입속으로 이름을 삼키고 눈을 똑바로 떴다. 아둔한 시야에 화가 치밀어 올라 이를 앙다물었다. 다시 걸음을 내딛었다. 바닥을 기어 더듬었다. 혹여 스란두일이나 그를 데려간 자의 발자국이 남아있을까, 어둠 속에서 진창 속을 손으로 헤집어 보아도 찾을 수 있는 것은 제 발자국뿐이었다. 더러워진 손을 주먹 쥐고 혹여나 하는 생각에 짐을 놓아 둔 곳으로 돌아가려 했다. 그러나 이미 방향감각을 잃은 뒤였다. 걸음이 길을 잃고 금방 어지러워졌다. 마법도 환각도 아닌 것이 나무들 사이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숨이 턱, 막혔다. 망연했다. 소린은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앉았다. 상체까지 쓰러지지는 않으려 주먹을 바닥에 꽂았다. 


길잡이가 용을 잃었다. 


자책감이 머리를 채워 몸까지 저릿했다. 한참 땅을 짚고 있던 소린은 다시 일어나 헤매기 시작했다. 스란두일의 마지막 눈 감은 얼굴이, 어둠 속에서 부유하는 듯 기이하던 모습이 환상처럼 어른어른하게 남아서 시야를 괴롭혔다. 그렇게 소린은 이틀 가까이를 꼬박 새어 가며 산을 헤맸다. 그러나 어떠한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인간이, 무슨 연유로 용을 탐냈는가. 그것이 소린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해가 한 번 뜨고 다시 질 때까지 산의 경사를 오르내리며 헤매기를 반복하는 동안, 어째서 인간이 용을 탐낸 것인지 알아내려 생각을 쥐어짰다. 그러나 알 수 없었다. 의미 없이 오르크들이 습격하는 경우는 있을 수 있었으나 성년식의 길에 인간이 용을 탐냈다는 이야기는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아니, 용이란 한낱 인간 종족이 탐낸다고 데리고 갈 수 있는 종족이 아니었다. 그래서 소린은 더더욱, 제가 보았던 것이 환영이 아닐까 싶었다. 행여 이 고약한 산이 둘을 갈라놓고 여행을 망치려 환상을 준 것은 아닌가 싶었다. 붉어진 눈을 비비며 진창 위에 아무렇게나 주저앉았다. 두려움인지 아쉬움인지 모를 기분이 어지럽게 섞여 그가 숨을 몰아쉬게 하였다.


당신이 어째서 그리 쉽게. 가운데땅에서 가장 강한 종족이, 어째서. 이해가 되지 않고 가슴이 갑갑해서 이만 악물었다. 몰아치는 감정과 걱정 속에서 그는 스란두일의 말을 기억했다. 산 너머에 있다는 마을에 사는 인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발걸음이 빨라졌다. 거의 검정에 가까운 진흙이 바지를 적셨다. 후들거리던 걸음이 점점 집요해졌다. 몸에 가득 찬 피로가 중독처럼 그를 움직이게 하고 있었다.


이대로 여행을 관두고 에레보르에 돌아갈 수는 없다, 찾아내야 한다. 머릿속에 굴리고 또 굴려 반복된 생각은 충혈된 눈으로 드러나고 있었다.











난쟁이가 철을 다루는 기술은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다. 그들은 철을 사랑하는 것을 넘어 지배할 수 있게 되었다. 난쟁이가 다루지 못하는 금속은 없었다. 가운데땅에 있는 대부분의 무기들은 난쟁이의 기술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다양한 종족들이 그들의 대장간에 들어가 일하기를 자처하였다.


에레보르의 역사서 중에는 여태 그들이 낳은 무기들을 수록한 책이 수백 권이었다. 수백 권에 이르는 장서, 그 속 수많은 무기 중에서 단 하나 기록되지 않은 것이 있었다. 속세에서는 굽이단검이라 불리는 것이었다. 성년이 지난 난쟁이의 팔뚝만한 작은 굽이단검은 날의 검은 빛을 제외하면 다른 단검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러나, 이 단검이 기록되지 않은 이유가 있었다. 용족이 난쟁이들에게 만드는 것을 금지시켰기 때문이었다.


굽이단검의 날인 검은 금속은 빛이 거의 반사되지 않는 먹빛을 띠었다. 다른 금속과 다르게 이 검은 금속은 빛을 산란하는 것이 아니라, 도로 주변의 빛을 먹어대었다. 용족은 난쟁이들에게 검은 금속을 쓰지 못하게 하였다. 빛을 먹어 들어가는 그 금속은 용의 성 아래에서만 채굴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허나 난쟁이들의 갈구심은 높았다. 한참 동안 사신들이 양국의 긴 거리를 말과 조랑말을 타고 오갔다. 그러나, 용의 말을 감히 무시할 수 있는 종족은 없었다. 난쟁이는 처음 만든 굽이단검을 파기하지 않는 대신 검은 금속을 다시 벼르지 않겠다 약조하였다. 그렇게 검은 날을 가진 단검은 단 한 자루만이 남게 되었고, 기록되지 않았다. 그리고 소실되었다.













독일어; Eid [ait]  
[남성] 선서;(신 또는 성스러운 것에 대한) 맹세, 서약, 서언(誓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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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린스란 중장편/Eid

Eid 4

왜 하필이면 난쟁이를 길잡이로 선택한 것인가.


질책하는 듯한 제 어미의 말에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는 자문해 보았다. 난쟁이를, 그것도 직계왕손인 소린을 길잡이로 택한 연유가 무엇인가. 그러나 본인도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성년식의 증표가 될 길잡이란 그런 것이었다. 일종의 계시처럼, 혹은 꿈의 한 나락처럼 잠깐 스친 것으로 본인이 결정하게 되는 것이었다. 어떻게 설명할까, 운명이라는 것을, 선택이라는 것을. 그녀 또한 이미 섬으로 가 성년식을 치른 용족으로서 뻔히 알면서도, 굳이 묻는 것이 야속하였다.


소린은 강한 난쟁이입니다. 두린의 직계 혈통 중에서도 유독 뛰어난 몸과 자질을 갖고 있지요.

 

스란두일은 적절한 대답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소린에 대해 익히 알고 있지 못하다 여기면서도 어미에게 그리 말했다. 그 말 외에는, 덧붙일 것이 없었다. 


예감이 들었습니다. 어머니, 그가 저를 지킬 수 있을 것입니다.

난쟁이가? 


어미는 비웃음을 삼키며 말했다. 요정을 남편으로 두고서도 다른 종족에 대한 불신을 드러내길 꺼리지 않는 것이 바로 스란두일의 어미였다. 어릴 적에 겪은 난쟁이와의 전쟁이 마음에 남아서 긴 불신을 주었다는 것을, 스란두일이 모르는 바 아니었다. 그러나 아들의 성년식이잖은가. 스란두일은 제 어미에게 다가가려 했다. 걸음을 좁히고 차가운 얼굴을 보며 믿어 달라고, 축원을 해 달라고 말하려 했다. 허나 다가가기 전에 그녀가 먼저 뒤돌아섰다. 걸음을 딛으려다 포기하곤 망연하게 선 스란두일의 시선은 외면당했다. 그녀는 아들을 내버려둔 채 늘어진 옷자락을 추스르며 침소로 돌아갔고, 스란두일은 성의 한가운데에 굳어서 제 어미의 발걸음 소리가 계단을 울리며 멀어지는 것을 가만히 듣고 있었다. 


스란두일은 제 방에서 홀로 눈 감았다. 성년식을 위해 하는 여행은 길잡이에게 뿐만 아니라 용에게도 충분히 위험했다. 제 아비가 이곳에, 용의 성에 있다면 축원을 받고 떠나기 전 따스한 말로 배웅도 받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이 드니 못내 서운해서 가슴 아래가 뭉근해졌다. 그러나 아비는 숲요정의 왕이었다. 다스리는 백성을 두고 아들을 위해 용의 성에 오래 머무를 수는 없었다. 요정의 숲으로 떠난 아비를 못 보며 지내는 것은 괜찮았다. 아주 어릴 때부터 익숙한 일이었다. 그러나 햇빛이 가득하게 들어차는 좋은 방을 갖고서도 스란두일은 그늘을 찾았다. 어리광을 부리고, 누워서 뒹굴 곳을 원했다. 어미는 그에게 그늘이기보다 서늘한 어른이었다. 스란두일은 어미를 구태여 이해하려고도, 미워하려고도 않았다. 다만 궁금했다. 왜 그녀는 다른 어머니들과 다른 것인지, 왜 자신은 품에 파고들 수 없는지, 자란 손톱을 홀로 깎으며 또각, 또각, 호기심을 잘라내려 애썼다.


여행을 떠나기 며칠 전, 스란두일의 아비인 요정왕이 결국 성으로 왔다. 몇 십 년만에 보는 아들을 말없이 안고 이마 위를 쓸어주는 손에서 미안함이 뚝뚝 흘러내렸다. 그는 다시 아들을 안았다. 마치 실제인 양 확인이라도 하는 듯이 품고 확인하기를 여러 번이었다. 스란두일은 제 아비의 어깨 위 풍성한 은발에다 코를 부비며, 몇 십 년이 지나도 익숙한 체향에 깊이 안도하며 눈 감았다. 오랜만의 그늘이었다. 요정왕은 스란두일이 떠나기 전까지 성에 머물렀다. 독에 내성이 있으니 용들과 식사를 하고 어울리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스란두일은 오랜만에 보는 아비의 곁을 내내 지켰다. 요정왕은 아들과 아내 사이, 날 선 기운을 눈치 못 챌 자가 아니었다. 따스하게 맥박이 뛰는 아들의 손목을 쓰다듬으며 어렵사리 이야기를 꺼냈을 때, 스란두일은 그의 말을 단번에 이해하지 못했다.


네 어미가 너를 낳고 한동안 마음을 많이 앓았단다. 네게 차갑게 대하더라도 서운케 생각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뜻 모를 말에 의아함을 못 감추는 재색 눈에 대고 아비는 그저 쓰게 웃어 보였다. 희고 엷은 장막을 드린 듯한 미소였다. 들추고 물을 용기까지는 나지 않았다.


마침내 떠나는 날이 되었을 때, 성 밖으로 마중을 나온 그의 부모는 말을 선뜻 꺼내지 못했다. 스란두일은 로브자락을 흐트러뜨리며 무릎 꿇었다. 


다녀오겠습니다.


고개를 들었을 때, 차디차던 제 어미가 눈물을 머금는 것을 보고 스란두일은 발 아래가 꺼지는 듯 아득했다. 차마 보지 못하고 제 발등에 흩날리는 흙먼지만 내려다보았다.











별이 뜬 숲은 춥지도 덥지도 않은 기온에 바람까지 불어 청량감을 실어 주고 있었다. 소린은 쇠와 흙의 냄새만 가득하던 에레보르가 떠올라 풀 냄새가 어색하고 어려웠다. 그가 이리 멀리 나온 적은 처음이었다. 아버지를 잃은 왕손은 마땅히 보호 받아야 했으며, 그는 제 조부인 왕의 눈을 피해 몰래 먼 곳까지 사냥을 나가곤 했더랬다. 그러나 이렇게 먼 숲은 처음이었다. 모닥불은 느리게 타고 있었고 둘은 말이 없었다. 소린은 가져 온 빵을 스란두일에게 조금 나누어 주었고, 스란두일은 거절하지 않고 먹었다. 맨땅에 앉은 스란두일의 옷깃이 길게 늘어져 땅을 덮고 있었다. 그 위로 이따금 작은 벌레가 오가거나 재가 흩날려 떨어지고 있었다. 소린은 풀어 놓은 검을 가져와 날을 기름으로 닦고 다듬기 시작했다. 불의 열기가 세서 이마와 손바닥에 땀이 맺혔다. 스란두일은 소린이 검을 다듬는 앞, 타닥타닥 소리를 내는 모닥불을 바라보다가 옷자락을 가벼이 털며 자리에서 일어나 걸음을 떼었다. 등 뒤로 소린의 시선이 닿는 것이 느껴졌다. 밤이슬을 밟고 몇 걸음을 더 걸었다. 그제야 멀리 가지 말라 이르는 소린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무 사이를 거닐며 스란두일은 작은 목소리로 노래를 했다. 용족어로 된 가사가 음정을 입으니 느리고 처연한 분위기를 띠었다. 느린 박자에 맞추어 걸음도 느긋했다. 앉은 소린에게까지 그 목소리가 들려 왔다. 소린은 문득, 이 어두운 숲에서 노래를 불렀다가 또 괴악한 것들을 불러오지는 않을까 싶었으나 스란두일의 낮게 흐르는 듯한 음색에 첨언하기를 그만 잊어 버렸다. 날에 돌이 부딪치는 소리가 방해되어 손까지 멈추어 버렸다. 흙먼지를 대강 벗어낸 검을 옆에다 내려놓았다. 스란두일의 목소리가 주위를 돌며 멀어졌다가 다시 조금씩 가까워지는 것에 귀를 기울였다. 멀어지는 소리가 안타까워 일어나 따라갈까 싶다가, 괜히 면구스러워져 도로 자리에 앉았다. 비록 가사는 알아들을 수 없었으나 음색으로 읽을 수 있는 것이 있었다. 그것이 노래의 장점이 아니던가. 그는 시선을 바닥에 떨구고 낮고 맑은 음색을 듣고 있었다. 오르내리는 음정에 제 호흡을 맞추었다. 그러다 문득, 음정이 멈추어서 고개를 들었다. 나쁜 생각이 앞서서 시선이 휘둥그레 다급했다. 그러나 금세 눈에 들어온 스란두일의 모습은 흠집 하나 없었다.


나무 사이로 걸어 나오고 있는 그의 은색 로브에 모닥불 빛이 반사되고, 백금발은 위로부터 내려온 별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언제 주운 것인지, 뾰족한 귀 뒤에 모양 다른 나뭇잎들이 몇 장 꽂혀 있었다. 소린은 제 눈을 의심하였다. 스란두일의 걸음에 따라 뒤의 나무가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주 천천히, 그가 걸어 나오는 발걸음에 맞추어 나뭇가지들은 교차했다가 풀어지길 반복했다. 그 모습이 마치 스란두일에게 절을 하는 것과 같았다. 밤이 어두워 그림자가 일렁인 것을 잘못 본 것인가 싶었으나, 먼 쪽부터 가까운 쪽까지 차례로 잎이 스치는 소리만은 귀를 속일 수 없었다. 스란두일이 다시 모닥불 앞에 서자, 뒤의 나무들은 숙였던 가지들을 거두었다. 


방금 눈으로 본 것인데도 생경해서, 입 밖으로 꺼낼 만한 말을 찾으려 소린은 한참 애썼다. 무슨 말이든 꺼내야 할 것 같았다. 그렇지 않으면 스란두일의 등 뒤에 날개라도 어른어른하게 보지 않을까 싶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스란두일이었다.


“이 숲은 이전에 우리 조상들이 다스리던 곳이었습니다. 오래 자란 나무들은 제 수명만큼의 기억을 갖고 있지요.”


말이 끝나고도 소린은 한참 입을 더듬어야 했다.


“나무들이 용을 알아보고 인사를 한다는 것이오?”

“그리 표현해도 되겠군요.”


모닥불을 사이에 두고 소린의 맞은편에 그가 앉았다. 귀 뒤에 꽂았던 나뭇잎을 떼었다. 손에 들고는 한참 바라보다가, 땅에 내려놓았다. 소린은 노랗게 열기를 받은 스란두일의 양 볼이 야위어 보인다 생각했다.


“우리가 지나온 황야도 이곳에서 이어지는 넓은 숲이었습니다. 전쟁으로 불탄 뒤 다시는 풀이 자라지 않게 되었지만.”


소린은 저 또한 알고 있다는 말을 굳이 꺼내지 않았다. 수많은 피를 흘리고서야 끝난 고대의 전쟁을 어찌 모를 수 있을까. 난쟁이와 용의 긴 전쟁사를 모르는 자는 없었다, 특히 왕위를 물려받을 위치라면. 


“어차피 오래된 이야기요.”


맞받아친 말에 스란두일은 쓰게 미소 지었다. 그는 앉았던 자리에서 일어나 모닥불에 나뭇가지를 몇 개 더 집어넣고는 잠자리를 할 요량으로 겉옷을 바닥에 길게 폈다. 소린은 옆에 두었던 검을 챙기며 일어섰다.


“나뭇가지를 주워 오겠소. 멀리 가지 않을 터이니 먼저 주무셔도 될 듯하군.”


대답 대신 스란두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천천히 멀어졌고, 스란두일은 깔아둔 제 옷 위에 한쪽 팔을 베고 옆으로 누웠다. 일렁이는 모닥불을 보니 잠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그는 ‘오래된 이야기’라는 소린의 말을 되새겼다. 저를 질책하던 어미의 눈빛도 떠올렸다. 두 종족의 화해로 끝나지 않았다면 용이든 난쟁이든 한 종족은 절멸했을 터였다. 그 때의 골이 깊어서 고대용 중 몇은 아직도 난쟁이를 믿지 못한다고 스란두일이 들은 적 있었다. 그러나, 지나간 것은 지나간 게 아닌가. 소린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이제는 제 조상들을 죽인 난쟁이의 후손에게 목숨을 맡겨야 한다. 스란두일은 그게 문제될 것이라고 생각지 않았다. 마음에 걸리는 것은 따로 있었다.


그는 생각을 잇느라 제 몸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진 것도 알 수 없었다. 기척이 가까워지고서야 모로 누인 몸을 바로했을 때, 복면을 한 낯선 자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인간?’


내리꽂으려 치켜든 단검 날을 피하기 어렵다 생각될 때 낯선 자의 복부에 뾰족한 검날이 관통하였다. 뒤로 날이 빠지자 스란두일의 얼굴 위로 피가 몇 방울 튀었다. 낯선 자가 쓰러지자 뒤에 섰던 소린의 모습이 드러났다. 검을 거둔 그가 시체의 복면을 벗겼다. 얼굴을 보아도, 옷차림을 보아도 어디서 온 인간인지 알기 어려웠다. 품을 뒤져 보자 투명한 액체가 든 약병이 하나 나왔다. 스란두일이 먼저 그것을 알아보았다. 그는 소린의 손에서 병을 빼앗아 모닥불로 던졌다. 깨지는 소리와 함께 타는 냄새가 지독했다. 소린은 황망하게 불을 보다, 눈에 날을 세웠다.


“아는 자요?”


대답 대신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 저 병에 담겨 있던 게 무엇인지 아시오?”


이번에는 고개를 젓지 않았다. 불만 바라보고 있는 그에게 소린이 가까이 다가갔다. 굳은 표정과 입매는 내내 평정을 유지하던 스란두일과 거리가 멀어 보였다.


“대답하지 않을 셈이군.”


그래도 여전히, 말이 없었다. 마른침을 삼키느라 목울대만 한 번 움직이는 것을 빤히 보다가 소린은 포기하고 돌아섰다. 시체를 끌어다 치울 때까지 스란두일은 그대로였다. 소린은 담요를 깔고 드러누웠다. 눈을 감고 있자니 스란두일의 목소리가 들렸다.


“소린, 내가 나눠 드린 힘을 쓰십시오. 쓰는 방법을 찾으십시오.”


소린은 반박하고 싶었다. 저인들 당신을 지키고 싶지 않아 검만 어설피 휘두르는 줄 아느냐 쏘아 붙이고 싶었다. 입을 다물고 대답조차 제대로 하지 않는 것을 어찌 믿느냐고도 하고 싶었다. 그러나 불쾌하게 뭉글뭉글 올라오는 감정을 참고 가만히 눈만 감고 있었다. 이어지는 목소리는 미세하나마 떨리고 있었다.


“나는 길잡이로서의 당신을 잃고 싶지 않으니.”


침묵이 한동안 이어졌다. 앉은 스란두일과 누운 소린 중 누구도 움직이지 않아 모닥불이 타는 소리와 바람에 나뭇잎이 스치는 소리만 허공에 날렸다. 한참 불만 바라보던 스란두일이 고개를 들어 별을 바라보았다. 큰 나무 새에 가려져 있을지언정 하늘만은 맑았다. 마음속에서 불안감이 고개를 쳐들고 있었다. 불쾌했다. 일개 인간이 둘이 있는 곳을 어찌 알고 찾아온 것인지 의아했다. 품에 지니고 있던 것은 더더욱 설명할 길이 없었다. 시선을 내려 눈 감은 소린을 바라보았다. 이제 잠이 든 것인지 오르내리는 가슴팍이 규칙적이었다. 스란두일은 땅에 깔았던 제 옷을 조용히 털었다. 풀과 흙알갱이가 붙은 것을 꼼꼼하게 손가락으로 떼어내곤 누운 소린에게 다가갔다. 제 그림자가 진 얼굴을 내려다보고, 옷을 든 양손을 한참 머뭇대다가 결국 거두었다.


한 가지 예감이 머릿속에 가득해서 스란두일은 샛별이 온전히 동쪽으로 기울 때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는 잠든 소린의 옆에 무릎을 감싸 안고 쪼그린 채, 잠을 못 이기고 눈감기 전까지 별을 보며 기도했다.











수정구는 맑았으나 그 안에 담긴 기체는 검었다. 기체는 산 듯이 움직이고 있었다. 스란두일은 구의 크기를 가늠하려 가까이 다가가고 싶었으나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나, 가까이 가서 재지 않아도 제 몸의 몇 배는 되는 크기라는 정도는 알 수 있었다. 검은 비늘에 흰 날개를 가진 용이 다가와 수정구를 품듯이 감쌌다. 스란두일은 그를 알아볼 수 있었다. 아니, 알아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간질간질하게 올라올 듯 올라오지 않는 기억을 잇는 중에, 용과 눈이 마주쳤다. 불처럼 샛노란 눈동자를 보고 스란두일은 몸서리를 치며 잠에서 깨었다.


일어났을 때 소린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스란두일은 어젯밤 저를 덮쳤던 칼날이 눈앞에 번뜩 떠올라, 큰 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소린, 하는 목소리가 나무 사이로 퍼진 후에야 기척을 함부로 내서는 안 된다는 자각이 들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선 채로 나무 사이를 하나하나 살피며 소린이 걸어갔을 곳을 읽어내려 흔적을 찾고 있자니 그제야 바즈락 바즈락 나뭇잎 밟는 소리가 들리고 소린의 모습이 드러났다. 스란두일은 잠깐 안도하느라 눈을 내려 깔았다가, 금세 예의 무표정을 되찾았다. 소린이 빨갛게 익은 열매 하나를 건넸다.


"깨기 전에 아침거리나마 가져올까 싶었는데 도통 먹을 만한 열매가 보이지 않더군."


시선을 마주하지 않고 말하는 투에 면구스러움이 묻어났다. 


“오히려 이렇게 깊은 곳에는 열매가 덜 자랍니다. 허기가 심하지 않으면 가져오신 것을 혼자 드셔도 괜찮습니다. 나는 오래 먹지 않아도 몸이 상하거나 하지는 않으니.”


소린은 대답 대신 스란두일의 손에다 열매를 쥐어 주고 돌아서서 앞서 걸었다. 스란두일은 굳이 뿌리치지 않고 받았다. 뒤에서 따라가며 한 입 베어 무니 과육이 제법 향기로웠다. 나란히 몇 걸음을 걷는 중에 새소리가 들렸다.


“스란두일.”


부르는 목소리에 그는 소린의 정수리를 내려다보았다. 작은 모습이 조금 지쳐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어제 괴한이 왜 그대를 습격했는지, 혹은 누구인지, 정말로 아무것도 아는 바가 없소?”


스란두일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앞에서 걷는 그에게 보일 리 없건만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못 박듯이 대답했다.


“모릅니다.”

“그렇다면 단순한 강도라고 생각하시오?”


그러나 이번 물음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한숨소리가 뒤에까지는 들리지 않았으나 소린의 어깨가 허탈히 처졌다. 몇 걸음을 더 침묵으로 걷고서야 소린이 운을 뗐다.


“그대가 나를 선택한 것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오. 그리고 나 또한 왕세손의 자리를 버리고 따라나선 것이오. 설명치 않아도 그대도 알 테지.”


낮게 읊조리는 듯, 혼잣말을 하는 듯한 어투를 스란두일은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그의 어조에서부터 이미,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읽을 수 있었다.


“어찌되었든 지금은 그대가 내 용이오. 그대 눈에 난쟁이가 하찮게 보이지 않도록 할 터이나 내 장담은 할 수 없소. 그러나, 일단은…….”


말을 멈추고 걸음도 멈추었다. 그는 한참 어물쩡대다가 몸을 돌렸다. 스란두일에게 바짝 다가와 똑바로 마주했다. 스란두일은 그제야, 소린의 눈 색이 검정이 아닌 깊은 파랑을 띠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를 믿어 주었으면 하오. 성에서 한 서약은 나의 이름을 걸고 지킬 테니.”


어떤 종족도 살지 않는 깊은 물 속, 심해어의 눈으로 바라본 색이 저렇지 않을까 하고, 스란두일은 그리 생각했다. 별 말을 다 길게 했군, 하면서 소린이 팩하니 돌아선 후에도 스란두일은 그 눈을 다시 마주하고 가까이서 보고 싶었다. 그가 용의 숨결에도 내성이 있다면, 얼굴을 마주하고 가까이 바라보고 싶다고, 그리 생각하며 다부진 어깨를 이따금 곁눈으로 내려다보았다. 그는 소린의 바다색 눈동자를 되새기자 목이 말라왔다. 처음 느낀 갈구심이 낯설었다.











독일어; Eid [ait]  
[남성] 선서;(신 또는 성스러운 것에 대한) 맹세, 서약, 서언(誓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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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린스란 중장편/Eid

Eid 3

다음 편은 이전 연재분과 좀더 많이 다르지 않을까 싶은.............

민망머쓱...











하늘은 대지에서 끝나고 대지는 하늘에서 끝난다. 새가 모였다 떠나는 곳에는 나무가 있고, 황야는 풀로 끝난다. 마침내, 지는 노을 아래로 숲의 푸른 색이 보이기 시작했다. 시야에 들어오고 몇 걸음 더 가까워졌을 때 스란두일은 풀내음을 맡을 수 있었다. 소린 또한 먼 시선 끝, 황야의 싯누런 땅이 옅어진 곳에 늘어선 나무들을 보았다. 다리의 피로가 풀리는 느낌이었다. 숲은 붉은 색을 위에서 입고 하루의 마지막 햇빛을 끌어모으고 있었다. 


황야를 가로질러 한 나절을 가면 도착하는 숲은 풍요롭고 비교적 안전한 곳이었다. 이따금 맹수들이 출몰하였으나 그들이 노리는 것은 사냥감 밖에 없었다. 스란두일은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렸다. 몇백 년 전이었던가, 혹은 그보다 더 오래되었던가, 태어나 처음 보는 동물들이 풍기던 지릿한 냄새와 풀의 비린내, 그리고 보송보송하던 포유류들의 털과 어린 눈동자가 새삼스레 떠올랐다. 


“안으로 조금 들어가면 둘이 쉴 만한 동굴이 하나 있소. 거기서 밤을 보내면 될 듯하군.”


스란두일의 말에 소린은 고개를 끄덕이곤 숲의 검은 입구를 바라보았다. 조금 더 지나면 숲 안은 깜깜해질 터였다. 요정의 시력으로는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인가 싶었으나, 굳이 묻지는 않았다. 어둑해지는 나무 사이를 걷는 동안 그는 스란두일에 대해 호기심이 깊어지는 것을 느꼈다. 용이나 요정에 대한 이야기야 공부로 배우면 안다 싶더라도, 두 혈통이 섞인 스란두일이 어떤 특성들을 물려받았는지는 짐작하기가 힘들었다. 따라 걸으며 옆으로 본 스란두일의 피부는 숲의 색을 입어 창백해 보였다.


해가 금방 졌으나 동굴은 스란두일의 말대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옆에는 계곡이 흐르고 큰 나무가 근처를 둘러싸고 있어 맹수들을 피해 쉬기에 마춤맞아 보였다. 소린은 동굴에 짐을 내려놓자마자 옷을 벗기 시작했다. 마른 모래바람에 찌든 몸과 머리칼을 서둘러 씻고만 싶었기 때문이었다. 스란두일은 그가 옷을 벗고 물로 들어가는 양을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 나뭇잎 사이로 들어온 달빛이 물을 빛내고 있었다. 소린이 들어서자 내내 규칙적이던 물소리에 이변이 생기고 산란하던 빛의 모양새도 일그러졌다. 달을 받으며 손으로 물을 끼얹자 단단한 몸 위로 물이 반짝이며 떨어졌다. 스란두일의 붉은 겉 로브가 온통 흙에 쓸려 부옇게 색이 묻었으나, 그는 물에 들어가지 않고 동굴에 걸터앉은 채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 


“몸이 드러나는 것이 창피하시오?”


올려보며 말하는 소린의 목소리는 분명 놀리는 투였으나 대꾸하기가 귀찮았다. 스란두일은 왠지 모를 피로감에 동굴 벽에 몸을 기대었다. 문득 밀려오는 두통에 이마를 짚었다가, 손을 떼었다. 열이 있는 것 같았다. 고작 황야를 하루 걸었다고 지칠 몸이 아니건만, 의아했다. 소린이 그 모양새를 보고 물에서 나왔다. 아래만 걸치고는 스란두일에게 다가갔다. 흘끔 바라보곤 무심한 어투로 말했다.


“근처에 청초롱 열매가 열린 걸 보았소. 먹으면 피로가 풀릴 터이니 필요하면 내 따다 드리리다.”


스란두일은 대답 대신 몸을 누일 요량으로 앉은 몸을 일으켰다. 팔을 짚고 일어서자 현기증과 함께 목에서 뜨거운 열기가 올라왔다. 참지 못하고 왈칵 소리를 내며 구토했다. 놀란 소린이 다가와서 그의 팔을 붙들었다. 괜찮다는 투로 손바닥을 들어 보였으나 얼굴이 많이 창백했다. 소린이 그의 안색을 살피고 몸을 신중히 훑어보았다. 걷어 올라간 소매 아래 길게 스친 찰과상이 하나 있었다. 달빛만으로도 그 색이 분간 갈 정도로 상처가 검게 변해 있었다.


“독풀에 스친 게군. 중독된 거요.”


어지러운 와중에 스란두일은 제 몸을 끌어다가 도로 앉히는 손길대로 순순히 따라야 했고, 소린이 제 소매를 멋대로 걷어올리고 손목까지 잡아 들어올리는 것도 제지할 수 없었다. 소린은 손목 아래 상처에 입술을 가져갔다. 강하게 빨아내고 뱉기를 몇 번 반복하는 것을 스란두일이 혼몽한 정신으로 바라보았다. 젖은 검정 곱슬머리에서 물이 맺혔다 떨어져, 스란두일의 무릎을 방울씩 적시고 있었다. 제 피를 빨고 뱉기를 반복하느라 근육이 오르내리는 어깨는 물 탓에 반들반들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는 소린이 제 피를 빨아내는것이 마치 짐승이 다친 동료를 핥아 주는 것과 같다 생각이 되어 가슴이 간질간질해졌다. 그리고 한켠으로는, 독이 있는 것을 알면서도 용의 피를 서슴없이 입에 머금는 소린이 어리석다 여겨지기도 하였다. 그는 까무룩하게 잠이 드는 정신 끝에 소린의 말 몇 마디를 겨우 들을 수 있었다. 약초를 찾으러 간다고 하는 것 같았다. 아무리 주변이 안전해 보인다 하더라도, 정신을 잃어가는 저를 홀로 두고 떠난단 말인가 싶었으나 입 밖으로 목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숲의 아침은 느리고 차가웠다. 스란두일은 선선한 습기를 느끼며 눈을 떴다. 몸을 일으키자 소린이 동굴 밖 나뭇가지에 걸어둔 옷을 걷어 입는 모습이 보였다. 놀랍게도 몸이 개운해져 있었다. 소매를 걷어 상처를 확인했다. 스친 자국은 여전히 길게 남아 있었으나, 붉은 기만 좀 돌고 거의 나아 있었다. 그는 해가 밝게 비치는 동굴 바깥으로 나갔다. 아침의 물 냄새가 시원했다. 고개를 들자 옅은 바람에도 서로 스치는 풀이 잘게 소리를 냈다. 사이로 보이는 하늘도 맑아 보였다.


“독 가진 자가 중독된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도 없소.”


소린이 앞을 대강 여미고 겉옷을 다부지게 털어 입는 동안 스란두일은 물가로 다가가 상체를 숙였다. 물을 손바닥에 담고 말라붙은 입술을 축였다. 백금발이 금세 젖었다.


“그래도 애써 밤 숲을 다녀 약초를 찾은 보람이 있더군. 씹어서 먹여 드리니 금방 혈색이 돌아와 다행이었소.”


아니나 다를까, 동굴에서 보아도 소린의 바짓자락이 엉망이었다. 스란두일은 밤눈이 어두운 난쟁이가 여기저기 나무들을 꺾고 더듬으며 별과 달에 의존해 약초를 찾아 헤매는 것을 상상했다. 그리고 하나하나 뜯고 씹어서 제 입술에 밀어 넣어 주는 것 또한 떠올렸다. 고맙다는 말 대신 동굴 안에 놓인 소린의 짐을 들어 건네주었다. 소린은 그를 마주하지도 않고 짐만 받아 그대로 등을 돌렸다. 물이 떨어지는 계곡의 소리에 낯선 기척이 섞였다. 스란두일은 동굴 바닥에 놓인 제 검을 가만히 집어들었다. 소린 또한 소리 나는 방향을 향하곤 허리춤에 손을 가져갔다. 사나운 짐승이라면 그나마 다행일 터였다. 하지만 최근에 이런 숲에도 간간이 오르크들이 출몰하지 않았던가. 허나 나무 사이에서 튀어 나온 것은 어린 사슴이었다. 소린은 사냥할 요량으로 칼을 뽑아 들었다. 다가서려 할 때에 사슴은 망설이는 듯하다가, 그의 앞을 스쳐 걸었다. 겁 없어 보이는 움직임을 눈으로 쫓으니 저 동굴 앞에서 손을 뻗고 있는 스란두일의 앞에 서는 것이 아닌가. 소린은 적잖이 놀랐다.


“어미가 근처에 있을 것이오. 내버려 두면 저를 부르는 소리를 듣고 돌아가겠지.”


작은 혀가 손가락을 핥는 것을 보며 스란두일이 미소 지었다. 소린은 그 모습이 착하지, 돌아가자꾸나 하고 꼭 짐승에게 말을 내뱉는 것 같아서 생경하였다. 사슴의 머리를 조심스레 쓰다듬은 스란두일이 손을 거두었다. 까만 눈을 굴리며 그를 올려다보던 어린 짐승은 다시 소린의 앞을 지나 나무 사이로 들어갔다. 그제야 소린이 머쓱하게 칼을 집어넣었다. 먼저 걸어가는 그의 옆으로 스란두일이 걸음을 따라잡았다. 











스란두일은 이따금 걸음 옆에 닿는 나뭇잎과 열매, 꽃들을 꺾었다. 나뭇가지 위에 익숙하게 잇고 엮는 손을 소린이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보석이나 금, 돌을 다루는 재주는 난쟁이를 따라올 자는 없었지만 그 손이 살아 있는 식물을 엮는 재주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릴 때에는 이렇게 꽃과 잎을 엮어서 머리에 장식하고 다니곤 했습니다. 지금도 가끔은 제철에 피는 꽃을 엮어 쓰기도 하지요.”

“요정들은 숲과 풀을 아낀다 들었소만.”


줄기를 가지 사이로 돌려 꼬았다가 뜯어지지 않게 묶는 손은 쉬이 익숙해서 걸음에도 흐트러지질 않았다. 하얀 손가락이 나뭇가지 하나 위에 각기 다른 꽃과 잎을 덧붙이고 있었다.


“물론입니다. 하지만 약해서 곧 땅에 떨어질 것이라면 이야기가 다르지 않습니까? 여리고 가여워서 아름다운 게 식물입니다. 하지만 강해서 아름다운 것이기도 하지요.”


소린은 스란두일의 말을 쉽게 이해하지 못하고 그저 듣고만 있었다. 난쟁이의 귀에는 그가 말하는 식물 운운이 꼭 어렵게 말을 꼬아 놓은 시구절 같이 들렸다. 스란두일은 장식한 나뭇가지를 품에다 조심히 넣고 말을 이었다.


“숲은 길고 깊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린 짐승은 사냥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


아까의 어린 사슴을 일컫는 것이리라. 사냥에 서툰 난쟁이였다면 스란두일의 말을 모욕으로 받아들였을 것이었다. 그러나 소린은 그가 난쟁이의 습식을 알고서도 이리 말하는 이유를 눈치 채고 대신 말을 이었다.


“피 냄새를 맡고 맹수들이 달려오면 곤란하기 때문이라 말하고 싶은 거요? 이 숲에 사는 맹수라 해보았자 내가 사냥 못하는 것은 없소.”


스란두일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어찌 될지 모르는 것이지요. 우리는 사냥무리가 아니라 둘이지 않습니까? 맹수가 떼로 덤벼들고 오르크가 습격한다면 어찌 될 거라 생각하십니까?”


반박하고 싶었으나 일리 있는 말이기에, 헛기침만 한 번 하고 말았다. 소린은 문득, 제 아비의 시신을 거두던 때를 떠올렸다. 오르크에게 갈기갈기 찢겨 몇 군데는 찾지도 못하고 엉망이 된 것을 그대로 매장했더랬다. 무거운 생각을 잇고 있자니 스란두일이 걸음을 멈추었다. 돌아보며 의아해할 때, 소린에게도 귓가에 스치는 소리가 있었다. 사슴과 다르게 확연히 빠르고 사나웠다. 풀을 스치고 가까워지는 동안 소린은 검 손잡이를 쥐었다. 


“말이 씨가 되었군.”

“미안하게 됐습니다. 하지만 떼는 아닌 것 같군요.”


소린의 말에 빠르게 대답하며 스란두일이 먼저 칼을 뽑아 들었다. 멧돼지였다. 한 마리인가 싶었더니 소린의 옆구리 쪽으로 또 한 마리가 달려왔다. 스란두일은 하나를 단숨에 베고 소린의 옆으로 돌아오며 칼을 가로로 세워 막았다. 깡, 하고 어금니가 날에 부딪치는 소리가 섬짓했다. 멧돼지가 뒤로 물러서자 스란두일도 옆으로 물러섰다. 짐승은 둘을 번갈아 보며 콧김을 소리 내어 뿜다가, 결심이라도 한 양 소린을 향했다. 소린은 몸을 낮추며, 제게 달려오는 멧돼지의 멱살에다 칼을 겨누었으나 날은 짐승의 가죽 위에 박히지 않고 빗나갔다. 멧돼지는 그의 등을 아슬아슬하게 뛰어 넘었다. 바로 방향을 틀어 스란두일에게 달려오기에 스란두일은 옆으로 피하며 날을 그었다. 피가 몇 방울 흩날렸다. 옆구리에 길게 상처 입은 짐승은 도망가는 듯 싶더니 그대로 주저앉아 숨이 끊어졌다.


소린은 숨을 몰아쉬며, 제 앞에서 죽어가는 짐승을 바라보았다. 스란두일이 다가와 손을 뻗어 주는 것을 무시하고 무릎을 짚으면서 일어나 짐을 고쳐 메었다. 검을 도로 집어넣고는 걸음을 떼었다. 땅에 쓸린 무릎이 따가웠으나 발에 힘을 주었다. 그는 급격하게 밀려오는 피로감을 내색 않으려 나무들을 올려보았다. 확실히, 그가 사냥을 다니던 숲과 비교해 보면 나무가 장대하고 커서 그늘이 짙었다. 하늘을 가리는 잎이 두껍고 커서 오히려 햇빛은 더 강하게 내리쬐는 것처럼 느껴졌다. 땀이 흘러내리는 것을 손등으로 닦았다. 스란두일은 옆에서 말없이 따라올 뿐이었다. 소린은 눅눅하고 갑갑해지는 가슴 한가운데를 주먹으로 치고 싶어졌다. 


“용의 힘을 받고도 전혀 쓰지 못하는 자들도 있었소?”


결국 입 밖으로 꺼내 물었다. 시선을 올린 채 어른어른한 햇빛을 구경하며 묻는 소린의 말에, 스란두일은 선뜻 대답거리를 찾지 못하였다. 발끝을 내려다보니 바람에 따라 그림자가 일렁여서 어지러웠다. 그림자는 나뭇잎을 지나치는 것에 따라 스란두일의 얼굴 위에도 연신 불규칙적인 무늬를 그리며 지나갔다. 그는 눈이 부셨다가 편해지는 것을 연달아 느꼈다. 한참 생각을 잇고서야 말했다.


“소린, 그대가 가지시려 하는 힘은 가시적이거나 화려하지 않기도 하합니다. 정의하기 힘들군요. 길잡이마다 나타나는 방향도 방식도 모두 다르니 말입니다.”

“그것이 자질과도 관련된 것이오?”

“그렇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예민하고 분별력 있는 종족이기에 용의 힘이 어울리지 않는 자는 길잡이로 선택하지 않습니다.”


소린은 더 말하지 않았다. 용들이 길잡이를 선택하는 방식은 그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일종의 계시처럼 한 사람을 택하고, 찾아가서 청을 하는 것이었다. 에레보르로 와서 막 대장간에서 나와 땀을 흘리던 그의 앞에 꿇어앉아 청을 하던 스란두일과 같이 말이다. 같은 왕손이지만, 비록 스란두일은 정식으로 왕위를 받지 못하는 왕손이라 하더라도 소린에게 굳이 존대를 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지 않나, 하고 소린은 넘겨 짚었다. 길잡이는 여행을 하다 목숨을 잃을 수도 있기에 청을 듣고도 거부하는 자도 물론 있었다. 그러면 그들은 또 다른 자를 찾아가 무릎을 꿇는다. 그래서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라고 제 힘을 일시적이나마 나누어 주고, 적합하다 여겨지는 자를 택하는 것이다. 다만 길잡이를 어떻게 선택하는지, 왜 적합하다 여기는지는 스란두일 뿐만 아니라 다른 용들도 설명하기 힘든 부분이었다. 대답 없는 그를, 스란두일도 굳이 마주하지 않았다. 대신 한 마디를 덧붙였다.


“성급히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행의 막바지에서야 각성하듯 힘을 쓰는 자들도 있다 들었으니.”


그러나 소린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침묵 속에서 사부작거리는 발소리와 이따금 나뭇잎들이 스치는 소리만 들렸다. 


스란두일은 이 여행길에서 소린이 기를 쓰고 자신을 보호하려 드는 상상을 했다. 난쟁이 또한 강한 종족이었으나 거대한 성체를 가진 용에 비하면 나약하기 그지없었다. 그런 난쟁이가 힘을 얻으려 칼 하나만을 가지고 제 앞에 몸을 던진다는 것은 얼마나 어불성설인가. 그 모순을 견딜 수 있을지 자문해 보아도 답은 알 수 없었다. 


생각이 깊어서 스란두일의 걸음이 꼭 혼자 걷는 것 같아 소린은 여러 번 뒤처졌으나 굳이 내색하지 않았다. 그는, 스란두일을 잡아 세우고 왜 자신을 길잡이로 택했냐 묻고 싶었다. 옆에 가는 팔을 붙들어 세우고는 짐승 몇 마리도 단숨에 처리하지 못하는 저를, 왜 택했냐고 따지고 싶었다. 그러나 걸음을 늘어뜨리며 애써 꾹꾹 참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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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린스란 중장편/Eid

Eid 2

어찌 귀한 왕손이 죽을 수도 있는 여행길에 오를 수 있는지, 난쟁이왕은 제 손주의 선택을 끝까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야속했다.


스란두일이 다녀간 뒤로 에레보르는 발칵 뒤집혔다. 왕은 용의 길잡이가 되어 여행을 떠나겠다는 소린의 고집을 꺾고 싶었다. 단 한 번도 손주의 고집을 제대로 꺾어 본 적이 없었으나, 이번만은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는 제 아들이 죽을 때처럼 오르크에게 잔혹히 사지가 뜯기는 소린을 상상하고는 몸서리쳤다. 손주까지 잃을 수는 없었다. 대면을 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으나 소린은 제 조부를 보지 않고 방에 틀어박혔다. 난쟁이왕은 떠나기 직전, 호위도 없이 봇짐 하나를 맨 채 휘적휘적 걷는 소린에게 단검 하나를 건네었다. 새카만 날을 보고 단검을 못 알아볼 소린이 아니었다. 그는 사색이 되어 고개를 저었다.


“용에게 오해를 살 것입니다.”


왕 또한 고개를 저었다.


“넣어 두어라. 혹시 모르는 용도이니.”


짐에 밀어 넣어 주는 것을 거절할 도리는 없어서 소린은 조부가 하는대로 내버려두었다.


“무사히 돌아오겠습니다.”


하고 돌아서서 걷는 내내 등 뒤로 시선이 머물렀다. 


소린은 조부에게 그리 돌아섰던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앞만 보던 시선을 내려 버석버석한 모래가 제 검은 장화 위에 뒤섞이는 것을 보았다. 그 위로 에레보르의 지하, 파고 내려간 아득한 지하 노란 불빛 아래 일던 돌먼지를 떠올렸다. 스란두일을 만나 맨 처음 걷는 길은 바싹 마른 황무지였다. 바위와 돌만 가득한 길은 제법 단단한 다리를 지닌 난쟁이족이라 하더라도 충분히 혹독했다. 소린은 봇짐을 고쳐맸다. 그의 짐은 들 수 있을 만큼 대강 정리한 것이라 가볍고 간소했다. 그는 옆에 걷는 스란두일을 곁눈질했다. 주머니 하나 없어 보이는 맨 몸에 검만 찬 것이 못내 신경 쓰여, 결국 운을 떼었다.


“먹을 것이나 마실 것은 가져오지 않으셨소?”


내려다보는 스란두일의 눈이 제법 샐쭉했다.


"배가 고프면 열매를 먹으면 될 것이고 목이 마르면 냇가를 찾으면 되지요. 그리고 저는 오래 먹지 않고도 견딜 수 있어 필요치 않습니다."


대답이 차분해서 소린은 머쓱하게 헛기침했다. 앞을 보니 온통 황야가 늘어서서 끝이 있기는 할까 싶었다. 넓은 황야를 건너면 사나운 인간 부족 몇이 마을을 이루기는 했으나 난쟁이나 요정과는 큰 교류가 없었다. 가운데땅은 살기 좋은 곳과 살지 못하는 곳이 고루 섞여 있었다. 소린은 낯선 땅을 밟으며 걸음마다 책장을 넘기듯 설레기도 하였고,  마음 한 켠에서는 경박함을 누르고자 불안키도 하였다. 비록 길잡이란 이름을 달았어도 그는 용의 섬으로 가는 길을 알지 못했다. ​성스러운 섬으로 가는 길은 오직 용들만이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둘 앞으로 바람이 불어 다른 색의 머리칼이 제각기 흩날렸다. 코 안이 갑갑할 정도로 공기가 바짝 말라 있었다. 흙냄새가 짙게 나는 것을 느끼며 소린은 매캐한 코끝을 문질렀다. 훔쳐 본 스란두일의 옆모습은 흙먼지에 엉겨 조금 부옇게 보였다. 성에서 걸쳤던 얇은 흰 옷 대신 일전에 보았던 짙은 붉은 색의 겉옷자락이 땅에 끌려 먼지를 있는대로 끌었으나 본인은 개의치 않는 듯했다.











몇 시간을 걸었을까, 대지가 뿜는 뜨겁고 마른 기운이 강해 발에 열기가 오르기 시작했다. 소린은 잠깐이라도 쉴 요량으로 먼저 넓은 바위 위에 앉았다. 말없이 따라온 스란두일은 앉지 않고 옆에 서 있었다. 소린은 그의 심중을 읽어낼 수는 없어서 그저 흘끔흘끔 바라볼 뿐이었다. 반용의 눈은 땅으로 내리깔고 있어서 먼 길을 걸어온 태없이 곱고 차분했다. 큰 키가 소린의 땀 젖은 이마에 그늘을 드리워서 그의 얼굴은 소린이 보기에 더 서늘해 보였다. 스란두일, 하고 부르자 옆얼굴이 느리게 이쪽을 향했다. 


“용이 사는 섬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계신가?”

​“들어 본 바는 있으나 저도 자세한 것은 알지 못합니다. 신비로워서 말로 표현 못할 부분이 많다고만 전해 들었지요. 몇만 년을 살아 영물이 되어 먹지도 마시지도 않는 고대용들이 지낸다고는 하나, 이는 왕손께서도 익히 아시는 바겠지요.”

“길은 확실히 아는 것이오?”


스란두일은 대답을 않고 한 걸음만큼 바짝 다가왔다. 표정 없는 눈으로 소린을 내려보고 있다가, 그의 이마 위 땀이 식을 만해서야 옆에 한 뼘 거리를 두고 앉았다.


“소린, 그대는 앞으로 나를 지키셔야 하는 입장이지 않습니까?”


어투가 제법 따박따박했다. 스란두일은 다리를 꼬았고, 소린은 그가 말을 잇기 기다렸다.


“비록 왕위를 물려받지 못하오나 내가 왕족임은 그대도 익히 알고 계실 터인데, 하대하거나 무시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소만.”


결국 뾰족하게 자존심 세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소린은 헛웃음을 짓고 싶었으나 참고, 다만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앞에 섰다. 이번에는 스란두일의 볼 위에 그의 그늘이 졌다.


“나 또한 왕손이오. 그러니 서로 하대할 이유는 없겠군. 그렇지 않소?”


소린이 손바닥을 온 방향 반대로 내밀어 보였다. 먼저 가시라는 뜻이었다. 스란두일은 아랫입술을 지분하게 물었다가 꼬았던 다리를 풀고 일어났다. 막 걸음을 내딛으려는데 머리 위로 그림자가 떨어졌다.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는 스란두일의 손목을 소린이 잡아채었다. 무엇인지 확인할 새도 없이 바위 뒤로 끌어당겼다.


“검은갈가마귀 떼요. 습격을 당하면 뼈만 남기고 뜯어 먹힐지도 모르니 움직이지 마시오.”


스란두일은 놀란 속을 차마 숨기지 못해 눈을 동그마니 뜨고 소린을 보았다. 두 얼굴 사이는 숨결이 금방 섞일 만큼 좁았다. 그는 난쟁이왕손의 조심히 오르내리는 어깨 모양에서 그가 검을 쥔 모습을 떠올렸다. 난쟁이의 힘이라면 덩치에 맞잖게 무겁고 큰 날을 들고도 여러 번 싸웠으리라. 검은 머리칼을 땋고 끝에 매어 둔 은장식은 밤새 스스로 세공한 것인지도 몰랐다. 룬 문자로 보이는 것이 작은 틀 안에 열을 맞춰 곰살맞게 새겨져 있었다. 스란두일은 그의 진중한 옆얼굴, 거뭇거뭇하게 수염 덮인 턱을 보며 말했다.


“이리 가까이 있으면 내 독에 더 빨리 중독된다는 것을 아십니까?”


그러자 얼핏 마주한 눈이 금세 비웃어 버리기에, 한 마디를 덧붙였다.


“내성이 있는 자라 하더라도 간혹 쓰러지는 경우가 있지요.”

“그럼 가는 내내 멀찍이 떨어져 서서 내외라도 해야겠군.”


다부지게 비꼬는 데에까지는 대답하지 못했다. 흐드러지는 수천의 날갯짓 소리가 요란하게 머리 위로 지나가고 나서까지도 소린은 빈 하늘을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먼저 일어서고 스란두일에게 손을 내밀었다. 맞잡아주는 스란두일은 호기심 도는 눈을 숨기려 부러 그를 마주하지 않았다. 난쟁이왕손의 두터운 손바닥이 생각만큼 거칠지 않아 놀란 것도 내색하지 않았다. 무릎을 대강 털고 앞서서 먼저 걸으니 등 뒤 자락이 펄럭이기에 퍼뜩 돌아보았다. 소린이 끌리고 구겨진 그의 겉로브 자락을 대강 정리해 주고 있었다. 남의 서툰 손길에 옷자락이 풀럭이니 기분이 생경했다. 왕손이라는 자가 누구의 옷을 손수 정리해준다는 이야기는 듣도보도 못했기에 더더욱 의구심이 들었으나, 스란두일은 소린이 하는대로 그저 내버려 두었다. 자락을 놓은 소린이 말했다.


“스란두일, 나는 누구를 따라다니며 보호해 본 적이 없소.”


짧은 그림자가 곧은 걸음 옆으로 곧잘 따라잡았다. 지지 않고 땅을 차며 앞을 질렀다. 


“그대가 뛰어난 검사인 것도 들어 알고 있소. 허나 나 또한 두린의 직계혈통이오. 어디서 쓰러질 만한 몸은 아니란 뜻이오.”


소린은 제 손바닥을 펴서 내려다보았다. 찌르르하게 몸에 흐르던 용의 힘도 떠올렸다. 금방 먹먹하고 갑갑해졌으나 입술만 앙다물었다. 그러니 믿으시오, 하는 말을 뒤에다 이어야 했으나, 굳이 뱉지 않았다. 스란두일은 듣고 있단 뜻으로 눈길을 한 번 주었다. 굳이 덧붙일 말도, 긍정할 말도 없었다. 옆에 따라오는 낮은 어깨는 그가 속도를 맞추어주지 않아도 힘들이지 않고 곧잘 따라왔다. 스란두일은 내색 않았으나 큼직하고 군더더기 없이 간결한 소린의 걸음이 마음에 들었다. 크게 걷는 와중에도 시선이 언뜻언뜻 스란두일의 곁으로 비쳤다. 그는 소린이 저를 보고 있는 것을 알아도 굳이 태를 내지는 않았다. 그렇게 걷는 내내 한참을 뜸들이다 소린이 말했다.


“그, 억지로 끌어당기는 통에 다치지는 않았소? 내가 손이 성급해서.”


스란두일은 질문을 선뜻 읽지 못해서 잠깐 망연하게 있다가, 대답 대신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서야 짧게 말했다. 


“괜찮습니다.”


소린은 헛기침을 하고 제 어깨에 걸어 맨 짐을 한 번 고쳐 매었다. 앞으로 한 시선 끝에는 황야가 끝이 없는 듯 보였다. 황토색과 바위의 회색이 뒤섞여 길게 이어진 지평선과 구름 없는 새파란 하늘이 맞닿은 것을 보니 갈증이 이는 것 같았다. 고개를 조금 드니 중천에 다다른 해가 보였다. 사정없이 내리쬐는 게 둘의 여행을 비호한다 할 수는 없었으나 소린은 이에 서운히 생각하지 않았다. 누군가의 비호를 받을 일은 없어야 한다, 그것이 제 옆의 스란두일이라 하더라도 긍지 높은 난쟁이 왕손에게는 마찬가지였다. 해가 지기 전까지 이 넓은 황무지를 벗어나려면 쉬지 않고 부지런히 걸어야 할 것이었다. 그동안 다시 검은갈가마귀 떼가 덮칠지도 모르고, 그보다 더한 것이 나타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소린은 허리춤에 찬 칼 손잡이를 더듬어 보았다. 옆에서 걷는 스란두일의 옷자락이 흙에 끌리는 소리에 귀 기울였다. 기분이 조금 들떴다. 한 걸음 정도의 거리를 두고 함께 걷는 스란두일이 낯설었다. 이종족의 체향은 호기심 많은 젊은 난쟁이의 피를 데우기에 충분했다. 그는 며칠 걷다 보면 금방 발톱이 빠지고 물집이 잡힐 것을 알았다. 튼튼한 가죽장화도 여행의 끝에는 덕지덕지 덧대야 할지 몰랐다. 소린은 스란두일 모르게 한숨을 내뱉었다. 시선이 자꾸 아래로 처졌다. 해도 곧 꺾일 것이고, 밤이 되기 전에 황야를 벗어나지 못하면 어디서 밤을 지새야 할지도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제 시작일 뿐인 것을. 떨구던 시선을 들고 걷는데 마른 바람에 백금발이 휘날리는 것이 옆으로 어른어른했다. 무심히 쳐다보다가 스란두일과 눈이 마주쳤다. 저도 모르게 먼저 화들짝 피하고 앞을 바라보았으나, 옆얼굴에는 스란두일의 눈이 한참 머물렀다. 흙바람에 말라가는 입술을 혀로 축이고 달싹였다. 한참 고민하다 겨우 말을 꺼냈다.


“성년식이 지나면 성체를 갖지 않소? 비늘이라든가, 그, 날개라든가 하는 것들 말이오.”

“그렇소만.”

“어떤 색인지, 어떤 모양인지는 아직 모르는 거요?”

“내가 타고난 모습이야 따로 있겠지만서도 색이나 모양새까지는 미리 알 수가 없습니다.”


소린은 백금발에 벽안을 가진 미인이 용의 모습을 띠게 될 것을 쉽사리 상상하기가 힘들었다. 일전에 성에서 보았던 파수꾼들처럼 큰 날개를 드리우고 창공을 날아다니는 것은, 더더욱 상상하기가 힘들었다. 스란두일은 그의 표정이 심각해지는 것을 곁눈으로 눈치 채고 속으로만 살포시 웃었다. 볼 위로 엉켜드는 머리칼을 뒤로 넘겼다.


“성체를 가지고도 딱히 외양을 바꿀 생각은 없습니다. 날개며 꼬리나 화염은 싸울 때에나 쓸 것이 아닙니까?”


소린이 바로 허, 하고 헛웃음을 지었다.


“용모는 소용이 없소. 내가 당신이라면 망설일 것도 없이 성체로 평생을 살 테요.”


스란두일이 소리 내어 웃었다. 소린은 맑고 낮게 퍼지는 웃음소리에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처음 보는 스란두일의 웃는 얼굴이 모래먼지에도 해사했다.


“왕손께서는 용이 부러우신 것입니까?”

“용광로를 지필 불이나 영생 동안 쌓을 수 있는 지식만은 조금 부럽긴 하군.”


웃음이 가시지 않은 목소리로 던져 준 물음에서야 퍼뜩 정신이 들어, 단호하게 대답하였다. 스란두일은 미소를 띤 채 더 말을 붙이지 않았다. 침묵이 어색하지 않아 소린 또한 굳이 말을 붙이지 않았다. 해는 계속 기울 터였으나 둘 모두 걸음이 바쁘지 않았다. 마른 바람이 다시 스쳤다. 소린은 스란두일의 성체를 상상하려다, 태양에 눈이 부셔 생각이 자꾸 산란해 생각을 거두어 버렸다. 













독일어; Eid [ait]  
[남성] 선서;(신 또는 성스러운 것에 대한) 맹세, 서약, 서언(誓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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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린스란 중장편/Eid

Eid 1

되게 부끄럽네요... 수정하고 재연재들어가는 Eid입니다.

설정 및 세부 사항과 문장들이 수정되었습니다.









용은 아름다운 종족이었다. 그들은 성년이 지나면 강한 비늘에 덮인 성체를 얻었으며, 성체를 가진 후라 하더라도 자의에 따라 성년 전의 모습으로 지낼 수도 있었다. 


그들은 태초에 다른 종족들이 하나씩 태어나는 것을 지켜보았으며 그 중 요정의 모습을 가장 사랑하였다. 따라서 가운데땅에서 지내는 용들은 요정의 모습을 띠고 있는 자가 대부분이었다. 가운데땅에 있는 용의 성을 지키는 파수꾼들은 거대한 성체를 가지고 큰 그림자를 드리우며 쉼없이 비행하였고 용의 성 주변은 파수꾼들이 드리우는 거대한 그림자로 인해 날짜가 바뀌듯 그늘과 햇볕이 느리게 교대했다.


스란두일은 용과 요정왕 사이에서 태어났다. 용과 요정이 결합하여 낳은 자손으로는 스란두일이 최초였으나, 그 또한 다른 용과 마찬가지로 성년을 맞이해야 했다. 성년이 가까워지며 스란두일은 점점 더 강해졌고, 요정왕인 아비에게서 배운 검술은 요정을 통틀어 모든 가운데땅의 전사들 중에 필적할 수 있는 이들이 거의 드물었다. 그는 긴 백금발을 갖고 있었으며 눈동자는 달빛을 머금은 얕은 바다의 색을 띠고 있었다. 왕족의 피가 흘러 고개를 숙이는 일이 없었고 뼈대와 걸음 또한 단단했다. 허나 용의 아름다움과 요정의 아름다움, 두 종족의 오랜 현명함을 모두 물려 받은 그를 실제로 본 이들 또한, 아주 드물었다. 우연히 그를 만나 근처에서 체향이라도 맡은 자들은 용족 특유의 기묘한 힘에 압박되어 차마 다가가지 못했다. 그렇다고 그가 가진 아름다움을 잊지도 못한 채 먼 발에서 그를 그리는 자가 여럿이었다. 따라서 스란두일이 성년이 되는 해에 그가 길잡이로 누구를 선택할 것인지에 대해서 온 가운데땅이 들썩인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고결한 용족 혼혈의 곁에서 머물 수 있는 자가 누가 있을지,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다.


모든 용족은 성년이 되는 해, 성년식을 치르기 위해 가운데땅을 떠나 용의 섬으로 갔다. 용의 섬에는 고대용들만이 소수 지내고 있었으며 다른 생명체는 없었다. 그들이 지키는 '꺼지지 않는 화로'에 피를 흘려 넣은 용은 거대하고 강한 성체를 얻을 수 있었다.


가운데땅에 지내는 용들은 함께 용의 섬으로 가서 증표가 되어 줄 다른 종족을 필요로 했다. 모두가 이를 길잡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길잡이를 할 수 있는 이는 거의 없었다. 용이 선천적으로 갖고 있는 독성을 견디기 힘들어서였다. 용이 가진 독성은 다른 종족들의 눈을 멀게 하고 힘을 빼앗았다. 용의 곁에 몇 시간 이상 머문 자들은 눈이 멀고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그것이 용족이 스스로 고립해 살아가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독성에 내성이 있어 길잡이가 된다 하더라도 가는 길에 용족의 아름다움을 탐낸 자들이나 오르크들의 습격으로 목숨을 잃는 길잡이도 부지기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길잡이로 선택되면 위험을 무릅쓰고 떠나는 이들 또한 많았다. 성년식이 끝나면 보상으로 용의 힘을 나눠 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난쟁이가 용의 길잡이가 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소린은 에레보르에 사는 왕손이었다. 같은 대에 태어난 난쟁이 중 소린이 맏이였고, 그는 난쟁이들 중 가장 뛰어난 대장기술과 가장 강인한 몸을 갖고 있었다.  소린의 부친 - 난쟁이왕의 아들은 사냥을 나갔다가 오르크에게 목숨을 빼앗겼으며, 그 날 이후 원래 검던 소린의 머리칼이 몇 가닥 세기 시작했다. 희게 센 머리는 다시 색을 되찾지 못했다. 또한 더 세지도 않았다. 아들을 잃은 난쟁이왕은 그를 총애했다. 


소린은 며칠 밤을 새어도 끄떡없는 몸을 갖고 있으면서도 왕이 되기에는 스스로 부족하다 여겼고, 늘 눈빛과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으려 애썼다. 그는 깨어 있는 시간 대부분 동안 대장간 아니면 서가에 있었다. 제왕학을 어릴 때부터 공부한 그가 성군이 될 것을 의심하는 난쟁이는 아무도 없었다. 말이 없고 고집이 센 성격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난쟁이들이 그를 따르는 이유는, 그가 에레보르를 진심으로 사랑했기 때문이었다.


소린이 스란두일을 처음 만난 것은 왕궁의 대장간에서 막 일을 끝내고 나왔을 때였다. 윗옷 없이 온몸에 땀을 흘리며 걷던 에레보르의 광활한 복도, 저 끝이 소란스러웠다. 빛이 들어오나 싶더니 난쟁이보다 머리 하나 이상은 큰 요정이 걸어오고 있었다.


요정이 겉에 걸친 붉은 옷자락이 걸음마다 휘날려 흰 대리석 복도 위를 길게 쓸었다. 다가와서 소린의 앞에 무릎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길잡이가 되어 주실 것을 요청합니다.”


소린은 그저 눈썹 위 흐르는 땀을 닦으며 망연히 요정을 내려다보았는데, 이는 당혹감보다는 스란두일의 모습에서 경외심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소린은 그제야 제 앞에 있는 것이 용족과 요정의 혼혈로 태어난 스란두일이라는 것을 알았다. 여태껏과 다른 식은땀이 옷 없는 등 위로 길게 흘러내렸다. 겨우 입을 떼고 일어나시라 말했다. 스란두일이 일어나자 둘의 눈이 처음 마주했다. 에레보르 밖에서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소린과 스란두일의 첫대면이었고, 이 날이 훗날 후손들이 칭하는 첫 계약의 날이었다.











용의 성은 가운데땅의 가장 북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가 가장 빨리 뜨는 곳이기도 하였다. 이곳은 가운데땅 안에서도 하나의 성역이었다. 태초부터 땅을 지켜온 용은 최초의 종족이었으며, 그들을 경외시하는 것은 요정이나 난쟁이, 인간들에게는 당연한 것이었다. 물론 용의 독성을 견뎌낼 수 있는 자들이 별로 없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이유였다.


소린은 검은 로브를 입은 용족들에게 둘러싸여 성으로 들어갔다. 용족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며 소린 또한 굳이 말을 걸지 않았다. 앞에 가는 이의 검은 로브자락을 내려다보았다. 독성을 조금이나마 막아주는 산씀바귀 씨에서 실을 자아내 만든 로브일 터였다. 어린 아이들이나 몸이 약한 자들에게는 물론 이러한 로브도 소용이 없었다. 용의 독에 올라 눈이 멀고 피를 토하며 쓰러지는 것은, 면역 없는 자에게 일종의 저주라 칭해도 과하지 않았다. 소린은 고개를 들어 위를 바라보았다. 용의 성, 뾰족한 첨탑이 닿은 먼 하늘에 거대한 용 몇 마리가 느리게 날고 있었다. 강에 놓인 다리는 몇십 분을 걸어야 할 정도로 길었다. 건너는 동안 다리 끝에 위치한 흰 성체가 보였다. 물빛이 어른어른 해를 반사해서 소린은 눈이 부셨다. 마침내 당도한 용의 성 정문은 에레보르 못지않게 크고 웅장하고 아름다웠다. 문이 열리고 소린은 긴장감을 세우며 안으로 들어갔다. 


"환영합니다, 에레보르의 왕손이시여."


스란두일이 가장 먼저 소린을 맞았다. 그는 은색의 로브 위에 새하얗고 얇은 겉옷을 여미며 손을 안으로 내밀어 보였다. 소린이 지체 없이 앞으로 걸었다. 스란두일이 반 걸음 앞에서 안내했다. 소린을 데려왔던 자들은 입구에서 더 이상 따라오지 않았다. 그는 스란두일을 따라 걸으며 성 내부를 둘러보았다. 벽이나 기둥으로 만든 것은 대부분이 흰 빛을 띤 돌이었다. 거의 세공하지 않고 최대한 있는 그대로를 사용한 듯했다. 깎고 다듬고 보석을 박아서 사용하는 난쟁이들의 에레보르에 비하면 불규칙적이고 울퉁불퉁했다. 또한 땅 아래에서 횃불을 반사하는 검은 에레보르에 비해 이곳은 창을 큼직큼직하게 내어 놓아 햇빛이 거름 없이 들어오고 있어 온통 환했다. 매끄럽지 않은 벽과 기둥은 행여 동굴에 들어온 듯한 느낌마저 주었고, 선연한 흰색이나 회색, 검정색으로 이루어진 돌의 무늬는 시원하고도 신비로웠다. 성 안에는 따로 경비가 없었다. 소린은 그럴 만하다고 생각했다. 저 성 위에 떠다니는 거대한 용을 이기고 굳이 이곳까지 들어오겠다 우기는 자들은 아무도 없을 것이었다. 다른 종족에게 용이란, 그런 존재였다.


"스란두일, 그대가 길잡이로 택하셨다는 자가 바로 이 자입니까?"


누군가 가까이 다가와, 둘은 걸음을 멈추었다. 소린은 걸어온 회랑을 돌아보다가 앞에 있는 자를 마주했다. 처음에는 큰 키의 요정인가, 하였으나 금세 용족이라는 걸 눈치 챌 수 있었다. 외향적으로 다른 점을 말로 표현키는 힘들었으나 분위기로 두 종족을 분간하는 것이 어렵지는 않았다. 그가 먼저 예를 갖추어 소린에게 고개를 숙였다.


"왕손이시여, 어서오십시오."

"……스로르의 손자 소린이오."


소린 또한 고개를 숙여 보였다. 잠깐 마주친 동안 용이 저를 보는 눈에 호기심이 강하게 어린 것을 그가 못 볼 리 없었다. 스란두일이 회랑 끝에 있는 의자와 테이블 쪽으로 손을 뻗어 보였다.


"소린, 잠시 실례를 해도 되겠습니까? 이야기를 하는 동안 잠시만 앉아 계십시오."


소린은 스란두일의 말이 버릇없다 여겨지기도 하였고 객을 대하는 태도가 아니라는 생각까지 이어져 내키지 않았으나, 대답 대신 넓은 회랑 끝의 의자로 걸어가 앉았다. 낮은 계단 위에 몇 개의 의자, 그리고 테이블이 있는 곳은 손님들을 응접하는 곳인 듯했다. 에레보르가 황금빛으로 가득하다면 이곳은 창백한 물빛이나 대리석의 흰 빛깔로 가득한 곳이었다. 차갑고, 단단하고, 세공되지 않은 넓은 회랑과 장식 없는 수많은 기둥들- 그리고 투박한 테이블과 의자까지. 소린이 아닌 다른 난쟁이였다면 고대종족들만이 가진 분위기에 압도당했을 터였다. 


십여 걸음 떨어진 채로 대화를 주고받는 둘은 그가 알지 못하는 용족어로 대화를 하고 있었다. 용족어는 말이라기보다는 소리에 가까웠다. 몰아 쉬었다가 또 낮추는 숨소리 속에 비슷한 연음이 높낮이를 달리 하는 것이 난쟁이의 귀에는 노래 같기도 해서 소린은 턱을 괸 채 스란두일의 입술만 무심히 바라보았다. 그와 옆에 선 용은 용족어와 요정의 말을 섞어 써서 마치 그 모습이 노래를 하다 말을 주고받는 것과 같았다. 스란두일의 저음이 노곤하고 맑게 가라앉아서, 기다리는 소린에게 긴장감을 풀게 하고 있었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한참이라 생각된 뒤에야 마침내 대화를 끝낸 스란두일이 돌아섰다. 또각또각, 소린에게 다가서는 동안 차가운 대리석 위에 닿은 장화굽 소리가 회랑을 가득 메웠다. 


"그래, 이제 무얼 하면 되는 것이오?"


퉁명스레 묻는 말에도 스란두일은 선뜻 대답을 않고 가만히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소린은 위에서 아래로 훑는 스란두일의 시선이 제 상태를 확인하는 것임을 익히 눈치 챌 수 있었다. 


"용들은 초대를 해놓고는 빈 테이블 앞에 언제까지고 앉혀두는 것이 예의라 생각하시는 겐가?"


그제야 스란두일은 빙긋이 웃었다. 흡족함이 입가에 드러났다.


"용서하십시오. 성에 들어오기만 해도 까무러치고 의식을 잃는 자들이 있어서 그러했습니다. 어떤 종족이든 길잡이로 선택을 받고 서약을 하러 왔다가 포기하는 경우가 많아서 말입니다."


공용어를 말하는 스란두일의 목소리는 조금 더 정돈되고 무거웠다. 퉁명히 쏘아보는 소린의 눈과 달리 그는 여전히 미소를 띠었다.


"그대가 이곳 용의 성에 들어온 첫 번째 난쟁이십니다. 먼 길을 오셨을 터인데 무례를 범한 것을 사과드리지요. 괜찮으시다면 일단 식사부터 청하고 싶습니다만."











용이 내어준 음식은 생각보다 입맛에 맞아 소린은 체면을 구기지 않는 한에서 배부르게 먹었고, 차를 내어 올 때까지 스란두일과 넓은 회랑에 둘만이 독대하고 있었다. 그는 식사를 하고 차를 마시는 내내 스란두일의 모습을 훔쳐보았다. 누가 보아도 요정의 모습이었으나 상대의 숨을 가쁘게 하는 분위기가 더해 있었다. 소린은 그것이 스란두일 몸에 흐르는 용족의 피에서 나오는 게 아닌가 싶었다. 적당히 표현할 수 있는 단어를 찾으며 따뜻한 차가 담긴 잔을 마셨다. 잔 너머로 바라본, 내려깐 눈꺼풀이 고왔다.


"왕손께서는,"


스란두일이 입을 떼자 그는 황급히 시선을 내렸다. 빛을 머금다가 흔들릴 때마다 뿌려대는 듯한 백금발의 잔상이 테이블위에 어른어른했다. 


"요정을 처음 보시는 게 아니라 짐작합니다만."

"용은 처음 보오."


스란두일은 찻잔을 들어 느긋하게 한 모금을 들이켰다. 


"저는 용이기도 하지만 요정이기도 하지요. 비록 피에 흐르는 독 때문에 제 아버지의 왕국에 자주 머물지 못한다는 점은 있소만."

"그대가 요정왕의 아들인 것 또한 알고 있소."


그 독성 탓에 나와 달리 정식으로 왕좌를 물려받지는 못하겠지만, 하는 말까지는 굳이 내뱉지 않았다. 둘의 시선이 맞부딪쳤다. 누가 먼저 뗄 것인지 내기를 하는 듯 테이블의 거리만큼 긴장감이 채워졌다. 이번에는 소린이 먼저 침묵을 깨었다.


"그래서, 그 서약이라는 것은 언제 해야 하오? 이 차를 다 마시고도 내가 쓰러지지 않으면 진행할 수 있는 거요?"


그는 스란두일의 눈이 차갑다고 생각했다. 미소를 띠고 있거나 말을 하더라도 재색의 그 눈동자가, 채도를 한껏 뺀 청회색이 건조한 새벽처럼 얼어붙어 보이는 것도 용족의 특색인가 싶었다.


“그대 이전에 이 성을 방문해서 서약을 했던 자는 인간이었습니다. 굉장히 용맹하고 성실한 자였지요. 무사히 성년식을 진행해 주고 용의 힘을 얻었소. 그게 정확히 50년 전이었습니다. 그 자가 이 성에 처음 왔을 때 얼마 동안 견뎠는지 아십니까?”


소린이 고개를 저었다.


"두 시간이었습니다. 쓰러져가는 것을 억지로 서약한 뒤에 그와 떠난 용의 힘을 나누어 받고 겨우 소생했지요. 그리고 소린, 그대가 온 지 이제 다섯 시간이 되어가는군요."


말이 끝나자마자 소린은 눈을 비비고 제 두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두툼하게 여기저기 군살이 밴 손은 그대로였다. 시선을 들고 스란두일을 마주했다. 또렷하게 백금발과 재색의 눈이 보였다.


"서약은 이곳의 가장 높은 탑에서 진행되지요. 그대는 내가 택한 길잡이시오만, 서약을 하실지 여부는 아직 그대에게 달려 있으니 올라가는 길 동안 마지막으로 고민하셔도 좋습니다."


스란두일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고 소린은 그를 따라 일어났다. 스란두일의 하얀 겉옷이 걸음에 따라 대리석 바닥을 쓸고 있었다. 투명하고 얇아 보이는 자락을 행여 밟지는 않을까 소린은 가까이 붙으면서도 발치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옆에 서서 함께 걸으니 스란두일의 체향이 느껴졌고, 소린은 왜 그를 가까이서 본 자들이 마음에 병을 얻게 되는지 알 것 같았다. 백금발은 여리고 가늘었으며 걸음에 흩어질 때마다 옅은 체향을 뿜어냈다. 달아서 기묘한 기분이 자꾸 들었다. 가까이서 코를 묻고 맡는다면 필히 아찔하고 어지럽지 않을까 싶었다. 그는 탑을 오르는 내내 정신을 다잡아야 했다. 모든 용이 이러한 것인지 아니면 혼혈의 피를 가진 스란두일만 이리 기묘한 것인지 궁금증이 일었다.


탑으로 올라가는 길은 길었고 긴 나선의 계단은 끝이 없는 듯했다. 계단 바깥으로 난 창문 너머로 이따금 용의 거대한 날개가 묵직한 소리를 내며 스쳐지나가곤 했다. 소린은 마지막 층계에 다다라서는 지친 내색을 않으려 땀을 닦아내고 허리를 곧추세웠다. 못내 다리가 후들거리기 시작했다. 얼마나 더 걸었을까, 소린, 하고 제 이름을 부르는 저음이 탑의 꼭대기에 꽉 차게 울렸다. 그제야 그는 앞을 바라보았다. 위가 뚫린 탑 꼭대기 한가운데 화로가 하나 놓여 있었다. 묘한 위압감이 화로 근처를 둘러싸고 있었다. 스란두일이 먼저 가까이 다가갔다. 흰 옷을 입고 있는 등으로 햇빛이 바로 내리꽂혀, 소린은 시야를 괴롭히는 눈부심이 환영이 아닌가 싶었다. 아찔한 기분은 피로감 때문이라 여기고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스란두일이 손을 내밀고 있었다. 다가가니 붙들어 주었다. 갑작스러운 온기였다.


"마지막으로 묻겠습니다. 익히 들어 아시겠으나 용의 섬으로 가는 길은 험하고 그대가 목숨을 잃을지도 모릅니다. 허나 이겨내고 돌아오는 길에 그대는 내 힘을 나누어 받게 될 것입니다. 길잡이가 되어 저와 동행해 주시겠습니까?"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스란두일은 화로를 바라보고 섰다. 열린 입술에서 흘러나온 것은 용족어였다.


이곳에서 시작한 여정이

성스러운 섬의 꺼지지 않는 화로까지 이어지고 

마침내 길을 돌아 나와 

한 바퀴의 마지막 점을 이을 때까지 

함께 할 길잡이가 여기 있사오니

부디 제가 가진 축복을 나누어 

이 자를 보호할 수 있게 허락하시길

고대의 이름에 요청합니다


화로에서 가는 연기가 한 줄기 피어올라 위로 천천히 솟았다. 소린은 망연하게 스란두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내, 화로에서 불길이 크개 치솟았다. 기세가 강해 하마터면 그는 뒤로 물러설 뻔했다. 어느새 평범한 불처럼 사그라든 것을 입을 꾹 다물고 바라보았다. 스란두일이 가까이 와 마주섰다. 그리고 소린의 양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의 눈에 일순간 스란두일의 몸이 빛나 보였다. 그 다음, 체온보다 뜨거운 기운이 어깨 아래로 흘러내렸다. 흡사 남의 피가 몸에 흐르는 듯해서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여행 동안만이라도 먼저 도움이 되도록 제 힘을 나누어 드렸습니다."


소린은 그 뜻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길잡이가 무사히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정식으로 힘을 받기 전, 적은 힘이나마 일시적으로 나누어 받을 수 있다고 들어 알고 있었다. 허나 찌릿하게 어깨에서 흘러내리는 기분 외에는 어떠한 것도 들지 않는 것은, 무슨 연유인지 혹은 잘못된 것인지 알 수 없어 어벙벙했다.


“아무렇지 않은 것이 정상이오?”


“아직 발현이 되지 않으니 아무렇지 않으실 것입니다. 길을 끝내고 돌아와서 받으시게 될 힘에 비하면 이는 반의 반도 되지 않습니다. 허나 길잡이의 역량에 따라, 어떤 자는 이것만으로도 산 병기가 되기도 하지요.”


“그렇다면, 내가 여행을 끝나고 나서 정식으로 그대의 힘을 나눠 받았을 때에도 마찬가지요? 용의 힘을 갖고 있으나 역량이 부족한 자는 쓸 수 없게 될 수도 있소?”


스란두일이 몸을 돌아 걸음을 떼자 그의 흰 겉옷 자락이 소린의 다리를 한 번 감고 스쳤다.


“왕손께서는 본인께서 성스러운 힘을 쓸 역량이 안 된다 스스로 생각하십니까?”


소린은 그 말에 이를 조용히 물었다.


“다른 종족에게 간 용의 힘이란 그런 것입니다. 쓰는 자가 방법을 찾아내야 합니다. 달리 말하면 무용지물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 번 힘을 맛보고는 여행이 끝마치고 제대로 된 힘을 얻고자 하는 길잡이들도 많았지요. 그 자들은 제 용을 목숨 걸고 지키곤 했습니다.”


대체 어떤 것이길래. 소린은 마음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호기심에 가슴이 뛰었다. 역광을 받고 선 스란두일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의미심장한 그 옆얼굴에서 무엇을 읽어내야 할지 소린은 알 수 없었다. 마침 탑 옆을 스치는 용의 날개소리가 들려 안으로 그늘이 졌다. 화로의 붉은 기운만 남아 둘을 비추었다. 길게 벽 위로 떨어지는 그림자가 흔들렸다가, 용이 창 옆을 지나감에 따라 아주 천천히 햇빛과 함께 사라졌다.


"내려가시지요."


이번에는 소린이 앞섰다. 사부작사부작한 스란두일의 발걸음 소리와 체향이 등 뒤에 가까웠다. 그는 용의 힘보다는 아름다움에 홀려 스스로 목숨을 던질 만큼 여행길에 애를 쓴 길잡이는 없을지, 문득 궁금해졌다.










독일어; Eid [ait]  

[남성] 선서;(신 또는 성스러운 것에 대한) 맹세, 서약, 서언(誓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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