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피옥윤'에 해당되는 글 16건

2015. 11. 6. 22:12

花白

보호되어 있는 글입니다. 내용을 보시려면 비밀번호를 입력하세요.

하피옥윤

굿나잇, 마에스트로 3









-







지휘자 김영신은 주목 받는 마에스트로였고, 일 년에 두세 번 꼴로 클래식 음악 전문 잡지 같은 곳에서 인터뷰를 했다. 화보 비슷한 것을 찍자고 하는 곳도 있었다. 선생님은 그냥 편하게 서 계시면 됩니다, 저희가 알아서 찍을게요, 다음 달 잡지가 나오면 그가 굳이 보지 않으려 해도 어김없이 거실 테이블 위에 한 권이 놓였다. 서점 가니까 있더라구요. 옥윤이 첼로를 꺼내며, 혹은 커피잔을 그 곁에 내려 놓으며 무심한 척 말하는 것을 보고서 영신은 속으로만 한숨을 폭 쉬고 어쩔 수 없이 그녀가 보는 앞에서 차례를 뒤적여야 했다. 사진은 아니나다를까 그에게 몹시 부끄러웠다. 옥윤이 곁눈 너머로 흘끔 보고서는 꼭 악당처럼 나왔네, 심통 부리는 교수처럼. 하고 말하면 푸스스 터져 나오는 웃음. 그녀가 뒤에서 팔을 감으며 다가오면 영신은 다시 입을 맞추어 주고, 느린 오후만이 이 거실에 오래오래 머물기만을 바라는 순간들이 있었다. 그녀가 선물한 고동색의 니트처럼, 그녀와의 시간은 영신에게 과하지 않고 낮은 채도와 명도를 가진 채 우아하게 엮인 하나의 타래로 여겨졌다. 따스하고 편안했다.


지면에서 보는 제 선생은 대학 입학 전, 그러니까 그를 알기 전보다도 더 낯설게 여겨져서, 옥윤은 그가 나온 사진을 빤히 쳐다보기가 부끄러웠다. 지휘자 김영신을 실은 기사에서 가장 앞면에 나온 사진들은 항상 비슷한 수식어를 그의 얼굴 곁에 크게 적어 놓곤 했다. 한국 클래식 잡지들은 대부분 김영신의 가치를 알고 있었으며, 알아야만 했다. 다각도로 써내려간 칭찬의 일색과 기자의 긴장감, 그리고 영신의 여유로움이 함께 느껴지는 기사를 읽다 보면 옥윤은 제 연인이 누구인지 잠깐 잊어버릴 때도 있었다. 


하루는 옥윤이 그에게 전달할 것을 들고 학교 교수실을 찾았다. 졸업한 지 조금 지났으나 옥윤을 알아본 후배들이 복도에서 인사를 건넸다. 노크하고 문을 여니 선생보다 그 맞은편에 앉은 여자가 먼저 보였다. 눈이 마주치자 여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앞에 놓인 노트북이나 자세를 보아하니 잡지사 기자인 것 같았다. 옥윤은 순식간에 머쓱해졌다. 아, 그러고보니 오늘 인터뷰. 설핏 지나가며 한 이야기를 기억하지 못한 스스로에게 자책했다.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옥윤 양. 이리 와서 앉아요.”


영신이 가볍게 손짓했다. 그의 손은 지휘할 때가 아니더라도 허투루 휘두르는 법이 없었다. 단순한 동작 하나에도 서글서글하게 올라오는 힘을 누가 거부할까. 옥윤은 문을 놓고 그의 곁으로 다가가 다리를 모으고 뻣뻣하게 앉았다. 여자의 눈매가 풀린 것이 마주보지 않아도 느껴졌다. 


“우리 수석 첼리스트 안옥윤 양입니다. 아시죠? 미모만큼이나 실력도 출중하죠. 제 애인이기도 하고요.”


무슨, 옥윤이 화들짝 놀라 그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영신의 덤덤한 옆얼굴은 장난과 한참 거리가 있어 보였다. 기자가 네에? 하고 반문했으나 옥윤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영신의 커다란 손이 허리를 끌어안고 바짝 당겼다. 소파가 흔들렸다. 옥윤은 놀라서 히끅, 소리까지 냈다. 맞은편 기자는 저와 제 선생을 번갈아 바라보는데, 시선을 어디 두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잠깐 먹먹해졌던 소리가 그제야 후루룩 귓가에 풀렸다. 어색하게 웃는 기자의 웃음소리가 쨍했다.


“쓰세요, 기사. 김영신 연애한다고.”


옥윤은 제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영신의 손은 허리만 감싸고 있었으나 온몸이 메인 것 같았다. 당연하다는 듯한 위압감.


인터뷰가 끝날 때까지 영신의 손은 옥윤을 놓아줄 줄 몰랐다. 기자의 꾸준한 시선을 덤덤한 척 맞받아치느라 옥윤은 어깨에 담이라도 걸릴 것 같은 기분이었다. 무대에서는 영신의 곁에 앉아도 부끄럽지 않았다. 그의 수석 첼리스트로 앉아 그의 지휘를 따르는, 혹은 되려 그의 지휘를 이끄는 제 연주가 자랑스러웠다. 그러나 이런 자리는 아니었다. 그녀는 기자가 노트북 화면을 보고 있을 때를 틈타, 멋없이 묶어 놓은 제 머리칼을 슬쩍 풀어 버렸다. 보풀이 일어난 면바지 무릎을 손으로 가린 채 이따금 툭툭 튀어나오는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정신을 한껏 날 세우고 있어야 했다. 이 소파에 앉아 있음으로 스승에게 해가 가는 일이 있을까 바짝 얼어야 했다. 노트북을 덮고 기자가 먼저 청한 악수를 받으며 그녀는 아주 조금 억울했다. 명함이라도 가져올 걸, 아니, 화장이라도 하고 올 걸,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영신에게 되는 대로 핑계를 대고 뛰쳐나간 그녀는 1층 건물 문을 나서는 기자를 겨우 따라잡았다. 숨 몰아쉬는 옥윤을 기자가 아까의 그 동그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기사 내지 말아주세요. 부탁입니다.”


기자는 이 순진해 보이는 젊은 첼리스트의 어디에서 그런 설득력이 나오는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옥윤은 절대 제 이름이나 나이를 싣지 말아 달라고 했다. 첼리스트라는 말도 적지 말아달라고 신신당부를, 그러나 구차하지 않게 애원했다. 


“선생님께서 지금 만나는 사람이 있다고는 하셔도 돼요. 하지만 상대가 제자라든가 단원이라는 뉘앙스는 꼭 빼 주셔야 합니다. 왜인지는 기자님께서도 아시리라 생각해요.” 


바싹 얼어 있던 아까의 모습과 상반되게 단어 하나도 더듬지 않고 내뱉어 놓고선 저를 빤히 보는 그녀에게, 기자는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 순간 망연해졌다. 단호하게 확인을 요구하는 눈동자가 영 다른 사람이잖은가. 알겠다고, 연애 이야기는 쓰지 않겠다고 몇 번이고 약속을 해주고서야 감사합니다, 하고 숙여 보이는 작은 머리통을 보고서야 기자는 깨달았다, 이 젊은 첼리스트를 당당하게 연인이라고 소개해 주었던 중년 마에스트로의 심정을, 영민한 연인을 자랑하고 싶었을 김영신 지휘자의 애정을.


잡지가 나왔을 때 영신은 기사를 몇 번이고 되읽었다. 늘 흘려 읽었으나 이번만은 꼼꼼하게 내용을 확인했다. 그러나 연애 이야기가 없었다. 왜, 어째서. 커버를 덮고 소파 등받이에 몸을 묻은 채 속상함을 억눌렀다. 아마도 저와 연줄 있는 편집부 상층에서 오지랖을 부린 게 아닌가 싶었다. 그것 말고야 답이 없었다. 그는 잡지에 실린 제 사진을 보며, 오랜 친우인 편집장의 사람 좋은 얼굴을 떠올렸다. 그에게도 옥윤을 소개시켜 주고 싶었다. 아니, 그 자 말고도 제 아는 곳곳에 옥윤의 모습을 보이고 싶었다. 주책이라 해도 좋았다. 경애하는 연인을 보이고 싶은 마음이야 나이에 상관없잖은가. 











영신은 제 무릎 위에 잠든 옥윤의 뺨을 살며시 쓸어 보았다. 곧 연주회라고 요즘 무리해서 연습한 탓에 눈에 띄게 핼쑥해져 있었다. 머리칼 나는 관자놀이께에 뾰루지가 빨갛게 하나 돋아 있는 것마저 안타까웠다. 단원들 모두 요 며칠 바짝 날 세워서 연습하지만 그녀에겐 무게가 달랐다. 첼리스트 안옥윤을 내세우는 드보르작 첼로 협주곡 b단조 작품 104번이 공연의 가장 메인이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성격상 내색은 않아도, 속으로 심하게 스트레스 받고 있음을 영신이 모를 리 없었다. 겉보기 무뚝뚝하고 무심해 보여도 성에 차지 않으면 끝까지 달려드는 아이였다. 요즘은 하루 두세 시간을 자며 연습한단 사실도 알고 있었다. 약속 있다고 둘러댄 날에는 체력을 키운답시고 몇 시간이고 운동한다는 것도, 모두, 영신은 알고 있었다. 그는 연인의 잠을 깨게 할까 싶어 차마 일어나지도 손대지도 못하고 무릎에 닿은 옥윤의 잠든 얼굴만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옥윤이 뒤척일 때에야 살짝이 소파에 얼굴을 내려놓고 일어났다. 제 모습이 우습다 여겨 작게 한숨지으면서도 부끄럽지 않았다. 


그는 거실 끝 피아노 앞에 가 앉았다. 손가락을 가볍게 털고 건반에 올려놓자 한동안 잊어버리고 있던 감각이 손톱 끝에 찌르르하게 와 닿았다. 옥윤이 처음 이 피아노를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연주해 보아도 되냐 물으면 기꺼이 그러라고 할 요량이었으나, 건반 덮개를 걷은 옥윤은 그에게 약간의 흥분을 담아 말했었다. 선생님, 피아노 쳐 주세요. 그때 연주해 주었던 것이 쇼팽 피아노 협주곡 2번 독주파트였다. 영신이 첫 음을 살며시 눌렀다. 독주파트가 본디보다 여리고 느리게 시작되었다. 낮잠에 방해 되지 않을 정도로만, 춤추듯 가볍게 이어진 음계가 온 거실에 채워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옥윤이 눈을 떴다. 피아노가 끝나기 전에 눈 부빈 그녀가 가까이 다가서서 영신의 목에 엉겼다. 영신이 웃었다. 이럴 때만은 옥윤이 아이 같았다. 좀처럼 제게 보이지 않는 칭얼거림과, 계산이나 버릇 아닌 애정에서 튀어나온 애교가 좋았다.


곡을 미처 끝내지 못한 채 영신은 뒤로 손 뻗어 옥윤의 턱을 감싸 쥐고, 입 맞추었다. 쪽, 쪽 뒤엉키던 혀가 떨어지고 시선이 닿았다. 돌연 그가 두 팔로 옥윤의 허리를 감싸더니 번쩍 안아 들어다 제 무릎 위에다 마주보게 앉혔다. 옥윤이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웃음에도 졸음기가 남아 있었다. 목덜미에 영신의 입술이 닿았다. 나른한 애무가 조금씩, 조금씩 짙어지자 옥윤은 감고 있던 팔을 뒤로 뻗어 피아노 건반을 짚었다. 쾅, 쾅, 음계 없이 멋대로 눌린 건반 소리에 둘 모두 놀라지 않았다. 


“선생님 소리가 꿈인 줄 알았어요.”


옥윤의 목소리가 조금 잠겨 있었다. 영신은 저보다 조금 높이 있는 옥윤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쓸어 보았다. 남아 있는 음계의 여운이 나른한 낮잠만큼 둘 사이에 가득했다. 







'하피옥윤' 카테고리의 다른 글

花白  (0) 2015.11.06
굿나잇, 마에스트로 2  (0) 2015.10.09
그냥 하피옥윤... 짧은 거...  (0) 2015.10.06
학생 하피 선생님 옥윤 이어서  (0) 2015.09.29
영화 이후 하피옥윤 단문  (0) 2015.09.22
,
2015. 10. 9. 23:17

굿나잇, 마에스트로 2

보호되어 있는 글입니다. 내용을 보시려면 비밀번호를 입력하세요.

하피옥윤

그냥 하피옥윤... 짧은 거...




아주 살짝 수위 있음





-





너와 나는 세상에서 도태되거나, 무언가에 결여된 사람처럼 서로의 마른 몸을 더듬었다. 네 몸은 섬처럼 단아했다. 고운 머리칼 향을 맡고 입술을 찾다가 콧등 위에 입술을 가져가고, 다시 볼의 온기를 느끼길 반복했다. 네 팔꿈치를 쓰다듬으면 일전 나에게 알려준 만주의 흙 냄새가 났다. 나는 네 양 손목을 잡는다. 흰 시트에 네 몸 냄새가 묻고 흩어진 네 머리칼 위에 내가 입 맞춘다. 내가 너에게로 고개 숙이는 순간 우리는 경건해진다. 내가 너를 위해 침잠하는 시간이다. 우리가 겪은 경성과 상해가 우리 겹친 사이에 스밀 때까지, 땀이 흐르기 전까지, 내가 붙든 네 손목 위 발갛게 주먹이 쥐어질 때까지, 어쩌면 어느 우주에서는 별이 뒤엉켰을 거라 믿는다. 네 이마 절반만큼 이국의 달빛이 비쳤다. 딱 절반만큼. 유자 냄새가 난다. 나는 옥윤, 너의 몸에서 내 결여를 찾는다. 자꾸만 갈구한다. 너를 뭍으로 올리는 것이 나의 몫이고 나를 젖게 하는 것이 너의 몫이렸다. 그렇게 믿는다. 잃을 것처럼 다시 부른다. 옥윤, 옥윤아. 절정 맞는 네 손목을 핥는다. 맥박이 뜨겁다.


너를 안는 일은 어쩐지 달이 가득 찬 밤을 헤매는 것 같아서 이따금 허릿짓을 하다 아득해진다. 천치처럼 멍해진 얼굴에 네 땀 젖은 손바닥이 닿아 다시 깬다. 너의 얼굴이 변하는 것 같아서 또 이름을 부른다. 살 닿는 거리에서 얼굴을 보고 있자면 의미 없는 투정을 부리고 싶어진다. 나와 있는 게 좋으냐 묻고 싶고, 얼굴 구석구석마다 입술을 대고 싶어진다. 옥윤, 옥윤아. 당신의 이름이 커서 부르고 나면 충만해짐을 당신도 알까.






해방되기 몇 해 전부터 너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색 없이 먹으로만 그어 놓은 너의 달과, 만주와, 핏자국들을 보며 나는 안도했다. 잡아두고픈 욕심이 앞서 너의 총을 미워하고 너의 의기를 서운해하던 나에게 네 그림은 죄책감을 덜 좋은 핑계였으니. 만주도 경성도 이제는 쫓기는 몸으로 돌아갈 수 없는 곳임을 깨닫고 나서도, 비밀스러운 거처 몇 군데를 거치며 몇 번의 위기를 겪고서도 너는 전장으로 돌아가고 싶어하지 않았던가. 체념한 이후의 네가 시들까봐 나는 몹시 두려웠다. 그래서 더욱 다행이었다, 이렇게 나의 곁에 남아 그곳들을 잊지 않은 네가. 정말로 다행이었다. 


물감을 몇 가지 구해다 주었으나 너는 고집스레 검은 선만 썼다. 부러 농을 묽게 해 번지게 두거나, 반대로 꾸덕꾸덕하게 칠한 자국까지 하나하나 너를 닮은 것 같아 묘했다. 네가 그린 내 손은 마디마디가 강조되어 더 투박해 보였다. 그림 속에서 내 손이 쥐고 있는 스카프는 색이 없어도 무엇인지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다음 장에 있는 조끼 입은 사내의 모습도. 흐드러진 꽃 속으로 걸어가는 사내의 모습에서 조금 눈물을 흘릴 뻔했다. 네가 보는 나는, 이런 모습이구나. 이토록 의연하고 단단한……. 이것을 그리고 있었을 너의 얼굴을 떠올려 보았다. 네 손에 주어졌을 힘 하나하나를 상상하려 애썼다. 나는 이지러진 선 위를 손으로 쓸고 또 쓸었다. 고마웠다. 너에게, 몹시 고마웠다.


네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후로 나는 네 뒤를 바라보길 좋아했다. 때로 얇은 셔츠 하나만 걸치고서 캔버스 앞에 앉은 너는 탐나게도 희었다. 사랑의 여운이 식기도 전에 내 셔츠만 주워 입고서 그리 앉은 네 뒷모습은 네가 이미 내 여자임을 잊게 해주었다. 묘한 소유욕을 불러 일으켰다. 새삼 북받쳐 뒤에서 너를 안았다. 붓이 흔들린다며 칭얼대는 목소리까지 고와서, 나는 네 목덜미에 입술을 묻으며 기어코 그림을 가르쳐 주겠다는 약조를 받아내고야 말았다. 당신 모습 그리고 싶어, 당신이 나를 그려준 것처럼. 셔츠 속으로 손을 더듬었다. 다시 붉어지는 얼굴. 내내 봄이다.









'하피옥윤'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굿나잇, 마에스트로 3  (0) 2015.10.20
굿나잇, 마에스트로 2  (0) 2015.10.09
학생 하피 선생님 옥윤 이어서  (0) 2015.09.29
영화 이후 하피옥윤 단문  (0) 2015.09.22
학생 하피, 선생님 옥윤  (0) 2015.09.19
,

보호되어 있는 글입니다. 내용을 보시려면 비밀번호를 입력하세요.

하피옥윤

영화 이후 하피옥윤 단문

영화 이후 하피옥윤 재회 단문




-





당신은 꿈에서 흰 옷을 입었다. 내가 보았던 당신은 절대 하얀 옷을 입은 적이 없었는데, 한 번도 없었는데, 그것이 불길하다 여긴 것은 며칠 지나서, 당신 만난 밤이 꿈인 줄 절절히 깨닫고 아픈 가슴을 카펫에 쏟아내던 한밤이었다. 나는 당신의 이름도 모르잖은가. 이미 죽은 자를 꿈꾸는 마음이 곪아서 카펫 위로 줄줄 흘렀다. 어둠 지고서야 우는 버릇이 들어 잠을 쉽게 물렸다. 눕지를 못했다. 슬픔은 느리고 가차 없는데 나는 이를 받을 방법을 몰랐다. 당신 죽고서 나는 도로 어려진 것마냥 스스로를 달래지 못했다. 일어났다 넘어지고 또 넘어지는 아이처럼 조금씩 비참해졌다. 당신에게 포기해도 되느냐 묻고 싶었다. 당신이 살린 나를 내가 감히 포기해도 되느냐고. 


살아남는 일이 억셌기에 나는 낮과 해를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강인국의 집은 곳곳이 어둑하고 서늘했다. 집이 특유로 가지는 음기가 있었다. 방 커튼을 치고 창문을 닫아 놓으면 바깥 소리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미츠코의 침대에 웅크리고 앉아 새벽을 지새면 바싹 마른 발톱 위에 해가 닿았다. 당신이 다녀간 그 날에, 담장 밖으로 검은 코트가 사라질 때까지 오래도록 마중한 내 시선을 느꼈을까. 그날 나는 빈 찻잔을 보며 당신의 말을 곱씹고 곱씹었다. 아름답고, 행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소매 끝에 당신 담배내가 묻은 것 같았다. 간절하게 이곳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어느 날에는 당신이 보았을 상해의 달을 상상했다. 콧날 위에 드리운 중절모 그늘과 입술에 물린 파이프와……나는 조금 더 상상했다. 상해로 오기 전의 당신을. 내가 알지 못하는 당신이 심연의 한가운데서 등을 웅크린다. 남은 담뱃불이 사그라든다. 냄새마저 사라진다. 당신이 없다, 당신이 없다. 내 위에 뜬 달을 보며 행여 잊을까 몇 번이고 읊었다.





나는 몇번의 악몽 끝에 밤을 헤아리길 택하고, 새벽 한가운데 서서 그날의 미라보를 떠올렸다. 바람 소리 끝에 당신이 묻어 있었다. 그래서 문이 열리고도 바람인줄 알았다. 목소리를 듣고도 꿈인가 했다. 당신의 그림자가 갈라졌다. 많이, 많이 기다렸어. 뭉근한 아픔을 이기지 못하고 카펫에 주저앉았다. 몸을 말고 웅크린 내게 당신이 다가왔다. 내 등에 당신 손이 닿을 때에도 나는 천치처럼 흠칫 놀라기만 했다. 아파하는 나를 일으켜주고서야 꿈 아닌 줄 알았다. 당신이 내 꿈에서, 내 꿈 속에서.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만 가로젓던 내게 당신은 입 맞추었는데, 잊었던 아카시아 향내가, 담배내 섞인 익숙한 내음이, 여기 계속 있을 건가, 이름은 모르지만, 마누라 이름도 모르고 가니까, 묵직한 기억 속 목소리가 순서 없이 단번에 밀려와 나는 당신에게 순식간에 갇히고. 


이름 불러 줘. 당신이 말했다. 당신의 이름을 처음 주워 담고 나는 오랜 병을 토하듯 영신, 김영신 하며 읊었다. 이것을 돌려주려 왔을 당신 구두에 묻은 인고들, 고스란히 카펫에 묻어 있었다. 장갑 벗은 손을 맞잡자 홀로 쌓아온 새벽이 뭉그러졌다. 어둠이 떠나는데 나는 하염없이 당신 품에서 울었다, 울어 본 적 없던 갓난아이처럼. 당신의 맨손이 좋았다. 이마에 닿는 단단한 어깨가 좋았다. 서늘한 냄새 묻은 코트가 좋았다. 당신은 안옥윤, 하고 숨처럼 나를 불렀다. 목소리가 낮고 더웠다. 한참을 붙든 채 천치처럼 울고만 섰던 내게 당신이 가장 먼저 돌려준 것이 숨겨 둔 내 이름이어서 고마웠다. 입술이 마주닿고서야 숨쉴 수 있었다. 오래 참았다, 참말 오래 참았다. 다행이다, 돌아와서 다행이야. 나는 당신의 품에서 안도하며 말을 하염없이 더듬었다. 당신의 셔츠가 젖었다. 내 뒤통수를 어르는 손이 고왔다. 다행이다. 거실이 밝아지고 있었다. 오랜만의 빛이었다. 안도감이 잠처럼 밀려왔다. 당신이 나를 달빛에서 가렸다. 기댈수 있었다. 몸이 풀렸다. 흩어진 매듭. 이제야 다행이다.

,
2015. 9. 19. 17:13

학생 하피, 선생님 옥윤

보호되어 있는 글입니다. 내용을 보시려면 비밀번호를 입력하세요.

하피옥윤

[암살 전력 60분] 하피옥윤 - 가면무도회



암살 전력 60분, 주제 : 60초



가면무도회 하피옥윤입니다.


늦게 시작해서 짧...ㅠㅠ




-




현기증 탓에 조명이 온통 날 서 있었다. 무도회장 마룻바닥 위 그림자들은 왈츠에 맞추어 이지러졌다가 동시에 뒤엉키길 반복했다. 옥윤은 꼬아 앉아 있던 다리를 풀었다. 무도회장의 샹들리에를 한 번, 입구 쪽을 한 번 바라보았다. 왈츠의 박자로 계산한 시간이 얼추 맞을진대, 어째서, 도리질을 쳤다. 그럴 리 없다, 다잡으면서도 불안감에 아랫입술을 씹었다. 아랫배가 저렸다. 그녀는 제 콧등부터 이마까지를 가린 나비를 손으로 만져 확인하곤 결국 푸른 드레스 자락을 가벼이 부여잡고 일어섰다. 기척 없이 다가온 사내가 그녀의 팔뚝을 붙들었다. 허리를 휘어 감았다. 박자에 맞추어 제 몸을 돌게 했다. 마주했을 때 이미 둘은 춤의 행렬 한가운데에 있었다. 붉은 가면을 쓴 사내에게서는 화약 냄새가 옅게 났다. 옥윤은 제가 손을 떠는 줄도 몰랐다. 눈이 맞닿았다. 옥윤은 숨을 멈추었다. 음악소리가 쏟아졌다. 발을 헛디딜까 겁났다. 박자 따라 몇 바퀴를 더 돌자 긴장한 탓인가, 금방 현기증이 일었다. 가면 쓴 사람들이 저를 중심으로 잼처럼 뭉개졌다. 이제 음악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사내는 하늘한 옥윤의 손목을 부드럽게 감싸곤 제 너른 어깨에 붙들어 두었다. 이제 괜찮아. 속삭이는 저음에 저도 모르게 아, 하고 한숨 같은 탄성을 내뱉었다. 고개를 떨구자 사내의 검은 자켓 위에 희미한 혈흔이 보였다. 옥윤은 사내의 옷깃을 꽉 여며 쥐었다. 


이제 무도회의 막바지였다. 누런 샹들리에 아래로 그녀는 새벽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제 그림자가 사내의 구두를 덮고 있었다. 사내의 숨이 옥윤의 이마에 닿았다. 잠깐 꾼 꿈처럼 부드러웠다. 그녀는 눈을 길게 내려 감았다가, 떴다. 저와 춤추는 그의 모습을 코앞에서 확인하고서도 마음이 가라앉질 않았다. 코 앞 목울대와 옷깃에서 사내의 살냄새를 맡았다. 언제나 당신은 흐렸잖은가, 잡을까 싶으면 사라지고, 곁으로 온단 약속이 무색하게 다시 멀어지고, 야속함이 차 올랐다. 가면 속에서 마음껏 얼굴을 구기다가, 그의 코트깃 속, 옆구리께 혈흔이 조금씩 번지고 있는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 참고 있던 호흡이 순식간에 터졌다. 울음을 삼켰다. 결국 발을 놓쳤다. 나가야 해. 옥윤이 속삭였다. 1분만 더, 하고 사내가 대답했다. 옥윤의 상체를 바짝 당겨 안았다. 춤이 흐트러졌다. 1분만 더 추자, 사내의 숨이 달큰했다. 마지막 샹들리에 빛이 쏟아졌다. 둘의 그림자가 사라졌다. 

'하피옥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영화 이후 하피옥윤 단문  (0) 2015.09.22
학생 하피, 선생님 옥윤  (0) 2015.09.19
굿나잇, 마에스트로 1  (0) 2015.09.08
하피옥윤 센티넬버스 이어서~  (0) 2015.09.04
[하피옥윤] 자전거 자국  (0) 2015.09.01
,
2015. 9. 8. 23:23

굿나잇, 마에스트로 1

보호되어 있는 글입니다. 내용을 보시려면 비밀번호를 입력하세요.

보호되어 있는 글입니다. 내용을 보시려면 비밀번호를 입력하세요.

최근 댓글

알림

이 블로그는 구글에서 제공한 크롬에 최적화 되어있고, 네이버에서 제공한 나눔글꼴이 적용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