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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린스란 중장편/순흔

순흔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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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왕자는 숲을 유독 좋아했다. 파릇파릇하게 피는 풀 비린내와 꽃향을 맡으며 숲의 아무 바위에서나 드러누워 낮잠을 자기도 했다. 그는 숲의 소리를 들을 줄 알았다. 제 손가락보다 작은 것들이 움직이는 소리는, 오직 생生만을 좇느라 순하고 솔직했다. 흙이나 나무에 손을 대고 서 있으면 바람마저도 어린 그를 감싸는 듯이 스쳤다. 왕은 왕자를 위해 숲 근처에다 작은 오두막을 지어 봄 내내 아이가 그곳에 머물 수 있게 했다. 왕자가 머물던 숲은 작고, 봄이 길었으며, 여름이 되어도 사나워지는 법이 없었다. 그곳에서 왕자는 홀로 검술을 익히고, 말을 타고, 어리지 않은 동물들을 쫓으며 봄을 보냈다.


숲에서 처음 장군을 만났을 때, 왕자는 성년을 갓 넘긴 나이였고 장군은 서른을 바라보고 있었으나 비슷한 계급의 무관들 중에서 가장 어린 나이였다. 왕자는 그에게 활을 겨누고, 그는 왕자에게 검을 겨누었다. 그러나 한눈에 왕족의 모습을 알아본 장군이 겨누던 칼을 먼저 치우고 그 자리에서 무릎 꿇었다.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회색 눈을 동그마니 뜬 채 젊은 장군의 정수리를 보던 왕자는 날 세워 겨누던 활을 내리고, 겁 없는 걸음으로 성큼성큼 다가섰다. 고개 숙인 장군의 시야에까지 보일 정도로 두 발이 가까이 왔다. 왕자의 장화에는 이미 흙이며 풀물이 얼룩덜룩하게 묻어 엉망이었다. 무릎까지 오는 겉옷 자락도 마찬가지였다. 넝마나 다름 없는 게, 한눈에 보아도 평민 차림이었다. 얼굴을 먼 발치에서나마 본 적이 없었다면 장군도 알아보지 못했을 터였다.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왕자는 나이치고 큰 골격을 갖고 있어 한눈에 보아도 건강하고, 기분 나쁘지 않은 위압감으로 단단했다.


"내가 누군지 아는가?"


턱을 치켜든 채 물었다. 어린 왕자의 목소리는 그 말투 때문에라도 묵직하게 무게가 있었다.


"제 나라의 왕자전하를 어떻게 못 알아보겠습니까."

"그래?"


그때까지만 해도 장군은, 왕자가 제게 칼 겨눈 죄를 묻지 않을까 두려워하고 있었다. 


"난 또, 아버지가 보낸 사람인 줄 알았지."


왕자는 장군의 매끈한 이마를 덤덤히 내려다 보다가, 문득 웃었다. 악의 없이 환한 미소에 장군은 당황해서 마른 침을 삼켰다. 백금발 뒤로 숲의 환한 햇빛이 싱그러웠다. 어디선가 단 꽃내음이 퍼졌다. 첫 만남에서 꽃내음을 맡은 것은 소린만이 아니어서, 스란두일은 일부러 소린을 숲으로 부르기도 했다. 소린은 기꺼이 숲을 찾아 향을 좇았다. 봄마다 찾아간 왕자의 숲은 그 주인만큼이나 어리고 보드라왔다. 그래서 그는 스란두일이 언제까지고 크지 않을 것만 같기도 했다.











사내가 왕자궁을 떠나고 나서도 온몸에 남은 통증은 도통 사라질 줄을 몰랐다. 스란두일은 새빨갛게 상처와 수치심이 섞여 썩어가는 속을 꾸역꾸역 눌러 놓고는, 누구도 보지 않건만 꼿꼿이 앉아 밥을 먹고, 비파를 켜고, 매일 같은 시간에 후원에 나가 소린이 가르쳐 준 동작을 되새겨 훈련했다. 검을 휘두르고 또 휘두르다 보면 손의 같은 곳에 물집이 잡혔으나, 소린에게서 배운 장님의 검술은 여러 번 반복하기 모자랄 정도로 그 종류가 지극히 적었다. 그렇게 오랫동안 훈련한 것 같은데, 매일매일 지쳐 숨 몰아쉴 때까지 독하게 몰아 붙이던 소린이었는데, 정작 그가 없어지고 나니 같은 동작만 계속 반복해야 할 만큼 손에 남은 게 없었다. 아쉽고 스스로 원망스러웠다. 그는 결국 어릴 때 혼자 숲에서 휘두르던 검술까지 끄집어냈다. 지쳐서 온몸이 아릴 때까지 낡은 궁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감은 눈에 희끗하고 불긋하게 보이던 빛이 사라지고 이 어두운 후원 특유의 어둠이 들어차고 나서야 이마를 손등으로 닦았다. 이렇게 온몸이 노곤하게 녹을 정도로 검을 쥐던 날이면, 반드시 수풀 사이를 얼얼한 손으로 더듬어 향 좋은 꽃을 몇 송이 꺾어다 지팡이 쥔 손에 꼭 끼워 왔다. 혼자 목욕하고 머리까지 말리면 밤이 깊어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제야 꺾어 온 꽃을 더듬어 보면 열에 여덟은 축축한 땀에 젖어 뭉개져 있었다. 아무래도 상관 없었다. 그러나, 소린이 매번 꺾어다 주던 꽃을 떠올리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다. 


스란두일은 아픈 몸을 누이고 잠드는 일에 익숙해졌다. 이후로 손님이 몇 번이나 더 찾아왔다. 역시 반역자가 보낸 사내들이었다. 매번 다른 자들이었고, 목적은 같았다. 살이 찢겨도 스란두일은 결코 소리 한 번 내지 않았다. 그들이 떠나고 나서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그들이 몸을 탐하고 간 후에는 예민한 코끝에 역한 냄새가 남아서 도통 지워지지 않았다. 


우습게도, 스란두일을 보필하던 시종들은 여전히 같은 시간에 같은 식사를 가져왔고, 아무 것도 묻지 않고 엉망으로 뒤집힌 방을 치워 주었다. 눈을 감고 침대에 들어가 있으면 등 뒤에서 사부작, 사부작, 찢어져 바닥에 떨어진 옷을 줍고 부서진 집기들을 쓸어담는 소리가 들렸다. 죽은 것이나 다름 없는 왕자의 심기는 상관 않는다는 양 느릿느릿한 동작으로 방을 치우고, 겁탈의 흔적을 모아 들고 나가면 스란두일은 그제야 참던 숨을 크게 몰아 쉬었다.


어느 날 본궁에서 사람이 찾아왔다. 왕자를 궁으로 모시라는 명이라고 했다. 스란두일은 말을 듣자마자 제 앞의 남자가 띠고 있을 표정을 상상했다. 가느다란 웃음을 달고, 저를 '왕자'라고 부르며 허리를 조아리고 있지 않을까. 침대에 앉은 채 이부자락을 말아 쥐었다. 수호하는 자들이 함께 하는 응접실도 없고, 그렇다고 커다랗고 깨끗한 내전이 있는 것도 아닌 이 단칸방의 왕자궁은 간단하게 손을 맞기에도 무색할 정도로 어설펐다.


"이곳이 내 궁인데 어디로 오란 말씀이시냐?"


손의 떨림까지는 남자가 보지 못하길 바라며, 진중하고 근엄한 목소리로 물었다. 


"본궁으로 입궁하시라는 명입니다."


허. 스란두일은 결국 헛웃음 지었다. 본궁, 이 어디란 말이더냐. 교활한 생각이 한 사람을 통해 건너온 말인데도 일부러 보란듯이 빤하고 적나라해서 가슴 아래 구역질이 차올랐다. 이제 지키는 자가 없으니 아예 곁에 두고 유린하겠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싶었다. 


왕자의 새 거처는 더 이상 곰팡이 냄새가 나지 않았고, 쥐인지 벌레인지 모를 것들이 기어 다니지도 않았다. 그러나 다시 들어간 궁은 그에게 몹시 낯설었다. 반역자는 오만해서 선왕이 쓰던 궁에 그대로 들어가 살았다. 바뀐 것은 사람들 뿐이었다. 벽이나 건물, 모든 것이 스란두일 어릴 적부터 선왕이 쓰던 그대로였으나, 정작 돌아온 왕자는 돌아온 궁의 모양새가 어떤지 알 수 없었다. 본궁으로 가는 동안 양쪽 팔을 누군가 붙들어 주고 있었다. 그는 제 모양새가 꼭 끌려가는 죄인과 같지 않을까 싶었다. 소린이 깎아 준 지팡이를 단단히 부여잡았다. 몰래 어금니를 갈았다. 누구도 믿지 말라 했던 그의 말이 사무쳤다. 











국경에서의 사냥은 수도와 달리 짧고 거칠었다. 바깥에 잠깐 나갔다 오는 것만으로도 뺨이 얼고 손이 부르트기 일쑤였으므로, 단지 여흥을 위한 사냥 또한 길 필요가 없었다. 점심을 먹고 나가서 해지기 전에 돌아오는 동안, 시찰하는 군사들은 숲을 돌아본다는 명목으로 말을 타고 짐승을 찾아 헤맸다. 침엽수림 사이에 이따금 철없이 뛰어나온 작은 짐승들이 희생되었다. 


"저곳은, 아무도 시찰하지 않는가?"


소린이 멀리 보이는 동쪽 절벽을 가리키며 드왈린에게 물었다. 절벽은 풀이 드물고 작은 틈마다 눈이 켜켜이 쌓여서 꼭 빙벽 같아 보였다. 


"가파르고 험해서 가려는 자가 없기에 시찰한 지도 오래됐지요."


소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소린이 오기 이전까지 초소를 맡고 있던 드왈린의 성격이라면, 굳이 쓸모없는 길에다 전우를 내보내진 않았을 터였다. 바람이 곱슬머리를 날려 입술을 간질였다. 소린은 손날로 이마에 차양을 만들고, 한 걸음을 더 동쪽으로 내디딘 채 얼룩덜룩한 절벽을 바라보았다. 드왈린은 몰라도, 그는 아니었다.


"앞으로 정찰대를 나눈다. 동쪽으로 가는 자들은 사냥감을 독차지하게 해주겠다고 일러라."


드왈린은 잠시간 망설였고, 그의 굳은 얼굴 뒤에 숨은 의중이 어떤 것인지 읽을 수 없었으나,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조정의 회의는 보통 이른 아침에 치르는 게 일반적이었다. 해가 뜨고 회의장 창문을 모두 열어 놓은 다음, 맑은 공기 속에서 깨끗한 정신에 토론하는 것이었다. 스란두일의 부친은 게을러서 등청하지 못하는 관료들에게 발언권을 주지 않기 위해 시간을 맞추어 회의를 열고, 이야기가 시작되면 회의장 문을 잠가 버렸다. 반역자는 선왕이 만들어 놓은 수많은 제도를 그대로 쓰고 있었다. 회의도 마찬가지였다. 수치심도 느끼지 못하는 자라고, 소린이 씹어 뱉듯 언급하는 것을 스란두일이 들은 적 있었다. 그러나 그뿐만이 아니었다.


스란두일은 벌써 같은 복도를 몇 번이나 더듬어 헤매고 있었다. 어릴 적 그렇게 많이 다닌 복도였는데도, 눈을 잃은 지금에 처음 온 궁은 문 손잡이 하나마저도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지팡이로 더듬고 손바닥이 얼얼해질 때까지 벽을 쓸며 한참 걸었으나 회의장을 도저히 찾을 수 없었다. 궁은 그가 자란 집이었다. 분명 아는 곳일 텐데, 아주 어릴 적부터 뛰어 다니고 숨기도 하던 곳인데, 어째서 낯설고 두려운지, 혼란스러움보다 스스로 수치심이 느껴져 안달 났다. 기척이 있는가 싶어 다가서면 도망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돌아온 집에서 길을 찾지 못해 천치가 된 기분보다 그것이 더 수치스러웠다. 결국 어느 켠에서 벽을 짚은 채 멈춰섰다. 회의 시간은 이미 지났을 터였다. 모멸감을 참느라 손바닥부터 이마까지, 그리고 온몸이 젖었다. 왕자께서도 이제 회의에 참석하셔야지 않겠습니까. 반역자는 스란두일을 기껏 불러다 그렇게 말했었다. 마치 죄인을 심문하는 것처럼 양쪽 팔을 제 부하들에게 계속 붙들게 하고, 제가 낳은 아이가 아님에도 왕자라 칭하며. 웃음기라곤 하나 찾아볼 수 없던 반역자의 목소리가 빈 복도에 공명하는 것 같았다. 스란두일의 입술이 파르라니 이빨 사이로 말려들었다. 분노를 갈무리하느라 바들바들 떨기를 잠깐, 그리고 다음 차례에 그는 들숨을 폐부 가득 들이켰다. 당장이라도 저 기둥 뒤에 숨은 자들에게 칼을 뽑아 들고 목이 베이기 전에 회의장으로 가는 길을 안내하라 윽박지르고 싶었다. 그러나 스란두일은, 가슴을 부풀렸던 공기를 천천히 내뱉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를 도울 자가 없느냐?"


정녕으로, 없느냐. 복도는 고요했다. 스란두일은 아무도 대답 않을 것을 알면서도, 숨죽인 기척들 사이에 한참을 서 있었다. 회의가 거의 다 끝났으리라 짐작되는 시간에야 누군가 와서 그를 끌고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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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린스란 중장편/순흔

순흔 5



소린스란 순흔 5편입니다. 너무 오랜만인데 ㅠㅠ 후 이전 편들은 좋았는데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역시 덕심 넘칠 때 좌르르 써야 하는데 현실이 그렇게 안 따라주니............




순흔 1편 바로가기

순흔 2편 바로가기

순흔 3편 바로가기

순흔 4편 바로가기










아침의 왕자궁은 새벽 기운이 가시지 않아 여전히 먹먹한 어둠을 안고 있었다. 스란두일은 없는 시야에서도 빛은 그나마 분간할 수 있었고, 밤에서 새벽, 새벽에서 아침으로 넘어가는 시간의 그 미묘하게 달라지는 어둠을 읽어낼 수 있었다. 이리 빛으로 시간을 분간하기까지도 한참이 걸렸다. 그 전에는 소린이 방문을 두들기고 세숫물을 가져다주는 것으로 시간을 짐작할 따름이었다. 눈이 보이지 않아 불편한 일 중 하나였다. 이제는 제법 눈 없는 움직임이 몸에 익어서 혼자 밥을 먹고 옷을 갈아입고 구석에 놓아둔 비파를 꼼꼼히 닦아 켜고, 또 벽을 더듬어 후원에 나가 소린이 가르쳐 준 검술을 익히는 것까지는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은 달랐다. 한 가지 일을 버릇처럼 똑같이 끝내고서 밥을 가져오는 시종들로 그나마 시간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세숫물을 물려 놓고 도로 침대에 누웠다. 왕자궁에 붙은 시종은 하루에 밥을 줄 때 세 번 오고 스란두일을 전혀 보살피지 않았다. 그는 소린이 떠나기 전 했던 말을 떠올렸다. 이 궁에서 누구도 믿지 마십시오, 왕자께서는 불신이 곧 생존임을 익히 아실 거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직접 벼린 것이라며 검을 그에게 쥐어 주었다. 늘 곁에 두십시오. 그것이 마지막 말이었다. 스란두일은 애써 왕자궁 바깥까지 나가 그를 배웅했다. 소린이 탄 말이 느릿한 흙먼지 냄새를 내며 멀어지는 동안 한참이고 지팡이를 쥔 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나마 있던 왕자궁의 온기가 순식간에 식은 것 같았다.


그가 직접 깎았다며 쥐어 준 검은 손잡이에 기묘한 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한참 쓸어보고서야 그 문양이 나뭇잎임을 깨달았다. 그의 손재주며 마음 씀씀이에 스란두일은 고요히 웃을 수밖에 없었다. 검날의 색도 한번 상상해 보았다. 필시 소린의 눈을 닮아 형형하면서도 묵직한 빛을 띠고 있을 터였다. 


스란두일은 이부자락을 턱까지 끌어올려 덮곤 지어 놓은 노래 가사를 머릿속으로 다시 외웠다. 적을 수 없으니 외우는 외에는 도리가 없었다. 그는 책을 읽고 싶었고, 작은 밥상을 놓고 소린과 함께 아침을 들고 싶었다. 소린이 떠난 바로 다음 날 아침, 여느 때와 달리 도로 침대에 드러누워 버린 스란두일은 이 침대의 사각 바깥으로 나가길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는 제게 깊게 밴 소린의 버릇과 손길을 감당해야 한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았다. 소린이 존재함으로써 이곳 시간이 흘러간다는 사실도, 뒤늦게야 깨달았다.











밤이 깊은 북방에 사나운 바람이 길게 늘어져 불고 있었다. 초소에 막 도착한 소린에게 무관 드왈린은 예를 갖춰 인사한 뒤 뜨끈한 술부터 내밀었다. 그와는 장군직에 오르기 전부터 안면이 있었다. 그 또한 현 왕의 반란에 탐탁찮은 모습을 보였다가 소린처럼 이 추운 곳으로 쫓겨나 있는 처지였다.


"이곳은 밤 내내 바람이 울어대기도 합니다. 처음 왔을 땐 시끄러워서 도통 잠도 못 잤지요."


바람이 운다라, 소린은 그의 표현을 곱씹으며 술을 한 모금 마셨다. 불 위에서 여태 데워 둔 것인지 따끈한 기운이 온몸에 금세 퍼졌다. 언 몸이 사르르 풀렸다.


초소는 보잘것 없이 초라했다. 희미한 불에 비춰 보인 벽은 모두 나무로 만들어져 있어서 바람을 온전히 막지 못해 쉭, 쉭 하는 소리가 안까지 들렸다. 그마저도 군데군데 부서졌다가 다시 대강 수리한 흔적이 흔했다. 그도 그럴 것이 선왕 때부터 거의 버려두다시피 한 북쪽이었다. 이보다 더 북녘에는 추운 곳에 사는 짐승만 간간이 출몰할 뿐, 사람을 발견한 적도 몇 백 년 간 없었기에 침략 위험도 없었다. 북은 빽빽한 침엽수림으로 채워져 있었고, 나라는 아주 오래 전부터 그곳을 북 국경으로 하고 있었다. 소린은 이 춥고 황량한 곳에 자신이 발령 난 이유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수족도 되지 못할 팔다리라면 잘라내어 버리든가 다른 곳에 쓰는 수밖에는 없었다. 왕의 선택은 교만했다. 그는 소린의 명망을 두려워했고, 스란두일을 조롱하기 원했다. 그 결과가 볕 안 드는 왕자궁과 이 의미 없는 북쪽 발령이었다. 


지키는 의미가 없는 곳인지라 군사들의 사기 또한 좋을 리 없었다. 새 장군이 왔는데도 다들 어영부영하고 딱히 반가워하는 기색이 없었고 총기도 없었다. 드왈린은 날 밝으면 주변을 둘러보라 했으나 소린은 굳이 눈보라 치는 바깥으로 나가 거대한 침엽수림을 멀리서 확인했다. 그리고 돌아섰다. 투덜대는 드왈린의 어깨 너머, 앞으로 그가 지휘해야 할 초소는 너무도 작고 초라했다. 수도에서 입고 온 옷은 추위에 걸맞지 않아 깃을 애써 여몄으나 칼날 같은 바람 앞에선 부질없었다. 소린은 이를 악물었다. 추위 탓이 아니었다. 구겨진 자존심에서 화가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었다.











아침에 본 침엽수림은 밤에 보았을 때보다 훨씬 음침하고 광대해 보였다. 소린은 은근한 위압감까지 느끼며 말고삐를 고쳐 쥐었다. 


"가끔 시찰 가면서 사냥을 하기는 하는데, 잡을 짐승도 별로 없고 그냥 황량합니다. 가끔 나무하는 사람들이 와서 한 수레 베어가는 거 말고는 사람도 없습니다."


드왈린이 시큰둥히 말했다. 숲은 머리에 눈을 얹은 채 묵묵히 찬 바람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침엽수림의 서쪽은 식물이 자라지 않는 눈밭이었고, 동쪽으로는 가파른 절벽에 가로막혔으며 마을은 남쪽으로 한참을 걸어야 나왔다. 과연 적의 침입을 우려할 곳은 아니었다. 직접 눈으로 보니 지켜야 할 땅의 쓸모 없음에 안타까움마저 들었다. 소린은 스란두일의 하찮고 어두운 왕자궁, 그 후원을 떠올렸다. 앞을 보지 못하는 왕자가 발을 더듬으며 지팡이를 짚고 후원을 홀로 산책하는 모습을 상상하니 금방이라도 미칠 것 같이 울화통이 치밀어 올랐다. 뜨거운 머릿속과 달리 표정만 굳히고 있자니 드왈린이 곁에서 눈치를 보았다. 


"왕자께선 잘 지내십니까?"

"눈을 잃으셨으나 총기는 여전하셨소."


적어도 내가 떠나오기 전까지는, 이라는 말은 어금니 아래로 와드득 소리 내어 씹어 버렸다. 


"건강은 어떠십니까?"

"눈이 나은 뒤로는 쭉 건강하시오."


검을 다시 잡을 정도로 건강해졌다고 덧붙이려다 관두었다. 제아무리 드왈린이라 하더라도 여기저기 불씨를 뿌려 좋을 것은 없을 터였다. 볼 것도 없군, 하고 말머리를 돌려 초소로 도로 향했다.


한때 소린은 스란두일이 거대한 숲 같다 여겼다. 감히 들어가 본 자가 아니면 속을 탐내지 못하는, 어떤 것을 품고 있는지 알 수 없는 광활하고 거대한 우림은 겨울의 침엽수라기보다 봄의 꽃나무에 가까웠다. 친부와 눈을 잃고, 왕자의 이름 안에 담긴 영예도 모두 잃었으나 그는 비파를 껴안고 노래를 피워내지 않았던가. 끝내 그의 가사를 듣지 않고 온 것을 떠올리자 다시 화가 치밀어 올랐다. 흙에 젖은 맨발을 닦아주고 업어 줄 때, 등이며 손가락에 닿던 스란두일의 생생하게 따스하던 체온도 벌써 사무쳤다. 터질 것 같은 울음을 참으려 관자놀이가 얼얼하도록 턱을 악물었다.











스란두일이 검을 다시 잡았을 때에는 채 한 시간을 넘기지 못하고 땀에 흠뻑 젖어 넘어지곤 했다. 소린은 녹녹한 선생이 아니었고, 스란두일은 땀에 전 상의를 벗고 남은 훈련을 마저 끝내야 했다. 날이 여름으로 접어들었는데도 후원은 제법 선선했다. 거닐기에 좋은 온도였고, 땀이 마르기 적당했다. 스란두일은 검을 내려놓고 손을 더듬어 바위를 찾아 앉았다. 물을 놓아둔 곳이 선뜻 기억나지 않아 한참을 더듬어야 했다. 목을 축이고 상의를 도로 껴입는 동안 새소리가 가까이 들렸다. 좁고 보잘것 없으나 본궁보다 훨씬 인적이 드물어 새나 벌레, 작은 동물들이 마음 놓고 다니는 곳이 바로 이 왕자궁 후원이었다. 귀를 세우고 한참 듣고 있자니 다른 소리가 들렸다. 시종이 후원까지 오는 법은 없었건만, 이상하다 싶어 검을 제대로 쥐었다. 굳은 채 한참을 경계하고 있어도 인적은 더 들리지 않고 스란두일은 스스로의 둔함을 자책하며 지팡이를 짚으며 일어섰다. 


방문을 열자마자 들이닥치는 어둠은 이미 익숙한 지 오래였다. 익숙치 못한 것은 적막이었다. 이 왕자궁은 처음 옮겨올 때부터 소린과 함께 지내지 않았던가, 하는 생각이 새삼 다시 들었다. 눈뿐만 아니라 머리며 온몸이 불덩이처럼 타들어 갈 때에 곁에서 잡아주던 소린의 서늘한 손길이 떠올랐다. 마음 어딘가 뭉근해졌으나 그는 안타까워하는 대신 침대에 앉았다. 검은 곁에 두고, 땀 젖은 옷은 벗어다 침대 곁에 대강 개어 두었다. 


그는 아주 어릴 때 시찰로 따라갔던 북방을 떠올렸다. 차갑게 날 선 바람이 그치지 않고 낮에도 하늘이 희게 흐린 곳이었다. 그곳에 서 있을 소린의 넓은 등을 애써 떠올려 보려 했으나, 어찌된 일인지 소린의 뒷모습이 도무지 기억나지 않았다. 스란두일은 비파를 집으려 도로 일어나 좁은 침대 근처를 더듬었다. 무릎에 놓고 끌어안자 설움이 울컥, 목까지 올라왔다. 현을 뜯기 직전에 그의 방문에 누군가 기척을 보였다. 방문 두드리는 소리가 이어 들렸다. 이번에는 시종일지도 몰랐다. 


"들어오라."


그러나 그는 문이 열리자마자 시종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인기척은 사납고, 곧고, 숙달되어 있었다. 달려드는 기색 전에 검을 뽑아들었으나, 제아무리 무예를 오래 닦은 왕자라 해도 눈이 보이지 않는데 눈이 보이는 자를 이길 수 있을 리 만무했다. 몸이 짓눌리고 옷이 찢겨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소린이 준 검이 마룻바닥에 와장창 소리 내며 떨어졌다. 스란두일은 그제야 괴한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누가 보낸 것인지도 대강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보낸 자의 의중까지도 알 수 있었다. 그는 할 수만 있다면 지금의 왕이 제 눈을 긋고 모든 영예를 앗아갔을 때로 돌아가고 싶었다. 차라리 그 때 아비를 따라 갔으면 좋았을 것을, 이제는 죽을 때마저도 놓쳐 그저 죽지 않기 위해 살아야 했다. 비명을 삼켰다. 나는 적어도, 네 녀석이 원하는 대로 죽어주진 않으리라. 눈을 잃기 전 마지막으로 보았던 소린의 모습을 떠올렸다. 불 타는 궁을 배경으로 한 채 엉망으로 상처 입은 맹수가 발악하는 듯 보이던 장군의 형형한 얼굴만은 웬일인지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소린이 그가 시력을 가졌을 때 마지막으로 보았던 것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 눈빛과 표정만이, 스란두일 자신이 여태 왕자임을 잊지 않게 해주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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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린스란 중장편/순흔

순흔 4




소린은 스란두일을 가르치기 전에 한동안 눈을 가린 채로 홀로 먼저 검을 휘둘러 보았다. 그의 검법은 눈을 가린 후 더욱 날카로워지고 과감해졌다. 앞을 가리고 연습한 적이 이미 여러 번이었으나 이번에는 달랐다. 자신보다 조금 더 귀와 피부가 열렸을 스란두일의 감각을 상상하며 더욱 편한 검법을 연구하다 보면 온몸이 금방 땀으로 젖기 일쑤였다. 가을볕은 따사롭기보다는 뜨거웠다.


"볼 수 없다면 오히려 과감해져야 합니다. 이전보다 더 넓게 휘두르십시오."


그가 안대를 풀고 내린 결론은 그것이었다. 저보다 조금 더 큰 왕자의 뒤에 서서 잡는 법을 봐 주고 몸짓의 흐트러짐을 찾아내었다. 목검이 여러 번 부딪치고 스란두일은 금세 숨이 차올라 목에서 센 소리를 뱉어냈다. 소린은, 그의 가장 큰 문제점이 겁을 내는 것이라 결론 내렸다. 이해 못하는 바 아니었다. 한 때는 저와 대련해도 지지 않을 왕자였으나 눈을 잃고 더러운 북궁에서 지내는 동안 몸이 많이 약해진 탓도 컸다. 근육이 칼로 가른 듯이 잡혀 있던 왕자의 허벅지나 팔뚝은 이전보다 한참 가늘어져 있었다. 공기가 좋지 않은 방에 머물며 이따금 잔기침을 오래 하기도 했으니 호흡이 불안정한 것도 그 탓이리라. 소린은 뒤에서 그의 몸을 잡아 고쳐 주며 몰래 어금니를 악물었다. 매 끼 날라 오는 밥상머리만 제대로 되었더라도 이리 마르진 않았을 것을, 혹은 눈을 잃은 뒤 상처만 제대로 치료했더라면, 조금만, 이곳이 조금만 더 밝고 따스하고 깨끗했더라도. 원통함이 올라왔으나 눅눅한 빨랫감을 짜내듯 꾹꾹 눌러 담아 참는 수밖에 없었다. 고름처럼 아프게 새어 나오는 아쉬움 탓에 소린은 간간이 더 엄하게 왕자를 가르치기도 했다. 다행히도 스란두일은 소린과 연습하는 검술을 힘들어할지언정, 결코 싫어하는 내색은 하지 않았다. 숨이 차고 가늘어진 팔이 벌벌 떨리더라도 끝내 먼저 검을 놓겠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는 왕자였다. 소린은 그 점이 고맙고 대견하여 이틀에 한 번씩 검 연습을 하는 날마다 꽃이나 향 좋은 풀을 꺾어서 스란두일의 방에 꽂아 주었다. 그는 기꺼이 코를 묻고 소린이 들여온 향을 음미했다. 꽃잎 몇 자락이 흩날려 스란두일의 무릎에 고이 머무르기도 했다. 향은 눈 잃은 스란두일에게 좋은 위로거리였다. 


향뿐 아니라 소리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는 이제 제법 곡조다운 소리를 비파로 내기 시작했다. 창을 열어 두어도 어둑한 방 안, 침대에 한 쪽 다리만 올리고 앉아 비파를 켜고 있는 동안에는 소린이 다가오는 것도 눈치 못 챌 정도로 집중하는 그였다. 왕자는 검을 연습하지 않는 날이면 노파가 알려준 것을 하루 해가 다 질 때까지 홀로 연습하기도 했다. 몇 시간이고 반복되는 음색을 소린은 지겨워하지 않았다. 그저, 어슴푸레한 방으로 흘러 들어오는 바람이 이따금 감히 왕자의 옷깃 새를 파고들어 부풀리는 것을 구경하다 가만히 다가가 여며 줄 뿐이었다. 자주 가을볕을 쐬기 시작한 왕자의 살갗은 아주 조금씩 검어지기 시작했다. 곱던 살갗이 갈빛으로 물드는 것을 보고 소린은 복잡한 심경을 앓았다. 왕자는 눈을 잃기 전의 몸으로 조금씩 돌아가고 있었지만, 그 때보다 더욱 거칠고 더욱 단단했다. 소린은 그 모습이 점차로 색을 입어가는 낙엽 같다 생각했다. 그러나 바람 몇 자락에 떨어지지는 않으리라. 











"오늘은 네가 읽고 싶은 것으로 골라 보아라."


잠들기 전, 여느 때처럼 책을 읽어 주려는 소린에게 왕자가 젖은 머리칼을 누이며 말했다. 향기로운 몸 냄새를 맡으며 소린은 살포시 웃었다. 


"어릴 적부터 책에 흥미를 두지 못하고 검만 잡은지라 글에 식견이 없사옵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재미가 없으면 내 너에게 어련히 책을 바꾸어 달라고 하지 않겠느냐."


그리고 어서, 하며 다그쳤다. 왕자는 언제부턴가 소린에게 이리 아이처럼 굴기도 했다. 기다리시라 말하면 소린의 옷자락을 슬며시 끌어당기거나 살을 맞대어 와서 소린에게 곤혹스러운 웃음을 터뜨리게 하기도 하였다. 다정한 말에 이번에도 결국 낮게 소리 내어 웃고, 왕실 서재에서 가져 온 책 더미 중 한 권을 뽑아 들었다. 소린이 택한 것은 얇은 이야기책이었다. 먼 옛날 나라를 잃고 떠돌던 왕이 도로 왕좌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한단 내용이었다. 스란두일은 그 날, 별이 멀리 기울도록 잠들 줄 모른 채 소린의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가 많이 늦었습니다, 하며 책을 덮자 그제야 피로하고 미안한 기색을 보였다. 왕자의 표정을 못 읽어낼 소린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어떤 말도 혀 끝으로 굴려 첨언할 수 없었다. 말은 언제부턴가 소용없어지고 있었다. 뱉을 수 없는 말만 몸 속에 쓸모 없는 뿌리처럼 남아 소린의 가슴을 썩게 하고 있었다. 줄기가 잘려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말이 왕자에게까지 닿지만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내일은 이 책을 읽지 않으리라. 덮어 놓고 더미 아래에 쑤셔 넣어 버렸다.


"물러가겠습니다."


못내 목소리가 굳었으나 스란두일은 웃어 주었다. 


"늦게 잡고 있어 미안하구나. 쉬어라."


그는 그 날, 제 방으로 돌아가잖고 오래도록 문 밖에 서서 머물러 있었다. 우울한 풀벌레소리가 복도에 가득했다.











그 날은 무관 회의가 있던 날도 아니었고, 스란두일을 가르치는 노파가 오는 날도 아니었다. 본래대로라면 후원에 나가 둘이 검 연습을 하고 있을 시간이었다. 그러나 둘의 그림자 말고는 누구의 것도 들지 않던 어두컴컴한 복도에 돌연 나타난 자가 있었다. 말단 관료는 왕이 소린을 찾는다고 말했다. 소린은 스란두일의 방 앞에 선 채로 역정을 억누르며 되물었다.


"나를 찾아 무엇 하신단 말이냐."

"저야 모릅니다. 말만 전할 뿐이지요."


관료는 어깨를 움츠리고 소린의 눈치를 보다 지금 당장 오라십니다, 하는 말을 붙이곤 물러가 버렸다. 그는 복도를 한참 서성였다. 빈 손을 쥐었다 펴며 떠오르는 생각들을 두서없이 머릿속에 늘어 놓았으나 어느 하나 명백한 것은 없었다. 쫓아낼 때는 언제이고, 이제와 부른다는 것은 둘 중 하나라는 것 쯤은 짐작할 수 있었다. 불길이 일렁이던 그날 밤, 스란두일의 눈을 그어 버린 현 왕의 칼날에 맺힌 핏방울이 떠올랐다. 결국 소리 나게 벽을 찼다. 어쩌면 둘 중 하나가 아니라 둘 모두일지도 몰랐다.











곡조가 늘어지기만 하면 듣는 이도 지루하고 손도 피로해합니다. 느린 부분과 빠른 부분을 분간하시면 소리끼리 알아서 실타래를 엮고 감정을 내보이지요. 스란두일은 노파의 말을 되새기며 다시 한 번 첫 소절을 뜯었다. 


"이 곡에 노랫말은 없더냐?"


노파는 그리 묻는 왕자의 말에 고개를 저었었다. 


"없습니다. 오래 전부터 전해 오는 곡인데 노랫말 없이 가락만 있습죠. 왕자전하께서 하나 붙여 보시는 것은 어떠하십니까?"


하고 끌끌, 웃는 노파의 웃음소리에는 노인 특유의 매캐한 장작불 냄새가 났다. 비파에서는 조금 더 가벼운 나무 냄새가, 그리고 제가 앉은 이불 위에는 소린의 몸 냄새가 어렴풋이 배어 있었다. 그는 눈을 잃은 뒤 냄새들을 기억하기 시작했다. 모든 물건에, 모든 시간에 냄새가 있었다. 감각은 굳이 기억하려 애쓰지 않아도 몸 곳곳에 남아서 그를 돕고 있었다. 소리, 촉감, 냄새. 이것들이 뒤엉켜 스란두일의 뇌리에 남을 때마다 그는 제 감각이 저를 보고 살아 남으라 말하는 듯 느껴졌다. 그는 첫 소절을 뜯은 뒤 입술을 열었다. 노파 앞에서는 왠지 민망하여 내뱉지 못했던 노랫말이 저음을 타고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오랜 바람은 북녘에서 와 위로를 건네고

뭍의 냄새가 짙은데도 이곳은 아직 섬이어라

섬에는 꽃이 피지 않는다 모래 바람에 모두 시들었다

시간이여 바다여 천천히 말라 다오

내 발을 디딜 수 있도록 느리게 길을 내어 다오


마지막 소절을 덧붙이고 싶었으나 음색만으로 남겨 두는 것도 나쁘지 않다 생각되었다. 때마침 바람이 창가의 잎을 스쳐 시원한 소리를 내었다. 낙엽이 지기 시작했으니 어쩌면 몇 잎이 떨어졌으리라. 스란두일은 다시 한 번 홀로 연습했다. 빈 방에 불도 켤 필요 없이 창가의 옅은 햇빛만 여린 시야로 느끼며 두 번, 세 번, 수십 번까지 곡을 연주하며 노래했으나 소린은 돌아올 기미가 없었다. 그가 돌아온 것은 밤이 다 되어서였다. 


"늦었구나."


다른 말은 제쳐 놓고 한 마디만 뱉는 스란두일에게, 소린은 무어라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멀찍이 떨어진 문간에 서 있었다. 스란두일은 그의 기색이 흐리자 조금 불안한 감을 내비치며 고개를 살짝이 기울였다.


"소린?"

"……저녁식사 드셨습니까."

"네가 없으니 몸종이 직접 방까지 가져다 주더구나. 밥이야 무슨 상관이겠느냐?"


없어진 자초지종을 둘러 묻는 말에 그는 마른 세수를 몇 번이나 하고서야 입을 열었다.


"발령이 났습니다. 북쪽 국경으로……."


동그랗게 뜬 채 소린의 기척을 좇아 향하던 재색 눈은 한 마디만으로 돌연 멈추었다.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것 같아, 스란두일은 손바닥에 닿은 이부자락을 구겨 쥐었다. 


"왕께서 발령하셨단 말이더냐."

"예."


호흡 하나하나마다 피가 맺히는 것 같은 기분에, 스란두일은 숨을 몰아 쉬었다. 냄새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의 몸짓이 내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언제 떠나라 하시더냐?"

"모레 새벽에 정찰대와 함께 갈 예정입니다. 북부 사령탑을 제게 온전히 맡기시겠다고."


스란두일은 그의 짧은 말 안에 들어 있는 모든 것이 단번에 가슴 가운데로 밀려오는 기분을 느끼고,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목 언저리 옷깃을 잡아 늘렸다. 예상치 못한 소식은 속을 헤집어 놓고 사납게 두들겨 상처를 냈다. 북부 사령탑은 이곳에서 꼬박 사흘은 더 걸어야 당도할 수 있는 곳이었다. 그는 선왕이 죽기 전 정찰을 갔을 때에 바위와 모래로 이루어진 황량한 땅을 보고 기함했던 것을 기억했다. 그 넓고 생기 없는 벌판, 바람조차 머물지 않고 스쳐 떠나는 메마른 땅을 떠올리자 숨이 턱턱 막혀 오는 것 같았다. 야생동물들의 습격이 잦고 먹을 것이 드물어 북부에 머무는 병사는 자주 병에 걸리거나 다쳐서 돌아오곤 했다. 열에 아홉은 군에 머물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가 앓다 죽었다. 스란두일은 아주 천천히, 자세를 바로잡았다. 소린이 곁에 가서 그의 팔을 붙들어주었다. 검을 쓰느라 붙은 근육은 이제 제법 단단해져 있었으나, 얼굴만은 하얗게 질린 것이 안타까워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갔다 언제 돌아오느냐."


괜찮다는 표시로 손을 내저어 보이고 한숨처럼 겨우 뱉은 말에 소린은 대답하지 못했다. 왕자는 이미 의연해져 있었으나 북받쳐 오르는 것은 도리어 소린이었다. 그는 침대 앞에 무릎을 꿇었다. 스란두일의 검어지기 시작한 손을 이마에 가져대었다. 소린의 이마에 닿기에 그의 손은 서늘하게 느껴졌다. 한참이고 무릎을 꿇은 채 그는 울지도, 말을 건네지도 못하고 굳어만 있었다. 고르지 못한 숨이 스란두일의 무릎 위에 쉴새 없이 떨어져 아래로 흘러내렸다. 스란두일은 그 숨결이 뜨거워서, 행여 눈물인가 싶었다. 그리고 손을 들어 그의 어깨를 짚어 주었다.


"노파가 가르쳐 준 곡에다 노랫말을 붙여 보았다. 돌아오는 날에 내 들려주마."


소린은 왕자의 손등을 이마에 댄 채로 고개를 겨우 끄덕였으나, 돌아오겠다는 말은 결코 내뱉지 못했다. 그 날 소린은 스란두일의 곁을 떠나지 않고 밤새 침대 머리맡을 지켰다. 왕자는 눈을 감고 누워 있었으나 그 숨소리만으로도 잠들지 못하고 있음을 소린이 알 수 있었다. 달이 유독 서늘한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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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린스란 중장편/순흔

순흔 3





스란두일이 목욕을 하는 밤이면 소린은 뜨겁지 않은 물을 가득 받아주고 그가 목욕할 몇 십 분 동안 밖에서 기다렸다. 문간에 기대 서 있으면 이따금 스란두일의 노랫소리가 작게 들렸다. 욕실의 습기는 그의 낮은 목소리를 쉽게 공명해서, 후원에서 훈련하며 듣던 노랫소리보다 훨씬 처연하고 아프게 들렸다. 찰박찰박하는 물 소리가 끊기고 나면, 짚기 쉬운 곳에 소린이 놓아 준 새 옷을 입은 스란두일이 옷깃만 대강 여민 채 젖은 머리칼로 더듬거리며 나왔다. 열린 문으로부터 훅 끼치는 김 속에서 소린은 왕자의 흐트러진 옷깃을 여며 주고 머리칼에서 흐르는 물이 떨어지지 않도록 어깨에 수건을 받쳐 주었다. 그리고 방으로 돌아가는 길까지 팔을 내어 주었다. 곁에 서서 함께 어둑한 복도를 걸으면 스란두일의 몸 냄새는 뜨거운 물의 냄새와 뒤섞여서 과일이나 과실나무의 꽃처럼 달고 짙었다. 작은 등불로 비춘 둘의 복도는 아늑했고, 네 개의 발소리와 스란두일의 지팡이가 부딪치는 소리만 조용했다. 이따금 스란두일은 기분이 좋은 날에 욕실 안에서 부르던 곡조를 이어서 부르기도 했다. 


"비파는 정말 놀라운 악기야. 듣는 자는 켜는 이의 기분까지 알게 만든다더군."


소린은 스란두일의 그 말에 눅눅하던 마음이 화들짝 들킨 듯 붉어지는 것을 느꼈다. 몰래 복도에 서서 듣던 스란두일의 서툰 비파 소리는 왕자의 것답게 정갈하고 깔끔하였다. 곡조 사이사이 틈마다 끼어서 곱게 각을 맞춰 접어 놓은 듯한 슬픔까지 읽어낼 이는 얼마 없으리라. 부끄러워지기 시작하자 스란두일의 젖은 머리칼에서 나는 향도 기묘하게 느껴졌다. 


"소린."

"예."

"곁에 있어 주어서 고맙다."


왕자가 부드럽게 건네 준 단 한 마디로, 그는 예상치 못한 선물을 받은 아이처럼 들떴다. 뛰는 가슴을 숨기고 스란두일의 느린 걸음에 제 보폭을 맞추었다. 겨우, 가슴에서부터 밀어내어 대답했다.


"저로서는 영광일 따름입니다."


다른 말들이 가지를 뻗어가는 나무처럼 가슴 속에 여러 가닥으로 뻗어가고 있었다. 하고픈 말은 너무도 많았고, 모두 한 뿌리를 가지고 있었다. 어느 하나 제 손으로 꺾지도 잘라내지도 못할 말들이었다. 그러나 소린은 그 중 하나도 스란두일에게 보일 수 없었다. 그는 왕자가 처소로 돌아가 침대에 앉자 본디 제 자리인 양 자연스레 그의 곁에 수건을 들고 섰다. 침상에 기대지 않고 소린에게 등을 보이고 앉은 스란두일은 젖은 머리를 소린에게 맡겼다. 백금발은 이미 길게 자라서 등을 덮을 정도였다. 소린은 꼼꼼하게 그의 젖은 머리칼을 닦아 주었다. 본디 하던 일도 아니고 검을 쓰던 손이라 섬세하지 못하건만 스란두일은 불평 없이 그에게 고마운 내색을 했다. 스란두일의 머리칼은 사내의 것 답지 않게 가느다랗고 결이 고왔다. 소린은 그의 체향이 훅 가까워올 때에 이따금 몸 곳곳이 저릿해 오는 것을 느꼈다. 촉촉한 백금발의 습기보다 소린의 손에 들린 수건이 더 젖고 나면, 소린은 젖은 수건도 곱게 개어서 빨래거리 옆에 가지런히 놓아 두었다. 왕자가 침대에 눕고 그는 침상 아래에다 왕자의 신발을 정리해 준 뒤 곁의 의자에 앉았다. 낡고 쥐 파먹은 의자는 소린의 무게를 받고 매번 삐걱거렸으나 아직까지는 쓸만해 보였다. 이 궁이 생기고 수많은 자들이 햇볕 없는 궁의 북쪽, 지금의 왕자궁에 머물렀으리라. 머무는 자는 왕자든 공주든 혹은 다른 왕족이든 하나 같이 무언가를 잃었을 자임이 분명했다. 지금의 스란두일처럼 한 가지 이상을 잃고 쫓겨나다시피 이곳으로 온 자들도 있었을 터였다. 몇몇은 아무도 돌보지 않는 중에 죽어갔을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 중에 하나가 이 의자를 썼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스란두일은 다행히도 쇠약해진 몸으로 왕자궁의 눅눅함이며 어둑한 그늘을 용케 버티고 있었다. 소린은 그것이 고마웠다. 


"소린, 어제 읽던 것."


누운 채 소린에게 손 뻗는 투가 이럴 때에는 영락없는 아이 같기도 했다. 소린은 소리 없이 웃으며 머리맡에 놓아둔 책을 펴 들었다. 


"예, 그렇잖아도 읽어드리다 잠을 청할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스란두일은 침대의 한 쪽으로 몸을 밀며 소린의 옷자락을 끌어당겼다. 마지못해 소린이 실례를 무릅쓰는 마음으로 감히 왕자의 침대에 올라가 앉았다. 매번 책을 읽을 때마다 면구스러운 일이었다. 스란두일은 소린의 든든한 허벅지에다 머리를 뉘었다. 그는 소린의 허벅지를 베고 있는 것만으로도 크게 안심했다. 제 몸에 닿은 체온으로 눈 앞의 오랜 어둠이 채워지는 기분이었다. 소린의 몸은 제 것보다 덥고 건조했다. 이 왕자궁에서 그가 오는 소리는 스란두일이 눈을 잃고 가장 먼저 배운 소리이기도 했다. 자박자박하고 당당한 발자국, 무인의 것임이 분명한 발자국, 그리고 제 곁에 머물 것임을 필시 알 수 있는 발자국. 


소린이 책을 읽기 시작하자 그는 빛을 잃었을 눈동자를 닫고 장군의 낮은 음색을 들었다. 소린은 그가 잠이 들 때까지 나지막하고 느린 목소리로 책을 읽어 주었다. 왕자는 몇 페이지를 읽는 동안 금방 소린의 허벅지를 벤 그대로 잠들었다. 그러면 소린은 조심스레 그의 머리를 베개 위에 놓아 주고 잠자리를 마지막으로 봐준 뒤 옆방으로 가는 것이었다. 마음이 괜히 쓰이거나 하는 날에는 곁에 둔 의자에 기대 앉아 졸며 밤을 지낼 때도 있었다. 그런 날에 장군은 왕자의 곁을 비우기 원치 않았기에 온 몸의 근육이 뻐근해지더라도 곁에 머묾으로써 마음을 놓곤 했다. 오늘처럼 잠든 그를 두고 돌아가는 날이면 소린은 어둑한 제 처소에 들어가 몸을 누이고 옆방의 소리에 귀 기울였다. 그는 왕자에게 처음 책 읽어준 날을 떠올렸다. 처음 이곳으로 쫓겨 오고부터, 소린은 왕자의 빈 눈동자를 볼 때마다 겁냈다. 하루 아침에 여러 가지를 잃고 몸까지 야위기 시작한 왕자는 안에서부터 조금씩 부서지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스란두일이 책을 그리워하던 그 날, 자신이 틀린 것임을 깨달았다. 감히 마지막 남은 정통의 왕손을 여리게 보았음에 스스로 엄히 꾸짖었다. 검술이나 기마뿐만 아니라 공부도 게을리하지 않았던 왕자였다. 나라를 버티던 가장 큰 재목이 아니었나. 그가 맨 처음으로 책을 읽어 달라 소린에게 부탁했을 때, 그는 놀랍고도 기특한 마음이 들어 뿌듯했다. 왕자의 슬픔이란 그런 것이었다. 종이처럼 곱게 접어 사이에 끼워 놓아 잃지 않을 뿐, 티를 내고 아파하는 종류의 것은 아니었다. 소린은 자신이 모시는 왕손이 얼마나 강한지 몇 번이고 깨달으며 뉘우쳤다.


스란두일은 창피함을 억누르며 왕실 서고에 있는 책의 반도 읽지 못한 것이 안타깝다 덧붙였었다. 행여 장군이 다 큰 왕자께서 어리광을 피우는 것으로 착각해 비웃지는 않을까, 면구스럽다며 거절하지는 않을까, 혹은 소린의 성격을 미루어 보아 불편함을 무릅쓰고 기꺼이 그에게 책을 읽어 준다 하지 않을까 걱정스러웠다. 그러나 소린은 스란두일의 손을 맞잡아주며 대답했었다. 기꺼이 그러겠노라고. 읽던 것의 제목을 불러 주시면 서고에 가서 찾아오겠노라고. 그의 마음이 곱고 고마워서 왕자는 저도 모르게 맞잡은 까칠한 손등 위를 다정히 쓸었다. 그 날 소린이 먼지 낀 서고를 기꺼이 뒤져 찾아온 책은 곧바로 낮은 그의 음색을 타고 스란두일에게 전해졌다. 때때로 스란두일은 소린에게 날카로운 언중을 가지고 방금 읽은 학문에 대해 첨언하곤 했다. 왕자의 논쟁 상대가 되어주는 것 또한 소린의 몫이었다. 











왕자궁의 아침은 다른 곳보다 몇 시간은 느리게 왔다. 소린은 볕이 드는 쪽으로 스란두일의 침대를 손수 옮겨주었다. 그래 보았자 아침에 겨우 볕이 드는 것인가 싶을 정도일 뿐이라, 소린은 반드시 그가 낮 내내 후원에 나가 볕을 쪼이게 했다. 잠이 덜 깬 왕자가 세수를 하고 나면, 그가 옷을 갈아 입을 때까지 소린이 먼저 후원에 검을 들고 나가 휘두르고 있었다. 비파를 가르치는 노파가 오는 날이면 스란두일은 늘 나가는 길로 걸으며 후원의 꽃 향을 맡거나 풀을 가지고 장난 치다 일찍이 들어갔다. 그렇지 않은 날에는 소린의 훈련하는 소리를 좇아 다가가 근처 바위에 앉아 있곤 했다. 


그날은 노파가 오는 날도 아니었고, 무관회의가 있어 소린이 자리를 비워야 하는 날도 아니었다. 평소처럼 오전 내내 소린이 검 연습을 하고 돌아오면 스란두일의 비파 소리가 복도부터 살며시 들려 와야 했다. 예와 다른 고요에 소린은 복도 끝에서 발을 멈춰 서고 상황을 파악하려 했다.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아 발부터 먼저 튀어나갔다. 왕자의 방으로 달려가 무례하게 문을 열어 젖혔다. 그러나 왕자는 방에 없었다. 혼란스러워졌다. 방에도, 늘 다니던 후원의 길에도 없다면 어디로. 마른 세수를 하고 빈 방에서 서성이다 다시 뛰쳐나갔다. 어둑한 복도의 어디서도 스란두일의 흔적을 찾을 수는 없었다. 귀를 기울여도 지팡이 소리 그 비슷한 것도 들리지 않았다. 결국 후원으로 다시 나갔다. 작은 나무며 풀 사이에서 지팡이가 찍어낸 흔적은 생각보다 찾기 어려웠다. 길 위에 엎드리다시피 걸으며 스란두일의 흔적을 찾아댔다. 그는 죄를 지은 것처럼 스스로가 무거웠다. 행여라도 왕자가 이곳에서 잘못된다면 누구를 탓해야 하는가. 어금니를 소리 나도록 깨물고, 늦봄 내 고요히 땅 위로 내려앉아 썩어가는 꽃잎을 발 끝으로 헤치면서 집중했다. 고작해야 작은 뜰이었다. 샛길로 들어가면 궁의 남쪽으로 갈 수 있지만……. 땅과 잔 나뭇가지 사이를 헤매던 소린의 눈이 번뜩 뜨였다. 황급히 후원의 샛길로 향했다. 빠져나갈 길은 그곳 밖에 없으나, 험하고 좁고 날카롭게 뻗은 나뭇가지에 다치기 쉬운 곳이라 눈도 뵈지 않는 스란두일이 들어갈 길은 아니었다. 거기다 그곳은 제법 궁인들이 오가는 곳이었다. 소린은 눈앞이 하얀 것을 애써 붙들며 잔 나뭇가지 사이를 헤치고 기어들어갔다. 비로소 넓은 곳이 보이기 시작하자 익숙한 비파 소리가 들렸다. 이끼 낀 바위에 아무렇게나 앉아 비파를 켜고 있는 스란두일에게 다가가 팔뚝을 낚아챘다.


"지금 여기가 어디인지는 아십니까?"


놀란 스란두일이 앉은 채로 휘청이다 결국 비파를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많이 말라 버린 왕자는 소린이 흔드는 힘에 쉽게 휘둘렸다. 


"소린, 화가 많이 났나 보구나."


직계 왕손의 낮고 침착한 목소리는 비록 화를 내지 않았으나 꾸짖는 것과 다름이 없어, 소린은 아랫입술을 말아 물며 손목을 놓았다. 허나 용서를 구하지는 않았다. 떨어진 비파를 망연히 바라보고 있자니 스란두일이 허리를 숙여 집었다.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몸체를 더듬어서 흠집 난 곳이 없는지 확인했다. 그리고 이어 말했다.


"새 소리를 따라 걷다 조금 멀리 왔구나. 걱정을 끼쳐서 미안하다."


소린은 스란두일의 말에 순간 목 아래가 뜨거워져 울고 싶어졌다.


"그러나 네가 이렇게 찾아 주었지 않느냐."


왕자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 손을 내밀었다. 소린은 그 의미를 알고서 팔을 내어 주었다. 울컥, 울컥 올라오고 아직도 놀라 뛰는 가슴이 행여라도 왕자에게 그대로 전해지지는 않을까 싶었다. 심각하게 찌푸린 무례한 얼굴이나마 그에게 보이지 않아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는 스란두일을 뒤에 세우고 좁은 샛길을 지나가기 쉽도록 손으로 나뭇가지를 꺾어 헤쳐 주었다. 익숙한 후원에 도로 돌아와서야 마음이 반쯤 풀리는 것 같았다. 감히 왕자를 원망할 수 없어서 자책하고 또 자책했다. 왕자의 뒤에 서서 머리칼에 붙은 나뭇잎이며 먼지를 일일이 손으로 떼어 주었다. 


"왕자전하."

"그래."

"검을 다시 잡아 보시는 것은 어떠하십니까?"


잠깐 망설이던 스란두일의 얼굴이 말가니 웃음을 담아 냈다.


"네가 가르쳐 준다면 기쁘게 배울 수 있겠구나."


스란두일은 제 옷깃을 고쳐 주는 소린의 손길을 받으며, 제게 손수 살을 맞붙이며 검술을 가르쳐 줄 그의 체온을 상상했다. 소린의 훌륭한 검술은 필시 맹인인 자신에게도 큰 무기가 될 수 있으리라. 잔잔히 설레기 시작했다. 애써 꺼낸 말의 의중이 느껴져서 고마웠다. 네가 곁에 내내 머무는데 무엇이 그리 걱정이냐는 말은 혀 끝으로 접어 삼켜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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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린스란 중장편/순흔

순흔 2



달이 서녘으로 한참 기울고서야 잠든 새벽이면 스란두일은 어김없이 나쁜 꿈을 꿨다. 꿈에서의 그는 어찌된 일인지 눈뿐만 아니라 귀도 목소리도 손도 잃어서 덩그러니 버려진 갓난아이처럼 어깨로 기어야 했다. 아버지, 아버지, 없는 목소리를 쥐어짜내며 소리도 시야도 없이 어디인지 알 수 없는 어둠을 마냥 끙끙대며 기어가다 보면 꿈의 끝에서 제 볼을 익숙한 손에다 부빌 수 있었다. 따뜻하고 묵직한 그것이 소린의 손이라는 것은 꿈에서도 알 수 있었다. 간혹 잠에서 깨면 제 방 의자에서 웅크리고 자고 있는 소린의 숨소리나 지금처럼 제 손등에 닿는 두툼한 소린의 손이 있어, 스란두일은 꿈과 생시가 다를 바 없이 어두운 눈 앞에도 안심하였다.


"일어나셨습니까."


스란두일은 누운 채 이불을 더듬어 목소리가 들리는 곳까지 손을 뻗었다. 이내 까슬한 소린의 수염 덮인 볼에 닿았다. 그대로 손가락을 내려 다정히 쓸었다. 후원 나뭇잎에 타닥타닥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가 생경하고 시원했다.


"빗소리가 들리는구나."

"예, 아침부터 오더이다."


소린의 목소리가 낮고 포근하여 스란두일은 하마터면 다시 잠에 들뻔했다. 칭얼대듯 볼을 침대 위에 부벼대는 동안 소린은 왕자의 옆을 내내 지키고 있었다. 스란두일이 한참 베개에 얼굴을 뭉갤 때까지 기다려주다가, 결국 그의 어깨를 조심히 붙들어 일으켜주었다. 


"세숫물을 가져 왔습니다."


왕자의 몸종이라고 왕이 보내어 하나 있던 것도 궁 북쪽으로 밀려난 둘을 우습게 보아서, 소린은 아예 몸종이 필요 없으니 가라고 돌려 보낸 터였다. 그는 당장 닥친 어둠에 여태 적응 못한 스란두일이 여려진 마음에다 멸시를 당하고 상처 받는 것을 보기가 싫었다. 왕자를 감히 여리게 본다 꾸짖어도 상관 없었다. 지금이야 궁의 구석이나마 둘이 지낼 수 있건만 언제 자객들이 들이닥쳐 목숨이 위태로워질지 알 수 없었다. 새로운 왕은 소린이 종잡기 힘든 자였다. 이전까지 죽은 듯 지내며 제 편이 될 만한 자들을 조금씩 꼬드기는 동안 소린은 그를 의심하지 못했다. 그것이 원통하고 죄송해서라도 그는 스란두일을 지키는 것으로 보답하길 원했다. 왕이 보낸 다른 자를 곁에 두는 것은 어찌되었든 굉장히 위험한 일이었다. 몸종의 일을 대신 하는 것 정도는 이미 버려진 장군의 이름에 하등 문제될 것이 없었다. 그는 기꺼이 스란두일을 수발했다. 끼니마다 오는 밥상도 그가 직접 복도까지 나가 받아 와, 먼저 먹어 확인한 뒤에 스란두일을 먹였다. 아침마다 마지못해 일어나는 스란두일을 끌어다가 세숫물 앞에 앉히는 것도 그의 몫이었다. 보이지 않을 눈을 대신해 길고 가느다란 왕자의 손을 물에 적셔주면 스란두일은 이제 제법 혼자서 얼굴을 씻을 줄 알았다. 


소린은 물에 젖은 스란두일의 하얀 이마를 보며, 몸종을 물린 바로 다음 날의 아침을 떠올렸다. 스란두일은 그 날, 체면 탓인지 소린에게 물러가라 명하고 홀로 대야를 쓰다가 세숫물을 온통 엎고 잠옷까지 함빡 적셨더랬다. 아무래도 기분이 심상치 않아 소린이 돌아왔을 때에 물로 젖어 엉망인 왕자의 얼굴에서 그가 가장 먼저 읽은 것은 바로 수치심이었다.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턱을 수건으로 닦아주려 다가갔을 때, 스란두일은 그의 손이 닿자마자 소스라치듯 뿌리쳤다. 살이 빠져 뼈가 도드라진 손가락은 소린을 뿌리치고서도 공중에 어설프게 머물러서 바들바들 떨다가, 다시 젖은 바닥을 더듬었다. 소린은 그가 이미 저 멀리 널브러져 있는 대야를 찾는 것이라고 짐작했다. 바닥에 있던 먼지와 물이 엉망으로 엉긴 옷자락 또한 엉망이었다.


"왕자전하."


무겁게 불러도 반쯤 넋이 나간 듯한 스란두일의 얼굴은 여전히 젖은 채 창백했다. 체온이 떨어지고 있는 것인지 마른 어깨가 떨고 있었다. 소린은 다시 스란두일을 붙들었다. 또 뿌리치려는 것을 단단하게 잡고, 눈을 볼 수 없건만 턱을 잡고 제 얼굴을 마주하게 했다.


"진정하십시오. 제가 왔지 않습니까."


스란두일은 고개를 비틀며 입술을 깨물었다. 수치심이 극도로 올라, 애써 굳히려 애쓰는 얼굴이 새빨개지고 있었다.


"나가 있거라."


고집스런 한 마디에 화가 치솟았다. 굳이 혼자 하시겠다고. 소린은 그를 뿌리치고 엎어진 대야를 주워다 힘줘 던져 버렸다. 벽에 부딪치고 그나마 몇 없는 세간마저 떨어지며 부서지니 요란한 소리가 났다. 스란두일의 얼굴빛은 금세 사색이 되었으나 소린은 그대로 돌아서서 나갔다. 후원에 서서 하염없이 연초를 태우며 그는 마음이 쓰렸다. 젖은 스란두일을 잡았던 손바닥은 여태 마르지 않고 있었다. 내려보니 손금마다 습기가 끼어 있었다. 왕자의 어깨는 이곳에 오기 전보다 훨씬 말라서 그의 손바닥 안 단번에 잡혔었다. 그는 축축한 감촉을 떠올리며 빈 주먹을 쥐었다가, 큰 걸음으로 왕자의 방에 돌아갔다. 그가 들어섰을 때에 스란두일은 그 자리 그대로인 채 무릎만 감싸고 웅크려 있었다. 문간에서도 한눈에 바들바들한 몸 떨림이 보였다. 소린은 깊게 자책하며 왕자에게 다가가 이마 열부터 재어 보았다. 좀 전까지는 차갑기만 하던 왕자의 얼굴에 뜨끈한 열이 느껴졌다. 소린의 가슴 아래로 묵직한 감정이 쿵, 떨어졌다. 


"나, 나는, 소리가 들리는데 어느 곳인지 어찌 되었는지 알 수가 없어서."


일국의 왕자였던 자가 어린아이처럼 소린에게 파고들었다. 소린은 그의 어깨를 감싸주지 못하고 젖은 백금발이 제 어깨에 엉기는 것만 조심히 쓰다듬어 주었다. 


"그대가 다친 건지, 아니면 누가 들이닥친 건지, 앞으로 나가 확인하지도 못하니, 어찌,"


스란두일은 소린의 어깨를 쥐고 힘겹게 숨을 몰아쉬었다. 물에 젖어 열이 오르는 것보다는 놀라서 어지럽고 가슴이 뛰는 것이 더 컸다. 


"이렇게 어두운데 나는 어찌 살아야 하오?"


왕자의 말에 소린은 아픈 목울대 아래를 억지로 움직여 따가운 침을 삼켰다. 스란두일의 백금발이 닿은 가슴께가 축축하게 젖고 있었다. 왕자의 말에 그는 어떤 대답도 줄 수 없었다. 혼절할 듯이 바들바들 떨고 있는 그의 흰 목덜미를 보며 소린은 저와 대련했던 왕자의 강한 검날을 떠올렸다. 가느다랗게 살 빠진 손목이 안타까웠다. 왕자는 용케도 울지 않았다. 그는 소린의 품에 이마를 대고서도 제 숨을 고르려 애썼다. 소린은 당장이라도 그를 끌어안고 오열하고픈 것을 참고, 조용히 제 몸에서 그를 떼어내고 두 볼을 손으로 감싸 쥐었다. 왕자의 붉어진 볼은 열이 오르고 놀라서 피가 오른 탓에 데일 듯 뜨거웠다. 날이 아직 추울 때였다. 이대로 두면 젖은 옷이 마르는 동안 필시 몸에 탈이 날 것이었다. 그러나 그보다는 숨을 쉬지 못해 새파래진 입술부터 진정시켜주는 것이 먼저라 생각했다.


"심호흡을 해 보십시오. 천천히, 그렇지요, 천천히."


금방 눈물을 쏟아낼 듯 그렁그렁하던 스란두일은 느지막이 말하는 투를 제법 따라가며 힘겹게 숨쉬었다. 그제야 엉망이던 얼굴이 점차로 돌아오고 할딱이던 가슴도 조금 나아지는 듯 싶었다. 소린을 놓지 않으려는 듯 옷깃을 틀어 쥔 그의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소린은 다음으로 왕자의 젖은 옷을 찬찬히 벗겨 주었다. 무례하지도, 더듬지도 않는 곧은 손길로 물기까지 깨끗이 닦아주고 겨드랑이 사이에 팔을 넣어 일으켜 주었다. 스란두일을 침대에 누이고 이불까지 덮어 준 그는 벽난로에 불을 피우면서도 여러 번 침대 쪽을 돌아 보았다. 여태 젖은 속눈썹이 불안히 깜박이고 있었으나 표정만은 아까보다 나았다. 그러나 마음이 놓일 리 없었다. 방에 온기가 천천히 돌기 시작할 때에 소린이 의자를 끌어다 스란두일의 곁에 앉았다. 그 소리에 스란두일이 침대 밖으로 손을 뻗었다. 소린이 잡아 주었다. 


"옷을 새로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스란두일은 고개를 저었다.


"춥지 않다."


하고 잡은 손에 힘을 주는 마음이 읽혀, 소린은 일어나기를 관두었다.


"예, 곁에 있을 테니 조금 더 쉬십시오."


하는 소린의 말을 듣고 긴장 풀린 얼굴 근육이 조금씩, 아주 조금씩 눈을 감고 잠에 빠져들었다. 소린은 그 날만 하더라도 두 눈 잃은 왕자가 언젠가 미쳐 버리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을 놓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의 스란두일은 홀로 얼굴을 씻고 소린에게서 수건을 받아 닦으며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는 것이었다. 낮게 울리는 목소리를 듣고 있던 소린이 문득 물었다.


"악기를 배워 보시는 것은 어떻습니까?"

"악기라?"


뜻밖의 말에 스란두일은 흐린 눈을 굴리며 생각에 잠겼다. 미간에 남은 상처는 이제 다 아물었으나 긴 흉터를 남길 듯 싶었다. 눈동자 위에 그어진 희미한 선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스란두일은 걱정스레 보던 소린이 무색할 만큼 환히 웃었다.


"좋은 생각이구나. 내 요즘은 검도 쥐지 못하니 소일거리가 없지 않았는가."


소린은 보일 리 없건만 따라서 미소 지었다. 수건을 도로 받아 들며, 이 아름다운 왕자에게 어울릴 만한 악기가 어떤 것이 있는지 머릿속으로 여러 개 떠올려 보았다. 그러자 마음이 금세 즐거워졌다. 작은 후원에 앉아 악기를 연주하며 노래하는 스란두일은 필시 지금보다 더욱 아름다울 터였다.











그가 선택한 것은 비파였다. 현이 몇 줄 되지 않고 연주법이 제법 쉽지만 연주하는 자의 성정에 따라 다른 소리를 내는 악기라 스란두일에게 안기고 익히게 한 뒤 어떤 소리를 낼지, 몹시 궁금해졌다. 처음 비파를 받은 스란두일은 한참 동안 몸체며 현을 손가락으로 쓸어 보았다. 모양새를 그리듯이 구석구석 더듬은 후에야 고개를 들고 소린이 있을 곳을 향해 말했다. 


"고맙구나. 몹시 마음에 든다."


음악 선생은 소린이 따로 궁 밖에서 구해 온 믿을 만한 자로, 손주 하나와 지내는 작은 체구의 노파였다. 왕은 의외로 스란두일의 음악 선생이 궁에 드나드는 것을 꺼리지 않았다. 고작해야 늙은 노파가 며칠에 한 번 드나든다고 무슨 힘이 있을까 하는 연유도 있었건만, 검을 쥐던 손에 악기를 쥐기 시작했으니 왕자의 재기는 영영 물 건너 갔다 여기는 게 더 클 터였다. 소린은 어찌 되었든 상관 없다 생각했다. 해치지 않을 것이라면 차라리 관심에서 멀어져 지금처럼 없는 듯 지내는 게 왕자에게는 가장 안전한 길이었다. 비록 후사도 보지 못하고 이곳에서 영영 늙어간다 하더라도, 소린은 그를 지킬 수만 있다면 기꺼이 없는 사람으로 만들고만 싶었다. 그것이 마지막 남은 이 왕가 후손에 대한 소린의 충성이었다. 


소린은 처음 노파가 온 날 저녁, 비파와 비슷한 색의 나무를 구하러 궁 근처까지 나갔다. 그리고 스란두일이 잠든 후 제 방으로 돌아가 밤새도록 가져온 나무를 길게 깎고 다듬었다. 며칠이 걸려 완성된 것은 스란두일의 큰 키에 맞춘 지팡이였다. 일부러 아래 쪽에는 철을 덧대어 주인이 더듬을 때마다 소리가 나도록 해 두었다. 돌에 닿을 소리와 나무에 닿을 소리가 달라지면 스란두일이 걷기에도 편할 것이었다. 지팡이의 머리 부분에는 파란 월장석을 구해다 박아 주었다. 성인 엄지 만한 월장석은 다른 월장석보다 푸른 기가 조금 덜했으나, 오히려 그 탓에 스란두일의 빛 잃기 전 눈 색깔과 비슷해 보였다. 이 어두운 복도에서도 파르라니 빛나는 것이 소린의 마음에 들었다. 마지막으로 회색 끈을 꼬아 손목에 걸 수 있게 달아 주었다. 지팡이를 처음 받은 스란두일의 얼굴에 얼핏 슬픈 빛이 스쳤으나, 그는 왕자다운 의연함으로 표정을 되찾고 새 지팡이를 짚으며 일어섰다. 따닥, 따닥, 바닥에 부딪칠 때마다 경쾌하지만 경박하지는 않은 소리가 마음에 들어서 소린을 손짓해 불러서 볼을 쓰다듬어 주었다.


이제 소린은 아침에 홀로 후원에서 검을 휘두르다 오면 스란두일의 비파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왕자의 방으로 들어가지 않고 복도에 선 채로 한참이고 서툰 연주 소리를, 몇 개 음을 반복하고 또 반복하고 그마저도 틀렸다가 다시 하는 그 소리를 하염없이 듣고 있곤 했다. 어둑한 복도에 발을 멈추고 숨 죽여 서 있으면 간간이 노파와 투닥거리는 말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그는 제 흙 묻은 신발을 내려다보며 언젠가 할 수 있다면, 감히 왕자에게 곡을 청해 보고 싶다는 생각까지도 하였다. 다만 이 눅눅하고 볕 들지 않는 곳에서 언제까지 그의 비파 소리만 들으며 머물 수 있을지, 소린은 장담할 수 없었다.


스란두일이 노파 없이도 제법 곡을 연주하게 되었을 때에는, 벽을 애써 더듬거나 발목을 접질리지 않고도 혼자 방에서 후원까지 걸어갈 수 있는 것 또한 가능했다. 그는 이제 작은 일에 소린을 찾지는 않았다. 어둠을 안고 살면서 소린을 그 속에 함께 끌어들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왕족의 피를 타고 나서 한때는 소린과 대련해도 크게 지지 않을 만큼 강하던 자신이 아니었던가. 이제 단단하던 팔의 근육이나 날래던 몸짓도 잃었으나 그는 최대한 소린의 손을 빌리지 않으려 애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린은 대부분 그가 필요로 할 때에 곁으로 다가왔다. 소린이 스란두일의 곁을 비우는 것은 일주일에 한 번, 무관 회의가 있는 날뿐이었다. 형식뿐인 회의였고 순식간에 퇴물이 된 장군이 발언할 곳은 없었으므로 정오가 되기 전에 그는 왕자에게 돌아왔다. 그나마 회의가 있는 날에는 왕자를 안타까워하는 궁녀 몇이 소린을 불러내 먹을 것을 몰래 싸 주어서, 그 날 점심식사는 그나마 나은 편이었다. 작은 상에 놓인 음식은 이전 받던 밥상에 비해 보잘것없고 맛없었으나 스란두일은 결코 불평한 적이 없었다. 제가 숟가락을 놓기 전까지는 한 술도 뜨지 않고 부지런히 생선뼈를 바르고 나물을 집어다 주는 소린을, 스란두일이 눈치 못 채는 바 아니었다. 스란두일은 자주 웃었다. 소린은 왕자의 웃음이 아팠으나, 내색 않고 매번 손을 마주잡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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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린스란 중장편/순흔

순흔 1




불을 질러라. 


한 마디로 밤의 반란이 마무리되었다. 소린은 땀 흐르는 손을 틀어 검을 고쳐 쥐고 싶었다. 그러나 반란자의 등을 보고 서서, 뒤로는 왕자를 호위한 채 발끝 하나 움직이지 못했다. 승산 없는, 의미 없는 긴장감이었다. 왕자의 곁에 선 자는 소린이 유일했다. 나머지 장군이며 무신들과 문신들 중 거부하는 자들은 모두 죽었고 나머지는 반란군의 편으로 돌아선 지 오래였다. 군사가 장악된 상황에서 장군과 왕자, 둘은 말굽으로 밟으며 가지고 놀 수 있을 정도로 유약하고 의미 없었다. 소린은 줄에서 떨어져 죽을 것을 알고도 올라가는 무용수의 심정으로 절망스레 제 뒤의 기척을 몇 번이고 확인했다. 스란두일은 어른어른한 몇 개의 횃불에 비추어도, 생의 끝을 앞둔 순간이어도 아름다웠다. 세상 모든 칭송을 한몸에 받던 왕자였다. 장대하고 아름다운 용모만큼 무력으로도 뛰어났으나, 무자비함 앞에서는 곧 짓이겨질 나비와 다름 없었다. 


그 날 왕은 반란자에게 참수당했다. 왕자인 스란두일은 반란자의 검 끝에 두 눈을 잃었다. 묶여 꿇린 채 고통스레 비명을 지르는 스란두일의 옆모습은 화마의 붉은 빛을 반사하느라 온통 붉어, 마치 불에 타고 있는 듯했다. 소린은 저도 모르게 왕자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며 오열했다. 그날 이후 재색으로 당당하고 처연하던 스란두일의 눈은 흉한 칼자국만 남기고 빛과 어둠 외에는 구분할 수 없게 되었다. 반란자는, 새 왕은 좀전까지 왕자였던 자를 죽이기 원했다. 방금 왕자의 피를 묻힌 사악한 칼날 끝을 그가 털어낼 때, 소린이 몸을 끌어 앞을 가로막았다.


"시력 잃은 왕자 하나가 해하기라도 할까 두려운 것인가? 그렇다면 나도 함께 베어라."


가슴을 긁고 목을 울리며 호령하는 소린의 목소리에 몇몇 병사들의 사기까지 죽었다. 반란자는 망설였다. 유일하게 왕자의 곁에 남은 소린은 나라 안에서 무력을 따라갈 자가 없는 장군이었다. 그는 스란두일과 소린을 죽이는 대신 왕자궁을 옮기라고 지시했다. 궁에서도 가장 북쪽, 춥고 습하고 볕이 들지 않아서 버려진 건물이었다. 거미줄과 곰팡이가 그득한 방에 눈 다친 스란두일이 들어가고 소린은 그 옆 방을 자처했다. 새 왕자궁은 오후가 늦도록 햇빛을 볼 수 없었고 밤이면 쥐인지 큰 벌레인지 모를 것들이 소리 내어 침대 아래를 지나다녔다. 앞을 보지 못하게 된 스란두일은 오랫동안 더러운 방에 누워 앓았다. 제대로 된 의원 하나 붙여주지 않아서 그를 치료하는 것 또한 소린의 몫이었다. 그는 스란두일이 감염되지 않도록 붕대를 구해다 여러 번 갈아주고 약을 달여 왔으며, 잠을 거의 자지 않고 침대 곁에서 머리를 대고 졸았다. 졸다 보면 흐느끼는 듯한 스란두일의 잠꼬대가 들렸다. 소린은 이불 바깥으로 나온 스란두일의 손을 잡아주었다. 왕자를 보필하는 장군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그것이 다였다.


스란두일이 붕대를 풀기까지 소린은 간호하는 틈틈이 그의 방을 정리해 주었다. 게으른 몸종이나마 왕자에게 붙이긴 했으나 그조차도 새 왕의 뻐꾸기나 다름이 없을 터여서 소린은 그를 밖에서 놀게 하고 차라리 제 손으로 직접 방을 정리했다. 스란두일이 앉아서 미음을 받아 먹을 수 있을 정도가 되었을 때, 소린은 왕자궁의 근방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나라의 무인으로 궁에 들어온 지 근 이십 년이 넘게 지났으나 넓은 궁의 구석구석을 모두 알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북쪽 끄트머리에 있는 듯한 이곳은 온통 습기가 차고 서늘했다. 볕이 드는 시간은 늦은 오후 잠깐이라서, 소린은 그 때나마 눈 안 보이는 스란두일을 억지로 일으켜 산책을 하게 했다. 왕자궁의 바깥에는 작은 뜰이 있었다. 보잘것없고 제대로 큰 나무도 없는 곳이었다. 그러나 조용하고 시원했다. 


스란두일은 일어나기를 거부하면서도 소린이 옷깃을 여며 주고 팔을 잡아 끌면 어쩔 수 없이 침대에서 빠져나왔다. 베인 눈은 붕대를 풀고서도 몹시 아렸다. 처음에는 빛이 닿는 것만으로도 찢어질 것처럼 아팠다. 그러나 그는 소린에게 내색하지 않았다. 밤마다 어떤 손이 제 목덜미를 꽉 짓누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몇 번이고 깨는 것 또한, 내색하지 않았다. 그는 앞에서 저를 이끄는 소린의 등을 더듬으며, 그 온도차에 적응하지 못했다. 소린의 등은 넓고 단단하고 더웠으나 제 손은 자주 차게 식었다. 그는 소린의 표정을 보고 싶었다. 그대는 왜 내 곁에 남아 참수 당할 위험을 무릅쓴 것이냐 묻고 싶었다. 여태 본 적 없는 소린의 굳은 얼굴을 상상했다. 행여, 밤에 찾아와 내 목을 누르는 것이 당신이냐 묻고도 싶었다. 왜, 왜 내 곁에 남은 것이냐. 그러나 질문은 말을 잃은 듯 입 속에서 헤매기만 했고 그는 한 손으로 벽을, 한 손으로 소린의 어깨를 짚은 채 뜰로 나가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제 방이라고 하나 문이 어디 붙었는지, 기름등은 어디 있는지, 제 침대의 색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했다. 발 하나 내딛는 것만도 소린의 도움이 필요했다. 수치심을 감추고 소린의 이름을 크게 부르면 그는 항상 곁에 있거나, 혹은 짧은 시간 안에 달려왔다. 왕자는 그의 목소리며 몸짓이며 손에 닿는 체온에 안심했다. 소린은 그가 어둠에 갇혀 있지 않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유일한 증거였다.


그러나 굳건하던 왕손의 장대한 몸이라도 감각 하나를 잃은 뒤 급격하게 쇠락하는 것은 그의 곁을 묵직히 지키는 소린마저도 막을 수 없는 부분이었다. 스란두일은 하루 지날 때마다 하루치씩 야위었다. 근육이 단단하게 자리잡던 팔이며 허벅지가 가늘어져서 본디 입던 옷이 헐렁할 지경이었다. 소린이 그를 찾으러 방에 들어오면 그는 흐릿한 재색 눈을 반쯤만 뜨고 말라 붙은 입술을 반쯤 벌린 채 침대에 웅크리고 있었다. 소린이 다가가서 어깨라도 짚거나 왕자전하, 하고 부르면 소스라치게 놀라곤 했다. 반란을 모르는 계절은 봄을 가져왔고, 봄이 깊어가도 왕자는 가을처럼 말라갔다. 


그가 처음으로 자결을 시도한 것은 화창하고 구름 한 점 없어 덥기까지 한 봄날의 한가운데였다. 스스로 목에 검을 겨누고 그으려는 것을, 어둑하기만 한 방에 선득한 그 빛을 보고 소린이 놀라 덮치고, 마르고 야윈 몸으로 애써 소린을 밀어낸 왕자가 결국 들고 있던 검으로 소린을 찌른 것까지 단숨에 일어난 일이었다. 스란두일은 무슨 일인지 바로 실감하지 못해 빛만 희끄무레한 눈앞을 애달피 찾았다. 손으로 더듬으니 익숙한 곱슬머리가 먼저 잡히고, 호흡이 어려운 어깨, 찢어진 옷이며 피가 젖어 들어가는 옆구리까지 만져졌다. 어찌할 바를 몰라 한숨처럼 장군, 하고 불렀다. 다음으로 소린, 이라고 불렀다. 소린은 손을 뻗어 왕자를 안심시키고 대답하고 싶었다. 그러나 목에서 겨우 신음 한 토막만 뱉어낼 수 있었다. 스란두일이 그를 안고 소리 질렀다. 


"밖에 누구 없느냐!"


외진 궁의 구석, 밖으로 나갔을 목소리는 대답을 데려오지 못했다. 스란두일은 그제야 사무쳤다. 눈먼 저를 도와줄 이는 이 작은 방의 바깥 어디에도 없다는 사실이 갑작스레, 파도처럼, 슬픔으로 그를 적셨다. 손이 피로 젖는 것을 느끼며 아득해지는 정신을 붙들었다. 심호흡을 했다. 하나, 둘, 셋까지 세고 두려움을 애써 눌러 죽였다. 


"소린, 붕대며 약초가 어디 있는가?"


분명 제 눈을 치료해 줄 때 쓰고 남은 붕대며 이런저런 것이 있을 터였다. 소린이 피 젖은 스란두일의 손목을 붙들었다. 옷자락마저 엉망으로 젖었으나 스란두일이 볼 길은 없었다. 그는 집은 손목을 그대로 틀어 한 방향으로 뻗어 주었다. 


"두 번째 선반에,"


까지 말하고 소린은 신음을 참느라 말을 끊어 버렸다. 스란두일은 일어나 옆에 집히는 물건들을 더듬으며 걸었다. 벽을 따라 걸으면 몇 걸음 되지도 않는 작은 방이건만 끝이 아득했다. 손에 치인 물건들이 앞다투어 소리 내며 떨어지고 몇 개는 그의 발등에 치였다. 결국 넘어졌다. 스란두일은 무릎으로 기기 시작했다. 기어코 벽의 끝까지 기어가 선반을 찾고 열었다. 하나, 둘, 두 번째 칸. 되는대로 집어서 돌아왔다. 맨발에 잡다하게 박힌 것이 많아 발이 쓰렸다. 엉망 된 방을 엉망으로 긴 탓에 얇은 잠옷 안, 아프고 쓰린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으나 참아내고 소린의 앞에 되는대로 가져온 것을 늘어 놓았다. 소린은 스란두일의 손가락을 쥐고 일일이 짚어주며 겨우겨우 짜낸 목소리로 설명했다. 스란두일은 소린의 상체를 벗기고 입으로 약초를 씹고 짓이겨 상처를 더듬어 올려 주었다. 붕대까지 모조리 감고 나자 온 몸에 열이 나듯 화하고 아파왔다. 긴장 탓에 생긴 근육통이었다. 스란두일은 손을 닦을 생각도 않고 그대로 소린의 옆에 웅크리고 앉았다. 보이지 않으니 더러워진 곳도 알 수 없었다. 다만 코 끝에 피 냄새와 진한 약초 내음만 감돌았다. 그는 세운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등이 뻐근했다. 


"내가 뭐라고……."


웅얼거리는 것을 소린이 곁에서 들었으나,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스란두일이 다시 말했다. 내가, 무엇이나 된다고. 며칠만에 들은 왕자의 목소리였다. 갈라지고 늘어지는 저음에 소린은 가슴이 눅눅히 젖었다. 눈을 내려 감았다. 스란두일에게 찔린 옆구리의 통증까지 겹치니 상체를 뜯어내고 싶을 만큼 고통스러웠다. 그런 말 마시라고 질책하고픈 것을 참고, 대신에 힘든 손을 굳이 올려 왕자의 어깨를 짚었다. 야윈 어깨는 얇은 천 하나를 사이를 두고 바로 뼈가 잡혔다. 차갑고 작은 어깨뼈였다. 이렇게 당신이 작았던가, 싶어 소린은 다시 아팠다. 스란두일이 천천히 어깨를 떨며 울기 시작했다. 소린은 모른 척, 쓸지 않고 손바닥만 올린 채 왕자를 위로했다. 왕이 죽은 뒤 왕자가 처음으로 보인 눈물이었다.











스란두일은 어두운 제 눈앞보다 아둔한 몸에 더 화냈다. 눈을 잃은 뒤 가장 애타고 화나는 것은 아무도 없는 방에서 일어나 희미한 빛으로만 아침을 읽어내고, 누군가 이 어둑한 방에 침범하지는 않았는지 두려움에 떠는 일이었다. 그는 눈을 잃으며 검술까지 잃었다. 빛나는 살결을 가진 왕자는 이제 온몸에 멍을 달고 살아야 했고 움직일 때마다 다쳐야 했다. 


아침, 잠에서 깨고 소린을 찾으려면 스란두일은 눅눅한 이불을 걷고 맨발로 방문까지를 걸어야 한다. 복도를 더듬어 옆 방의 차가운 문에 귀를 대면 아침의 서늘함이 볼을 얼린다. 기척이 없으면 그는 또 돌아선다. 온 벽을 도로 더듬어 걷다 보면 궁의 뜰 중에서도 가장 보잘것없는 뜰로 나갈 수 있다. 이슬 젖은 흙을 맨발에 묻히기 전이라도, 복도에서 먼저 소린의 검사위를 듣는다. 눈 먼 스란두일이 듣기에 소린의 검날이 내는 소리는 직설적이고, 또한 뜨거웠다. 


그는 아침의 나긋나긋한 풀내음과 늦봄의 단 꽃내음을 맡으며 복도로 나가기 전, 밝은 귀에 들리는 발자취나 바람 소리로 소린의 움직임을 상상하곤 했다. 그리고 안도했다. 내가 그대 얼굴을 기억해 다행이구나. 푹 젖은 아침에 소린은 스란두일이 찾기에 쉬웠다. 맨발에 촉촉한 흙을 묻히며 다가가면 소린은 스란두일이 가까이 올 때까지 기척을 읽은 태를 내지 않았다. 소린의 검에 걸리적거릴까 싶어 왕자의 맨발이 걸음을 더듬기 시작할 때야 휘두르던 팔을 내렸다. 그리고 한 손으로 스란두일의 팔뚝을 잡았다. 왕자의 몸을 쥐는 손이 공손하고 조심스럽게 미리 망토를 깔아 둔 바위 위로 모시고, 그가 무사히 그 위에 앉으면 소린은 앞에 무릎 한 쪽을 꿇고 제 소매로 스란두일의 발을 닦아 주었다. 인내심을 가지고 흙을 털어내면 스란두일은 안 보이는 눈을 소린의 둥근 어깨 쪽으로 두고 엷게 웃었다. 아래로 늘어진 망토 자락에다 희고 큰 발을 도로 놓아준 뒤 소린은 다시 검을 쥐고, 스란두일은 앉은 자리를 손으로 더듬다 운이 좋으면 나뭇가지나마 하나 주울 수 있었다. 그러면 흙먼지를 끌고 밟는 소린의 가죽장화 소리와 검날이 바람을 베는 소리, 뜰의 키 작은 나무들이 부대끼는 소리를 들으며 이파리를 손끝으로 만져댔다. 그리고, 가끔 노래했다. 왕자의 노랫말은 새며 냇물이며 봄의 냄새를 말했으나 묵직한 저음과 느린 박자 탓에 매우 구슬펐다. 소린은 그 노래 속도에다 발을 묵직하니 맞추기도 했다. 낮게 부르던 노래가 잠깐씩 끊기면 소린은 그 때마다 놀라 곁눈으로 스란두일을 확인했다. 그럴 리 없건만, 소린은 앞 못 보는 왕자가 자꾸 마른 햇빛처럼 여겨져 한눈파는 새 그늘로 사라질까 싶었다. 


수련이 끝나면 소린은 스란두일을 업어서 도로 방까지 데려갔다. 일전에라면 면구스러울 일이지만 이곳은 볕도 잘 들지 않는 궁의 가장 구석이라 보고 혀를 찰 사람도 없었다. 스란두일은 저보다 키 작은 소린에게 순진히 업혀 온통 땀에 젖은 머리며 목덜미에다 코를 묻었다. 등 위에서 느긋하게 흔들리다 보면 소린의 빠른 맥박이 점점 제 속도를 찾아가는 것도 느낄 수 있었다. 그 때만은 제 아둔한 몸이 밉지 않았다.


"소린."

"예."

"꽃이 얼마나 졌는가?"

"아직 많이 만개해 있습니다. 몇몇 나무는 흐드러집니다."

"그러한가. 날이 많이 더워지고 있는데."


소린은 왕자를 고쳐 업었다. 그의 몸은 소린이 느끼기에 잎자락처럼 가벼웠다. 어둑한 왕자궁으로 몇몇 꽃잎이 겁 없이 날려들었다. 그 날 소린은 왕자를 방에 모신 뒤 도로 뜰에 나가 꽃을 한아름 꺾어 돌아왔다. 그 해 봄의 마지막 만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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