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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린스란 중장편/Eid

Eid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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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과 나무 없이 돌이 대부분인 지대는 먹을 것을 구하기가 영 힘들었다. 이 지역이 가진 상처를, 왕손인 둘이 모를 리 없었다. 한때 오르크와 다른 종족들의 격전을 벌이고 수없이 피아의 시체가 널려 몇날 며칠을 태운 뒤, 나무가 듬성듬성 자라고 짐승도 꼬이지 않게 된 곳이었다. 여기서 동쪽으로 얼마 멀지 않은 곳에 이전 인간 왕국이 있었다. 번영하던 돌길과 빛나던 건물들은 암흑에 싸이고 살아남은 인간들은 겨우 추슬러 강의 남쪽으로 건너서 가파른 산 속에 숨어 버렸다. 스란두일을 납치해 간 인간들이 있는 마을은 그들의 잔당이 남은 곳이었다. 전쟁 후 미처 돌아가지 못하고 남은 자들, 부상을 입고 버려졌던 자들의 자손, 그리고 같은 종족에게마저 내버려질 만큼 사악했던 범죄자들. 


소린의 머릿속으로 지도가 그려지고 있었다. 더 북으로 간다면 책에서만 보았던 보랏빛 호수 - 오르크와 연합군이 가장 격전했던 곳도 볼 수 있을 터였다. 그는 쩍쩍 갈라진 바닥과 그늘 없이 달궈져 뜨거운 바위를 내려다보았다. 앞에 스란두일의 발꿈치가 보였다. 로브 없이 걷고 있는 그는 걸음마저도 요정다웠다. 소린은 이 땅에서의 전쟁 이전, 선량한 자들이 터를 빼앗기기 훨씬 전, 에레보르가 세워지기도 더 전을 감감히 떠올려 보았다. 글로만 배운 것이라 그려지지 않고 막연했다. 그 때 이 땅의 종족이라곤 용과 요정 밖에 없었을 터, 그 중에서 스란두일을 낳은 선대도 있으리라. 용과 요정은 오래 친교했으나 용과 난쟁이는 오래 반목했다는 것도 배워서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한때 전쟁까지 일었을 정도로 손깍지가 맞지 않는 종족이었다. 소린은 헛웃음을 흘렸다. 스란두일의 모습은 용보다는 요정에 가까웠다. 그러나 분명 용족의 분위기가 흘렀다. 행여 종족의 반목이 지금까지로 길었더라면, 선조들의 불가침조약이 없었더라면 영영 만나지도 못했을 모습이었으리라 생각 들어서 새삼 생경했다. 


그는 문득 손바닥을 펴 보았다. 아직도 열기가 화하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스란두일에게 묻고 싶었다. 그대가 준 힘이 이게, 맞느냐고. 내가 제대로 받은 것이, 맞느냐고.


숲을 지나오며 열매를 따온 것으로 며칠은 버틸 수 있을 터였으나 물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 돌 사이 흐르는 가느다란 물줄기나마 한참을 걸은 뒤에야 찾아 다행이었다. 바위에 앉은 소린은 제 목을 양껏 축인 다음에 물주머니도 최대한 채웠다. 가죽으로 만든 주머니가 부푸는 동안 스란두일은 옆에 서서 전경을 바라보았다. 먼 계곡부터 시작해 내려온 물길은 아래로 가는 동안 점차 굵어지고 힘이 붙어 물고기들이 헤엄칠 깊이를 만들어낼 것이었다. 단단한 돌을 닳게 하며 만들어낸 물길이 이윽고 제가 가진 모든 힘을 안고 이내 물을 이끌던 땅이 끝나면, 폭포로 떨어질 터였다. 소린은 떠나온 길을 돌아다보았다. 그리고 제 짐에 넣어 둔 열매의 개수도 가늠해 보았다. 척박한 북쪽을 거닐려면 든든해야 했다. 더 나무가 안 보이기 전에 열매 몇 개나마 더 따오겠소, 하고 언질한 소린은 스란두일에게 물 주머니를 내밀었다. 그리고 과일 담을 천 하나만 든 채 그나마 듬성듬성하게 나무가 보이는 쪽으로 걸었다. 


스란두일은 그가 멀어진 뒤에도 가만히 서서 남쪽으로 뻗은 물줄기를 응시했다. 북으로 물을 거슬러 올라간 곳 절벽 위에서 쏟아질 물소리, 그 뒤의 은밀한 동굴에 용족 하나가 살고 있을 터였다. 용의 성에 살지 않고 은둔하는, 고대용의 자손. 스란두일은 별안간, 꿈속에서 제 모습을 담아내던 고대용의 호박색 눈을 떠올리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숨을 몰아쉬었다. 빈 손바닥을 들어 얼굴을 감쌌다. 소린이 자리를 비운 지금에서야, 이제야 공포심이 밀려들어 몸을 무너뜨렸다. 그는 얼굴을 떨구고 어깨를 떨며 소리 내어 울었다. 여태 참아내며 한 번도 티내지 않고 담아두기만 했던 공포심이, 쌓이고 쌓였던 불안감이 눈물과 울음소리로 주체 없이 흘러 나왔다. 태어나 처음 온 낯선 길의 한 지점에서 그는 용의 성을 그리워했다. 두고 온 책과 차가운 대리석과 흰 돌로 된 기둥들, 아름다운 은발의 아버지, 그리고 제 친어미. 그러나 그는 이제 누구를 믿어야 할지 몰랐다. 용의 성은 내 집이 아니었나, 느리게 나는 성체들이 지켜주어 깊게 잠들 수 있는 곳이 아니었나, 그러나 지금은 장담할 수 없었다. 그는 누구에게 칼을 겨누어야 하고 누구에게 도움을 청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간절히 답을 원했으나 어디에 빌어야 할지도 몰랐다. 모든 것이 혼란스러워, 그는 그저 눈물방울을 무릎 위로 떨구면서 고개 저었다. 


한참 울던 스란두일은 퍼뜩 든 하나의 생각에 몸을 떨며 억지로 추슬렀다. 일어나서 소린의 짐을 더듬었다. 엉망이 된 시야에 손까지 떨려 물건들이 소리 내며 흐트러졌다. 믿지 말라 했던가, 그를. 그리고 스란두일은 그의 짐에서 먹빛 날을 가진 검을 하나 찾아낼 수 있었다. 굽이단검. 소실되었다고 알려진 검이, 소린의 짐에 들어 있었다. 손을 놓쳐 떨어뜨린 뒤 한 발자국을 물러났다. 어째서 소린이. 빈 주먹을 쥐고 파도 같이 거세게 밀려드는 생각을 정리하고 있을 때에, 숲에서 기척이 들렸다. 


“스란두일?”


소린은 붉게 붓고 눈물에 젖어 엉망 된 스란두일의 얼굴과, 풀어헤쳐친 제 짐을 번갈아 바라보고 어찌 상황을 판단해야 할지 읽어내려 했다. 스란두일은 허리에 찼던 검을 뽑아들었다.


“온 길로 돌아가시오.”


울음을 채 못 그친 목소리는 반쯤 잠겨 있었다.


“스란두일, 무슨 일인지 말해 주시오.”


소린이 조심히 한 걸음을 좁히자 그는 두 걸음을 물러났다.


“굽이단검을 왜 그대가 갖고 있소?”


더 다가서지 않았다. 대답을 고르느라 혀로 입술을 급히 축였다. 두 손바닥을 펴 보이며 대답했다.


“여행에 필요할지 모른다 하며 내 조부께서 챙겨 주었소.”


울음 탓에 소스라치게 떨리는 손일지언정, 몸에 익은 검을 고쳐 잡는 데에는 큰 무리가 없었다. 스란두일은 한 바퀴를 돌려서 소린의 목에 겨누었다.


“그대들의 탐욕으로 만든 굽이단검을 왜 용족이 금하였는지 알고 계시오?”


발음만은 정확하였으나 목소리의 떨림까지 어찌할 수는 없었다. 소린은 붉어진 그의 눈을 마주한 채 고개를 끄덕이지도, 부정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칼날이 반 걸음 더 다가와 소린이 목울대에 닿았다. 어쩔 수 없이 입 열었다.


“용의 성 바로 아래에서만 재료를 구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알려져’ 있소.”


알려져, 라는 말이 가진 의중에 스란두일은 비소를 보이며 고개 저었다. 아니, 아니야. 속삭이듯 부정했다.


“굽이단검은 용의 비늘을 뚫을 수 있는 유일한 무기이기 때문이오. 그래서 우리의 선조들이, 그대들을,”


붉던 눈에 눈물이 맺혔다. 날 세워 겨눈 검이 여리게 떨리기 시작했다.


“그대도 알고 있었지.”

“스란두일.”


변명은 요원하고 말은 한 단어도 생각나지 않았다. 조부가 챙겨 주는 것을 끝까지 거절했어야 했나, 아니면, 지금 당장이라도 나는 모르는 사실이라며 거짓말했어야 했나, 어떤 말로 제 용을 달래고 이해시켜야 할지 감도 오지 않아, 소린은 그저 입만 다문 채 속으로 안달냈다. 스란두일은 검을 치웠다. 눈을 한 번 감았다가, 떴다. 눈물을 그친 듯한 혼혈의 왕족은 예의 위엄을 되찾고 있었다.


“다시는 나를 따라오지 마시오.”


뒤돌았다. 손목을 휘둘러 검을 허리에 꽂은 뒤 여태 쓴 적 없던 붉은 로브의 모자를 뒤집어 썼다. 하늘이 흐렸다. 비가 한 방울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소린은 마른 침만 삼키고 서 있다가 퍼뜩 따라 나섰다. 서두르느라 가져 온 과일 몇 개가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스란두일, 하며 부르자 앞에서 걷는 걸음은 더 빨라졌다. 빗줄기가 순식간에 굵어졌다. 소린은 미끄러워진 돌을 힘겹게 밟아가며 그를 따라 쫓았다. 마침내 따라잡아, 옷자락을 잡아채고 뒤돌렸다. 스란두일은 온몸을 떨고 있었다. 얼굴빛이 어두웠다.


“나는 누구를 믿어야 하는 거요?”


무표정한 뺨 가득 젖어 있는 슬픔, 바삭바삭 부서질 것 같은 목소리에 소린은 무어라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그저 손을 뻗었다. 그는 스란두일의 젖은 얼굴을 닦아 주고 싶었다. 스란두일은 그가 뻗은 손바닥에서 검은 기운이 연기처럼 솟아오르는 것을 보았다. 공포는 순식간에 밀려와 몸을 지배했다. 검을 뽑아들어, 옆구리를 찔렀다. 날을 빼고 한 걸음을 물러나자 소린이 천천히 몸을 숙였다. 


“……스란두일?”


알 수 없다는 표정, 벌린 입과 커진 동공과, 옆구리를 짚었다가 떼니 검은 연기는 사라지고 피로 흥건히 젖은 소린의 손바닥을 보고서야 스란두일은 머릿속이 조금씩 차가워지는 것을 느꼈다. 빗줄기 너머 소린은 무릎을 꿇고, 제게서 입은 상처를 손으로 감싼 채 버티다가 쓰러지고 있었다. 스란두일은 제 손에 들린 검을 내려다보았다. 검날에 묻은 피가 비에 지워지고 있었다. 


소린.


속삭이듯 이름을 읊었다. 검이 떨어져 바위에 부닥쳤다. 달려가 끌어 안았다. 죽지 마시오, 여기서 죽지 마시오, 오열하며 백금발을 비에 적셨다.


나는 그대를 믿어야만 하오, 부디 일어나 곁을…….











비 오는 경사는 난폭하기 그지없었다. 닿는 발걸음마다 밀려나고 넘어지길 반복해서 스란두일의 무릎은 상처와 진흙으로 엉망이 되었다. 그는 소린을 다시 한 번 고쳐 업고, 앞으로 걸었다. 젖어서 생명체가 닿기를 거부하는 길을, 길이라고 부르기도 힘든 돌 위를 기듯이 인내하며 지나갔다. 작은 난쟁이의 몸은 움직일 때마다 그의 등에 걸쳐져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미끄러져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서 소린을 고쳐 업고 빗길을 내달렸다. 내달리다 보면 다시 다쳤다. 이가 악물렸다. 부디, 죽지 말라고 속으로 되뇌었다. 그가 죽는다면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해서 생각하기조차도 힘들었다. 제 목숨을 노리는 자가 있을지도 모르는 용의 성으로? 다른 길잡이를 택하러? 그도 아니면 성체를 얻길 포기하고 또 다른 어떤 곳으로? 답은 요원하고 머릿속까지 빗물로 들어차서 일렁이고 어지러웠다. 


동굴은 생각보다 멀지 않은 곳에 있었으나, 가는 동안에만 수어 군데를 다친 스란두일은 도착하자마자 주저앉았다. 쓰러진 소린을 끌어안은 채 젖은 돌바닥에 무릎 꿇고, 절벽 위에 위치한 동굴 입구를 향해 용족어로 소리 질렀다.


“나는 요정이자 용인 스란두일입니다. 그대에게 도움을 요청하러 왔습니다.”


비를 뚫고 지른 용족어가 갈라져 절벽 위로 왕왕 울려댔다. 스란두일은 젖은 얼굴을 들고, 숨을 가다듬었다. 가슴 아래 깔려 있는, 형체도 없고 원인도 모를 분노에 밀려나온 목소리는 아까보다 크고, 또렷하고, 당당했다. 


“형제여, 저는 길의 끝을 보고자 합니다.”


동굴에서 누더기를 걸친 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스란두일은 소린을 안은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힘 빠진 무릎을 억지로 세우고 서서 한숨처럼 말을 덧붙였다.


“부디 도와주십시오.”













독일어; Eid [ait]  
[남성] 선서;(신 또는 성스러운 것에 대한) 맹세, 서약, 서언(誓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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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린스란 중장편/순흔

순흔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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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왕자는 숲을 유독 좋아했다. 파릇파릇하게 피는 풀 비린내와 꽃향을 맡으며 숲의 아무 바위에서나 드러누워 낮잠을 자기도 했다. 그는 숲의 소리를 들을 줄 알았다. 제 손가락보다 작은 것들이 움직이는 소리는, 오직 생生만을 좇느라 순하고 솔직했다. 흙이나 나무에 손을 대고 서 있으면 바람마저도 어린 그를 감싸는 듯이 스쳤다. 왕은 왕자를 위해 숲 근처에다 작은 오두막을 지어 봄 내내 아이가 그곳에 머물 수 있게 했다. 왕자가 머물던 숲은 작고, 봄이 길었으며, 여름이 되어도 사나워지는 법이 없었다. 그곳에서 왕자는 홀로 검술을 익히고, 말을 타고, 어리지 않은 동물들을 쫓으며 봄을 보냈다.


숲에서 처음 장군을 만났을 때, 왕자는 성년을 갓 넘긴 나이였고 장군은 서른을 바라보고 있었으나 비슷한 계급의 무관들 중에서 가장 어린 나이였다. 왕자는 그에게 활을 겨누고, 그는 왕자에게 검을 겨누었다. 그러나 한눈에 왕족의 모습을 알아본 장군이 겨누던 칼을 먼저 치우고 그 자리에서 무릎 꿇었다.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회색 눈을 동그마니 뜬 채 젊은 장군의 정수리를 보던 왕자는 날 세워 겨누던 활을 내리고, 겁 없는 걸음으로 성큼성큼 다가섰다. 고개 숙인 장군의 시야에까지 보일 정도로 두 발이 가까이 왔다. 왕자의 장화에는 이미 흙이며 풀물이 얼룩덜룩하게 묻어 엉망이었다. 무릎까지 오는 겉옷 자락도 마찬가지였다. 넝마나 다름 없는 게, 한눈에 보아도 평민 차림이었다. 얼굴을 먼 발치에서나마 본 적이 없었다면 장군도 알아보지 못했을 터였다.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왕자는 나이치고 큰 골격을 갖고 있어 한눈에 보아도 건강하고, 기분 나쁘지 않은 위압감으로 단단했다.


"내가 누군지 아는가?"


턱을 치켜든 채 물었다. 어린 왕자의 목소리는 그 말투 때문에라도 묵직하게 무게가 있었다.


"제 나라의 왕자전하를 어떻게 못 알아보겠습니까."

"그래?"


그때까지만 해도 장군은, 왕자가 제게 칼 겨눈 죄를 묻지 않을까 두려워하고 있었다. 


"난 또, 아버지가 보낸 사람인 줄 알았지."


왕자는 장군의 매끈한 이마를 덤덤히 내려다 보다가, 문득 웃었다. 악의 없이 환한 미소에 장군은 당황해서 마른 침을 삼켰다. 백금발 뒤로 숲의 환한 햇빛이 싱그러웠다. 어디선가 단 꽃내음이 퍼졌다. 첫 만남에서 꽃내음을 맡은 것은 소린만이 아니어서, 스란두일은 일부러 소린을 숲으로 부르기도 했다. 소린은 기꺼이 숲을 찾아 향을 좇았다. 봄마다 찾아간 왕자의 숲은 그 주인만큼이나 어리고 보드라왔다. 그래서 그는 스란두일이 언제까지고 크지 않을 것만 같기도 했다.











사내가 왕자궁을 떠나고 나서도 온몸에 남은 통증은 도통 사라질 줄을 몰랐다. 스란두일은 새빨갛게 상처와 수치심이 섞여 썩어가는 속을 꾸역꾸역 눌러 놓고는, 누구도 보지 않건만 꼿꼿이 앉아 밥을 먹고, 비파를 켜고, 매일 같은 시간에 후원에 나가 소린이 가르쳐 준 동작을 되새겨 훈련했다. 검을 휘두르고 또 휘두르다 보면 손의 같은 곳에 물집이 잡혔으나, 소린에게서 배운 장님의 검술은 여러 번 반복하기 모자랄 정도로 그 종류가 지극히 적었다. 그렇게 오랫동안 훈련한 것 같은데, 매일매일 지쳐 숨 몰아쉴 때까지 독하게 몰아 붙이던 소린이었는데, 정작 그가 없어지고 나니 같은 동작만 계속 반복해야 할 만큼 손에 남은 게 없었다. 아쉽고 스스로 원망스러웠다. 그는 결국 어릴 때 혼자 숲에서 휘두르던 검술까지 끄집어냈다. 지쳐서 온몸이 아릴 때까지 낡은 궁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감은 눈에 희끗하고 불긋하게 보이던 빛이 사라지고 이 어두운 후원 특유의 어둠이 들어차고 나서야 이마를 손등으로 닦았다. 이렇게 온몸이 노곤하게 녹을 정도로 검을 쥐던 날이면, 반드시 수풀 사이를 얼얼한 손으로 더듬어 향 좋은 꽃을 몇 송이 꺾어다 지팡이 쥔 손에 꼭 끼워 왔다. 혼자 목욕하고 머리까지 말리면 밤이 깊어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제야 꺾어 온 꽃을 더듬어 보면 열에 여덟은 축축한 땀에 젖어 뭉개져 있었다. 아무래도 상관 없었다. 그러나, 소린이 매번 꺾어다 주던 꽃을 떠올리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다. 


스란두일은 아픈 몸을 누이고 잠드는 일에 익숙해졌다. 이후로 손님이 몇 번이나 더 찾아왔다. 역시 반역자가 보낸 사내들이었다. 매번 다른 자들이었고, 목적은 같았다. 살이 찢겨도 스란두일은 결코 소리 한 번 내지 않았다. 그들이 떠나고 나서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그들이 몸을 탐하고 간 후에는 예민한 코끝에 역한 냄새가 남아서 도통 지워지지 않았다. 


우습게도, 스란두일을 보필하던 시종들은 여전히 같은 시간에 같은 식사를 가져왔고, 아무 것도 묻지 않고 엉망으로 뒤집힌 방을 치워 주었다. 눈을 감고 침대에 들어가 있으면 등 뒤에서 사부작, 사부작, 찢어져 바닥에 떨어진 옷을 줍고 부서진 집기들을 쓸어담는 소리가 들렸다. 죽은 것이나 다름 없는 왕자의 심기는 상관 않는다는 양 느릿느릿한 동작으로 방을 치우고, 겁탈의 흔적을 모아 들고 나가면 스란두일은 그제야 참던 숨을 크게 몰아 쉬었다.


어느 날 본궁에서 사람이 찾아왔다. 왕자를 궁으로 모시라는 명이라고 했다. 스란두일은 말을 듣자마자 제 앞의 남자가 띠고 있을 표정을 상상했다. 가느다란 웃음을 달고, 저를 '왕자'라고 부르며 허리를 조아리고 있지 않을까. 침대에 앉은 채 이부자락을 말아 쥐었다. 수호하는 자들이 함께 하는 응접실도 없고, 그렇다고 커다랗고 깨끗한 내전이 있는 것도 아닌 이 단칸방의 왕자궁은 간단하게 손을 맞기에도 무색할 정도로 어설펐다.


"이곳이 내 궁인데 어디로 오란 말씀이시냐?"


손의 떨림까지는 남자가 보지 못하길 바라며, 진중하고 근엄한 목소리로 물었다. 


"본궁으로 입궁하시라는 명입니다."


허. 스란두일은 결국 헛웃음 지었다. 본궁, 이 어디란 말이더냐. 교활한 생각이 한 사람을 통해 건너온 말인데도 일부러 보란듯이 빤하고 적나라해서 가슴 아래 구역질이 차올랐다. 이제 지키는 자가 없으니 아예 곁에 두고 유린하겠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싶었다. 


왕자의 새 거처는 더 이상 곰팡이 냄새가 나지 않았고, 쥐인지 벌레인지 모를 것들이 기어 다니지도 않았다. 그러나 다시 들어간 궁은 그에게 몹시 낯설었다. 반역자는 오만해서 선왕이 쓰던 궁에 그대로 들어가 살았다. 바뀐 것은 사람들 뿐이었다. 벽이나 건물, 모든 것이 스란두일 어릴 적부터 선왕이 쓰던 그대로였으나, 정작 돌아온 왕자는 돌아온 궁의 모양새가 어떤지 알 수 없었다. 본궁으로 가는 동안 양쪽 팔을 누군가 붙들어 주고 있었다. 그는 제 모양새가 꼭 끌려가는 죄인과 같지 않을까 싶었다. 소린이 깎아 준 지팡이를 단단히 부여잡았다. 몰래 어금니를 갈았다. 누구도 믿지 말라 했던 그의 말이 사무쳤다. 











국경에서의 사냥은 수도와 달리 짧고 거칠었다. 바깥에 잠깐 나갔다 오는 것만으로도 뺨이 얼고 손이 부르트기 일쑤였으므로, 단지 여흥을 위한 사냥 또한 길 필요가 없었다. 점심을 먹고 나가서 해지기 전에 돌아오는 동안, 시찰하는 군사들은 숲을 돌아본다는 명목으로 말을 타고 짐승을 찾아 헤맸다. 침엽수림 사이에 이따금 철없이 뛰어나온 작은 짐승들이 희생되었다. 


"저곳은, 아무도 시찰하지 않는가?"


소린이 멀리 보이는 동쪽 절벽을 가리키며 드왈린에게 물었다. 절벽은 풀이 드물고 작은 틈마다 눈이 켜켜이 쌓여서 꼭 빙벽 같아 보였다. 


"가파르고 험해서 가려는 자가 없기에 시찰한 지도 오래됐지요."


소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소린이 오기 이전까지 초소를 맡고 있던 드왈린의 성격이라면, 굳이 쓸모없는 길에다 전우를 내보내진 않았을 터였다. 바람이 곱슬머리를 날려 입술을 간질였다. 소린은 손날로 이마에 차양을 만들고, 한 걸음을 더 동쪽으로 내디딘 채 얼룩덜룩한 절벽을 바라보았다. 드왈린은 몰라도, 그는 아니었다.


"앞으로 정찰대를 나눈다. 동쪽으로 가는 자들은 사냥감을 독차지하게 해주겠다고 일러라."


드왈린은 잠시간 망설였고, 그의 굳은 얼굴 뒤에 숨은 의중이 어떤 것인지 읽을 수 없었으나,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조정의 회의는 보통 이른 아침에 치르는 게 일반적이었다. 해가 뜨고 회의장 창문을 모두 열어 놓은 다음, 맑은 공기 속에서 깨끗한 정신에 토론하는 것이었다. 스란두일의 부친은 게을러서 등청하지 못하는 관료들에게 발언권을 주지 않기 위해 시간을 맞추어 회의를 열고, 이야기가 시작되면 회의장 문을 잠가 버렸다. 반역자는 선왕이 만들어 놓은 수많은 제도를 그대로 쓰고 있었다. 회의도 마찬가지였다. 수치심도 느끼지 못하는 자라고, 소린이 씹어 뱉듯 언급하는 것을 스란두일이 들은 적 있었다. 그러나 그뿐만이 아니었다.


스란두일은 벌써 같은 복도를 몇 번이나 더듬어 헤매고 있었다. 어릴 적 그렇게 많이 다닌 복도였는데도, 눈을 잃은 지금에 처음 온 궁은 문 손잡이 하나마저도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지팡이로 더듬고 손바닥이 얼얼해질 때까지 벽을 쓸며 한참 걸었으나 회의장을 도저히 찾을 수 없었다. 궁은 그가 자란 집이었다. 분명 아는 곳일 텐데, 아주 어릴 적부터 뛰어 다니고 숨기도 하던 곳인데, 어째서 낯설고 두려운지, 혼란스러움보다 스스로 수치심이 느껴져 안달 났다. 기척이 있는가 싶어 다가서면 도망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돌아온 집에서 길을 찾지 못해 천치가 된 기분보다 그것이 더 수치스러웠다. 결국 어느 켠에서 벽을 짚은 채 멈춰섰다. 회의 시간은 이미 지났을 터였다. 모멸감을 참느라 손바닥부터 이마까지, 그리고 온몸이 젖었다. 왕자께서도 이제 회의에 참석하셔야지 않겠습니까. 반역자는 스란두일을 기껏 불러다 그렇게 말했었다. 마치 죄인을 심문하는 것처럼 양쪽 팔을 제 부하들에게 계속 붙들게 하고, 제가 낳은 아이가 아님에도 왕자라 칭하며. 웃음기라곤 하나 찾아볼 수 없던 반역자의 목소리가 빈 복도에 공명하는 것 같았다. 스란두일의 입술이 파르라니 이빨 사이로 말려들었다. 분노를 갈무리하느라 바들바들 떨기를 잠깐, 그리고 다음 차례에 그는 들숨을 폐부 가득 들이켰다. 당장이라도 저 기둥 뒤에 숨은 자들에게 칼을 뽑아 들고 목이 베이기 전에 회의장으로 가는 길을 안내하라 윽박지르고 싶었다. 그러나 스란두일은, 가슴을 부풀렸던 공기를 천천히 내뱉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를 도울 자가 없느냐?"


정녕으로, 없느냐. 복도는 고요했다. 스란두일은 아무도 대답 않을 것을 알면서도, 숨죽인 기척들 사이에 한참을 서 있었다. 회의가 거의 다 끝났으리라 짐작되는 시간에야 누군가 와서 그를 끌고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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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린스란 중장편/Eid

Eid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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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서진 파란색 대문은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열자마자 여럿의 살기가 달려들었다. 소린은 인간이 한 말이 거짓이 아님에 오히려 안도했다. 몇을 정신없이 쓰러뜨렸다. 잔악성이 손 끝으로 나와 검을 휘두르고 보이는 족족 숨을 끊어 놓았다. 그러나 어지럽고 아득한 와중에 자꾸 둔해지는 움직임은 몇 번이고 죽을 고비를 가져왔다. 싸우는 내내 그는 묘한 향을 맡을 수 있었다. 기분 나쁘게 가라앉는 것이 안개처럼 끈적했고, 무언가를 태운 연기처럼 독하기도 했다. 소린은 스란두일의 모습을 찾으려 핏발 선 눈을 굴렸다. 한동안 쓰지 않은 집인지 곳곳에 낡은 흔적이 티났다. 실내는 몹시 어두웠다. 앞에 보이는 방문을 부수고 들어갔다. 기묘한 향은 이 방에서부터 나온 듯했다. 한층 독해진 기운에 그는 숨을 크게 한 번 들이마시고 코를 소매로 가렸다. 맨 바닥에 스란두일이 누워 있었다. 차마 손으로는 더듬지 못하고 눈으로만 몸을 확인했다. 육안으로는 묶이거나 다친 곳이 보이지 않았다. 


“눈 떠보시오.”


명령도, 절규도 아닌 목소리는 스란두일에게 전혀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폐가에 가득 찬 향이 그 원인임은 깊이 생각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용케 살아남았던 인간 하나가 소린을 뒤에서 덮쳤다. 기척을 읽고 돌아섰기에 망정이지 등에 칼이 꽂힐 뻔했다. 반격하고 칼을 떨구게 했다. 몸 안에 가득 차 있던 피로가 분노로 바뀌는 데 얼마 걸리지 않았다. 바닥에 엎어져 있는 인간을 끌어다 멱살 잡았다. 


“누가 보냈는가?”


그것이 소린의 결론이었다. 성년식을 하러 떠난 용족을 누군가 탐냈고 인간에게 사주한 것이다. 탐욕이 난쟁이보다 심한 그들이라면 대가에 따라 목숨 걸고 움직였을 것이다. 인간의 얼굴은 공포로 엉망이 되었다. 죽음을 앞두어서가 아니라, 온통 붉게 핏발 선 채 형형하게 노려보는 소린의 눈빛 때문이었다. 눈이라도 뽑아 버릴 생각으로 소린이 인간의 얼굴 위에 큰 손바닥을 겹친 순간, 손바닥 아래서 약한 빛이 흘러나오더니 강한 열기가 돌았다. 인간의 얼굴이 순식간에 검게 변했다. 마치 불에 탄 것 같았다. 찢어지는 비명 끝에 황급히 손 떼고서야 소린은 상황을 눈으로 볼 수 있었다. 피로가 깨고 현기증이 몰렸다. 제 손바닥과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검게 탄 인간의 얼굴을 번갈아보아도 무슨 일인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뒷걸음질 치다가 스란두일의 몸에 걸려 넘어지고서야 그는 본분을 기억해 냈다. 여태 깨지 못한 스란두일을 들쳐 업으려 했으나, 선뜻 손대지 못하고 한참 망설였다. 결국 어깨에 들메고 집을 나섰다. 


부서진 대문을 나서고, 골목으로 들어서고, 어둠으로, 더 어둠으로 몸을 숨기려 걸어가는 동안 걸음은 한 발마다 무게를 더한 것처럼 묵직해졌다. 스란두일은 한참 지나서야 눈 떴다. 그리고 별안간 소리 지르며 발버둥 쳤다. 소린은 갑작스러운 소란을 어찌 하지 못하고 그의 다리만 세게 붙들었다. 요지부동이었다. 억지로 차대는 그를 거듭 고쳐 붙들었다. 내달리는 내내 그의 허벅지에 소린의 손톱으로 생채기가 생겼다. 소린의 어깨에는 스란두일이 손으로 낸 상처가 여럿 겹쳤다. 그는 못 볼 것을 보기라도 한 것처럼, 공포에 질린 목소리로 몇 번이고 내려달라고 소리 질렀다.











마을을 벗어나고 얼마나 달렸는지 짐작도 하기 힘들 때에야 소린은 스란두일을 내려놓았다. 어딘지 알 수 없었으나 길은 마을보다 황망했다. 소린은 허망함을 느끼고 스란두일의 옆에 주저앉았다. 


“모두 죽였단 말입니까?”


스란두일의 말에 소린은 어처구니가 없어 헛웃음만 지었다.


“지금 살려준 자에게 그걸 말이라고 하시는가?”

“우리를 쫓는 연유라도 알아내야 할 것이 아닙니까.”


단호한 얼굴에다 대고, 나 또한 연유를 물으려 했으나 내 손바닥 아래 새까맣게 타 버렸는데, 그대는 영문을 아느냐고, 이것이 그대가 말한 힘이고 각성이냐고 쏘아 붙이는 것을 참았다. 스란두일은 몇 번 기침을 했다. 숨이 벅찼다. 그제야 허벅지께에 남은 소린의 손톱자국이 아파왔다. 그는 제 꿈을 기억하려 애썼다. 안개 속에서 노란 불처럼 제 온몸을 담아내던 고대용의 눈동자를 떠올렸다. 소리보다 진동으로 와닿던 용족어가 아직 생생했다. 소린을 믿지 말라던 말도 선연했다. 그는 소린의 옆모습을 슬쩍이 보았다. 살기가 여태 가라앉지 않고 있었다. 어둠 속에도 분간 갈 정도로 더러워져 있는 그의 몸이 숨 몰아쉬는 것을 보고, 스란두일은 조금 몸을 움츠렸다. 한참 말없이 숨만 돌리던 소린이 먼저 몸을 일으켰다. 손을 내밀었다. 스란두일은 그의 손을 맞잡지 않았다. 알 수 없는 공포가 그를 부자유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망연히 빈 손을 거둔 소린이 먼저 걸음했다.


“잘 곳을 찾아보도록 하지.”


스란두일은 몇 걸음 떨어져서 그를 따라 걸었다. 소린은 금방이라도 고꾸라져 땅에 아무렇게나 눕고 싶은 것을 참고 억지로 걷느라 몹시 휘청댔다. 


“왕손께서도, 우리가 평범한 길을 가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눈치 챘을 거라 생각합니다.”


한참 망설이다 뱉은 듯한 스란두일의 목소리가 뒤에서 아득했다. 몇 가지 대답이 떠올랐으나 소린은 목소리를 뱉을 기력이 없었다. 











눈을 감는다. 한동안을 인내하고 기다리면 성 바깥으로 다니는 성체 용의 거대한 날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멀리서부터 차례로, 후득, 후득, 휴지를 길게 두며 점차 커지는 바람 소리와 거대한 근육들이 움직여 내는 소리, 가구들을 하나하나 덮으며 짙어졌다가 서서히 옅여지며 떠나가는 그늘은 스란두일의 마음을 편하게 했다. 용의 날개 소리가 제 청각에서 온전히 멀어지고 나면 자리에서 일어나 촛불을 끈다. 매캐한 냄새가 잠깐 남는다. 서랍에서 말린 진깨비꽃잎을 꺼내어 머리맡에 둔다. 과하면 오래도록 정신을 잃을 터이니 아주 조금만 덜어내고 남은 꽃잎은 도로 넣어 둔다. 잠을 쉽게 이루지 못하는 날 스란두일은 이것으로 버텨냈다. 어미의 도움 없이 혼자 베개를 챙기고 이불을 덮으면 어린 혼혈의 피는 밤 기운에 식었다가 자는 내내 아주 느리게 더워졌다. 


그는 이따금 밖으로 나갈 때에 말을 타고 달리다 잠시금 다른 종족들과 마주치곤 하였다. 어린 스란두일은 속도를 줄이며 웃어 주었다. 로브의 모자 아래, 그늘에 싸인 미소를 보고 몇몇은 넋을 잃은듯 따라 붙기도 하였다. 어느 날, 홀린듯이 다가와 망연하게 제 얼굴만 바라보는 자에게 어린 스란두일은 로브의 모자를 벗고 손을 뻗어 옷자락을 잡기도 하였다. 그 날, 함께 달리던 어미는 스란두일을 뒤로 낚아채며 심하게 책망했다. 


“저 자는 이제 네 독으로 인해 곧 눈이 멀고 피를 토하며 죽을 것이다. 네가 무슨 짓을 한 건지 알겠느냐?”


어린 스란두일은 그 날 이후로 다른 종족과 눈 마주치지 않았다. 











깨어날 때부터 소린은 온몸이 쑤시듯 아파오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두린 직계 혈통이 가진 몸은 며칠의 혹사로 쉽게 무너질 것이 아니었다. 그는 근육을 부지런히 움직여 풀어내고 먼 곳을 살폈다. 둘은 나무가 듬성듬성한 숲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아무것도 염두에 둘 새 없이 급히 뛰어 온 뒤, 쫓는 흔적이 없는 것만 확인하고는 대충 자리를 펴고 누웠더랬다. 동쪽으로는 넘어온 산이 있었다. 햇볕 아래 보니 검은 색이 위로 갈수록 짙어지는 것이 확연하게 보였다. 거대한 산세가 하늘을 이길 듯 솟아 있었으나 그 웅장함이 아니라 음산함 때문에 소린은 위화감을 느꼈다. 동남쪽으로는 그가 스란두일을 업고 달려 온 들판이 이어져 있었다. 풀이 듬성듬성하여 회갈색 땅이 얼룩진 것마냥 드러나 있었다. 나무 사이에 가려진 시야가 자유롭다면 도망 나온 마을로 가는 길을 볼 수 있을 터였다. 그는 용의 섬이 어느 방향인지 알 수 없었으니 스란두일이 깨기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모로 누운 채 하반신에 햇빛을 고스란히 받고 있는 그를 내려다보고, 소린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입 속으로 몇 가지 물음이 맴돌았다. 묻지 못할 것이 많아 갑갑해져왔다. 하얀 이마 위로 닿은 그늘은 스란두일을 창백하게 보이게 했다. 소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빈 손을 내려다보았다. 망연하게 생각을 굴리며 옆에 주저앉았다.


스란두일이 일어난 것은 그 뒤로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잠자리 갈무리를 하고 그늘에서 벗어났을 때, 그제야 소린은 스란두일의 소매 근처며 목 언저리 옷깃 아래에 난 자잘한 상처들을 볼 수 있었다. 어떤 것은 부딪친 것처럼 멍이 들어 있었고 어떤 것은 손톱 자국처럼 붉게 부어 있었다. 틀어 잡힌 듯한 손자욱도 보였다. 몸을 집요하게 훑는 시선이 불편해 스란두일은 옷깃을 여미며 조금 앞서 걸었다. 소린은 따라 붙으며 짐을 고쳐 메고 해가 오르는 위치를 가늠했다. 스란두일은 북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소린은 이 근방의 지리를 자세하게는 몰랐으나, 적어도 이 북쪽으로 가면 예전 오르크와 연합군이 전쟁한 후 폐허가 된 땅들이 나온다는 정도는 알고 있었다.


끝자락이 땅에 끌리는 스란두일의 붉은 색 겉로브는 이제 조금씩 닳고 있었다. 소린은 그 로브를 제 손으로 빨아주던 것을 기억했다. 흙먼지 색을 입고 자잘하게 닳은 로브 자락에 시선을 고정한 채 물었다.


“북으로 가면 폐허만 나오지 않소?”

“그렇습니다.”

“섬으로 가는 길이 아니지 않소? 내 듣기로 바다는 더 서쪽으로 가야 한다고 알고 있소만.”

“예, 섬으로 가는 길은 아닙니다.” 


소린은 스란두일의 대답을 선뜻 이해 못하고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그러면 왜 이리로 가는 것이오?”


발자국 소리가 끊겼기에 스란두일 또한 멈춰 섰으나, 소린을 돌아보지는 않았다. 


“내 여행길이니 그저 따라와 주시지요.”


단호한 어투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 결국 참지 못하고 걸음을 도로 좁히고 다가가 손목을 낚아챘다. 스란두일은 통증에 신음이라도 할 듯이 미간을 찌푸렸으나 소린은 되려 힘을 줘 끌어당겨서 큰 키의 그를 제 쪽으로 고개 숙이게 만들었다. 시선이 가까워졌다. 


“닥치고 따라오라는 말씀인가?”

“소린.”


손바닥이 스란두일의 상처를 짓누르는 줄 알고도 소린은 더 끌어당겼다. 이제 숨이 닿을 정도로 바짝 끌려 온 얼굴에 가까이 대고 읊듯이 말했다.


“내 아비는 오르크에게 사지가 찢겨 죽었다. 응당한 이유 없이 내 발로 죽을 게 뻔한 곳에 가지는 않을 것이니 지금 대답해라.”

“……”


그가 보는 스란두일의 얼굴은 역광으로 어두웠다. 바람도 없는 고요한 숲이었다. 동물 소리 하나도 쉽게 들리지 않았다.


“진깨비꽃이었습니다.”


말을 던져 놓고, 저를 잡은 팔을 풀어낸 뒤 스란두일이 발끝을 돌렸다. 소린에게서 뒤돌아 향한 방향은 다시 북쪽이었다. 


“당신도 맡았을 겁니다. 그 집에 퍼져 있던 향이 진깨비꽃 향입니다. 용들이 잠을 이루지 못할 때에 쓰는 진정제이나…… 과하면 정신을 잃는 식물이지요. 행여 들어보신 적 있으십니까?”


반쯤 고개를 돌려 묻기에 소린은 망연히 있다가 고개 저었다.


“당연히 들어봤을 리 없을 테지요. 용들끼리만 쓰는 비기이니.”


소린은 생각을 애써 정리했다. 가다듬은 생각의 지점을 하나로 모은 뒤 입으로 뱉었다.


“같은 용이 그대를 해하려 한다는 것이오? 그들은 인간이 아니었소?”


스란두일은 대답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소린이 황급히 따라붙었다.


“나는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아무 것도 모르겠습니다. 입 밖으로 낼 수 있는 것도 없고 추측할 수 있는 것도 없습니다. 성년식을 치르지 못할 수도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방법은 모두 찾으려 하는 것입니다.”

“그게 무슨,”

“그러니 소린, 당신이 원하신다면 이제 돌아가셔도 좋습니다.”


걸음을 따라잡고 옆으로 바라본 스란두일의 표정에서 소린은 무엇이라도 읽고 싶었다. 그러나 용의 감정은 얼굴 바깥으로 쉽사리 보이지 않았다. 


“이 여행은 생각보다 위험합니다. 그대도 아시다시피 그냥 성년식 길은 아니지요. 나는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위험하다는 것만 알 뿐, 누가 나를 노리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니 돌아가란 말이오? 이제 와서?”


스란두일은 더 말을 섞지 않겠다는 듯 속눈썹만 내려 깔았다. 소린은 저도 모르게 안달 냈다.


“왕손으로서 이 길에 오르는 게 어떤 의미인지 스란두일, 그대는 알 거라 생각하오. 나는 그대를 지켜 섬에 다다라 힘을 나눠 받기 전까지는 돌아갈 수 없소.”


그러나 스란두일은 여전히 침묵했다. 소린도 포기하고 땅만 내려다보았다. 북쪽으로 걸을수록 점점 나무들이 줄어들고 바닥의 돌이 많아졌다. 더 걸으면 끔찍한 전쟁 이후 아무도 살지 않는 땅이 펼쳐질 터였다. 오래 걸어 태양 빛에 정수리가 훈훈해질 때쯤 소린이 침묵을 깼다.


“스란두일, 나는 그대의 길잡이가 아니오?”

“……”

“내가 그대를 지키려 한다는 것만 알아주었으면 하오.”


스란두일은 대답하는 대신, 예의 고고한 시선만 정방향으로 고정해 있을 뿐이었다. 소린은 더 말을 잇고 싶었으나 다시 앞을 향했다. 바람이 선선했다. 빈주먹을 쥐었다.











독일어; Eid [ait]  
[남성] 선서;(신 또는 성스러운 것에 대한) 맹세, 서약, 서언(誓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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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린스란 중장편/순흔

순흔 5



소린스란 순흔 5편입니다. 너무 오랜만인데 ㅠㅠ 후 이전 편들은 좋았는데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역시 덕심 넘칠 때 좌르르 써야 하는데 현실이 그렇게 안 따라주니............




순흔 1편 바로가기

순흔 2편 바로가기

순흔 3편 바로가기

순흔 4편 바로가기










아침의 왕자궁은 새벽 기운이 가시지 않아 여전히 먹먹한 어둠을 안고 있었다. 스란두일은 없는 시야에서도 빛은 그나마 분간할 수 있었고, 밤에서 새벽, 새벽에서 아침으로 넘어가는 시간의 그 미묘하게 달라지는 어둠을 읽어낼 수 있었다. 이리 빛으로 시간을 분간하기까지도 한참이 걸렸다. 그 전에는 소린이 방문을 두들기고 세숫물을 가져다주는 것으로 시간을 짐작할 따름이었다. 눈이 보이지 않아 불편한 일 중 하나였다. 이제는 제법 눈 없는 움직임이 몸에 익어서 혼자 밥을 먹고 옷을 갈아입고 구석에 놓아둔 비파를 꼼꼼히 닦아 켜고, 또 벽을 더듬어 후원에 나가 소린이 가르쳐 준 검술을 익히는 것까지는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은 달랐다. 한 가지 일을 버릇처럼 똑같이 끝내고서 밥을 가져오는 시종들로 그나마 시간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세숫물을 물려 놓고 도로 침대에 누웠다. 왕자궁에 붙은 시종은 하루에 밥을 줄 때 세 번 오고 스란두일을 전혀 보살피지 않았다. 그는 소린이 떠나기 전 했던 말을 떠올렸다. 이 궁에서 누구도 믿지 마십시오, 왕자께서는 불신이 곧 생존임을 익히 아실 거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직접 벼린 것이라며 검을 그에게 쥐어 주었다. 늘 곁에 두십시오. 그것이 마지막 말이었다. 스란두일은 애써 왕자궁 바깥까지 나가 그를 배웅했다. 소린이 탄 말이 느릿한 흙먼지 냄새를 내며 멀어지는 동안 한참이고 지팡이를 쥔 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나마 있던 왕자궁의 온기가 순식간에 식은 것 같았다.


그가 직접 깎았다며 쥐어 준 검은 손잡이에 기묘한 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한참 쓸어보고서야 그 문양이 나뭇잎임을 깨달았다. 그의 손재주며 마음 씀씀이에 스란두일은 고요히 웃을 수밖에 없었다. 검날의 색도 한번 상상해 보았다. 필시 소린의 눈을 닮아 형형하면서도 묵직한 빛을 띠고 있을 터였다. 


스란두일은 이부자락을 턱까지 끌어올려 덮곤 지어 놓은 노래 가사를 머릿속으로 다시 외웠다. 적을 수 없으니 외우는 외에는 도리가 없었다. 그는 책을 읽고 싶었고, 작은 밥상을 놓고 소린과 함께 아침을 들고 싶었다. 소린이 떠난 바로 다음 날 아침, 여느 때와 달리 도로 침대에 드러누워 버린 스란두일은 이 침대의 사각 바깥으로 나가길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는 제게 깊게 밴 소린의 버릇과 손길을 감당해야 한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았다. 소린이 존재함으로써 이곳 시간이 흘러간다는 사실도, 뒤늦게야 깨달았다.











밤이 깊은 북방에 사나운 바람이 길게 늘어져 불고 있었다. 초소에 막 도착한 소린에게 무관 드왈린은 예를 갖춰 인사한 뒤 뜨끈한 술부터 내밀었다. 그와는 장군직에 오르기 전부터 안면이 있었다. 그 또한 현 왕의 반란에 탐탁찮은 모습을 보였다가 소린처럼 이 추운 곳으로 쫓겨나 있는 처지였다.


"이곳은 밤 내내 바람이 울어대기도 합니다. 처음 왔을 땐 시끄러워서 도통 잠도 못 잤지요."


바람이 운다라, 소린은 그의 표현을 곱씹으며 술을 한 모금 마셨다. 불 위에서 여태 데워 둔 것인지 따끈한 기운이 온몸에 금세 퍼졌다. 언 몸이 사르르 풀렸다.


초소는 보잘것 없이 초라했다. 희미한 불에 비춰 보인 벽은 모두 나무로 만들어져 있어서 바람을 온전히 막지 못해 쉭, 쉭 하는 소리가 안까지 들렸다. 그마저도 군데군데 부서졌다가 다시 대강 수리한 흔적이 흔했다. 그도 그럴 것이 선왕 때부터 거의 버려두다시피 한 북쪽이었다. 이보다 더 북녘에는 추운 곳에 사는 짐승만 간간이 출몰할 뿐, 사람을 발견한 적도 몇 백 년 간 없었기에 침략 위험도 없었다. 북은 빽빽한 침엽수림으로 채워져 있었고, 나라는 아주 오래 전부터 그곳을 북 국경으로 하고 있었다. 소린은 이 춥고 황량한 곳에 자신이 발령 난 이유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수족도 되지 못할 팔다리라면 잘라내어 버리든가 다른 곳에 쓰는 수밖에는 없었다. 왕의 선택은 교만했다. 그는 소린의 명망을 두려워했고, 스란두일을 조롱하기 원했다. 그 결과가 볕 안 드는 왕자궁과 이 의미 없는 북쪽 발령이었다. 


지키는 의미가 없는 곳인지라 군사들의 사기 또한 좋을 리 없었다. 새 장군이 왔는데도 다들 어영부영하고 딱히 반가워하는 기색이 없었고 총기도 없었다. 드왈린은 날 밝으면 주변을 둘러보라 했으나 소린은 굳이 눈보라 치는 바깥으로 나가 거대한 침엽수림을 멀리서 확인했다. 그리고 돌아섰다. 투덜대는 드왈린의 어깨 너머, 앞으로 그가 지휘해야 할 초소는 너무도 작고 초라했다. 수도에서 입고 온 옷은 추위에 걸맞지 않아 깃을 애써 여몄으나 칼날 같은 바람 앞에선 부질없었다. 소린은 이를 악물었다. 추위 탓이 아니었다. 구겨진 자존심에서 화가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었다.











아침에 본 침엽수림은 밤에 보았을 때보다 훨씬 음침하고 광대해 보였다. 소린은 은근한 위압감까지 느끼며 말고삐를 고쳐 쥐었다. 


"가끔 시찰 가면서 사냥을 하기는 하는데, 잡을 짐승도 별로 없고 그냥 황량합니다. 가끔 나무하는 사람들이 와서 한 수레 베어가는 거 말고는 사람도 없습니다."


드왈린이 시큰둥히 말했다. 숲은 머리에 눈을 얹은 채 묵묵히 찬 바람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침엽수림의 서쪽은 식물이 자라지 않는 눈밭이었고, 동쪽으로는 가파른 절벽에 가로막혔으며 마을은 남쪽으로 한참을 걸어야 나왔다. 과연 적의 침입을 우려할 곳은 아니었다. 직접 눈으로 보니 지켜야 할 땅의 쓸모 없음에 안타까움마저 들었다. 소린은 스란두일의 하찮고 어두운 왕자궁, 그 후원을 떠올렸다. 앞을 보지 못하는 왕자가 발을 더듬으며 지팡이를 짚고 후원을 홀로 산책하는 모습을 상상하니 금방이라도 미칠 것 같이 울화통이 치밀어 올랐다. 뜨거운 머릿속과 달리 표정만 굳히고 있자니 드왈린이 곁에서 눈치를 보았다. 


"왕자께선 잘 지내십니까?"

"눈을 잃으셨으나 총기는 여전하셨소."


적어도 내가 떠나오기 전까지는, 이라는 말은 어금니 아래로 와드득 소리 내어 씹어 버렸다. 


"건강은 어떠십니까?"

"눈이 나은 뒤로는 쭉 건강하시오."


검을 다시 잡을 정도로 건강해졌다고 덧붙이려다 관두었다. 제아무리 드왈린이라 하더라도 여기저기 불씨를 뿌려 좋을 것은 없을 터였다. 볼 것도 없군, 하고 말머리를 돌려 초소로 도로 향했다.


한때 소린은 스란두일이 거대한 숲 같다 여겼다. 감히 들어가 본 자가 아니면 속을 탐내지 못하는, 어떤 것을 품고 있는지 알 수 없는 광활하고 거대한 우림은 겨울의 침엽수라기보다 봄의 꽃나무에 가까웠다. 친부와 눈을 잃고, 왕자의 이름 안에 담긴 영예도 모두 잃었으나 그는 비파를 껴안고 노래를 피워내지 않았던가. 끝내 그의 가사를 듣지 않고 온 것을 떠올리자 다시 화가 치밀어 올랐다. 흙에 젖은 맨발을 닦아주고 업어 줄 때, 등이며 손가락에 닿던 스란두일의 생생하게 따스하던 체온도 벌써 사무쳤다. 터질 것 같은 울음을 참으려 관자놀이가 얼얼하도록 턱을 악물었다.











스란두일이 검을 다시 잡았을 때에는 채 한 시간을 넘기지 못하고 땀에 흠뻑 젖어 넘어지곤 했다. 소린은 녹녹한 선생이 아니었고, 스란두일은 땀에 전 상의를 벗고 남은 훈련을 마저 끝내야 했다. 날이 여름으로 접어들었는데도 후원은 제법 선선했다. 거닐기에 좋은 온도였고, 땀이 마르기 적당했다. 스란두일은 검을 내려놓고 손을 더듬어 바위를 찾아 앉았다. 물을 놓아둔 곳이 선뜻 기억나지 않아 한참을 더듬어야 했다. 목을 축이고 상의를 도로 껴입는 동안 새소리가 가까이 들렸다. 좁고 보잘것 없으나 본궁보다 훨씬 인적이 드물어 새나 벌레, 작은 동물들이 마음 놓고 다니는 곳이 바로 이 왕자궁 후원이었다. 귀를 세우고 한참 듣고 있자니 다른 소리가 들렸다. 시종이 후원까지 오는 법은 없었건만, 이상하다 싶어 검을 제대로 쥐었다. 굳은 채 한참을 경계하고 있어도 인적은 더 들리지 않고 스란두일은 스스로의 둔함을 자책하며 지팡이를 짚으며 일어섰다. 


방문을 열자마자 들이닥치는 어둠은 이미 익숙한 지 오래였다. 익숙치 못한 것은 적막이었다. 이 왕자궁은 처음 옮겨올 때부터 소린과 함께 지내지 않았던가, 하는 생각이 새삼 다시 들었다. 눈뿐만 아니라 머리며 온몸이 불덩이처럼 타들어 갈 때에 곁에서 잡아주던 소린의 서늘한 손길이 떠올랐다. 마음 어딘가 뭉근해졌으나 그는 안타까워하는 대신 침대에 앉았다. 검은 곁에 두고, 땀 젖은 옷은 벗어다 침대 곁에 대강 개어 두었다. 


그는 아주 어릴 때 시찰로 따라갔던 북방을 떠올렸다. 차갑게 날 선 바람이 그치지 않고 낮에도 하늘이 희게 흐린 곳이었다. 그곳에 서 있을 소린의 넓은 등을 애써 떠올려 보려 했으나, 어찌된 일인지 소린의 뒷모습이 도무지 기억나지 않았다. 스란두일은 비파를 집으려 도로 일어나 좁은 침대 근처를 더듬었다. 무릎에 놓고 끌어안자 설움이 울컥, 목까지 올라왔다. 현을 뜯기 직전에 그의 방문에 누군가 기척을 보였다. 방문 두드리는 소리가 이어 들렸다. 이번에는 시종일지도 몰랐다. 


"들어오라."


그러나 그는 문이 열리자마자 시종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인기척은 사납고, 곧고, 숙달되어 있었다. 달려드는 기색 전에 검을 뽑아들었으나, 제아무리 무예를 오래 닦은 왕자라 해도 눈이 보이지 않는데 눈이 보이는 자를 이길 수 있을 리 만무했다. 몸이 짓눌리고 옷이 찢겨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소린이 준 검이 마룻바닥에 와장창 소리 내며 떨어졌다. 스란두일은 그제야 괴한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누가 보낸 것인지도 대강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보낸 자의 의중까지도 알 수 있었다. 그는 할 수만 있다면 지금의 왕이 제 눈을 긋고 모든 영예를 앗아갔을 때로 돌아가고 싶었다. 차라리 그 때 아비를 따라 갔으면 좋았을 것을, 이제는 죽을 때마저도 놓쳐 그저 죽지 않기 위해 살아야 했다. 비명을 삼켰다. 나는 적어도, 네 녀석이 원하는 대로 죽어주진 않으리라. 눈을 잃기 전 마지막으로 보았던 소린의 모습을 떠올렸다. 불 타는 궁을 배경으로 한 채 엉망으로 상처 입은 맹수가 발악하는 듯 보이던 장군의 형형한 얼굴만은 웬일인지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소린이 그가 시력을 가졌을 때 마지막으로 보았던 것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 눈빛과 표정만이, 스란두일 자신이 여태 왕자임을 잊지 않게 해주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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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린스란 중장편/필연의 날개

필연의 날개 1






소린은 눈 뜨자마자 본 것이 안개라고 생각했다. 그는 꺼져 가는 의식 속에서 한때 에레보르를 멀리 벗어난 외딴 숲, 한여름에 보았던 짙은 안개를 떠올렸다. 사냥은 요원했고 이른 아침이지만 어둑하기 그지없는 숲을 벗어날 때에, 어린 소린은 어른 난쟁이들의 호위를 받아야 했다. 갈가마귀를 타고 에레보르까지 가는 길은 매우 멀었다. 그는 갈가마귀의 목덜미를 힘껏 쥔 채 안장 앞으로 바짝 당겨 앉고 속도를 냈다. 곧 어른들을 앞질러 나갔다. 선두에서 나는 스라인의 날개는 그의 키 세 배가 넘는 길이였으며, 활짝 편 크기는 웬만한 맹수들도 그 크기만으로 압도할 정도로 거대했다. 두린의 피를 받은 난쟁이들은 유독 아름답고 커다란 날개를 가지곤 했다. 소린은 부친의 진갈색 날개를 보며 늘 제 날개를 상상하곤 했다. 곧 돋을 제 몫의 날개 색을 상상하면 마음이 간질간질하고 다급해졌다. 빨리 성년이 되고 싶었다. 빨리 날개를 갖고 싶었다. 날갯짓에 익숙해져 갈가마귀를 풀어주고 맨몸으로 활공하는 안개 속은 분명 지금보다 더 상쾌하고 부드러우리라.


"일어나라."


물을 끼얹는 것처럼 차가운 목소리였다. 소린은 순식간에 정신이 드는 것을 느끼며 눈을 뜨고 앞을 보았다. 그제야 제가 안개라 생각했던 것이 요정의 흰 날개라는 사실도 깨달았다. 깜빡, 깜빡, 두 번 눈을 감았다 뜨는 동안 머릿속이 맑아지고 상황이 읽혔다. 자신이 무릎 꿇고 앉은 곳이 요정왕의 궁전이라는 사실과 온몸이 묶였다는 것, 누군가 제 등을 붙들어 세우고 있다는 것까지 깨닫자 앞에 선 요정의 무표정한 듯 차가운 얼굴도 상황과 맞물리기 시작했다. 요정의 큰 키와, 그 키의 두 배는 넘을 것 같은 거대한 날개는 왕의 것답게 윤기가 넘치고 웅장했으나, 소린이 안개라고 착각할 만큼 보드랍고 섬세해 보였다. 소린은 스란두일, 이라고 속으로 발음했다. 그를 모를 리 없었다. 적어도, 두린의, 왕손의 피를 받은 난쟁이라면. 


"스란두일."


입으로 내뱉자 단번에 목에 칼이 들어왔다. 날 끝이 차가울 정도로 목이 탔으나 소린은 서두르지 않고 마른 침을 삼킨 뒤에야 뱉은 말을 고쳤다.


"요정왕이시여, 저는 스로르의 손자 소린입니다. 난쟁이왕의 친서를 들고 왔습니다."


스란두일이 그의 앞으로 한 걸음 내딛자 어두운 은색 로브 자락이 뒤의 날개를 쓸며 사락대는 소리를 냈다. 소린은 그가 제 코앞까지 다가와 고개를 숙여 눈을 맞출 때에 기묘한 냄새를 맡았고, 그것이 요정왕의 체향임을 깨달았다.


"난쟁이는 왕의 친서를 전달하기 위해 남의 땅에 함부로 침입하는가?"

"발각될 것을 알고 온 것입니다. 침입이 아닙니다."


그제야 가슴께 통증이 느껴졌다. 숨 쉬기가 힘들었다. 아까 맞은 화살 탓이리라 여겼다. 


소린은 저를 바라보는 요정왕의 얼굴에서 그 어떤 표정이나 감정도 읽어낼 수 없었다. 그의 말은 반은 맞고 반은 거짓이었다. 왕을 직접 만나 친서를 전하려 했던 것은 사실이나 혼자 요정의 숲에 몰래 들어온 것은 숲의 주인에게 침입과 다를 바 없었다. 스란두일의 손이 소린의 턱을 낚아챘다. 짙푸른 눈을 빤히 들여다보는 눈동자의 맑은 회색이 너무도 또렷해서, 소린은 제 속을 읽히는 것처럼 부끄럽기까지 했다. 난쟁이를 놓고 다시 반 걸음 물러선 요정왕의 자세는 흐트러짐이 없었다. 커다랗고 흰 날개가 한 번 펼쳐졌다가 다시 접혔다. 그가 짧게 손짓하자 옆에 선 요정 중 하나가 소린의 품을 뒤져 친서를 꺼냈다. 스란두일은 친서에 찍힌 두린 가의 낙인을 유심히 살펴보곤, 길고 흰 손가락으로 단번에 두 조각을 냈다. 소린은 제 아비의 친서가 두 갈래로, 다시 네 갈래로 찢겨 바닥에 흩어지는 것을 보고 놀라 일어나려 했으나 등 뒤의 손이 그를 짓눌렀다.


"날개도 나지 않은 미성년 난쟁이를 홀로 보낼 정도라면 너희 왕도 무사치 못한 모양이군."


소린은 입술을 씹었다. 


"스로르가 죽었다는 소문이 돌고 있어. 그게 사실인지 네가 확인해 주어야 할 것 같구나, 왕손이여."


둘 사이 잠깐 들어찬 침묵이 몹시 날카로웠다. 소린은 요정왕을 똑바로 올려다 본 채 말했다. 


"할아버지께서는 몇 년 전에 반란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저와 아버지, 두린 왕가를 따르는 난쟁이는 에레보르에서 모두 쫓겨나 청색산맥 근처에 숨어 지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정식으로 방문치 못하고 저 혼자 온 것입니다."


그제야 스란두일의 얼굴에 표정이 생기기 시작했다. 호기심에 가까운 의아함이었다. 소린은 말을 이었다.


"아버지께서는 검은 날개가 흰 날개와 어우르던 때를 생각하시고 전하께 도움을 요청하겠다 했습니다. 그리고 저희의 처지나 약속하는 보상을 모두 적어 저에게 맡기셨습니다. 방금 찢어 버리신 그 친서 안에 말입니다."


어린 목소리 끝에 날이 서 있었다. 소린의 목소리는 성년을 앞둔 두린의 난쟁이답게 힘 있고 묵직해서 소리 지르지 않아도 호통치는 느낌까지 들었으나 스란두일은 도리어 빙긋이 웃었다. 옆으로 걸음하자 찢어진 스라인의 친서가 그의 발 아래 뒹굴었다.


"스라인이 잘못 골라도 한참 잘못 골랐군."


왕은 다시 손짓했다. 소린은 저를 잡아 일으키는 손길이 거칠어 몸을 틀었으나, 날개도 없는 작은 난쟁이가 묶인 채로 요정 호위병 두엇을 이길 리 만무했다. 멀어지는 동안 돌아선 스란두일의 등, 흰 날개가 빛을 뿌려낼 듯이 느리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마저도 소린에게는 차가워 보였다. 그의 작은 몸이 호위병들에게 끌려 모퉁이 하나를 돌아 더 보이지 않을 때까지 스란두일은 고개를 돌린 채 소린을 마주하고 있었다. 발꿈치가 끌리고 다친 가슴께가 몹시 아파, 소린은 어금니를 악물어야 했다. 











요정의 활공은 숲을 결코 벗어나지 않는다. 동료와 짝지어 날며, 결코 서로의 눈을 벗어날 때까지 떨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스란두일의 선대부터, 즉 난쟁이와 지내기 전부터 지켜온 법칙이었다. 그렇게 해야 날짐승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을 수 있었고, 행여 날개 달린 다른 것과 부딪치더라도 생명을 잃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난쟁이와 달리 오래 활공하지 못했다. 다만 가벼운 몸을 높이 띄우고 빠르게 나는 것만은 웬만한 맹금을 능가할 정도였다. 스란두일은 특히 높은 창공에서 새를 사냥하는 것을 좋아했다. 왕인 스란두일이 사냥을 직접 나서거나 숲을 시찰할 때면 따라나선 호위병들은 군주의 새하얀 안개 같은 날개에 넋을 잃기 일쑤였다. 흰 날개는 요정 모두가 갖고 있는 것이었으나 스란두일처럼 아주 새하얀 색을 가진 요정은 드물었다. 더군다나 왕의 깃털은 화사한 흰색이 아니라 손 대면 녹아 버릴 것처럼 아스라하게 가라앉은 흰색이었기에, 더더욱 보는 이를 홀리게 했다.


스란두일은 느리게 날갯짓하며 공중에서 한 바퀴를 돌았다. 활시위를 당기고, 쏘았다. 새 하나가 맞아 떨어지는 것을 다른 요정이 아래로 튀어나가 낚아챘다. 스란두일의 사냥복은 항상 검은색이었다. 날개를 방해치 않도록 등을 없애고 목과 허리에서 앞으로 걸어 입은 검은 옷은 얇고 가벼워서 그의 움직임마다 솔직하게 흔들리곤 했다. 섬세하게 세공된 긴 활을 든 요정왕은 아래서 보았을 때 흰 날개를 지닌 흑로 같아 보였다. 


갈리온이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지친 날개를 쉴 시간이었기에 스란두일은 그에게 눈짓하고는 아래로 날갯짓했다. 숲이 한눈에 보일 정도로 높이 올라온 이곳은 사냥하기 좋은 곳은 아니었으나, 왕으로서의 책임을 다해야 할 땅을 굽어보기에 더할나위 없는 곳이었다. 숲은 울창했다. 사시사철 푸르지는 않았으나 계절에 맞춰 색 바꾸며 요정들을 보살피기 충분하고, 안온했다. 한참 그의 곁에서 뜸 들이던 갈리온이 입 열었을 때에는 사냥 무리가 모두 숲의 나무에 닿을 듯 가까워진 때였다.


"저 난쟁이는 어찌하실 겁니까?"


잎과 꽃을 화려하게 단 나무는 분명 오래 숲을 지킨 요정에게 친숙하기 그지없었으나, 활공을 하다 내려올 때에는 땅에 날 세우고 꽂아 놓은 비수 더미와 다를 바 없었다. 공중에서 사냥하는 버릇이 오래 든 요정들은 빠르게 하강하면서도 빼곡한 숲의 나무를 피하는 법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스란두일은 발이 땅에 닿자 갈리온에게 활을 건넸다.


"스로르를 죽였다는 난쟁이들에게 팔아 볼까 생각 중이네."

"전하,"


갈리온의 부름에 벌써 잔소리가 섞인 듯해서 스란두일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바람에 헝클어진 백금발을 하나로 모아 높이 당겨 끈으로 묶은 그는 제 충신에게 여유로이 웃어 보였다.


"내가 그럴 리 없지 않은가."


여전히 뚱한 갈리온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고 걸어가며 스란두일은 슬며시 웃었다. 얇은 장화발에 닿는 흙이 곱고 부드러웠다. 묘하게 들뜨는 기분이 발을 가볍게 하고 있었다.











감옥은 어둡고 습했다. 그리고 간수 하나 없이 적막했다. 소린은 가슴께 상처가 어찌 되었는지 확인하고팠다. 몹시 쓰라리고 갈수록 숨이 가빠오고 있었다. 적어도 이곳에 가둔 걸 보니 당장 죽이지는 않을 것 같았으나 그걸로 자위할 수는 없었다. 묶인 손이라도 풀면 나을 것을, 겨우 벽에 기댄 채 잠에 빠지지 않으려 버티고 있는 것이 다라서 화가 치밀었다. 상처야 저들이 죽일 작정을 하지 않는다면 치료해 주고 나을 터였다. 문제는 친서였다. 인장을 박은 친서가 찢어졌으니 왕손으로서의 몸뚱아리가 그 역할을 해야 했다. 그러나 요정왕이 제 말을 들을 거라는 기대도 전혀 들지 않았다. 차라리, 하는 생각과 함께 소린은 감기는 눈을 억지로 들어 작게 난 창문을 보았다. 일어서려 차가운 벽에 몸을 비벼댔다. 꽉 맞물린 어금니 새 신음이 절로 새어나왔다. 겨우 다가갔으나 창문은 제 키에 전혀 닿지 않을 만큼 높았다. 좌절감이 화로 바뀌며 소린은 낮은 목소리로 욕을 뱉고 도로 주저앉았다. 물이 고인 것인지 허벅지께가 축축하게 젖는 것이 느껴졌으나 이제는 어찌되어도 좋았다. 목이 탔다. 작게 들어오는 햇빛도 원망스러웠다. 


방법이 없는 것인가, 부은 눈을 감고 정신을 가다듬으려 애쓰고 있을 때 열쇠 소리가 들렸다. 감옥 바깥 문이었다. 까무룩 감기는 눈을 억지로 뜨자 검은 옷을 입은 요정왕이 보였다. 함께 따라온 호위병이 창살을 열고, 스란두일이 안으로 들어왔으나 소린은 꼼짝 않았다. 다만 감기는 눈꺼풀에 애써 힘주고 그를 치켜 볼 뿐이었다. 스란두일이 곁의 요정에게 손바닥을 펴 보이자 채찍이 주어졌다. 하얀 손가락 위 까맣고 굵은 채찍줄이 판판하게 감기더니 긴장을 잔뜩 머금었다. 양손으로 당기자 가죽 펼치는 소리가 짝, 하고 울렸다. 뺨을 때리는 것과 흡사한 소리였다. 손에 든 채찍이 소린에게 날아가기까지 얼마 걸리지 않았다. 소린은 어깨부터 등까지 길게 찢는 듯한 감각에 결국 비명 질러야 했다. 간신히 벽에 기대고 있던 몸이 쓰러지고 통증에 오한이 들었다. 그는 온몸을 떨었다. 옆으로 누운 시야에 요정왕의 까만 장화발이 보였다.


"네 작은 조상들이 이곳을 멋대로 떠나고 나서 나는 오래도록 생각했다. 난쟁이는 어떤 족속인가, 내가 그들을 몰랐던 것인가, 알지도 못하며 친화를 하겠다 나선 것인가."


다시 한 대. 이번에 소린은 비명을 목 안으로 삼켰다. 뒤로 묶인 팔과 등을 휘며 목을 젖히는 중에 혀를 깨물지 않으려 어금니를 대신 힘 줘 씹어야 했다.


"우리를 죽이고 떠나 놓고서 이제 와 다시 손 내미는 그 뻔뻔함이 대견하구나. 너희 족속은 원래 그런 것이었어."


세 대. 소린은 가슴을 찬 바닥에 대고 정신 없이 숨 몰아쉬었다. 등의 감각이 저릿하게 둔해지고 있었다. 스란두일이 다가와 그의 머리채를 잡았다. 마주보게 하니 독기가 여전히 서려 있어서, 스란두일은 울컥 올라오는 불만족에 얼굴을 구겼다. 


"내가 놓을 때까지 너는 여기서 내 소유로 지내라. 네 조상들이 못 치른 죄값을 네가 치른다면 두린 가를 도와주겠다."


요정왕의 손이 떨어지고 소린은 볼과 입술을 바닥에 댄 채 그의 까만 장화가 멀어지는 것을 무력히 보았다. 생각도, 감정도 없이 통증만 머릿속이며 온 몸에 가득했다. 그는 다친 등을 크게 들썩이도록 기침하고서 몸을 파고드는 한기를 느꼈다. 느리게 정신을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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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린스란 중장편/Eid

Eid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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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마을은, 마을이라 일컫기에 면구스러울 정도로 많이 망가져 있었다. 길 전체에 악취가 진동하고 담장들은 여기저기 부서진 채 방치되어 있었으며, 근원을 알 수 없는 불쾌하고 미적지근한 바람이 불었다. 소린은 온통 진흙을 묻힌 몰골로 골목을 두리번대며 걸었으나 길에 몇 없는 인간들 중 누구 하나 난쟁이를 신기하게 여기는 자도, 빤히 쳐다보는 자도 없었다. 길은 황망하고 건물들은 형태가 이지러져 있는 이곳에서, 스란두일을 찾아낼 수 있을지 그는 장담할 수 없었다. 결국 지나가던 인간 하나를 붙들었다. 


“키가 큰 요정을 혹시 본 적 있소?”


소린의 모습을 뒤늦게 찬찬히 훑은 인간은 난쟁이를 처음 보는 듯, 그제야 호기심을 드러냈다. 고개를 저었다. 소린은 피로가 몰려오는 혼몽한 정신을 뿌리치려 눈을 잠깐 감았다가, 떴다. 눈 아래와 미간으로 열이 올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피로가 혀까지 먹어 들어갔는지, 둔하게 굴러가는 머리만큼 입 속도 둔해졌다. 이마를 짚은 채 자책하는 동안 인간은 돌아서 가 버리고, 소린은 벽에 손 짚은 채로 몇 분을 꼼짝 않고 서 있었다. 몸을 저릿저릿하게 만드는 피로감 속에서 그는 스란두일의 백금발을 환상인 양 여러 번 떠올렸다. 그리하지 않으면 제 용의 모습마저 잊을 것 같았다.











꿈은 스란두일의 손발뿐만 아니라 머리와 뼛속까지 노곤하게 만들었다. 온몸이 공중에 떠 있는 듯하고 피부에 닿는 감각도 흐렸다. 그를 향한 시선이 하나 있었다. 온몸을 휘감아도는, 크고 올곧은 시선이었다. 사방 가려진 곳 없이 몸이며 생각까지 드러난 기분에 스란두일은 알몸이라도 된 양 불안해졌다. 


- 그 자를 믿지 마라.


고대용의 목소리였다. 머릿속을 채우고 가슴을 울렁이게 하는 용의 그것은 목소리라기보다는 진동에 가까웠다. 스란두일은 혼몽한 와중에 약한 구토감을 느꼈다. 


- 용의 성에 살지 않는 용을 찾아가라. 내 아들이다. 여행을 관두거라.

“지금 저더러, 성년식을 하지 말라는 말씀이십니까?”


간신히 쥐어짜내 말했다. 그는 그제야 제게 말 거는 고대용의 눈동자를 똑바로 볼 수 있었다. 짙은 호박색을 띤 노란 눈동자에 제 모습이 그대로 맑게 비쳤다. 용은 눈을 한 번 깜빡이고 느리게 그의 곁을 스쳤다. 새까만 비늘로 덮인 몸통과 거대한 날개가 스란두일의 가슴에 닿을 듯 그 앞을 아슬하게 지나쳤다. 느린 움직임에 맞춰 지축이 쿵, 쿵, 하고 흔들렸다.


- 너는 성년이 될 수 없다.


스란두일은 그의 말을 단 하나도 이해할 수 없었다. 고개를 젓고 해명을 요구하려 노란 눈동자를 도로 찾았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 가련한 피여. 누가 너를 가로막고 있다 생각하는가.


힘주어 말하는 고대용의 발음은 그의 작은 몸을 떨게 했다. 스란두일은 발아래가 빈 것처럼 불안했다. 꿈의 혼몽함에 짓눌린 머릿속을 필사적으로 굴렸다. 조금씩 의식이 깨어나고 있었다. 소린, 이름을 떠올리고 그 다음으로 기억난 것은 숲에서 자신을 들쳐메고 가던 인간의 체취였다. 대체 어떤 인간이 무슨 이유로 용을 탐한단 말인가, 누가 감히 용의 성년식을 방해한단 말인가. 그리고 분명 그 향은,


“누구입니까?”


스란두일이 물었으나 용은 그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 내 아들을 찾아가라. 여행을 관두어라. 네 길잡이를 믿지 마라. 


소린을? 되물으려던 차에 용은 몸체를 완전히 뒤로 돌렸다. 


- 그는 두 가지 운명을 가졌다. 


꼬리 끝 형형하게 빛을 반사하며 바짝 날 서 있는 비늘을 보고 스란두일은 한 걸음 물러섰다.


- 너는, 네 몸에 무엇이 담겼는지 모르나보구나. 


아이야, 라는 탄식 같은 말을 마지막으로 용은 발걸음도 없이 사라졌다. 거대한 존재감은 멀어지는 것만으로도 혼을 빼앗았다. 균형을 잃고 휘청대는 중에 눈앞에 흰 안개가 밀려들었다. 스란두일은 이것이 꿈이라는 것을 알았고, 깨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고, 꿈이 아니라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허나 눈을 뜨려 해도 갑갑한 몸은 갇힌 채 통 열리지 않았다. 정신을 두드리고, 또 두드리며 스란두일은 제 길잡이의 이름을 불렀다.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안개가 목 끝까지 차올랐다.











소린은 골목과 골목 사이를 오가며 간 곳과 가지 않은 곳을 분간해 내는 와중에 숲의 빼곡한 나무를 떠올렸다. 스란두일과 걸었던 숲은 끝이 없을 듯해 보였고, 모든 것이 느린 곳이었다. 걸음 또한 느긋했다. 여행은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 길을 아는 용과 그의 증표가 될 길잡이가 있으면 언젠가는 용의 섬에 닿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한도 끝도 없을 것 같던 숲의 푸름 속에 멈춰 청량한 풀내음을 들이마시며 쉬던 때도 있었다. 겨우 며칠 전인데 피로 속에서 돌이켜보니 몇 달은 지난 것처럼 아득했다. 소린은 스란두일이 비스듬히 누워 작은 풀벌레를 손에 얹고 노는 것을 바라보았었다. 그 때 스란두일은 속에 입던 옷을 빤 터라, 맨 몸에다 겉 로브만 아슬하게 걸치고 있어 바람 부는대로 속살이 드러나고 있었다. 시선은 온통 작은 벌레 하나에 빼앗긴 채였다. 간혹 얼굴 위로 옅게 미소가 떴다. 소린은 방금 냇가에서 가져온 빨랫감을 바위에 내려놓고는 하나하나 차례로 펴서 나뭇가지에 걸었다. 활엽수가 적어 바람이 많은 곳이라 밤이 되기 전에는 입을 수 있을 만큼 마르리라고 생각했다.


“대견하지 않습니까?”


돌연 던진 말에 소린은 영문을 모르고 돌아보았다. 소린의 키에는 높은 나무라 옆으로 돌아가 돌을 딛고 서서야 스란두일의 옷까지 널 수 있었다. 스란두일의 옷은 물에 젖어서도 반짝반짝하고 은은한 광채를 내고 있었다. 용족이 요정과 어울려 만든 옷감이란 신비하고 고와서 귀하게 취급 받았다. 소린은 그의 옷에서 나는 광채가 스란두일에게 어울린다 생각했다.


“이 작은 것들도 살아남는 법을 알고, 해를 끼치지 않는 것을 구분하지 않습니까.”

“자연의 이치가 그러하지.”


그는 마지막으로 제 젖은 신발을 벗어 대충 던져 놓고는 넓은 바위 위에 누웠다. 햇빛이 내려와 몸의 절반은 땡볕이었으나 그 나름대로 괜찮았다. 빨래를 하느라 젖어 있던 맨가슴이며 팔뚝이 기분 좋게 데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눈을 감자 햇빛이 어지럽게 붉은 얼룩을 그려댔다.


“소린.”

“말씀하시오.”


스란두일의 손 위를 뛰놀던 벌레는 어느새 기어내려온 것인지 이미 풀 사이로 사라지고 없었다. 스란두일은 굳이 눈으로 쫓지 않았다.


“나를 가까이 두는 것이 두렵지 않으십니까?”


팔 베고 누웠던 고개를 옆으로 틀었다. 스란두일의 얼굴은 온전히 그늘 안에 있었다. 빛의 잔상이 남아서 시야가 어른어른 붉었다. 


“두렵지 않소.”


땅을 보던 스란두일은 굳이 웃지도, 그를 마주하지도 않았다. 다만 작게 대답했다. 고맙소, 라고. 소린은 풀 위에 닿은 그의 맨 종아리를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폐허에 가까운 마을에 어둠이 지자 인간들은 집으로 숨어들었다. 그나마 밖을 다니던 몇몇이 황급히 골목 속으로 들어가는 형국은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확실히 숨는 것에 가까운 동작이었다. 소린은 하나 둘씩 문이 걸어 잠기는 골목 사이를 걷고 있었다. 식은땀이 흘러 선선한 저녁 공기에 차갑게 식었다. 허나 머릿속의 온도는 여전하였다. 


스란두일.


당장이고 몸이 무너질 것처럼 어지러운 와중에 그의 이름이 지침인 양 되새겼다. 밖으로 내뱉지는 않고 입 속에 머물렸다. 소린은 큰 골목에서 작은 골목으로 걸음을 바투 옮겼다. 이따금 비척거렸다. 손과 발에는 피가 돌지 않는데 정수리에는 머리털이 곤두서고 있었다. 이미 어둠이 진 골목 어귀, 인간의 눈으로는 보기 힘들 성 싶은 사위에서 그는 몇몇 수상한 거동을 보았다. 둘, 혹은 셋. 무리 지어 조용히 이동하는 것이 낌새가 확실해서, 칼을 뽑고 달려갔다. 난쟁이의 시력과 무력이 인간 두어 명을 상대치 못할 리는 없었다. 조용히 하나를 뒤에서 잡아채고 목에다 칼을 겨누었다. 동료가 사라진 것을 눈치 챈 인간들이 어둠을 더듬다가, 소린의 안광을 마주했다.


“키가 큰 요정을 본 적이 있소?”


대답 없었다. 날에 힘을 주고 들이밀자 비명소리를 내었다. 소린은 개의치 않고 더 기다렸다. 지체되기에 그대로 목을 그었다. 달아나려는 인간 중 하나를 잡아채어 벽으로 밀어 붙였다. 


“어디 있나?”


공포심이나 불안감은 시야로만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 옆 골목 부서진 파란색 대문…….”


진실을 이야기하는 것 또한, 눈으로만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공포에 떠는 몸과 목소리에서 진위를 구분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소린은 검 손잡이를 고쳐 쥐었다.


“너는 누구냐?”


대답하지 못하고 눈만 겁먹은 채 마주하였다.


“용족을 어쩐 연유로 쫓는 것이냐?”


여전히 답이 없기에 겨눈 날을 그으려는 찰나, 다른 기척이 가까워서 시선만 뒤로 던졌다.


“소린? 소린이십니까?”


뒤에서 들린 목소리는 난쟁이의 것이었다. 소린은 익숙한 얼굴에 머리가 맑아지는 것을 느꼈다. 어쩌지 못하고 잠깐 생각을 놓친 틈으로 붙들렸던 인간이 팔을 풀고 달아났다. 소린이 쫓으려 하자 난쟁이는 가까이 다가왔다. 팔을 붙들었다. 발린, 어릴 적부터 아비를 따르던 자였고, 소린에게는 먼 친척에 가까운 자였다. 고개를 세차게 젓는 그의 앞에서도 발린은 예를 잃지 않고 왕손에게 걸맞는 인사를 건네었다.


“네가 어떻게 이곳에 있나?”

“근처 철산에 회의가 있어 사절로 다녀오는 길입니다.”


발린은 바닥의 시체와, 흐린 달빛에 비친 소린의 때 묻은 모습과, 그의 검에서 아직 흐르는 피를 보고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용의 길잡이로 떠나시지 않으셨습니까? 용은…….”


소린은 대답하지 못했다. 발린은 갑갑함에 한 걸음을 다가섰다. 소린의 몸에서 악취가 훅하니 끼쳤다. 단순한 몸 냄새가 아니었다. 끔찍하고 섬짓한 기운은 평범한 난쟁이마저도 겁먹게 만들었다. 제가 알던 난쟁이왕손이 맞는가 싶어서, 발린은 몸을 떨었다. 거의 무릎을 꿇을 기세로 소린의 손을 쥐었다.


“소린, 왕손이시여, 부디 설명해 주십시오.”


발린은 소린의 두 손을 쥔 채 급기야 눈물까지 글썽이기 시작했고, 소린은 그를 부드럽게 뿌리치고는 검을 집어넣었다. 이성을 더듬더듬 찾으며 입 열었다. 그의 이야기는 여행 중에 처음 느꼈던 불안감부터 시작하여 스란두일을 잃기까지 간결히 이어졌고, 발린은 소린의 손을 놓지 않은 채 힘을 주었다 풀며 경청했다.


“제발, 이 여행을 그만 두십시오. 예감이 좋지 않습니다. 떠나시기 전부터 그랬어요. 전하께서도 얼마나 걱정하시는지 알고 계십니까?”

“그리 쉽게 엎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소린은 고개를 저었다. 그는 어릴 적 에레보르의 대장간을 떠올렸다. 작고 어린 왕자에게 대장간은 들어서자마자 숨이 막히는 곳이었다. 풀무도 틀도 모두 하나같이 커다랬다. 쇠 냄새는 열기만큼이나 목을 조여오고, 쿵, 쿵, 연달아 터지는 굉음 속에서 어린 소린은 저 이글대는 불길을 똑바로 보겠다고 각오하고선 작은 몸을 곧추세웠었다. 소린은 피로 탓에 밀려오는 열 속에서, 몹시 외로워졌다. 제 용을 찾고 성년식이 끝나 힘을 나누어 받을 때까지 열은 없어지지 않을 것 같았다. 묵직한 조바심이 들었다. 발린이 다시 첨언하려 할 때, 소린은 제 등 뒤로부터 기척을 느끼고 돌아섰다. 바로 검을 뽑고 목을 겨눠 찔렀다. 적의 손에서 무기가 떨어져 대리석 바닥에 요란하게 굴렀다. 소린의 검이 뽑히자 달려들었던 이는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쓰러졌다. 발린은 방금 숨 끊어졌을 인간과, 어둠에 반쯤 가린 왕손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소린이 제 쪽으로 돌아서자 저도 모르게 한 걸음을 물러섰다. 그의 발끝에 소린의 시선이 머물렀다.


스란두일은, 저를 가까이 두는 것이 두렵지 않냐 물었더랬다. 소린은 무심히 내려깔던 스란두일의 속눈썹이 떠올라서 먹먹해졌다. 그 마음을 백분 이해 못한다 하더라도 일부나마 읽고 싶어졌다. 스란두일은 그가 가진 용의 힘을 차치하고서라도 충분히 강한 전사였다. 적어도, 소린이 생각하기에는 그러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소린은 허리를 숙이고 시체 얼굴을 들어올렸다. 안면 있을 리 없는 자들이었다. 갑갑함에 제 입술을 사납게 씹다가 발린에게 말했다. 


“내가 그를 찾아 와야 한다.”


소린의 말은 변명이 아니라 단언이었다.


“그는 나를 선택해 준 내 용이다.”


소린은 돌아섰다. 시체를 지나 걸었다. 말아 쥔 손바닥에 땀이 들어찼다. 발린은 제가 모시던 왕손의 모습을 다시 찾을 수 있을지 걱정되어, 걸어간 골목 끝까지 잠깐 뒤쫓았다가 이내 포기했다. 뒤돌아서 불안스레 시체를 내려다보았다. 마른 침을 삼켰다. 어릴 적부터 모신 왕손의 눈이 그렇게 광기로 형형한 것을, 그는 본 적이 없었다.











독일어; Eid [ait]  
[남성] 선서;(신 또는 성스러운 것에 대한) 맹세, 서약, 서언(誓言)








'아이트'라고 읽으시면 됩니당


그... 스란두일도 왕자인데 왜 소린에게 극존칭을 쓰냐면

스란두일은 용과 요정 혼혈인데 요정들은 대부분 용의 독성에 내성이 없잖아요 (오로파파는 아주 예외)

그 때문에 왕위를 못 잇는 왕자이기 때문에... 그래서 첫편인가 2편에서 소린한테 자기도 엄연한 왕손이라 그런다는..

그냥 사족을 덧붙여 보았습니다ㅠㅠ 

굳이 덧붙이긴 그런데 헷갈리실까봐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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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린스란 중장편/필연의 날개

필연의 날개 Prologue




요정은 고대부터 숲을 지켰다. 흰 날개로 숲 위를 활공하는 요정은 내려다볼 수 있는 모든 것을 사랑하려 애썼다. 그들은 나무 뿌리의 힘보다 나무를 있게 하는 햇빛의 풍요로움을 더 숭배했다. 난쟁이는 숲의 나무가 가장 색 짙고 울창하던 시기에 그들과 함께 했다. 난쟁이는 나무의 향기보다 바위 속에 숨겨진 힘을 더 믿었다. 그들의 날개는 흙 색에 가까웠으며, 높은 곳을 잠깐씩 활공하는 요정과 달리 절벽 사이사이를 오래 날 수 있게 작은 몸보다 훨씬 컸다. 요정의 영생과 비할 바 못 되더라도 난쟁이는 절벽을 뚫고 돌을 옮길 수 있게 단단한 몸을 가졌다. 숲 근처 절벽을 요정들이 내어 주고, 난쟁이들은 그들에게 살 집과 아름다운 보석을 주었다. 아주 오랜 시간 동안 다른 색의 날개가 점차 섞이고 긴밀해져 두 종족의 두 왕은 같은 숲을 공유하기에 이르렀다. 


두 날개가 한 하늘을 모시는 때가 그리 길지는 않았다. 난쟁이들이 숲을 떠났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더 많은 지식과 기술을 갈구했다. 손 안에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일은 이기기 힘든 갈증을 안겨주었으며, 이는 보이지 않는 것을 더 숭배하는 요정들이 보기에 욕심일 뿐이었다. 요정은 그들을 보내지 않으려 했고, 난쟁이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결국 내전이 일어나고 길지 않은 전쟁 동안 사상자는 수도 없이 많았다. 난쟁이들이 떠나고 두 왕이 다스리던 숲은 전쟁이 끝난 후에도 오래 뒤숭숭했다. 둘이 만든 것에 하나가 빠진 것은 단순한 뺄셈으로 칠 수 없었다. 절벽에는 뻥 뚫린 구멍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이로서 내면을 보려 하는 요정과 텅 빈 곳을 채우는 난쟁이의 공생은 끝났다. 신의를 잃고 슬퍼한 요정왕은 다시는 이 숲에 난쟁이가 들어오지 못할 것이라 선언했다. 











성년이 되는 네 생일 전에 돌아와야 한다. 반드시, 그때까지 잡혀 있어선 안 된다. 


소린은 부친의 말을 새기고 또 새겼다. 마지막 남은 물 몇 방울을 한참 아쉽도록 입에다 털어 넣은 다음, 텅 빈 수통을 허리에 도로 차고 바위에 걸터앉았다. 몇 주 동안 제대로 쉬지도 않고 걸었더니 눈이 금방이라도 감길 것 같고 어질어질했다. 배도 고프고 목도 몹시 말랐다. 모래바람을 오래 맞은 피부가 아렸다. 무릎은 의지와 달리 자꾸 삐걱거렸고, 발톱도 두어 개 빠진 거 같았다. 그러나 날개가 돋는 성장통에 비할 바는 아닐 터였다. 성년이 되는 날부터 몸에 열이 나기 시작할 것이고 날짜가 며칠 더 지나면 등에 날개가 돋을 터였다. 날개가 돋기 시작하면 일어나지도, 말을 하지도 못할 정도로 앓고 성장통이 심하면 반쯤 자란 날개를 단 채 그대로 죽어 버리는 난쟁이도 있었다. 이는 어떤 난쟁이도 피할 수 없는 단계였다. 소린은 제 머리칼의 색과 비슷하게 짙은 날개를 가지고 싶었다. 대부분의 난쟁이는 갈색이거나 짙은 고동색의 날개를 가졌으나, 아주 검은 색이라도 나쁘지 않을 것이었다. 그것이 요정왕의 감옥에서 나는 것만 아니라면, 그 통증 정도는 참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숲에 쳐진 요정왕의 결계는 난쟁이들이 통과할 수 없었다. 그러나 성년이 되지 않은 어린 아이라면, 날개가 없는 난쟁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졌다. 소린은 다시 일어섰다. 숲은 이제 짙은 초록이 완연히 보일 정도로 가까워 있었다. 새파란 하늘과 누런 황야에 대비되어서, 꼭 장막을 드리우고 안으로 잠식하는 거대한 동굴처럼 보였다. 소린은 자신이 태어나기 전 선조들이 저 음험한 숲속에서 허여멀건 요정들과 살을 맞대고 살았다는 것이 아직 믿기지 않았다. 저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사실도, 아직 믿기지 않았다.


지금부터 빨리 걸으면 한 시간 안에 결계 앞에 도착할 수 있을 터였다. 숲 앞의 황야에는 나무도 무엇도 없어 모습이 금방 노출되겠지만, 숲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는 요정의 생태를 생각하면 그도 위험한 일은 아닐 거 같았다. 되려 누런 땅에 기어다니는 전갈 같은 것들이 더 위험할지도 몰랐다. 소린은 마지막으로 장화끈을 단단히 고쳐 묶고 바위에서 일어났다. 로브에 달린 검은 후드를 뒤집어쓰고, 독하게 내리쬐는 태양을 올려다보았다. 들어가서 요정왕을 만나고, 아버지의 친서를 전한다. 회의 자리에 자신 또한 함께 있었으므로 그 내용이야 뻔했다. 그러나 실패한다면. 소린은 어금니를 물었다. 날이 더웠으나 로브를 단단히 여몄다. 빠른 걸음으로 마침내 결계 앞에 다다랐을 때, 소린은 숨을 한 번 가다듬고는 발을 안쪽으로 내디뎠다.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다행이다, 참은 날숨을 단번에 내뱉고 주변을 경계하며 더 어두운 숲 안쪽으로 걸었다. 


숲 속은 겉에서 보는 것과 달리 환하고 싱그러웠다. 살살 불어오는 바람은 여태 황야의 독한 햇빛과 매캐한 바람에 찌든 폣속과 피부가 씻겨나가는 것 같았다. 소린은 경계를 유지하면서도 처음 보는 경치를 마음껏 눈에 담았다. 이런 곳이라면, 이렇게 깨끗하고 조용한 곳이라면.


키 낮은 풀꽃들 사이에 흐르는 냇물은 냄새도 나지 않고 흙도 안 섞여서 속이 비칠 정도로 맑았다. 소린이 고개를 숙이고 들여다보니 작은 물고기도 떠다니고 있었다. 난쟁이들이 떠난 후에도 요정은 이 숲을 오래 지켰다고 했다. 그는 그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먼저 손바닥 한 가득 떠서 조금씩 입술을 축인 다음, 얼굴을 씻었다. 싸하게 시원한 감촉이 좋아서 눈을 감았다. 그때였다. 뒤에서 느리게 접근하는 기척은 누구인지 알 필요도 없었다. 품의 단검을 빼어 들고 돌아섰다. 가로로 긋고, 목을 겨냥해 찔렀다. 흰 날개를 가진 요정이 쓰러지는 것을 막 확인할 때, 소린은 뒤에서 등으로 별안간 꽂히는 감각을 이기지 못하고 앞으로 꼬꾸라졌다. 도로 일어날 의지와 달리 눈이 풀리고 몸의 힘이 빠졌다. 느려지는 숨결을 타고 숲의 맑은 흙 알갱이가 입 속으로 들어왔다.










여름 톨킨온리전을 목표로 연재합니다.

프롤로그라 짧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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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린스란 중장편/Eid

Eid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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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울음을 울며 새 한 마리가 숲 위를 날았다. 둘의 뒤에서 온 새의 울음은 앞으로 지나는 것이 아니라 위로 솟았다. 숲의 끝이 높은 산으로 이어져 있기 때문이었다. 소린은 앞을 보았다. 거대한 산은 색이 검었고 미끄러워 보였다. 경사를 앞두고 길은 갈수록 험해졌다. 스란두일은 겉에 걸쳤던 긴 로브와 안에 덧입었던 얇은 로브까지 벗어내어, 튜닉과 바지만 입은 채 산을 올랐다. 소린은 보이는 열매를 따서 짐에 넣으려 하다가 포기하고 그의 뒤를 따랐다. 경사를 오르다 넘어지고 짐을 쏟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다. 비가 오지 않아도 흙은 발 딛는 대로 무너져 내려서 몹시 위험했다. 동물 것 아닌 발자국이 오래 찍히지 않는 숲은 모두 그러했다. 스란두일은 걸음을 멈추고 허리 숙여 흙을 한 줌 쥐었다. 그대로 얼굴로 가져가 냄새 맡았다. 오랫동안 동물의 흔적과 나뭇잎들만 섞였던 흙은 평화로웠다, 적어도 이곳까지는 말이다. 


안심하는 그의 표정만으로도 소린은 그가 무엇을 하는지 물을 필요가 없었다. 둘이 숲을 가로질러 걸어오는 데까지 거의 사흘이 걸렸다. 그 내내 스란두일은 이따금 나뭇가지나 나무줄기에 손을 대었다. 잎 사이 이슬을 흩뿌리고 스치는 흰 손길은 소린이 옆에서 보기에 경건하기도 하고 조용하니 선득하기도 했다. 식물을 보듬는 스란두일의 눈이나 손은 마치 기도하는 것마냥 진중하고 고요했다. 그는 스란두일을 이해하기보다 적응하려 애썼다. 


가파른 경사를 소린이 먼저 올랐다. 돌산을 파고 지내는 난쟁이에게 산행은 어려운 것이 아니었으나, 좀처럼 성 밖에 나오지 않는 어린 용족에게는 달랐다. 소린은 자주 그를 잡아주었다. 뒤따라오는 모습을 확인하려 연신 고개를 돌리고 내려 보았다.


“용족의 몸에는 문신이 있다 들었소.”

“그렇소만.”


대답 끝, 소린이 손을 내밀자 스란두일은 망설였다. 소린이 팔을 뻗은 채 위에서 기다리자 별 수 없이 맞잡았다. 소린의 손바닥은 훈훈하게 더웠다. 그는 경사를 오르는 동안 스란두일을 자주 잡아 주었다. 손을 내밀 때마다 스란두일은 그의 몸이 제 독기로 굳는 상상을 했다. 어느 순간 움켜쥐었던 손가락마저 풀리지는 않을까 겁이 났으나, 뻗어 맞잡아 체온을 나누는 것은 또 다른 이야기였다.


“붉은 문양이라 들었소. 그게 어떤 의미가 있는 거요?”


스란두일은 대답하지 않았다. 소린은 한 걸음을 더 위로 딛기 위해 나무뿌리를 손으로 잡으며 올랐다. 장화 밑창이 땅을 끌며 뒤로 밀려났다. 그는 잡은 나무뿌리가 단단한지 확인하려 몇 번 잡아당겼다. 걸음을 옮긴 뒤에야 다시 스란두일을 내려다보았다.


“어찌 생긴 것인지 궁금하군. 낙인 같은 것인가?”

“날 때부터 있는 것이고 이종족은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왜지?”


다시 대답하지 않았다. 소린은 문득 갑갑하다 여겼지만 내색 않았다. 그가 또 한 걸음을 내뻗던 순간, 파사삭하고 위태로운 소리가 들렸다. 스란두일이 반 걸음 아래서 발을 헛디딘 것이었다. 소린이 급히 손을 뻗어 붙들었다. 손목을 끌어주자 경사를 올라오기는 하였으나 몸짓이 힘들었다. 스란두일은 표정으로는 아픈 내색을 않고 발목만 흙 위에 끌었다. 땅에 딛고 누르자 그제야 통증이 밀려왔다. 앞으로 올라오지 않고 가만히 멈춘 것을 보던 소린이, 희고 단단한 용족의 손목을 한층 더 힘줘 당겼다. 스란두일의 몸이 딸려가나 싶더니 허리가 들렸다. 그대로 몸은 소린의 어깨 위에 안착했다. 하체는 소린의 앞으로, 상체는 소린의 등으로 하고 반 접히듯 들메어진 그는, 갑작스레 뜬 발에 적응하지 못하고 몸을 틀었다. 움직이는 허리를 소린이 힘줘 붙들었다.


“무슨 짓입니까, 소린?”

“이 상황에서 체면을 따지고 싶소?”


허리를 붙든 손에 살과 뼈가 눌려 몹시 아파, 스란두일은 비명을 목 가득 채웠다. 수치심과 피가 쏠려 이미 얼굴은 달아올라 있었다. 소린의 등 뒤로 경사가 까마득했다. 저도 모르게 앞의 목에다 팔을 감고 붙들었다. 눈을 꼭, 감았다가 떠도 수치심과 두려움이 뒤섞여 사라지질 않았다. 가슴보다 얼굴이 낮은 탓에 피가 쏠리고 제 심장이 뛰는 소리가 들렸다. 


“난쟁이 남자들은 어릴 때에 아비와 시간을 많이 보내지. 보통은 세공이나 철을 다루는 법을 배우지만 어린 아이들이 별 수 있겠소? 아비에게도 장난을 거는 게지. 내 또래 난쟁이 중 하나가 특히 제 아비의 어깨에 이리 매달리는 것을 좋아했소.”


한 걸음씩 딛는 게 아까보다 확연히 느렸다. 땅을 스치는 난쟁이의 발 소리는 느리고 안정적이었다. 스란두일은 그것이 제 몸무게가 실려서인지, 혹은 어지러울 저를 배려한 것인지 궁금했다.


“별 것 아닌 것인데, 그게 왜 그리 부러웠는지 모르겠소. ……다른 아이들에게 놀이는 단지 놀이지만, 왕세손에게는 그게 아니지 않소?”


소린의 말에 스란두일은 어린 난쟁이왕손의 모습을 상상하였다. 또래와 어울리는 일이 크게 없이 아래형제들과는 다른 교육을 받고 자랐으리라. 작고 귀한 의자에 앉아 제왕학을 더듬더듬 읽고 무슨 뜻인지도 모르며 암기하였을 어린 난쟁이의 모습은 지금의 소린과 쉬이 겹쳐 생각하기 어려웠다. 스란두일은 그의 어리던 손에 몇 살부터 망치가 쥐어졌을지 문득 궁금해졌다. 어릴 때부터 장난감 대신 책임감을 작고 도톰한 손 한가득 쥐고 있었으리라. 그는 소린이 이 여행에 가진 애착을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작은 검 하나를 벼르는 데에도 모두의 기대치를 채워야 했을 왕세손이었을 터인데, 하물며 인생을 걸고 하는 여행이라면. 


스란두일은 이어서 제 어릴 적 용의 성이 가졌던 모습을 떠올리려 애썼다. 스란두일의 아비는 요정왕이었다. 요정왕은 숲요정국의 왕좌를 지키느라 용의 성에 들어온 적이 드물어, 어린 그는 어미 곁에서만 자랐다. 어미가 왜 제게 차가웠는지, 스란두일은 성년이 다 된 지금까지 알 수 없었다. 그가 모친과 관련해 기억할 수 있는 것은 일부였다. 그러나 책을 읽어주거나 살갑게 대하던 기억이 없는 것은 확실했다. 떠올리려 하면 할수록 유년은 흐리기만 했다. 혼탁한 기억은 피다 만 꽃처럼 닫혀서 시들지도, 꽃잎을 펴지도 않고 언제까지고 실제의 향과 색을 드러내지 않은 그대로일 것 같았다. 스란두일은 제 유년의 기억이 온전하지 않은 이유가 차가운 모친 때문이라고 넘겨짚었다. 상처를 받고 아팠다면 기억할 연유가 없으므로 굳이 돌이키지 않았다.


생각을 잇던 스란두일은 제 입술이 소린의 어깨를 누르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저도 모르게 놀라 화들짝 떼었다. 내색 않으려 했으나 가슴 뛰는 것이 업힌 등에 전해지지는 않을까 싶었다. 소린의 발이 조금 느려지는가 싶더니 그를 내려주었다. 아까보다는 경사가 낮고 제법 넓은 평지였다. 스란두일은 여태 가시지 않은 발목 통증을 내색 않으며 바로 서려 했으나 못내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어설프게 발꿈치를 공중에 띄웠다. 소린이 그 모습을 놓치지 않고 훑었다.


“왕가에 태어난 것이 다 그렇지 않습니까.”


스란두일의 말에 소린은 나쁜 뜻 없는 실소를 가볍게 흘렸다. 그는 스란두일의 앞에 한 쪽 무릎을 굽히고 앉아 가만히 발목을 보다가, 이번에는 어깨와 다리 아래에 제 손을 집어넣어 번쩍 안아 들었다. 몸이 화들짝 들리는 통에 스란두일은 급히 숨을 들이쉬었다. 소린은 그를 풀이 자란 땅 위에 내려놓고 장화를 벗겨 주었다. 제 발목을 드러내게 해놓고 짐을 뒤지는 소린의 등에다 무어라 말하려다가, 그는 입을 다물었다. 소린은 붕대를 꺼내어 그의 다친 발에다 힘 있게 당겨 감아 주었다. 고귀한 타국의 왕손이 제 앞에 무릎 꿇은 채 장화를 신겨 주려 하기에 그것만은 제가 하겠다 했다.











산은 굉장히 어두웠다. 그제야 소린은 둘이 지나온 숲과 이곳 산이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들어올 때 없던 죽은 나무들이 곳곳에 검게 말라 붙어 있었다. 


“주위를 함께 경계해 주십시오. 오르크들이 요즘 들어 이 근처에 자주 나타난다 들었습니다. 이미 지나온 아래는 흙이 깨끗하지만 여기서 더 깊이 들어갈수록 냄새가 진동할 것입니다.”


스란두일의 말에 소린은 다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찢긴 채로 거무죽죽하게 흩어져 있던 제 아비의 시신이 떠오르지 않은 바 아니었으나, 금방 떨쳐내었다. 그리고 이 산의 다른 지명을 떠올렸다. 비탄의 산. 슬픔과 한탄이 쌓여 산을 이루고 있는 듯, 검고 어두운 곳이었다. 위로 올라갈수록 흙은 더 검어지고 산 생물은 보기 힘들어질 것이었다. 정신을 잃고 떠도는 광인들이 유독 많은 곳이라고도 알려져 있으나, 성년식을 치르러 가는 용족이 아니고서는 들르는 이들도 없어서 이곳 산의 위에 무엇이 사는지 정확히 아는 자들은 드물었다. 


“걸을 수 있겠소?”

“덕분에 좀 편합니다.”


다행히, 한동안의 앞은 평지에 가까웠다. 먼저 소린이 걸음을 떼었고 스란두일이 절뚝이며 따라갔다. 허나 평지는 짧았고 산은 오를수록 험했다. 촉촉하고 매끄럽던 흙은 진흙탕이 되어 둘의 장화에 엉겨 붙었다. 발이 지치니 몸도 금방 따라 지쳤다. 이따금 가시를 단 식물들이 보였고, 산지 죽은지 눈으로 구분 가지 않았다. 힘없이 늘어진 나뭇가지들 사이에 움직이는 것은 거의 없었다. 마치, 누군가 생명의 흔적을 산 정상에서 이곳까지 쓸어서 지운 것 같다고 소린은 생각했다. 뒤를 보니 스란두일의 표정은 내색 않으려 하더라도 못내 굳어 있었다.


“산을 돌아가는 방법은 생각해 보지 못한 것이오?”


원망조가 섞인 소린의 말에 스란두일은 고개를 저었다.


“양쪽으로 계곡이 높아 아예 오를 수가 없는 곳입니다. 더 돌아간다면 일주일은 걸어야 할 테고.”


거기에 대고 마땅히 답변할 것이 없어 소린은 입을 다물었다.


“산을 넘어가면 인간들이 지내는 마을이 하나 있습니다. 이런 진창보다는 낫겠지요.”


머물 수 있는 곳이 없을 듯해 보일 때에 밤이 깊었고, 아래의 숲과 달리 산은 누울 풀도 마땅찮아 보였다. 그나마 넓어 보이는 바위를 겨우겨우 찾는 데에도 달빛이 옅어 오래 걸렸다. 둘은 지쳐 있었다. 서로 등을 맞대고 좁은 바위 위에 누웠다. 맞댄 등이 불편하였으나 둘 모두 떼지 않았다. 음산한 기운에 오래 잠들지 못했으나 이야기를 나누지는 않았다. 달도, 별도 옅어 무엇이 다가오는지 볼 수 없었다. 소린은 깨어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였다. 그러나 산의 위로부터 내려오는 듯한 불쾌한 기분은 어찌된 것인지 졸음까지 가져왔다. 눈이 감길 때까지 그는 스란두일의 등에서 전해지는 체온의 감각을 불안히 붙들고 있었다.











스치는 듯, 혹은 무언가를 긁는 듯한 소리에 까무룩 잠들었던 것을 겨우 깨었다. 붙이고 있던 등이 허전해서 뒤를 돌았다. 스란두일의 몸이 팔에 걸리지 않아 의아했다. 온전히 몸을 돌리고 겨우 시야를 떴을 때, 소린은 어둠 속 몇 걸음 앞, 힘없이 위에서 아래로 늘어지는 백금발을 분간할 수 있었다. 눈 감은 흰 얼굴도 공중에 뜬 듯 어슴푸레하게 보였다. 누군가 그를 데려가고 있었다.


“스란두일……?”


꿈인지 분간하기도 전에 몸이 먼저 튀어 나갔다. 그러나 따라잡지 못했다. 어두운 와중에도 한 가지의 형체만은 더 분간해 낼 수 있었다. 인간이었다. 몇 걸음 따라가지 못하고 놓쳐 버렸다. 이미 보이지 않는 것을 따라 방향만 곧게 내달리다가, 퍼뜩 정신이 들어 주변을 돌아보았다. 어둠 속에서 몇 그루의 죽은 나무만 겨우 보일 뿐이었다. 


스란두일. 입속으로 이름을 삼키고 눈을 똑바로 떴다. 아둔한 시야에 화가 치밀어 올라 이를 앙다물었다. 다시 걸음을 내딛었다. 바닥을 기어 더듬었다. 혹여 스란두일이나 그를 데려간 자의 발자국이 남아있을까, 어둠 속에서 진창 속을 손으로 헤집어 보아도 찾을 수 있는 것은 제 발자국뿐이었다. 더러워진 손을 주먹 쥐고 혹여나 하는 생각에 짐을 놓아 둔 곳으로 돌아가려 했다. 그러나 이미 방향감각을 잃은 뒤였다. 걸음이 길을 잃고 금방 어지러워졌다. 마법도 환각도 아닌 것이 나무들 사이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숨이 턱, 막혔다. 망연했다. 소린은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앉았다. 상체까지 쓰러지지는 않으려 주먹을 바닥에 꽂았다. 


길잡이가 용을 잃었다. 


자책감이 머리를 채워 몸까지 저릿했다. 한참 땅을 짚고 있던 소린은 다시 일어나 헤매기 시작했다. 스란두일의 마지막 눈 감은 얼굴이, 어둠 속에서 부유하는 듯 기이하던 모습이 환상처럼 어른어른하게 남아서 시야를 괴롭혔다. 그렇게 소린은 이틀 가까이를 꼬박 새어 가며 산을 헤맸다. 그러나 어떠한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인간이, 무슨 연유로 용을 탐냈는가. 그것이 소린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해가 한 번 뜨고 다시 질 때까지 산의 경사를 오르내리며 헤매기를 반복하는 동안, 어째서 인간이 용을 탐낸 것인지 알아내려 생각을 쥐어짰다. 그러나 알 수 없었다. 의미 없이 오르크들이 습격하는 경우는 있을 수 있었으나 성년식의 길에 인간이 용을 탐냈다는 이야기는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아니, 용이란 한낱 인간 종족이 탐낸다고 데리고 갈 수 있는 종족이 아니었다. 그래서 소린은 더더욱, 제가 보았던 것이 환영이 아닐까 싶었다. 행여 이 고약한 산이 둘을 갈라놓고 여행을 망치려 환상을 준 것은 아닌가 싶었다. 붉어진 눈을 비비며 진창 위에 아무렇게나 주저앉았다. 두려움인지 아쉬움인지 모를 기분이 어지럽게 섞여 그가 숨을 몰아쉬게 하였다.


당신이 어째서 그리 쉽게. 가운데땅에서 가장 강한 종족이, 어째서. 이해가 되지 않고 가슴이 갑갑해서 이만 악물었다. 몰아치는 감정과 걱정 속에서 그는 스란두일의 말을 기억했다. 산 너머에 있다는 마을에 사는 인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발걸음이 빨라졌다. 거의 검정에 가까운 진흙이 바지를 적셨다. 후들거리던 걸음이 점점 집요해졌다. 몸에 가득 찬 피로가 중독처럼 그를 움직이게 하고 있었다.


이대로 여행을 관두고 에레보르에 돌아갈 수는 없다, 찾아내야 한다. 머릿속에 굴리고 또 굴려 반복된 생각은 충혈된 눈으로 드러나고 있었다.











난쟁이가 철을 다루는 기술은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다. 그들은 철을 사랑하는 것을 넘어 지배할 수 있게 되었다. 난쟁이가 다루지 못하는 금속은 없었다. 가운데땅에 있는 대부분의 무기들은 난쟁이의 기술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다양한 종족들이 그들의 대장간에 들어가 일하기를 자처하였다.


에레보르의 역사서 중에는 여태 그들이 낳은 무기들을 수록한 책이 수백 권이었다. 수백 권에 이르는 장서, 그 속 수많은 무기 중에서 단 하나 기록되지 않은 것이 있었다. 속세에서는 굽이단검이라 불리는 것이었다. 성년이 지난 난쟁이의 팔뚝만한 작은 굽이단검은 날의 검은 빛을 제외하면 다른 단검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러나, 이 단검이 기록되지 않은 이유가 있었다. 용족이 난쟁이들에게 만드는 것을 금지시켰기 때문이었다.


굽이단검의 날인 검은 금속은 빛이 거의 반사되지 않는 먹빛을 띠었다. 다른 금속과 다르게 이 검은 금속은 빛을 산란하는 것이 아니라, 도로 주변의 빛을 먹어대었다. 용족은 난쟁이들에게 검은 금속을 쓰지 못하게 하였다. 빛을 먹어 들어가는 그 금속은 용의 성 아래에서만 채굴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허나 난쟁이들의 갈구심은 높았다. 한참 동안 사신들이 양국의 긴 거리를 말과 조랑말을 타고 오갔다. 그러나, 용의 말을 감히 무시할 수 있는 종족은 없었다. 난쟁이는 처음 만든 굽이단검을 파기하지 않는 대신 검은 금속을 다시 벼르지 않겠다 약조하였다. 그렇게 검은 날을 가진 단검은 단 한 자루만이 남게 되었고, 기록되지 않았다. 그리고 소실되었다.













독일어; Eid [ait]  
[남성] 선서;(신 또는 성스러운 것에 대한) 맹세, 서약, 서언(誓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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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린스란 중장편/비가 그친다면

비가 그친다면





맹인 소린 x 몸 파는 스란두일로 소린스란 현대A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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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번호는 저랑 맞팔이고 성인이시라면 알려드려요.












나는 끝없이 젖을 테지. 당신이 떠나기 전까지 무한하게 자라날 감정에 곰팡이를 피워가며 기다릴 순 없어. 나는 당신을 버림으로써 살아남을 거야. 썩은 뿌리는 구제하지 못해. 나를 뽑지 마, 나를 가져가려 하지 마. 여기는 내 집이야. 그리고 당신은,




비가 오는 날, 스란두일이 씌워주었던 우산은 소린의 머리 위에서 끝없이 빗소리를 내며 흔들렸고, 거리는 지나치게 조용했다. 비가 곧 그칠 것 같아. 그는 스란두일의 그 말이 거짓이라 생각했다. 우산 위로 떨어지는 물방울이 도통 가늘어지지 않기 때문이었다. 이 산책을 길게 하고픈 마음에 덧붙이는 말이리라. 소린과 맞닿은 스란두일의 왼쪽 가슴이 가쁘게 오르내렸다. 이미 둘의 바깥 어깨는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소린은 그가 지을 달뜬 표정을 상상했다. 손 끝으로 읽어냈던 스란두일의 얼굴은 결코 흐리지 않았다. 곧은 눈썹뼈나 고집 센 턱, 소린의 손가락 새를 간질일 정도로 긴 속눈썹. 그 위에 달뜬 표정을 당장이고 손 끝으로 읽고 미소 띤 입술에다 입 맞추고 싶었다. 스란두일은 걷기 힘들어하는 그의 허리를 감싸고 끌어당기느라 소린의 지팡이가 헛걸음 딛는 것도 상관 않는 듯했다. 그는 바쁜 걸음으로 소린을 선물 가게로 이끌었다. 겨울이잖아, 그치? 연말이고 말이야. 그가 가게 문을 열어주며 끌어당길 때에, 소린은 지팡이를 더듬으며 겨울이 어떤 것인지 문득 기억나지 않아 되새겨야 했다. 


한참 선반을 훑던 스란두일이 소린의 손에 쥐어 준 것은 스노우볼이었다. 소린은 매끈하고 차가운 구체를 쓰다듬으며 안에 들었을 것을 상상했다. 예뻐. 정말 예뻐. 아저씨 손이 움직일 때마다 눈이 거꾸로 쏟아져. 소린은 스란두일의 그 말 또한 거짓이라 생각했다. 얼음 아닌 하얀 입자들이 작은 공간에 떠다니는 것은 생각보다 볼품 없을 거라 여겼다. 그러나 그는 큰 손 안에 스노우볼을 감싸고 말했다. 이걸로 하지. 너도 같은 걸로. 스란두일의 만족스런 웃음은 보이지 않아도 익히 알 수 있었다.







소린의 재규어에서는 아주 옅은 모과향이 났다. 스란두일은 그 향이 앞좌석에서 운전하는 소린의 기사가 가진 싸구려 취향 탓이라 생각했다. 그래도 기사는 제법 과묵한 편인 것 같았다. 백미러로 스란두일을 훔쳐 보지도 않았으며, 뒷자석에 앉은 그가 소린의 목을 감고 질척하게 입 맞추더라도 불편한 내색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소린은 그를 찾아올 때 일부러 차를 잘 가지고 오지 않는 듯했다. 스란두일은 흠집 하나 없이 깨끗한 차창, 새겨진 로고를 손톱으로 긁어 보며 이 차의 뒷자석에 올랐을 사람들을 상상했다. 


가져다 팔면 하나 당 적어도 몇백 달러는 벌 것 같은 시계며 반지를 볼 때, 소린이 그것을 아무렇지 않게 스란두일의 화장대에 올려 놓을 때, 그의 가방을 몰래 뒤지다 점자판으로 된 말라르메의 시집을 발견할 때, 그의 지갑에서 갈색의 풍성한 머리칼을 가진 예쁜 소녀의 사진을 찾았을 때, 그는 소린을 궁금해 않으려 애썼다. 스란두일은 소린을 뒤에 두고 낡은 수첩에다 종종 일기를 썼다. 그에게선 젖은 종이 상자 같은 냄새가 나, 그게 꼭 장님의 냄새 같아. 우리의 불행은 서로에게 입혀주는 옷과 같아. 나는 그의 불행을 사랑하고 그는 나의 불행을 원하지. 머리가 오른쪽으로 기운 필기체로 적어 내려가다 보면 소린이 뒤에서 안고 어깨에 입 맞추는 게 종종 느껴졌다. 스란두일은 그가 보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손바닥으로 글자를 가렸다. 돌아 앉아서 소린의 흐리고 뭉개진 두 눈을 마주한 순간, 스란두일은 매번 그의 본래 눈동자 색을 궁금해 하고 상상했으나 차마 입 밖으로 내어 묻지는 못했다. 그는 소린의 본래 눈동자 색을 알게 될까 두려워했다. 두려워하는 것을 감추려 입을 맞추고 몸의 구석구석에다 소린의 손을 이끌 때에 그는 처음 빛을 잃고 망연할 소린을 떠올렸다. 


당신은 어떻게 견뎠어? 어둠으로 내동댕이쳐진 순간, 내 의지가 아닌데도 장막 속에 갇히는 순간, 더럽고 냄새 나는 흙에다 뿌리 내려야 하는 것을, 그렇게 살아남아야 함을 깨닫는 순간. 당신은 얼마나 절망했어? 


스란두일은 이따금 소린의 검은 곱슬을 사납게 움켜쥐었다. 뒤에서 힘주어 잡아당겨도 장님의 두 눈은 당혹감을 보이는 적이 없었다. 불만족스러웠다.







비가 오는 날 스란두일은 오전 늦게까지 잠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전날 아무리 일찍 눈을 붙여도 마찬가지였다. 덕분에 비 오는 날 밤에 스란두일을 찾아간 소린은 다음 날 아침, 오래도록 그의 맨 등을 쓸고만 있어야 했다. 난 비가 싫어. 정말 싫어. 꼭 몸 속까지 푹 젖어서 움직일 때마다 물이 나올 거 같아. 그러나 스란두일의 반지하 방은 비가 오지 않는 날에도 늘 눅눅하게 습기 차 있었다. 젖은 날에 만지는 그는 꼭 비에 아파하는 꽃을 연상케 했다. 잎마다 젖어서 힘이 빠지고 허리까지 구부정하지만 분명 그 색만은 오히려 더 진할 터였다. 


소린은 잠든 그의 머리칼을 만지는 것을 좋아했다. 스란두일은 제 머리색이 물 빠진 블론드고, 빵 위에 바른 꿀 색 비슷하다고 표현했다. 소린은 그 표현이 마음에 들어서 스란두일의 머리칼을 만질 때마다 꿀 바른 빵의 달콤한 향을 떠올렸다. 이곳 골목은 발 닿는 곳마다 온통 썩은내가 진동했으나 스란두일의 체향만은 달게 느껴지는 연유도 그 때문이었다. 소린은 스란두일의 방에서 종종 후각을 잃었다. 달달하게 그에게 취하면 날카로운 그의 후각도 별 도리가 없었다. 별 수 없이 촉각으로 그를 더듬어 찾으면 좁은 방에서 인스턴트 누들 박스나 날카로운 콘돔 포장지를 지나 그의 보드라운 살갗까지 금방 닿을 수 있었다. 여기서 그를 찾는 것은 결코 맹인인 소린에게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깰 줄 모르는 그의 맨 등에다 입을 맞추고 조용히 속삭였다. 네가 나를 묶는군. 










말이야, 사람 눈을 읽으면 거짓말을 알 수 있다고 하잖아. 스란두일은 길게 담배 연기를 뱉고 말했다. 소린의 어깨에 기댄 머리통이 작게 옴짝거렸다. 소린은 코 끝에 닿는 스란두일의 머리 냄새가 좋아서 고개를 틀고 정수리에 코를 묻었다. 손으로 감싸 안고 살짝이 헝클어뜨렸다. 부드럽고 자극 없는 냄새였다. 장님에게 자극이 없는 냄새란 드묾에도 불구하고. 스란두일은 말을 이었다. 난 그거 거짓말인 거 같아. 아저씨는 매일 나한테 거짓말 하잖아. 무심히 내뱉은 말 끝과 동시에 소린의 입술에는 스란두일이 피던 담배가 물려졌다. 그는 스란두일의 타액으로 이미 축축한 필터를 엄지와 검지로 쥔 채 깊이 빨았다가, 내뱉었다. 다시 한 모금. 그리고 스란두일이 라이터를 켰다 끄길 반복하는 소리가 들렸다. 소린은 눈 앞 전경을 상상했다. 몇 개의 전깃줄과 낡은 건물, 비를 피해 간판 아래에 자리 잡았을 몇 마리 비둘기, 비에 젖어 흉하게 얼룩진 시멘트 벽. 스란두일이 매일 보고 있을 전경이었다. 그리고 이 문 앞에서 그는 필시 홀로 담배를 태우며 자신을 기다렸을 터였다. 때로는 새벽이 깊을 때까지 기다리다가 다른 남자를 찾으려 골목까지 나갔으리라. 둘이 처음 만났던 골목에서, 낙서가 가득한 벽에 몸을 기댄 채, 품이 큰 셔츠를 입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누군가와 눈이 마주칠 때까지.


있지. 라이터 만지기를 그친 스란두일이 말했다. 고마워. 소린은 앞뒤로 생략된 말을 읽어낼 수 있었다. 손을 뻗어 어깨를 끌어안았다. 코 끝을 묻었던 머리카락에 입술까지 묻었다. 스란두일의 집이 있는 골목 앞, 연말 답지 않게 내리는 비는 미적지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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