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배준호 중장편'에 해당되는 글 5건

형배준호 중장편/세상의 끝

세상의 끝 4



준호는 어릴 때부터 바닷가나 큰 강 근처에 살아 본 적이 없었다. 동생이 죽기 전에 딱 한 번 가족들끼리 함께 바닷가에 갔던 적이 있었다. 바람이 불면 볼이 얼어붙을 것처럼 추운 겨울이었다. 부둣가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밤이 깊었기에, 아버지 차에서 내린 준호가 생전 처음 접한 바다는 검고 거대한 겨울 밤바다였다. 졸려서 칭얼거리는 동생의 손을 꽉 잡고 한참을 홀린 듯이 그 큰 일렁임을 바라보았다. 준호는 동생에게 말했다. 저거 봐, 저 시커먼 게 바다래. 눈을 부비던 동생은 오빠의 소매를 늘어뜨리며 곁눈으로 바다를 바라보았다. 달빛이 비치는 검은 물 아래에 무엇이 있을지 어린 준호는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날 이후로 어쩐지 큰 물을 생각하면 그날의 차가운 비린내와 바다 위에 비치던 달빛들, 본 적 없는 거대함에서 느꼈던 공포가 다시 떠오르는 것이었다. 그에게 바다는 결코 들여다 볼 수 없는 하나의 낯선 세계가 되었다.


동생이 죽은 후 가족들은 더 이상 여행을 가지 않았다. 바다는커녕 가까운 계곡이나 산으로도 가지 않았다. 거실의 커튼은 먼지를 먹었으며 냉장고에 곰팡이가 폈다. 집에 만연한 우울을 견디지 못한 아버지는 아예 지방으로 직장을 옮기고 거기서 혼자 살았다. 어머니가 정식으로 이혼을 결심했노라고 열여섯 살의 준호에게 울며 고백했을 때, 준호는 엄마의 결심이 생존을 위한 것임을 알았다. 모두 같이 살아 남으려고 그러는 거지? 괜찮아요. 내가 아직 애도 아니고. 이미 많이 사랑해 줬잖아요. 결국 소리 내서 오열하는 엄마를 안아줄 때에, 준호는 바닷가에서 잡았던 동생의 작은 손을 떠올리기도 했다. 네가 살아 있었다면 보지 못한 세계에 대한 그 공포를 함께 기억할 수 있었을까, 저 아래 끝없을 것 같던 심연을 보고 느꼈던 어린 아이의 막연하던 감정을 남매로서 공유할 수 있었을까. 











형배를 찾는 일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준호는 처음에 그가 다니는 학교 근처로 갔다. 이미 야간자습시간이 다 지난 학교는 당연하게도 불이 꺼지고 문이 닫혀 있었다. 황망해져서 담 근처를 빙빙 돌다가 형배네 학교 교복을 입은 학생 셋을 골목 어귀에서 마주쳤다. 어둠 속에서 깔깔거리며 웃던 셋이 준호의 시선을 느끼고 대화를 멈췄다. 남자아이 하나가 일어섰다. 준호는 그제야 조금 드러난 가로등 빛에 교복의 모양새를 온전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넥타이 색깔이 형배의 것과 같았다.


“3학년이시죠?”


무어라 입을 열려던 남학생이 삐딱하게 선 자세를 천천히 고치며 뒤의 일행을 한 번 보고, 다시 준호를 마주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교복바지에 손을 꽂자 마이 주머니에 들어 있는 담뱃갑이 빼꼼히 보였다.


“혹시 최형배라고 아세요? 어디 있는지.”


남학생의 미간이 잠깐 구겨졌다. 


“걔는 왜?”

“제 형인데요, 며칠 안 보여서 찾으러 다니는 중입니다.”


거짓말이 아닌데도 침이 마르고 부끄러워졌다. 준호가 시선을 피하지 않으려 애쓰는 동안 남학생은 다시 일행을 한 번 돌아보고 눈짓을 교환했다. 이내 골목 밖으로 온전히 걸어나온 그가 준호의 바로 앞에 섰다. 손가락을 들어 건물 하나를 가리켜 보였다.


“저기 A라고 쓰인 간판, 보이지? 뭐, 오늘 있을진 나도 장담 못하지만.”

“감사합니다.”


준호는 화하게 화색이 도는 것을 감추느라 볼살을 깨물고 고개를 숙였다.


입구에서 들어가지 못하고 한참을 맴돌았다. 대학생인 듯도 하고 그보다 나이가 많아 보이기도 한 남녀들이 서넛 혹은 두셋이서 무리를 지어 A자 네온사인 아래 지하로 들어갔다. 교복을 입지 않고 왔어도 들어가자마자 쫓겨날 게 뻔했기에 준호는 발만 굴렀다. 슬슬 추위가 몸에 퍼지고 있었다. 슬리퍼에 져지 차림으로 나온 게 그제야 후회되었다. 얼어서 새빨개진 손끝을 주머니에 넣고선 형배의 넥타이를 만지작거렸다. 한참을 참다가 지하 계단으로 뛰어들어갔다. 아니나 다를까, 유리문을 열고도 들어오지 못해 어영부영 서서 눈치 보는 준호를 발견하고 바에 서 있던 남자가 다가왔다. 준호는 빠르게 주변을 돌아보았다. 이방인을 보는 시선이 한결 같은 모양새로 날아와 꽂혔다. 겁이 났으나 내색 않고 마른침을 삼켰다. 등 뒤에서는 문이 닫히느라 종소리가 요란했다.


“저, 사람 좀 찾으러 왔습니다.”


바텐더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곤 준호를 아래위로 훑어 보았다. 그때 바 안쪽 룸에서 형배가 나왔다. 검은 자켓을 걸치며 다가오는 그의 뒤에 검고 긴 생머리에 흰 얼굴을 한 여자가 따라 나왔다. 감색 원피스에 달린 비즈가 바 조명에 반짝였다. 여자는 형배의 허리에 팔을 감았다가 시선을 느끼고 준호를 바라보았다. 예쁘고 동그랗고, 사나움이 없는 눈이었다. 준호는 얼어붙은 발가락을 슬리퍼 위에서 꼼지락거리며 말았다. 눈앞에 있는 의붓형의 모습에는 검은 바닷물처럼, 현실성이 하나도 없었다. 주머니 속 형배의 넥타이를 힘껏 움켜쥐었다. 시선을 떼지는 않았다.


“형.”


이라고, 처음 불렀다. 바텐더가 형배를 돌아보곤 턱짓했다.


“아는 애냐?”


가까이 다가오고서야 형배가 대답했다.


“동생임더.”


그의 시선이 준호를 아래위로 순식간에 훑었다. 바텐더와 똑같은, 경계 친 눈빛에 준호는 찌릿하게 가슴이 아파옴을 느꼈다. 나가자, 하고 말을 던진 채 먼저 등을 보이고 계단을 올라서는 형배를 따라 도망치듯 A를 나왔다. 인적 없는 골목 안쪽으로 들어간 형배가 담배에 불을 붙이고 건물벽에 기대섰다. 가슴 깊이 들이켰다가 길게 한 모금을 뿜을 때까지 둘은 시선만 마주한 채 말을 않았다. 두 모금 째를 뱉은 형배가 먼저 입 열었다.


“안 춥나?”

“추워요.”

“춥다 카면서 옷은 와 그래 얇게 입고 밤에 싸돌아댕기노?”


형배의 손이 눈앞까지 뻗어와 준호는 순간 반 본능적으로 눈을 움찔, 감았다. 흐트러진 머리칼을 정리해 주고 부드럽게 내려와 벌어진 카라를 세우고 당겨주는 동안 귓불과 턱에 형배의 손가락이 스쳤다. 아래를 보니 저보다 조금 더 큰 듯한 손이 깃을 여며 주는 모양이, 앞에서 담배를 문 채 찌푸린 형배의 얼굴이 어색했다. 준호는 그가 뱉은 연기와 깔끔하게 빗어 넘겨 어른 같이 반들반들한 머리칼을 보고 억울함이 이는 것을 느꼈다. 그에게서는 친아버지에게서도 맡아본 적 없는 짙은 향수 냄새가 났다. 여자 것 같았다. 감색 원피스의 반짝반짝하던 장식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정작 보이는 것은 격자무늬의, 교복이 아닌 넥타이였다. 


“여기가 형 지내는 곳이에요?”

“그래. 사장이 아는 사람이라가꼬.”

“집에는……안 올 겁니까?”

“가서 뭐하노. 여기가 편한데.”

“여기서 뭐하고 지내시는데요?”

“이야기하면 니가 아나.”


툭툭 내뱉는 말이 돌멩이처럼 하나하나 가슴을 때렸다. 져지 지퍼를 올려주고 다시 훑어보는 형의 시선이 준호에게 낯설었다. 준호는 희미하게 퍼지는 그의 담배 연기를 보며 밤바다를 떠올렸다. 상상하지 못할 검은 물 아래, 그 냉기와 선선한 비린내도 떠올렸다. 형배의 담배 쥔 손을 보며 그는 묻고 싶었다, 집을 떠나 온 당신의 세상이 여깁니까? 지독한 거리감이 파도처럼 차갑고 또 무거웠다.


화를 이기지 못하고 숨을 쌕, 쌕, 들이마시던 준호가 손을 뻗었다. 한없이 멀어 보이기만 한 형배의 넥타이를 잡아챘다. 바짝 끌어다 입을 맞추었다. 앞니가 부딪치고 입술이 짓눌렸다. 형배가 그의 어깨를 잡았다. 준호를 달래는 듯 입술을 축이며 부드럽게 혀를 움직였다. 조금씩 얼음을 녹이듯 두 입술의 온도가 녹아가며 비슷해졌다. 혀가 한참 더 뒤엉키자 준호의 몸이 먼저 반응했다. 단 한번 섞였던 몸 냄새를 기억하고서 본래 붙어야 하는 불인 양 화르르 피어올랐다. 드로즈가 슬그머니 불편해질 때쯤 그가 형배를 밀어냈다. 손등으로 젖은 입술을 훔쳤다. 억울함이 잔뜩 드러난 눈을 형배가 놀란 눈으로 마주했다.


“씨발, 뭘 어떻게 하란 거야.”


처음 듣는 의붓동생의 욕에 형배의 눈이 동그랗게 떠지고, 무어라 상황을 읽을 새도 없이 준호는 골목 안의 어둠에서 한 걸음을 뒤로 물러섰다. 


“알아서 하세요. 난 못 본 거니까, 아버지한테도 봤다고 이야기 안 할 겁니다.”


준호가 돌아섰고, 형배는 그를 잡지 않았다. 쨍한 네온사인과 몇 안 되는 행인들 사이로 동생의 모습이 비틀비틀 작아졌다. 슬리퍼를 신은 맨뒤꿈치가 빨개져 있었다. 형배는 손으로 입술을 더듬어 보았다. 앞뒤 없이 달겨든 탓에 아직도 앞 잇몸이 얼얼했다. 그새 거의 타들어간 담배를 마지막으로 한 모금 삼켰다가 뱉고는, 땅에다 던졌다. 


A로 도로 내려갔을 때 여자는 이미 가고 없었다. 형배는 헛헛해져서 소파 좌석에 아무렇게나 몸을 묻고 앉았다. 잔뜩 겁먹은 채 바 입구에 서 있던 준호의 겁먹은 눈이 떠올랐다. 제법 강단 있는 놈인 줄 알았더니, 의외의 부분에서 어린 티를 내는 게 은근하게 귀여웠다. 아랫입술을 가볍게 씹었다. 아직 통증이 미미하게 남아 있었다. 녀석은 누구냐 물을 수도, 저를 더 추궁할 수도 있었는데 화를 내고 가 버렸다. 그것이 찝찝했다. 어쩔 수 없이 한숨 지었다.











바 A에서 준호를 만난 이후로도 사흘이 더 지나고서야 형배는 집으로 돌아갔다. 그의 아버지는 아들과 눈을 마주치지도 않았다. 준호의 어머니는 형배에게 밥을 차려 주고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수저를 드는 의붓아들의 손등에 핏자국 비치는 반창고가 있었으나, 며칠씩을 말없이 집을 비우고 와서도 또 말이 없었으나 그녀는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반찬을 놓고 한 걸음을 물러섰다. 멀찍이 떨어진 그녀의 앞치마를 보며 형배는 어두운 골목으로부터 빛으로 물러서던 준호의 걸음을 연상했다. 나물 집던 젓가락을 멈추고 물었다.


“준호는예?”


새어머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찰나에 스치는 공포를 읽지 못할 리가 없었다. 고등학교에 들어가기도 전부터 눈칫밥 먹는 버릇을 길에서 배운 그였다. 


“준호 학원, 가는 날이야.”


어쩔 수 없이 말을 더듬고 부엌을 나가 버렸다. 새어머니의 뒷모습을 보던 그는 다시 숟가락 가득 밥을 퍼서 입에 넣었다. 식사 후 오랜만에 들어가 본 방은 놀랍도록 그대로였다. 며칠을 비웠는데도 모든 제 물건이 그대로여서 기시감이 들 정도였다. 단 하나, 책상 위에 교복 넥타이가 곱게 개어진 채 놓여 있었다. 형배가 그것을 집어 들었다. 제 물건인데도 낯설어서 한참을 들여다보다가, 자켓 주머니에 넣었다. 방에 준호의 냄새가 깊게 배어 있음을 그제야 깨달았다. 그는 준호의 침대 위에 앉았다. 아침에 등교한 후 그의 어머니가 정리해 주었을 이불을 들춰 보았다. 준호의 냄새가 한층 짙어졌다. 다음으로 그의 베개를 만져 보았다. 귀와 머리통이 닿았을 곳을, 방을 함께 쓰는 형제의 흔적을 남의 것처럼 손으로 더듬었다. 뭉근한 흥분감이 들었다. 의붓동생의 새빨개지던 얼굴과 서툴던 신음이 떠올랐다. 몸 섞었던 바닥을 보자 조금 더 몸이 동했다. 벨트를 더듬었다. 손가락이 조금씩 초조해졌다. 마침내 그는 서랍을 열어 준호와 섹스했을 때 썼던 로션을 꺼내었다. 뚜껑을 열자마자 익숙한 향을 맡을 수 있었다. 손바닥에 짜려다가, 무언가 생각난 듯 멈추고 뚜껑을 닫았다.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도통 화를 낼 줄 모르는 여자였다. 형배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녀는 형배가 만나 본 여자들 중 가장 말이 적었고, 착했고, 호기심이 없었다. 이름을 알고 몸을 알게 된 후로 처음 물은 질문이, 하필이면 그것인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걔, 니 친동생 아니지?


일부러 순흔을 내고 머리채를 잡아가며 사납게 관계하고서 늦은 저녁에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친아버지는 현관에서 그를 때렸다. 얼얼하고 아찔한 눈을 들고 맞은 뺨을 감싸며 넘어진 몸을 다시 세웠을 때, 2층에서 내려온 준호와 눈이 마주쳤다. 








'형배준호 중장편 > 세상의 끝'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세상의 끝 3  (0) 2015.12.29
세상의 끝 2  (0) 2015.12.21
세상의 끝 1  (0) 2015.11.30
,
2015. 12. 29. 20:42

세상의 끝 3

보호되어 있는 글입니다. 내용을 보시려면 비밀번호를 입력하세요.

형배준호 중장편/세상의 끝

세상의 끝 2

1편 바로가기





-





다시 아침이 오면 나는 너를 더듬고 더듬어 현기증을 환히 밝히고 가 보지 못한 세상의 끝을 네 품에서 찾을 텐데.








형배의 피 다른 동생인 준호는 형배의 친부에게서 크게 예쁨 받았다. 깡패질을 하고 다니는 친아들보다, 착실히 공부하고 싸움을 하지 않았으며 밤에는 나다니지 않는 새 아들이, 어른 말에 크고 밝게 대답하는 준호가 더 마음에 들었음을 친부는 거리낌 없이 드러내곤 했다. 가족 식사 자리마다 쉴새 없이 또래에게서 들은 농담을 풀고 적당한 애교로 웃어 보이던 준호는 형배가 보기에 환히 터지는 불빛 같아 보이기도 했다. 그는 형배를 은근하게 피했다. 형배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같은 집에서 숨이 닿을 만큼의 거리에서 어깨를 스칠 때마다, 그리고 함께 쓰는 방에서 이따금씩 눈을 마주칠 때마다 그는 저와 한 살 터울이라는 녀석의 웃는 얼굴에서 묘한 독기를 읽었다. 준호가 두려움 혹은 그 비슷한 이유로 저를 피하는 것이 아님을, 형배는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집안에서 없는 듯 머물던 어느 휴일에 형배는 준호와 그의 친모가 대화하는 것을 들었다. 신학대를 포기하는 게 어떻겠냐는 친모의 물음에 준호는 생각해 보겠단 말을 했다. 문틈으로 검은 뒤통수가 보였다. 몇 시간이 흐른 뒤, 이어폰을 꽂은 채 침대에 누워 있던 형배는 방으로 들어오는 준호의 기척을 읽었다. 의자를 빼는 소리, 작게 내뱉는 한숨, 이어서 한참 틈을 두더니 사각, 사각 가위질 소리가 들렸다. 형배는 눈을 떴다. 고개를 돌리자 준호의 옆얼굴이 보였다. 책상에 앉은 녀석은 사진을 자르고 있었다. 얼굴에 표정이 없었다. 호기심이 동한 형배가 상체를 일으켰다. 준호는 개의치 않는 양 계속 가위질을 해댔다. 가까이 가서 보니 한 장이 아니었다. 어린 여자아이의 얼굴과 한눈에 보아도 준호임을 알 수 있는 소년의 얼굴이 뾰족하게 조각 나 있었다. 준호의 가위날이 움직이는 모습은 마구잡이였으나 서두름이 없었다. 형배가 그의 손에서 가위를 뺏었다. 이내 준호가 그를 돌아보았다. 시선에 날이 바짝 서 있었다. 그가 벌떡 일어서자 비슷한 높이에서 둘의 눈이 마주쳤다. 그러나 그도 잠깐이었으며 준호가 돌아서서 방을 나가 버렸다. 흰 티셔츠를 입은 열여덟 살 준호의 등은 형배의 생각보다 넓고 높았다. 그는 준호의 책상 위를 내려다보았다. 어린 여자아이와 햇볕 아래 앉은 준호의 모습은 지금에 비할 바 없이 반짝였다. 











어린 최형배를 탐내는 조직은 부산에서부터 있었다. 나이 비해 눈빛이 세고 패기 있는 녀석을 막내로 들이기 위해 몇몇 조직은 형배가 다니는 학교까지 찾아오기도 했다. 어딘가에다 제 몸을 의탁하는 일은 언제든 가능했다. 그러나 어차피 목숨을 걸고 목숨을 맡기는 일이었다. 그는 어느 조직에다가도 응답을 주지 않았다. 교복을 벗고 정장을 입은 채 아슬아슬하게 어른들의 세계를 걸칠 듯 걸치지 않는 그를 보고 누군가는 어마어마한 집의 자제라 저렇다고도 하고 누군가는 어린 범 새끼가 굴 밖 사정을 하나도 모르고 하는 행실이라고도 했다. 그는 소문을 신경 쓰지 않았다. 해명하는 법도 없었다. 그저 제 밑의 고등학생들과 부산의 바닷가 근처 작은 골목마다 숨어들어 담배자국을 내며 조금씩 자랐다. 친부를 따라 서울로 온 이후 달라진 게 있다면 골목에서 혼자가 되었단 사실 밖엔 없었다. 길바닥에서 혼자라는 것은 결코 작은 변화가 될 수 없었다. 홀로 문 담뱃불은 어린 짐승의 위치를 드러내고 본래보다 더 긴 그림자를 만들어냈다. 어른의 치열함과 아이의 보호막 사이, 그 선에 자리잡은 최형배는 위태로웠다. 누구도 그에게 선택을 강요하지 않았으나, 선택해야 했다.


가을의 한가운데, 학교와 멀지 않은 자정의 어느 주차장이었다. 형배는 배에서 흐르는 피와 제 앞에 선 자의 번뜩이는 칼날을 보고서 처음으로 어른이 되겠다 결심했다. 저를 찌른 자에게 들개처럼 덤벼드는 그를 보고 상대방은 질려서 욕을 퍼부었고 결국 형배가 칼을 뺏어쥐었다. 상대가 도망가는 것을 보고서 형배는 일어섰다. 깊은 피로감 탓에 푸르고 흐린 주차장의 조명마저 눈이 부셨다. 저를 찌른 자가 누구인지 짐작하는 일은 매우 쉽고 또한 매우 어려웠다. 누구든 될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이 이미 먹잇감 된 짐승이라 여겼다. 적이 무엇이든 어떠랴. 형배는 누구 것인지 모를 칼을 집어다 자켓 안주머니에 꽂아 넣었다. 피를 흘리며 걸었다.


창상을 입은 채 집에 돌아가자 동생은 제 교복을 벗기고 상처를 치료해 주었다. 제법 능숙한 동작이었다. 형배는 점점 먹먹해지는 통증 속에서 준호의 바짝 굳은 얼굴, 정수리 위로 불빛이 반짝 반짝 터지는 것을 보았다. 애새끼, 하얗게 질린 꼴이라니. 웃음이 피실피실 새어 나왔다. 


“아버지한테 말하면 뒤질 줄 알아라.”


어금니를 씹어가며 부러 낮게 말했건만, 제 말에 주눅 드는 기색은 없어서 형배는 못내 아쉬웠다. 멋대로 잘라 버린 머리는 언제 다듬었는지 중학생처럼 짧아져 있었다. 묻고 싶은 말이 몇 가지 있었으나 현기증이 먼저였다. 점점 멀어지는 감각 속에서 준호의 손이 여러 번 제 몸을 스쳤다. 그 손끝이 차가웠다. 












준호가 가위질로 조각 내 버렸던 어린 여자아이가 죽은 친여동생임을 알게 된 것은 그 뒤로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귀가가 유독 늦었던 밤, 아버지의 역정이 두렵고 귀찮았던 나머지 형배는 돌을 집어다 동생과 쓰는 제 방 창문에다 톡, 톡, 두들겼다. 마침내 온갖 인상을 다 쓴 준호의 얼굴이 나왔고, 형배는 반가움의 표시로 맥주병으로 가득 찬 비닐봉투를 들어 보였다. 가스관을 밟고 올라오는 그를 준호가 붙들어 주었다. 팔과 손이 맞닿고 마침내 밤을 건넌 그는 창문 안으로 들어오며 준호와 뒤엉켜 굴렀다. 쿵, 쿵, 요란하게 침대에 부딪치고서 둘은 약속한 것마냥 동작을 멈추고 침묵했다. 부모님의 기척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겹친 몸을 일으켰다. 


“미친 놈이란 소리 좀 듣지 않아요?”


뾰족하니 묻기에 꼰대 같은 면이 있는 녀석이라 생각했다. 형배는 맥주병을 따다 준호에게 내밀었다. 기대치 않았으나 준호는 빼앗듯 병을 받고서 서너 모금을 단번에 들이켰다. 형배의 입가에 비죽이 미소가 떴다. 그것마저도 읽었을까, 준호가 곁눈질하더니 이것도 비밀입니까? 하고 물었다. 형배는 부러 대답하지 않았다. 준호의 침대 끝에 등을 대고 앉은 그는 한 손을 뒤로 뻗어다 시트를 만져 보았다. 동생의 몸 냄새가 났다. 그리고 그는, 그날 제 상체를 끌어당겨다 울던 준호의 정수리 냄새를 떠올렸다. 


둘은 시덥잖은 대화를 하며 단번에 서너 병을 비웠다. 취기가 올랐다. 


“제가 신부가 되면 걔도 천국으로 가겠죠.”


준호가 한 말의 의중을 비신자인 형배는 온전히 이해하기도, 납득하기도 어려웠으나 내려깐 눈에 담긴 감정만은 읽을 수 있었다. 그래서 신부가 되겠다고. 준호는 아까 전부터 취기가 올랐는지 상체를 좌우로 느리게 흔들고 있었다. 볼이 새빨갰다. 흰 티셔츠 아래 준호의 목선과 쇄골을 보며 그는 남은 맥주를 바닥 비웠다. 무릎을 세운 채 앉은 녀석의 구부정하고 마른 덩치를 보니 담배가 고팠다. 혀로 입술을 축였다. 맥주를 퍼붓는데도 갈증이 일었다.


“그래서, 세례명이 뭐라꼬?”

“아가토.”


아가토, 아가토. 생소한 언어가 주는 발음은 취기 가득한 입속에 쉽게 감기질 않았다. 이유를 모를 안타까움이 들었다. 그리고 형배는 그의 팔뚝을 잡고서 끌어당겼다. 바짝 당겨 온 귀에 대고 말했다.


“아까 물은 거,”


숨결 닿은 준호의 귀가 붉어지고 있었다.


“그래, 이것도 다 비밀이다.”


준호의 티셔츠 속으로 형배의 손가락이 파고들었다. 갈비뼈 끝에 검지가 닿자 숨 참는 소리가, 마치 신음처럼 형배의 귓불에 터졌다.





'형배준호 중장편 > 세상의 끝'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세상의 끝 4  (0) 2016.01.14
세상의 끝 3  (0) 2015.12.29
세상의 끝 1  (0) 2015.11.30
,
형배준호 중장편/세상의 끝

세상의 끝 1



새아버지의 아들은 이따금 다쳐서 왔다. 건너편 침대에서 훔쳐본 그는 들개 같은 표정으로 밤 내내 혼자 상처를 치료했다. 준호는 그와 같은 방을 쓴지 넉 달이 지나도록 말을 섞어 보지 못했다. 





낮에는 최형배, 제 새 형을 도통 볼 수 없었다. 새아버지는 아침상에서 저와 제 친아들을 비교하며 한탄했다. 어느 새벽에 준호는 화하게 방에 들어찬 젖은 흙냄새에 깼다. 숨 몰아쉬는 형배를 보고서야 그게 흙냄새가 아니라 피냄새인 줄 깨달았다. 다친 형배의 교복을 벗겨주는 동안 준호는 처음으로 그와 눈 마주쳤다. 고개를 도로 숙이고도 이마 위에 닿는 시선이 끈질겼다. 아버지한테 말하면 뒤질 줄 알아라. 어금니가 물려 발음이 뭉개졌다. 준호는 그에게 묻고 싶었다. 왜 항상 날을 세우느냐고. 형배의 교복 넥타이는 풀려서 양쪽으로 늘어져 있었다. 벌어진 가슴 위로 길게 늘어뜨린 그의 재색 넥타이가 준호에게는 쇠사슬처럼 여겨졌다. 달이 밝은 새벽이었다. 열아홉과 열여덟 살의 부모 다른 형제는 침대 아래 마주보고 앉은 채 아침까지 지샜다. 준호가 잠깐 조는 새에 형배는 사라졌다. 짙은 갈색으로 남은 핏자국 위에 그의 교복 넥타이만 남아 있었다. 환히 열린 2층 창문 밖으로 몸을 내어 보자 한기가 머리칼 새를 헤집어 놓았다. 비밀 하나를 떠안았음을, 준호는 그제야 깨달았다.





준호가 피 다른 형을 다시 만난 곳은 저녁의 학교였다. 형배는 교복 아닌 정장을 입고 준호네 학교 정문에 기대어 서 있었다. 제법 그럴싸한 수트에다 담배를 입술 한 쪽으로 빼어 문 형배는 열아홉 살로 보이지 않았다. 준호는 그를 못본 척 그대로 정문을 지나 걸었다. 뒤따라오는 걸음이 느껴졌다. 그가 멈춰 서자 형배 또한 거리를 두고 멈췄다. 거리 가득 저와 비슷한 교복을 바라보다가, 준호는 뒤로 돌아섰다. 언제 불 붙인 것인지 담배 냄새부터 쎄했다. 하필이면 그날은, 여동생의 기일이었다. 엄마는 재혼 후 여동생의 기일을 챙기지 않고 있었다.


"왜 따라옵니까?"


말 끝에 형배가 슬며시 웃었다. 나무를 짓누르는 쇠 같은 웃음이었다. 가을의 건조함에 눈이 뻑뻑해서, 준호는 미간을 구긴 채 형배의 대답을 기다렸다. 말이 없기에 도로 돌아섰다. 형배는 이제 준호 곁에 바짝 붙어 서서 걸었다. 


"니, 신부 될끼라매?"


비웃는 낌새는 없었다. 툭툭 땅으로 던지는 것 같은 말투는 버릇인 듯했다. 버스에 타고서 형배는 그의 빈 곁을 놔두고 앞자리에 앉았다. 각진 정장 어깨가 비스듬한 자세에 따라 잔주름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형배의 검은 얼굴 위로 네온사인이 차례차례 지나갔다. 준호는 그의 덩치가 이리 큰 줄, 그때 처음 알았다. 앞을 비스듬히 향하고 있던 형배 얼굴이 저를 향했다. 준호는 굳이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상처는 어떻습니까?"

"생긴 건 곱상해가 똑 애늙은이처럼 말하네."


준호의 눈이 살짝이 가늘어졌다. 형배는 웃었다. 불빛 탓에 그의 눈이 옅은 갈색으로 보였다. 준호는 다시 차창 밖을 보았다. 본래 내려야 할 독서실은 이미 한 정거장 전에 지나쳤다. 내색하지 않았다. 그대로 한참이고 같은 버스에 탄 채 몇 정거장을 지나쳤는데도 형배는 준호에게 목적지를 묻지 않았다. 본래 그래야 한다는 양, 익숙하다는 양. 준호는 그것이 싫었다. 형배가 형이 되고서 이사를 하고, 엄마를 절반 내어주고, 새벽을 빼앗겼으며 여동생이 죽은 날을 기리지 못하게 되었다. 바뀐 일상의 탓을 형배에게 돌릴 수 없다는 것쯤이야 준호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틀이 일그러지는 사실보다 더 싫은 것은 틀이 무너지고 있다는 제 자각이었다. 새로 생긴 형은 그에게 커다란 지표 같이 여겨졌다. 눈을 뜨고 감으면 있던 낯선 형의 흔적들. 그러나 그는 언제나 느긋하고, 덤덤하고, 이곳의 주변인 양 굴었다. 배에 깊은 상처를 입고 왔을 때마저도 그랬다. 준호는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길가 화단에 아무렇게나 앉았다. 되는 대로 내린 곳이라 여기가 어디인지 알 수조차 없었다. 도로 버스에 타고 납골당에 갈 수도 있었으나 혼자 가기가 싫었다. 제게 따라붙는 최형배를 달고 가기는 더더욱 싫었다. 형배는 그의 곁에 조금 떨어져서 앉았다. 


"신부 된다 카는 놈이 공부는 안 하나?"

"형은 그럼 고3이란 작자가 공부는 안 하고 옷 빼 입고 싸돌아다닙니까?"


말 끝나자마자 형배의 웃음이 푸스스 터져나왔다. 그는 일어서서 준호 앞에 섰다. 월광에 반질반질하게 빛나는 검은 구두도, 열아홉의 것은 아니었다. 시선을 들자 형배의 얼굴이 어둑하게 보였다. 웃음기 사라진 얼굴로 그가 손 뻗어 준호의 정수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손이 따스해서 놀랐다. 밤의 열기가 순식간에 화악, 가슴 어딘가에서 올랐다. 준호가 그의 손목을 쥐었다. 마주보고 있을 때의 그는 다친 짐승 같기도, 혹은 어딘가 갇힌 것 같아 보이기도 했다. 바람이 형제 사이로 불었다. 형배의 펄럭이는 자켓 자락은 꼭 향수내가 독하게 날 것 같았으나, 정작 그에게선 열아홉 사내 아이의 몸 냄새만 짙게 났다. 준호는 그의 자켓 자락을 끌어당겼다. 제게로 가까워진 상체에다 이마를 가져다 대었다. 뭐고, 하는 목소리가 먹먹히 들렸다. 그의 몸 냄새에 호흡을 담았다. 조금씩 울음으로 흐트러졌다.


밀어내지 않아 주어서 고마웠다. 우는 것을 알고도 묻지 않아 주어서 고마웠다. 들썩이는 어깨 위에 온기가 좋았다. 다행이었다. 한참 눈물 흘리고서 젖은 얼굴을 들어준 형의 손은 생각보다 다정하고 묵직했다.




'형배준호 중장편 > 세상의 끝'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세상의 끝 4  (0) 2016.01.14
세상의 끝 3  (0) 2015.12.29
세상의 끝 2  (0) 2015.12.21
,
2015. 8. 30. 01:15

짐승들의 방식 1

보호되어 있는 글입니다. 내용을 보시려면 비밀번호를 입력하세요.

  [ 1 ]  

최근 댓글

알림

이 블로그는 구글에서 제공한 크롬에 최적화 되어있고, 네이버에서 제공한 나눔글꼴이 적용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