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배준호, 형배조윤, 종성지원 단문들 백업
사령을 만나고 온 날에는 밤 깊도록 당신의 별에서 꿈을 앓았다. 희게 부서져 떨어지는 내 손을 당신이 받고, 나는 심연의 턱자락에서 손 뻗을 생각도 못한 채 가라앉고, 가라앉고, 다시 가라앉아……. 나의 박동이 나를 저주처럼 깨웠다. 새벽이 아파서 찬 휴대폰을 껐다가 다시 켜고, 모서리를 쓸며 당신의 쨍하던 눈썹 끝을 떠올리고, 목덜미에 닿던 짧은 손톱 감촉을 떠올렸다. 앓은 밤에 당신을 기억하면 반은 떠오르고 반은 문지른 사진처럼 기억나지 않았다. 생각이 저리게 아프면 기실 이것도 죄가 쌓여 남긴, 나의, 내가슴의 재 탓이라 여겼다. 당신은 나를 숲이라 여겼으나 나는 밤의 자락조차 잡지 못하는 몽돌이었다.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당신이 세례명 아닌 이름부터 내게 불러주었기 때문일까, 당신이 나를 부르는 발음은 늘 그러했다. 색으로 표현한다면 때 없는 산의 짙붉은 꽃일 테고 온도로 표현한다면 열 살 아이의 정수리에 떨어지는 햇빛일 터였다. 당신이 나를 불러 줄 때 나는 당신 안의 둥글고 흰 달을 보았다. 그 빛을 생각하면 이런 새벽도 괜찮았다. 우리가 더 둥글어질 수 있다는 믿음으로 시작했기에, 괜찮을 수 있었다. 이불로 턱을 감싸고 곁에 없는 당신을 곁에서 읽으려 눈 감으면 이따금 눈물이 흘렀다. 모자람보다 벅참으로 흘러내리는 것이었다. 당신이 좋았다. 당신의 사나움이 좋았다. 몸 섞은 후 죄를 뱉고 난 후의 기분처럼 허망하고 두려울 때 분분히 밀려오던 억울함조차도 사랑했다 말하면, 당신은 나를 두려워할까. 손가락 끝에도 기분을 모아 전할 수 있다면 수천 번 당신을 만졌을 것을.
한없이 붉어지던 새벽, 돌아오지 못할 달콤함, 영영 내 손금에 남을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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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여, 최형배 씨. 우리 솔직하게 쫌 이야기해 보까요? 목격자는 그때 신부가 둘 있었다 캤어. 뭐, 자꾸 신부 아이고 부제다 그러는데 씨발 나는 그런 거 모리고, 형배 씨가 피해자 집에 도착한 게 9시야. 맞죠? 아니 씨발 흥분하지 말고. 앉아봐요. 하여튼 깡패새끼들은 하나같이 검사를, 어? 좆같이 보지? 씨발, 앉으라고. 누구는 눈깔이 없어서 안 부라리나. 그래. 저 뭐야, 어디까지 했어. 그래, 부제님이 흉기를 든 채로 발견된 게 8시. 목격자는 5시에 신부 둘을 봤다 캤어. 지금 사건 전말 알고 껴든 거 맞아요? 아니믄 그냥 들이대는 거야? 보자......강남에 나이트, 부산에 호텔 서너 개, 창원에 빌라 두 채, 기타 등등. 어? 나는 당신 같이 팔자 좋은 깡패 새끼가 이런 사건에 끼어드는 걸 본 적이 없거든. 형배 씨, 경력 몇년 됐으요? 96년도 인수건설 사건, 당신 새끼시절에 있던 데 맞지? 상당히 오랫동안 이 바닥에서 구르신, 형님이, 왜, 무슨 일 때문에? 난 그기 궁금하단 말이야. ...... ......니 영도파 김병식이 알지? 인수건설 사건 때 니가 쌔빠지게 똥 닦아주던. 모르긴 뭘 몰라. 니 거기 있다가 김판호하고 뒤통수 쌔리고 나온 거 아냐. 철천지 원수를 지고 나왔겠구만. 니, 김병식이가 지금 어디 대표인 줄, 알제? .....김병식이 피해자 아내랑 내연 관계인 거도 아나? ......담배 한 대 주까요? ......후, 그, 뭐야, 부제님은 저기 우리 계장님이 밥 시켜줘가 묵고 있을 거야. ......여기 털어요. 재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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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젖은 낙엽을 밟으며 동창의 결혼식에 갔다 온 날, 부제는 밤 내내 열에 앓았다. 베갯머리로 새가 팔락대는 것처럼 부산스러운 몸살이었다. 모로 누운 부제는 벽에 걸어 둔 제 수단을 보며 빗소리를 들었다. 열기를 느리게 뱉고 삼키며 여러 번 잠의 앞까지 다녀왔다. 선잠 속에서 붉은 물고기가 빗속을 헤엄쳤다. 새벽 되고서 종소리가 들렸다. 먹먹한 눈을 꾹꾹 누르고 약을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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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잔인한 게 뭔지 아네? 종성은 동명수의 손가락 끝에 잡힌 벌레 더듬이와, 그의 날 선 웃음과, 잔뜩 열오른 화약 냄새를 기억했다. 부싯돌이 몇 번 헛돌고서야 동명수는 벌레를 불 태웠다. 기름 냄새가 뒤섞여 났다. 종성은 고개를 틀어 지원을 바라보았다. 경추에서 으스러지는 소리가 났다. 눈에 핏자국이 비쳤다. 몇 가지 기억은 동공을 지우는 피처럼 어설프고 잔혹했다. 지원과 관련된 모든 기억이 그에게 그러한 형태로 남아 있었다. 얼룩 같기도 하고 불길 같기도 한 일종의, 기록보다는 감정에 가까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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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무를 출 때마다 윤은 묘한 해방감을 느꼈다. 검자루를 쥔 손가락마다 힘을 풀고 놓길 달리 하면 검인은 다른 각도로 빛을 쓸어 받았다. 눈으로 볼 수 있는 날카로움이, 삿됨이 좋았다. 제 손으로 끊는다면 끊을 수 있을 사나움을 확인하는 일이 즐거웠다. 열여덟 살의 조윤은 검무를 한번 추기 시작하면 한 시진을 꼬박 쉬지 않고 몸을 놀렸는데, 그때마다 반드시 검고 얇은 두루마기를 겹쳐 입었기에 땀에 젖은 머리칼이 흐트러지기 시작하고 열기가 오르면 묶어 둔 새가 펄럭이듯 고통스럽게 아름다워졌다. 기방의 기생들은 마당으로 나와 숨을 죽이고 그의 검무를 구경하곤 했다. 달 아래 검은 자락을 날리는 윤을 보고 이들 중 몇은 안타까움에 차마 참지 못하겠다는 듯 낮게 신음했다. 기방의 맏딸이나 다름없는 여자의 외아들이었다. 난 곳이 아깝도록 영민하고 유려했으므로 예쁨 받는 것이 당연했다. 그러나 다만 분내 나는 기생들 사이에서만이었다. 꽃잎이 짝짝이인데 그 향이 무어 중요하겠느냐. 친아들을 보고 혀를 차는 어미의 말버릇이 그러했다. 동년배 기생들이 퇴기 취급 받는 데 비하면 윤의 친어미를 탐내는 자들은 여전히 많았다. 그녀를 부르는 양반 중 하나가 최지사였다. 도두刀頭에 새까만 범을 새긴 검을 차고 다니는 그는 묵직한 동래 말투와 큰 풍채 덕에 어디서든 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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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덴지 말하면, 너가 알기는 하네? 지원이 말없이 노려보니 동명수가 혀로 볼 안쪽을 긁으며 비죽이 웃었다. 거, 형수랑 같이 갔어. 형님이 어이 말했는지 아네? 어떠한 일이 있어도 개인적인 연락을 말라. 인민영웅께서 차출된 데에 다 이유가 있지 않간? 지원의 얼굴을 빤하게 보던 그가 급기야 허리를 굽히고 웃어댔다. 날이 서서 지원의 귀에 싸했다. 그는 말아쥐었던 주먹을 폈다. 입이 말랐다. 그래서, 그게 어딘데? 동명수가 웃음을 천천히 그치고서 혀로 입술을 핥았다. 베를린. 지원은 자켓을 집었다. 그는 카페를 나서며 가장 먼저 통역관 련정희를 떠올렸다. 희고 둥근 얼굴과 표종성의 약혼자답게 강단 있고 세련되던 말투가 기억났다. 몇 걸음 가지 못해서 행인 가득한 보도 한가운데에 걸음을 우뚝 멈췄다. 지나가던 몇몇이 지원을 흘끔 보았다. 지원은 그제야 16년 동안 함께 훈련 받았던 표종성의 얼굴이 전혀 기억나지 않는 것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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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가 높은 밤이라 바다 소리가 지붕 위까지 들렸다. 준호는 엎드린 채 눈 감았다. 슬레이트 지붕에서는 썩은 감 냄새가 났다. 바람이 불면 바다 냄새가 날 터였다. 구름이 걷히고서야 준호는 스코프에 눈을 가져댔다. 실수가 없으려면 과감해야 한다. 그에게 배운 첫 법칙이었다. 내는 이런 거보담 쪼만한 놈을 쓰지만서도, 니는 이게 어울릴끼다. 처음 잡아 보았던 M76의 무게와 서늘한 감촉은 이후 최형배가 떠나던 날 보인 눈빛을 준호에게 연상시켰다. 그가 갈기갈기 찢겨 죽는 꿈을 꾸는 날에는 새벽 내내 지붕에 올라 있었다. 등에 닿던 무게가 기억났다, 귓바퀴에 대고 읊어주던 단어 또한. 떨지 마라. 생각을 하니 떠는 게 아이가. 없는 목소리가 유령처럼 들러붙었다. 준호는 아랫입술을 문 채 방아쇠를 당겼다. 바다에서는 파도가 한껏 높아지고 있었다. 바닷가의 축제가 돌연 끝나고 있었다. 준호는 반짝이는 조명들을 보며 아이일 때 보았던 고깃배 불빛을 기억했다. 사람들 사이에 비명이 일었다. 준호는 총을 메고 지붕을 뛰어내려왔다. 사라진 사람에 대한 증오가 독처럼 그를 좀먹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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