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x강 크오 단편

[영화조윤] 연필 깎는 시간




문구용 커터날에는 어떤 제품이든 날에 기름이 엷게 발려 있었다. 윤은 그래서 연필을 깎기 전에 커터날을 티슈조각에 앞뒤로 네 번씩 문질렀다. 닦아낸 커터날은 약 3cm 정도 뽑는다. 연필 깎기의 정석이 어떻든 간에 윤에게 가장 편한 길이가 그 정도였다. 손때가 타기 시작한, 연필의 뻗은 몸체에서 처음으로 각도가 생기는 부분에 칼날을 박고 최대한 예각을 그리며 위로 민다. 살짝 당기는 기분으로 서두르지 않게 밀어야 깨끗하게 잘린다. 흑연에 날이 닿자마자 뗀다. 기실 연필을 깎는 데 제일 중요한 것은 기술보다는 나무의 질과 결이었다. 윤이 싸구려 연필을 혐오하는 까닭이 여기 있었다. 웬만큼 손재주가 좋은 자가 아니고서야 보통 커터날로 작은 나무조각을 세공하는 일이 쉬울 리 없었다. 그러나 부드럽고 질 좋은 나무는 연필 깎는 손을 즐겁게 만들었다. 따라서 윤이 최고급 연필만 쓰는 이유는 필기감의 만족도보다 연필을 깎을 때의 노고가 적다는 데 더 큰 무게가 실렸다. 공들여 십여 분 연필을 깎는 시간은 조윤에게 가장 평온을 바라는 시간이었기에 조금의 스트레스만치도 허용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명망 있는 방송작가인 조윤에게 최고급 연필을 선물하는 이들이 꽤 많은 이유도 그 탓이었다. 그의 서재 서랍장 하나에는 한 번도 깎지 않은 연필이 종류별로 수십 다스 블럭을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에 제 연인인 윤영화가 준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 야.



이제 막 흑연에 닿기까지 3mm 정도 남은 커터날이 멈췄다. 노크도 하지 않고 불쑥 들어와선 문도 닫지 않는, 저 수준 낮은 교양머리야 수십 번 말해도 고쳐지지 않는 부분이니 진작에 포기했다만, 들어오자마자 손바닥을 불쑥 내밀어보이는 저 성급함은 이쯤 고칠 때도 되지 않았나 싶었다. 윤은 먼저 커터날을 내려놓고 다음으로 연필을, 다음으로 코끝에 걸쳐 끼고 있던 안경을 차례로 내려놓았다. 속눈썹을 내려깐 뒤 나무 조각이 뒹구는 종이를 살짝 앞으로 밀었다. 



- 화요일.



애초 말했던 일정을 어기고 이렇게 들이밀면 곤란하단 부연설명을 하는 것도 윤의 타입은 아니었다. 영화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은 달랐다. 다시 손바닥을 흔들어 보였다.



- 초안 화요일. 말했잖아. 지금 못 줘.

- 쓴 거라도 달라고. 대강 러프라도 나왔을 거 아냐. 



윤은 대답 대신 오른손 검지를 느리게 제 관자놀이로 가져가 꾹, 꾹, 눌렀다. 늘 이런 식이었다. 머리가 아파왔다. 교양으로 무장하고 있어야 할 앵커가 깐깐하고 멋대로인데 무식하기까지 하다니.



- 화요일.

- 아 씨발, 내 놓으라고. 대강 워딩만 보게!



상스러운 말에 바로 미간이 좁혀졌다. 윤은 고개를 딱, 소리나게 꺾으며 입모양으로 읊었다. 미친. 천박한 새끼. 그리고 의자를 약간 돌려 얼굴 오른쪽에 있는 모니터를 마주했다. 



- 기다려. 지금 보낼게. 



그제야 영화는 길게 한숨 쉬며 안도했다. 윤이 덧붙였다, 기대는 하지 마. 그가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인 채 마우스를 움직이는 동안 영화는 윤의 '더럽게 큰' 책상을 돌아 그의 의자 곁으로 다가갔다. 어깨에 손을 얹어도 윤은 움직이지 않았다. 좀 더 용기 낸답시고 짚은 어깨를 은근히 주물러 보았다. 윤이 짧게 으음, 앓는 소릴 냈다. 영화는 아예 두 손으로 그의 양 어깨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주무르는 동작 따라 꼿꼿하던 윤의 몸이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기어코 마우스로 메일 전송버튼까지 누르고 나서야 윤은 그에게 몸을 맡기고 눈을 내려감았다. 낮은 목소리로 신음하는 걸 듣자니 묘하게 욕구가 동한 영화가 윤의 셔츠 위 가슴으로 손을 내렸다. 봉긋하게 살이 집힐 만한 곳까지 내려가기도 전에 윤이 그의 손목을 붙들었다. 포기하지 않고 그 어귀에서 손을 놀리던 영화가 윤의 의자 등받이에 턱을 얹고 말했다.



- 기대는 자동으로 하지, 조 작가님. 니가 쓴 게 제일 편해. 리딩도 그렇고, 너 쓰는 단어도 다 내거 같고.



다른 이였다면 휴식을 깬 데 대한 보상이랍시고 읊는 아부라고, 윤은 생각했을 터였다. 그러나 그가 아는 윤영화는 눈치 보는 일이나 지리멸렬한 아첨과는 결단코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최상급 방송인인 그에게 아부가 들어가면 들어갔을 테지. 입에 안 붙는 대본을 쥔 윤영화는 그것을 써낸 이가 애인이든 가족이든 그 자리에서 당장 찢어 버렸으리란 사실도 알았다. 까다로운 녀석이 제법 마음에 들어할 때마다 차오르는 뿌듯함은 온갖 짜증을 부리며 둘이 싸우더라도 기어코 윤이 영화의 대본을 맡을 수 있는 연원이었다. 윤은 속으로만 빙긋이 웃었다. 그러니까 너도 욕을 이렇게 먹어가며 내게 일감을 들이미는 거겠지. 간혹 섹스 중에 일 이야기가 나와 산통을 깨는 일이 있더라도 말이야.




- 알면 제대로 해.

- 뭐, 안마라도 더 해드릴까? 조 작가님?



손아귀에서 빠져나와 도로 어깨로 올라가려던 영화의 손을 윤이 다시 턱, 붙들었다. 그대로 당기는 투에 영화의 상체가 쏠렸다. 어깨 너머로 얼굴이 내려오자 윤이 그의 넥타이를 쥐고 가볍게 한 텀을 더 끌어당겼다. 이윽고 두 입술이 닿고, 살 부딪치는 소리와 물 소리가 뒤엉켰다. 여태 윤의 손에 잡혀 있던 넥타이가 모양을 일그러뜨리며 늘어졌다. 먼저 몸을 일으킨 것은 영화였다. 번들번들해진 입술을 손등으로 문지르고 고개를 뚝, 뚝 소리나게 양옆으로 꺾더니 아예 윤의 의자를 제게 돌리고 양 볼을 잡아 키스했다. 윤은 미친 새끼, 하는 말을 씹어 삼키며 뒤통수에 손을 가져가 머리칼을 손가락 새 움켜쥐었다. 그러고보니 마감, 하나 더 있는데. 그는 옮겨오는 숨과 함께 간질간질한 감정을 삼켰다. 자세를 고쳐쥐느라 키보드 옆에 쌓아 뒀던 종이들이 흐트러졌다. 깎다 만 윤의 연필이 굴러 바닥에 떨어졌다. 그제야 윤이 영화를 두 손바닥으로 힘껏 밀어냈다. 손에 닿은 몸에서도 열기를 읽을 수 있었다. 



- 값어치 받아냈으니까 더 방해하지 말고 비켜, 마감 치게.



가슴이 양손에 짚인 채 그대로 쭉, 밀려나자 영화의 입꼬리가 틀어졌다. 여기서 더 요구하지 않는 것 또한 둘의 불문율 중 하나였다. 한 걸음을 물러선 그에게서 윤이 시선을 떼고 다시 모니터를 보는 동안 영화는 넥타이를 고쳐맸다. 인사 없이 돌아선 그가 윤의 의자 등받이 뒤로 다시 돌아갔고, 잠깐 손길이 윤의 목 언저리에 스친 듯도 했다. 작업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서야 윤은 옆을 흘끔 내려다 보았다. 바닥에 떨어졌던 연필이 도로 종이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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