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배초인 조각글] 불면
거, 퍼뜩 눕어라. 11시다.
형배는 미간을 구긴 채 침실 안으로 한 걸음을 더 들였다. 파들짝 놀란 초인이 침대 아래 떨어진 몸을 일으키려 애썼다. 온전한 발목은 침대 발치와 묶여 있고 의족은 없었으며 안대까지 차 놓았으니 바닥에서 침대까지 올라가는 일만도 허겁지겁이고 힘이 들 수밖에. 형배는 그가 침대에 앉기까지 닫힌 문 옆에 비스듬히 기대 서서 담배를 물었다. 불을 붙이고 첫 연기를 삼켰다 뿜는 동안, 의족이 없는 초인에게는 딱 그만큼의 시간이 필요했다. 숨을 들이키고 눈을 가린 그대로 얌전히 멈춰 있으면 그제야 형배가 문 근처에 널브러진 의족을 들고 침대 곁으로 다가왔다. 침대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이미 닳고 낡은 의족을 빈 다리에 끼우면 수치심을 숨기지 못하는 손이 더러운 시트를 틀어쥐었다. 형배는 그때마다 제 보스의 취향이 독특하다 생각했다. 말라빠지고 독기 오른 사내를 보고 욕정이 일 거라고 쉽게 상상이 가질 않았다.
형배는 사내가, 초인이 처음 왔을 때부터 단 한번도 그의 눈을 본 적이 없었다. 형배의 보스는 이유가 있어 가려 두는 거라고만 했다. 이 작은 조직에서 이제 막 서열 서너 번째를 다투는 스물두 살의 어린 형배는 그렇게 보스의 깡마른 사내를 담당했다. 사내가 보스와 잠자리를 하고 난 뒤 눈 가리고 다리 없는 그를 씻기고 잠들 때까지 지키는 일은 형배의 몫이었다. 밑에 애들을 시키지 말라는, 특별한 지시가 있었다. 형배는 그것만으로도 보스가 얼마나 저를 신임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욕조에서, 혹은 옷을 갈아입힐 때에 형배의 손이 살에 닿으면 사내는 마른 몸을 웅크리고 입술을 바투 깨물었다. 그 모습이 곧 부서질 장작 같다고, 형배는 생각했다. 불 태우지 않았으나 금방 재가 될 것이라 여겼다. 사내의 이 불안정함을 보스도, 알고 있을까. 적어도 형배가 알기에 그는 이 자를 직접 씻기거나 입힌 적이 없었다. 비밀이 오롯해졌으나 헛헛했다. 품을 수 없는 비밀은 비밀이 아니었기에, 형배는 사내를 보면서도 사내를 지우려 했다.
형배는 의족을 모두 끼운 뒤 초인의 무릎에 이불을 끌어 덮어 주었다. 이는 둘 사이 하나의 신호가 되어 초인이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하는 시작이 되었다. 형배는 그가 눕는 모습을 보고 담배를 바닥에 던져 비벼 껐다. 급히 핀 탓에 약한 현기증이 일었다. 한 걸음을 물러났다.
불을 끄고도 사내는 쉽게 잠드는 적이 드물었다. 때론 악몽을 꾸는 듯 작게 앓는 소리를 내기도 하고, 어떤 때엔 누구와 대화하는 듯 웅얼거리기도 했다. 그가 온전히 잠드는 모습을 확인하는 것도 형배의 몫이었다. 그는 왜 보스가 이런 일을 시키는지 납득하지 못했으나, 조직은 납득으로 성립되는 것이 아니었다. 깊은 밤까지 문간에 앉아 깜박 졸다 보면 사내는 고른 숨을 쉬며 몸을 웅크린 채 잠들어 있곤 했다. 그 모습을 확인하고야 형배는 사내의 침실을 벗어날 수 있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의자에 앉았던 그는 사내가 유독 오늘따라 잠들기 어려워한단 사실을 깨달았다. 담배 한대를 더 물고, 필터 끝까지 태운 형배는 침대에 다가섰다. 이것이 선 하나를 넘는 일임을, 발 내딛는 순간 알고 있었다.
와, 잠이 안 오나?
무심한 척 뱉는 말이 두 번째 선이었다. 어슴푸레한 중에 사내가 모아 쥔 손을 조금 떠는 것이 보였다. 형배는 마른침을 삼켰다. 둘이 존재하는 이 침실에서는 사내의 마른 몸이 떠는 소리마저 들릴 것 같았다. 형배가 손을 뻗었다, 사내의 안대를 벗겼다. 초인은 묵직한 눈꺼풀을 천천히 들어올렸다. 형배와 눈이 마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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