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x강 크오 단편

[형배희철] 안녕히 가세요, 용강약국입니다

나는 항상 여기 있어요. 당신의 불안을 안고 침묵이 되어서.







불 하나만 켜놓은 약국은 특유의 어슴푸레한 흰 벽 때문에 밝을 때보다 침묵이 몇 배는 깊어졌다. 소독용 핀셋이 부딪치고 새 붕대를 풀어다가 허리에 감는 소리까지 들렸다. 이따금 살이 스쳤다. 그때마다 희철은 입술을 물었다. 약국 바닥엔 경계선 희미한 두 개 그림자가 졌다.


희철은 형배의 상처 위에 조심스레 입술을 올렸다. 어떤 타박상은 유독 낫지 않았다. 그 더딤이 꼭 무너지고 또 무너졌다가 다시 쌓을 수 없는 상처 같다고 희철은 생각했다. 그래서 더 안쓰러웠다. 


이건 뭐에 맞은 거예요? 참 희한하다. 꼭 장도리에 찍힌 것 같네. 

장도리 맞다.


허, 기가 차서 흘러나온 날숨이 먼저였고 두려움에 부르르 떠는 오한이 다음 순서였다. 장도리라니, 끔찍하게. 희철은 입꼬리를 꾹 내렸다. 이제 싸움은 안한다고 하지 않았어요? 뾰로통하게 물으면 형배는 대답 대신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줬다. 희철은 형배의 손목을 잡고, 끌어내려서 손날에 입맞췄다. 형배의 손날은 거칠고 딱딱했으며, 아물었다가 다시 다치고 또 아물길 반복한 흉터처럼 울퉁불퉁했다. 희철은 그의 울퉁불퉁한 손을 좋아했다. 요철을 손가락 끝으로 만지고 있으면 안정감이 들었다.


약사님요. 


형배가 불렀다. 희철이 흘끔거리며 그를 마주했다. 


마, 내 한동안 여 못올거 같은데.


한 마디에 가슴이 금방 무게를 지니고 가라앉았다. 형배는 늘 이런 식이었다. 잔뜩 다쳐 와서는 약사님요, 파스 하나 주이소.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말하고 담배를 빼 물었다. 연기가 약국에 꽉 차고 형배가 다시 한 대를 빼물어도 희철은 매번 물어볼 수 없었다.

이번엔 어디로 가요? 언제 가세요? 또 올 거죠? 

물음이 까끌까끌하게 입에 남았다. 그가 기침을 해도 형배는 담배를 끄지 않았다. 온통 울상을 지어야 겨우 담배를 끄는 심보도, 굳이 싫어하는 호칭을 불러대는 것도 그러려니 견딜 수 있었다. 다만 그는, 희철은, 형배의 침묵만은 버티기 힘들어했다. 부산에서 타고자라 주먹을 직업으로 삼는 그에게 침묵이 어떤 의미인지 적확하게는 짐작 못했지만 그것이 가지는 무게만은 절절하게 느꼈다. 다른 세계의 사람. 평행선의 거리를 실감하고 나면 닿는 일은 더 요원해졌다. 희철은 형배의 옆구리에 마지막 감은 붕대 끝을 꽉 매어 주고 그를 힐긋 올려다봤다. 눈이 마주쳐서 조금 주눅 들었다.


호랑이에 얼룩말 무늬 남겠네...하도 칼빵이 많아서.


그 말에 형배가 바람 빠진 웃음을 지었다. 웃으라고 한 이야기가 아닌데도 픽 터진 걸 보니 마음이 조금 풀려서, 희철도 웃고야 말았다. 그는 제가 감아놓은 붕대를 손가락으로 더듬어 보았다. 눈치를 보느라 형배를 연신 쳐다봤다. 두 대째 담배를 비벼 끈 형배가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희철이 시선을 비켰다. 돌아간 턱이 손에 잡혔다. 담배 냄새가 쎄하게 났다. 희철은 돌아간 얼굴에서 눈을 다시, 천천히 올려 떴다. 마주침, 안도. 그런 것은 이 사내와 영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지만......희철은 조금 슬프게 웃었고 형배는 조금 굳은 얼굴로 웃었다. 먼저 일어선 것은 희철이었다, 늘과 같이.


가세요. 몸 조심하시고요. ...또 오세요.


손님 대하듯 인사했고 형배는 등을 보인 채 옷을 입었다. 흰 셔츠 아래로 울긋불긋한 문신이 비쳤다. 방금 감은 붕대의 두툼한 두께감도 보였다. 소매 단추를 채우며 형배가 그에게 다가섰다. 희철이 한 걸음 물러섰다. 다만, 한 걸음일 뿐이었다. 형배가 그의 뺨에 검지를 가져다댔다. 희철은 숨을 참았다.


희철아.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애원하고 싶은 마음을 참느라 희철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형배의 검지가 뺨에서 턱선으로 내려갔다. 성적인 의도는 없었다. 담백했기에 더 서늘했다.


몸 조심해라이.


희철은 한참 지나서야 고개 끄덕였다. 약국문이 열리고, 형배가 나갔다. 돌아보지 않았다.

안녕히 가세요. 뒤늦은 인사가 따라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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