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린스란 - 스란두일의 흉터가 어느 날 지워지지 않는다면
요정왕의 예고 없는 부름은 흔치 않았다. 그는 느긋하고 준비성 강했으며, 이제 막 재건된 에레보르의 왕만큼이나 정무가 다난했으므로 산으로의 방문을 원하거나 에레보르의 왕가에다 방문을 요청하고 싶으면 늦어도 며칠 전에는 매를 보내곤 했다. 에레보르로 돌아온 지 일 년이 채 되지 않은 난쟁이왕은 급하게 갈겨 쓴 티가 나는 서신을 손에 구겨쥔 채 필리에게 정무를 모두 맡겼다. 다녀오마, 한 마디만 던져 놓고는 겉옷만 걸치고 조랑말에 올랐다. 한 나절을 꼬박 쉬지 않고 달려와 신다르의 구불구불한 궁을 걷는 동안에도 머릿속에 시커멓게 낀 불안감을 떨치지 못했다. 마침내 응접실도 왕좌 앞도 아닌 스란두일의 침실로 들어갔을 때, 컴컴한 방안 침대에 앉은 음영과 주위를 가득 채운 절망에 소린은 숨이 턱 막혔다.
"스란두일."
하고 불러도 난쟁이왕은 대답을 들을 수 없었다. 마땅한 예를 차리지도, 아는 척도 않는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 백금발을 늘어뜨린 얼굴을 들어올렸을 때에, 소린은 마른 침만 삼켰다. 일전에 본 적 있는 얼굴이었다. 요정왕이 제 약한 부분을 드러내 보이는 일이 드물었기에, 그 오랜 시간 동안 에레보르와 숲의 궁에서 마주했어도 좀처럼 보기 힘든 모습이기에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일그러지고 붉게 화상 입은 스란두일의 모습은 그에게 두렵기보다 아팠다. 그는 제게 마주한 동공 없는 눈을 똑바로 보고 물었다.
"무슨 일이오?"
흉터를 고스란히 드러낸 스란두일은 꼭 바스라질 것 같이 아파 보였다. 소린은 손에 쥐고 있는 그의 턱부터 차례대로 모래처럼 무너질 것 같아 덜컥 겁이 났다. 평소 그리도 감추던 모습이 아니었나. 숨이 턱, 막히고 울음이 나올 것 같았다.
"에루께서는 내가 추악한 모습으로 살기 원하시지 않았을까 싶소."
"그 무슨,"
가슴 아래서부터 열기를 훅 끼치며 올라오는 화에 소린은 그의 턱을 놓고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무슨 어불성설이오."
스란두일은 다시 백금발을 흩어 내리며 고개를 숙였다. 어슴푸레한 방 안에서 분간키도 힘든 그의 옆모습은 이전 소린을 대면할 때에 비해 많이 말라 있었다. 며칠이나 창문을 닫아 놓은 것인지 방 안은 눅눅하고 퀘퀘했다. 겨우 기어들어온 빛마저 스란두일의 침상까지 닿지 못하고 있었다.
"아들과 갈리온에게 알리지 못했소. 며칠 나가지 못한 탓에 정무도 엉망이오. 그래서 그대를 부른 것이오. 누가 될 것을 알고서도."
목소리만은 놀라울 정도로 침착했다. 소린은 여전히 가슴이 뭉근해서 그의 곁에 허벅지를 붙이고 앉았다. 한 손으로 허리를 감싸고는 둘 곳 없이 망연해 보이는 눈동자를 제게 향하게 했다. 본디 성정 급한 소린이었으나 이번만은 요정왕을 대하는 손길이 꼼꼼하고 달았다. 반은 알아보지 못할 얼굴이 다시 그를 향했다.
"어찌 견뎌야 할지 모르겠소."
겨우 한숨처럼 내뱉은 말이 무거웠다. 스란두일은 그제야 조금씩 어깨를 떨며 울기 시작했다. 얼굴이 본래로 돌아오지 않은 이후 처음으로 흘린 눈물이었다. 말없이 안아주는 난쟁이 왕손의 품은 충분히 넓고 더웠다. 그는 아주 잘게 들썩이며 울었다. 왕이라 믿을 수 없게 작고 여린 몸짓이었다. 소린은 두꺼운 반지 사이로 스란두일의 백금발을 쓸어주었다. 제 연인의 어깨가 이리 말랐던가 싶어서 못내 아팠다.
"걱정 마오. 내내 곁에 있어 드리겠소."
손가락마다 보드랍게 감기는 가느다란 머리칼이나 이곳 숲을 꼭 빼닮은 체향은 변함이 없어, 소린은 깊이 안도했다. 그러나 제 어깨를 붙들고 떠는 손가락만은 어떻게 붙들어 주어야 할지 몰라 막연했다.
요정왕은 밤이 되고부터 앓기 시작했다. 소린은 그가 내는 열기에 어찌 할 바를 모르고 침상 근처에서 쩔쩔 매고만 있었다. 그가 가진 의학지식이라곤 전투 중 다치거나 탐험 중에 생기는 중독과 저체온증 따위에나 대처하는 법이 다라서 어찌 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요정의 몸에 이리 열이 오르고 아플 수 있다는 것부터 처음 알았다. 다른 요정을 불러야 하는 것인가 싶어 문간에서 서성이자니 스란두일이 그를 불렀다.
"내버려두시오. 내 상태는 내가 잘 알고 있으니."
그 말에 소린은 가슴 아래쪽으로 묵직한 무게가 더해지는 것을 느꼈다. 스란두일의 한 마디 뒤에 숨은 여러 뜻이 읽혀서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어릴 적부터 보아 온 요정왕은 별 비친 물처럼 희게 반짝이는 용모를 백 년이 넘도록 간직하고 있었다. 그가 산에서 쫓겨나고 버려진 마음에 이를 갈며 조금씩 늙어갈 때에도, 절대 보상 받지 못하리라 여기던 제 마음을 미련히 끌어안고 있다가 끝내 스스로 뭉그러뜨린 뒤에야 거미줄과 흙이 엉킨 차림으로 다시 만났을 때에도 요정왕은 여전하였다. 소린은 그의 머리맡으로 다가가 이마 위에 손을 올렸다. 열이 끓는 이마는 소린이 만져 보았던 요정왕의 어떤 몸보다 더 뜨거워서, 난쟁이왕은 조금 더 슬퍼졌다.
"내일이 되면 돌아가시오. 떠나시기 전에 내 아들을 불러 주시고."
스란두일의 어조는 먼지 낀 방에 고요하게 깔릴 만큼 차분했다. 소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스란두일의 곁에 앉은 채 꼬박 밤을 새었다.
다음 날, 그는 레골라스를 불러다 긴 설명을 않고 아비가 찾는다는 전언만 전해 주었다. 이국왕에게 예를 갖추어 마중 나온 왕자와 갈리온에게 인사를 건네고 조랑말을 탈 때까지 스란두일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깊은 숲의 궁을 빠져나오며 소린은 조랑말의 속도를 늦추고 뒤를 여러 번 돌아 보았다. 왕이 머물 곳의 창문을 찾는 것은 쉽지 않아, 멀어짐에따라 포기하고 돌아서야 했다.
국정을 레골라스에게 온전히 맡긴 뒤부터 스란두일은 시종이 꺾어다 준 나뭇가지나 꽃으로 화관을 만들곤 했다. 며칠을 꼬박 집중해 만들면 화관 하나가 새로이 완성되었다. 다 만들고 나면 새로운 것을 또 만들었다. 이제 쓰지 않을 화관이 방 한 구석에 벌써 몇 개 쌓인 채 독한 향을 뿜어댔다. 버려진 것들은 쉽게 시들지도 않았다. 그는 아주 조금씩 말라갔다. 임라드리스에 알리자고 하는 레골라스의 말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조금 지나면 임라드리스의 영주가 올 것임도 알았고, 보다못한 갈리온이 감히 왕의 침소를 부수듯 들어와 잔소리를 할 것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게 소용 없을 것 또한 알고 있었다. 그는 남은 꽃 몇 송이를 집어다 손가락으로 후드득, 꽃잎을 뜯어냈다. 열린 창 밖으로 뜯어낸 꽃잎을 흩뿌렸다.
새벽까지 잠들지 못하는 것은 아무래도 상관이 없었다. 그러나 잠든지 얼마 지나지 않아 지독히 괴롭혀대는 악몽만은 그를 울게 만들었다. 결국 굵은 눈물을 뚝, 뚝, 흘리고 있을 때에 스란두일은 제 흉한 왼얼굴 속으로 스미는 눈물에 소스라칠 것만 같았다. 저린 감각을 안고 웅크렸다. 큰 몸을 둥글게 만 채 옆으로 누웠을 때, 그는 작은 키의 인영 하나를 보고 그림자겠거니 싶었다.
"소린."
자신은 이 방에 스스로 갇혀 한 발도 나가지 못할 것이기에, 그를 볼 일도 이제 전무하다 여긴 스란두일이었다. 마지막으로 제 이마에 닿던 손바닥이 마지막이겠거니 여겼다. 숨이 다하기 전 이르모께서 주신 벌인가, 혹은 선물인가, 망연하고 혼란해 있을 때 소린이 다가와 두터운 손으로 그의 왼쪽 뺨을 쓸어 주었다.
"쉬잇, 눈 감으시오."
"내가 갈 곳에는 그대가 오지 못하오."
소린은 고개를 저었다.
"그것은 요정들의 생각이오."
소린의 손은 스란두일의 열 오른 얼굴에 서늘하게 느껴졌다. 오래도록 앓은 열병이 몸에서 빠져나가듯, 스란두일은 그의 손등을 겹쳐 쥐고 안도했다.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가 내쉬었다. 소린은 다른 손으로 품을 뒤적여 무언가를 꺼내었다. 스란두일은 열로 흐린 시야에서도 그의 손에 들린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별을 닮은, 흰 보석.
"늦게 돌려드려 미안하오."
잠옷 위에 흰 보석의 목걸이가 놓였다. 열 오른 목 뒤로 채워주는 손길이 현실감 없었다. 겨우 기어 들어오는 달빛에도 보석은 밝게 빛났다. 제가 일전 표현한 것마냥 별을 옮겨 놓은 것 같은 모양새에, 스란두일은 힘없는 손을 들어 움켜쥐었다. 마르고 퍼석한 손 안에서 빛이 삭아 들어갔다.
"내게 어울리지 않는 물건인가 싶었소."
그의 말에 고개 젓는 소린의 표정은, 스란두일이 보기에 희미하기도 하고 슬퍼 보이기도 하였다. 미소가 얼핏 걸린 듯도 했다.
"이제야 주인을 찾았는데 무슨 말씀이시오."
소린은 침상에 어깨를 비스듬히 기대고 앉았다. 스란두일의 흉터 진 왼 뺨이 그의 허벅지에 닿았다. 그가 느리게 노래하기 시작했다. 난쟁이말로 된 가사는 스란두일이 알아들을 수 없었으나 낮은 목소리에 보드라운 음계가 좋았다. 노래가, 마음에 드는구려. 속으로 말하며 느리게 눈 감았다. 오랜 불면이 천천히 몸에서 빠져나갔다. 소린의 목소리는 꿈결처럼 요정왕의 처소를 채우고 있었다.
'소린스란 단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소린과 스란두일 연애편지 단문 (2) | 2014.09.03 |
---|---|
19세기 au 린란 - 가면 쓴 스란두일 (2) | 2014.08.26 |
스란두일 옷 입혀주는 소린 (0) | 2014.08.20 |
린란 오피스 AU (0) | 2014.08.15 |
애기 소린과 애기 스란두일 (2) | 2014.08.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