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 국연

[형배범신 단문] 역광


적나라하지는 않지만 대략적인 성애묘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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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신은 내려깔았던 눈을 뜬 뒤 성호를 그었다. 형배는 그의 맞은편 의자에서 다리를 꼬고 앉은 채 담배를 막 피워 문 터였다. 여관방의 창 밖으로 새 그림자가 후두둑 지나갔다. 옆방에서 켜 놓은 티비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기도할 때부터 살금살금 들리던 앵커의 목소리는 김일성의 사망 소식을 몇십 분에 걸쳐 다급하게 전하고 있었다. 범신은 묵주를 정리해 넣곤 형배의 입에 물린 담배를 집었다. 그대로 제 입으로 가져가 두어 모금을 빨고 뱉는 동안, 형배의 시선이 범신의 로만칼라에 머물렀다. 그의 눈빛을 읽은 범신은 로만칼라를 손끝으로 잡아 늘리고 싶었으나 애꿎은 담배만 고쳐 쥐었다. 형배가 새 담배 하나를 꺼냈다. 범신이 담배를 문 채로 형배에게 고개 숙였다. 불 붙인 담배 끝에서 새 담배로 불이 이어 붙었다.


“성당은 언제 가노?”

“두 시간 뒤에 출발하려고.”


말을 꺼내 놓자 금세 피로가 밀려 와 어깨를 두드리고 고개를 꺾었다. 이제 성당에 부임된 지 2년 지난 젊은 신부는 할 일이 많았다. 지역에선 제법 큰 성당에 본당신부를 제외하면 범신이 혼자였으니 그럴 만도 했다. 신부가 부족한 시기였다. 제법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범신이 들어간 곳은 내내 일이 쌓여 있었다. 범신은 피로를 감추지 않았고, 때로 최형배를 만나는 것으로 쌓인 피로를 풀어냈다. 그와 몸을 섞거나 사소하게 말싸움 하는 일이 좋았다. 무엇보다, 구마 직후 너덜너덜해진 마음을 끌고 찾아가더라도 아무 것도 묻지 않아 주는 점이 고마웠다. 범신이 형배의 정수리에 손을 올렸다. 깨끗하게 빗어넘긴 머리칼을 흐트러뜨리고 싶은 충동을 참고 뒤통수를 쓸어 주었다. 형배가 입 속에 연기를 머금은 채 그를 올려다 보았다. 제 정수리를 멋대로 쓸고 만지도록 내버려 두는 자가 몇인지, 저와 동갑인 신부가 알 리 없으리라 여겼다. 다시 새 그림자가, 이번엔 두어 마리가 지나갔다. 흰 범신의 얼굴 절반에 그림자가 빠르게 스쳤다. 형배가 손을 들어 그의 귀를 어루만졌다. 범신이 살짝이 인상을 구겼다. 밤에 얼핏 보았던 귀 근처 상처가 햇볕 아래 확연히 보였다. 며칠 지방에 다녀온다더니, 이전 본 적 없던 상처였다. 


“두 시간 동안 뭐 하꼬?”


형배의 물음에 범신의 깨끗한 아래턱이 말을 뱉을 듯 말 듯 움직였다. 그리고 뒤통수에 손 댄 그대로 입술을 가져왔다. 금세 혀가 엉켰다. 범신의 손이 형배가 앉은 의자 팔걸이를 더듬었다. 다른 한손은 등받이를 붙들었다. 한참 숨이 섞이고 나서 범신이 먼저 몸을 일으켰다. 그는 형배를 쳐다보지 않고 안경을 꺼내 썼다. 머리를 쓸어 넘겨 정돈하고, 단추가 잠긴 것을 확인하며 깃을 정리했다. 다시 로만칼라를 잡아끌고픈 짧은 충동. 수단 아래는 최형배가 남긴 순흔이 아직 선연할 터였다. 


“아니, 그냥 일찍 갈래. 나 좀 태워 줘라.”


여관방 건너를 지키고 있을 녀석을 부르려는 것인지, 범신의 말이 끝나자 형배가 의자 옆 방문 쪽으로 고개를 꺾었다. 범신이 고개를 저었다.


“창우 말고, 네가 데려다 줘.”


형배의 미간이 살풋 구겨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여관방으로 들어오는 햇빛은 역광으로 바뀌어 있었다. 더 희어 보이는 범신의 얼굴이 불안정했다. 형배가 그의 손목을 붙들었다. 소스라치게 놀라는 모습을 보고 형배의 눈이 순식간에 사나워졌다.


“김범신.”

“니가, 데려다 줘.”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형배는 그러나 그의 시선을 좇았다, 제 무릎과 의자와 다시 마룻바닥, 그리고 의미 없는 허공을 헤매는 정인의 눈동자를.











차에 타고서도 범신은 말이 없었다. 창가에 기댄 머리칼이 언제나처럼 말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안경테가 날카롭게 빛났다. 형배는 범신의 안경을 싫어했다. 안경 낀 범신은 오롯한 성직자였다. 입을 맞추거나 살을 맞댈 때 좀처럼 끼지 않던 안경이 얼굴에 자리 잡으면, 그가 아는 동갑내기의 김범신은 베드로 신부의 모습으로만 남았다. 형배는 자신이 범신을 오역하고 있다 믿었다. 이따금, 범신을 읽는 일은 배운 적 없는 단어로 이루어진 문장을 더듬는 것 같았다. 그는 범신을 떠올리고 설명할 수 있는 몇 개의 단어들이 그의 안경 빛 아래로 사라지는 기분을 혐오했다. 차 속도가 빨라졌다. 운전이 거칠어짐을 눈치 챈 범신이 짜증 섞인 투로 형배를 바라보았다. 길에서 죽기 싫다는 말이 입끝까지 올라올 때에야 차는 신호등 앞에서 멈춰서고, 오전의 햇빛만큼이나 먹먹한 침묵이 가득 들어찼다. 형배가 라디오를 켰다. 아니나 다를까, 라디오에서도 김일성의 사망 소식이 쨍한 목소리로 흘러나왔다. 다시 라디오를 끈 것은 형배가 아니라 범신이었다.


“주말에 성당 와라.”

“내가 뭐한다고 거기 가노?”

“미사 끝나고 오라고. 저녁에.”


형배는 잠깐 대답이 없었고, 그의 옆얼굴을 보던 범신이 헛웃음을 픽 흘렸다. 다시 차가 움직였다. 성당의 첨탑이 보이기 시작했다. 형배는 그제야 등이 따갑게 가려운 것을 느꼈다. 밤 내내 사납게 긁어대었던 제 등 위의 손톱을, 시야 너머 있었을 범신의 사나움을 상상하자 아랫배께에서 경박한 즐거움이 고개를 쳐들었다. 그는 한 손으로 핸들을 잡은 채 다른 손으로 넥타이를 늘어뜨렸다.


“토요일에 가꾸마.”


차가 멈추고, 범신은 인사도 입맞춤도 없이 내렸다. 뒤라도 돌아봐 주면 좋으련만, 형배는 가려운 등을 시트에다 깊게 묻고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수단 입은 검은 등이 조금씩 작아졌다. 강단 있는 걸음은 느린 법도, 멈춰서는 법도 없었다. 제게 올 때에 그랬으니 벗어날 때에도 마찬가지라 생각 들자 형배는 비죽이 웃었다. 잠이 모자라고, 담배가 고픈 오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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