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식 달
많이 좋아하는 내 신부님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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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호는 다친 새끼손가락에 감긴 붕대를 이로 잘근잘근 물어 보았다. 안의 살갗이 가려운 것은 그러나 영 풀리질 않았다. 그는 붕대 탓에 두 배는 굵어진 제 손가락을 위아래 앞니 사이에다 물고 한참 끙끙거리고서야 지독한 가려움을 포기했다. 이번에는 제법 독하게 다쳤다. 그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잇자국 따라 뚝뚝 떨어지던 핏방울이 바로 지금인 양 눈앞에 아찔하게 떠올랐다.
아그네스 수녀는 치료해 주는 내내 작정했다는 양 그를 몰아붙였다. 대체 어떻게 장난을 치면 손가락이 이 지경이 되도록, 응? 한두 번도 아니구요. 전에는 손목이었죠. 김신부님은 뭐라고 안 하셔요? 하긴, 그 양반두, 뭐. 안타까워서 잔뜩 구긴 얼굴에다 그저 배시시 웃어 보이는 외에는 도리가 없었다, 매번 그랬듯이.
병원 나온 길에는 날이 맑았다. 준호는 걸음을 멈추고 벤치에 앉았다. 성당 첨탑이 보이는 거리였으나 빨리 들어가기가 싫었다. 곧 봄이라 했던가, 날짜가 영 와닿질 않았다. 소금으로 친 결계 안을 넘었다 온 다음에는 특히 그랬다. 수요일이 토요일 같고 아침 해를 받으면서도 저녁인 양 쓸쓸해졌다. 때때로 길 잃은 천치처럼 멍해지기도 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악몽도, 공포도, 독한 저주도 없었다. 준호는 괜찮았다. 말 그대로, 그저 괜찮았다. 성당 일은 이제 제법 적응되었고, 편백향이 은은하게 나는 사제관도 전혀 불편하지 않았다. 그러나 걱정은 곁에 있는 이의 몫이었다. 너, 저, 뭐야, 신경정신과 같은 데라도 가 보는 게 어떠냐. 김신부는 이제 막 사제 서품을 받은 지 1년 된 어린 신부가 그 삿된 일들을 모두 보고도 말갛게 바른 것이 영 걱정되었다. 준호가 그 마음을 모를 리 없었다. 급히 고향으로 내려갔던 마태오 수사에게도 주기적으로 연락하는 것을 곁에서 직접 지켜 봤던 터였다. 평생 술 없으면 잠도 못 잘 거라 장담하던 그는, 구태여 아침마다 전화를 걸어 준호의 안위를 확인하곤 했다. 졸음을 참으며 괜찮다는 말을 하고 나면 마음이 괜하게 싱숭생숭해져서 정인의 번호에다 메시지를 넣어 놓곤 했다. 예식 탓에 며칠을 연락 않더라도 그 투박한 사투리로 불만 한 번 내비치지 않을 만큼 무심한 사람이어서, 또 다행이라고, 그는 안도했다. 머리맡에서 덜컹거리던 창문 소리며, 생전 처음인 양 낯설게, 또 곱게 들리던 심장 소리가 떠올라 그는 붕 뜬 뒷머리를 긁고 입술을 비죽이며 웃기도 했다.
준호는 가방을 뒤져 초콜릿바를 꺼냈다. 포장지를 뜯자마자 절반만큼 입에 베어 물었다. 단내가 코를 막고 목을 간질였다. 우적우적 씹어 삼키고 나머지 남은 덩이도 단숨에 먹어 해치웠다. 속이 달아지자 기분이 녹녹해졌다. 손가락의 간지러움과 통증도 좀 나은가 싶었다.
어린 동생은 나이답잖게 단 걸 싫어했다. 어쩌다 받은 군것질거리는 모두 오빠인 그의 몫이 되었다. 준호는 그래서, 동생이 죽은 뒤 한동안 단 것을 입에 대지 않았다. 신학교를 다니고, 부제 서품을 받을 때까지만 해도 그랬다. 다시 단 걸 먹기 시작한 것은 고작해야 사제 서품을 받은 후부터였다. 동생의 장례 직후 몇 년간은 꿈에 나온 동생이 동그란 머리를 숙이고 땅에 떨어진 사탕 조각을 주웠다. 날카로운 조각에 어린 동생의 손가락이 찢어져 피가 흘렀다. 어린 준호는 동생의 꿈을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못했다. 자라지 않는 여동생의 모습은 먹지 못하고 늘러붙어 녹아가는 사탕 조각처럼 겹겹이 쌓여갔다. 동생의 꿈을 안 꾼 지가 일 년이 훨씬 넘었음을, 준호는 성당의 첨탑 근처로 날던 새를 보다 문득 깨달았다.
뭐, 괜찮습니다. 다 지난 일을요.
일부러 말투를 흉내내며 허공에 뱉어 보았다. 금방 헛헛하고 면구스러워져서 초콜릿 포장지를 구겨 쥐었다. 느리게 먹을 것을, 속이 어쩐지 좋지 않았다. 푸르르 고개를 흔들고 하늘을 멀리 올려다 보았다. 첨탑 근처의 새는 사라지고 없었다. 구름의 흔적이 그 대신인 양 이지러져 있었다. 준호는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는 난분분히 떠도는 꽃잎을 상상했다. 지난 봄에 눈이 많이 오지 않았으니 흩날리는 것은 꽃으로 족하리라 싶었다. 그는 문득 웃음을 흘렸다. 미소기를 지우지 않은 채 일어나서 가방을 도로 메고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크게 숨을 삼켰다가 내뱉었다. 나무와 풀 향이 뒤엉키자 속이 조금씩 편해졌다. 봄의 냄새인 줄 깨닫자 얼굴색이 조금 더 밝아졌다. 가방을 고쳐 쥐던 그가 다친 손을 한 번 털었다. 고작해야 새끼손가락일 뿐인데 어째 영 불편한 것이, 어깻죽지까지 근질근질한 착각마저 들었다. 그러나 물어뜯기고 부러진 상처도 길어야 몇 달이면 나을 터였고, 붕대를 벗고 새 살이 돋아 퉁퉁 불고 땀내나는 맨살을 금방 다시 볼 수 있을 것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나은 살이 또 언제 다칠지는, 알 수 없었다. 그는 한 손으로 쥐고 있던 가방끈을 단단히 어깨에 걸치곤 걸음의 속도를 바삐 했다. 사제관의 편백향을 맡으며 제 키에는 조금 좁은 침대에 드러누워 책을 읽고 싶었다. 아직 순이 돋지 않은 가로수가 걸음과 바람 따라 사제의 얼굴에다 제각기의 그림자를 그려냈다. 입에 단내가 남아 있었다. 침이 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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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초식이 좋아요. 거기 계셔 주셔서 고마워요. 신부님은 항상 제 기도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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