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배준호 썰계 올렸던 단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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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끝 1
새아버지의 아들은 이따금 다쳐서 왔다. 건너편 침대에서 훔쳐본 그는 들개 같은 표정으로 밤 내내 혼자 상처를 치료했다. 준호는 그와 같은 방을 쓴지 넉 달이 지나도록 말을 섞어 보지 못했다.
낮에는 최형배, 제 새 형을 도통 볼 수 없었다. 새아버지는 아침상에서 저와 제 친아들을 비교하며 한탄했다. 어느 새벽에 준호는 화하게 방에 들어찬 젖은 흙냄새에 깼다. 숨 몰아쉬는 형배를 보고서야 그게 흙냄새가 아니라 피냄새인 줄 깨달았다. 다친 형배의 교복을 벗겨주는 동안 준호는 처음으로 그와 눈 마주쳤다. 고개를 도로 숙이고도 이마 위에 닿는 시선이 끈질겼다. 아버지한테 말하면 뒤질 줄 알아라. 어금니가 물려 발음이 뭉개졌다. 준호는 그에게 묻고 싶었다. 왜 항상 날을 세우느냐고. 형배의 교복 넥타이는 풀려서 양쪽으로 늘어져 있었다. 벌어진 가슴 위로 길게 늘어뜨린 그의 재색 넥타이가 준호에게는 쇠사슬처럼 여겨졌다. 달이 밝은 새벽이었다. 열아홉과 열여덟 살의 부모 다른 형제는 침대 아래 마주보고 앉은 채 아침까지 지샜다. 준호가 잠깐 조는 새에 형배는 사라졌다. 짙은 갈색으로 남은 핏자국 위에 그의 교복 넥타이만 남아 있었다. 환히 열린 2층 창문 밖으로 몸을 내어 보자 한기가 머리칼 새를 헤집어 놓았다. 비밀 하나를 떠안았음을, 준호는 그제야 깨달았다.
준호가 피 다른 형을 다시 만난 곳은 저녁의 학교였다. 형배는 교복 아닌 정장을 입고 준호네 학교 정문에 기대어 서 있었다. 제법 그럴싸한 수트에다 담배를 입술 한 쪽으로 빼어 문 형배는 열아홉 살로 보이지 않았다. 준호는 그를 못본 척 그대로 정문을 지나 걸었다. 뒤따라오는 걸음이 느껴졌다. 그가 멈춰 서자 형배 또한 거리를 두고 멈췄다. 거리 가득 저와 비슷한 교복을 바라보다가, 준호는 뒤로 돌아섰다. 언제 불 붙인 것인지 담배 냄새부터 쎄했다. 하필이면 그날은, 여동생의 기일이었다. 엄마는 재혼 후 여동생의 기일을 챙기지 않고 있었다.
"왜 따라옵니까?"
말 끝에 형배가 슬며시 웃었다. 나무를 짓누르는 쇠 같은 웃음이었다. 가을의 건조함에 눈이 뻑뻑해서, 준호는 미간을 구긴 채 형배의 대답을 기다렸다. 말이 없기에 도로 돌아섰다. 형배는 이제 준호 곁에 바짝 붙어 서서 걸었다.
"니, 신부 될끼라매?"
비웃는 낌새는 없었다. 툭툭 땅으로 던지는 것 같은 말투는 버릇인 듯했다. 버스에 타고서 형배는 그의 빈 곁을 놔두고 앞자리에 앉았다. 각진 정장 어깨가 비스듬한 자세에 따라 잔주름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형배의 검은 얼굴 위로 네온사인이 차례차례 지나갔다. 준호는 그의 덩치가 이리 큰 줄, 그때 처음 알았다. 앞을 비스듬히 향하고 있던 형배 얼굴이 저를 향했다. 준호는 굳이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상처는 어떻습니까?"
"생긴 건 곱상해가 똑 애늙은이처럼 말하네."
준호의 눈이 살짝이 가늘어졌다. 형배는 웃었다. 불빛 탓에 그의 눈이 옅은 갈색으로 보였다. 준호는 다시 차창 밖을 보았다. 본래 내려야 할 독서실은 이미 한 정거장 전에 지나쳤다. 내색하지 않았다. 그대로 한참이고 같은 버스에 탄 채 몇 정거장을 지나쳤는데도 형배는 준호에게 목적지를 묻지 않았다. 본래 그래야 한다는 양, 익숙하다는 양. 준호는 그것이 싫었다. 형배가 형이 되고서 이사를 하고, 엄마를 절반 내어주고, 새벽을 빼앗겼으며 여동생이 죽은 날을 기리지 못하게 되었다. 바뀐 일상의 탓을 형배에게 돌릴 수 없다는 것쯤이야 준호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틀이 일그러지는 사실보다 더 싫은 것은 틀이 무너지고 있다는 제 자각이었다. 새로 생긴 형은 그에게 커다란 지표 같이 여겨졌다. 눈을 뜨고 감으면 있던 낯선 형의 흔적들. 그러나 그는 언제나 느긋하고, 덤덤하고, 이곳의 주변인 양 굴었다. 배에 깊은 상처를 입고 왔을 때마저도 그랬다. 준호는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길가 화단에 아무렇게나 앉았다. 되는 대로 내린 곳이라 여기가 어디인지 알 수조차 없었다. 도로 버스에 타고 납골당에 갈 수도 있었으나 혼자 가기가 싫었다. 제게 따라붙는 최형배를 달고 가기는 더더욱 싫었다. 형배는 그의 곁에 조금 떨어져서 앉았다.
"신부 된다 카는 놈이 공부는 안 하나?"
"형은 그럼 고3이란 작자가 공부는 안 하고 옷 빼 입고 싸돌아다닙니까?"
말 끝나자마자 형배의 웃음이 푸스스 터져나왔다. 그는 일어서서 준호 앞에 섰다. 월광에 반질반질하게 빛나는 검은 구두도, 열아홉의 것은 아니었다. 시선을 들자 형배의 얼굴이 어둑하게 보였다. 웃음기 사라진 얼굴로 그가 손 뻗어 준호의 정수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손이 따스해서 놀랐다. 밤의 열기가 순식간에 화악, 가슴 어딘가에서 올랐다. 준호가 그의 손목을 쥐었다. 마주보고 있을 때의 그는 다친 짐승 같기도, 혹은 어딘가 갇힌 것 같아 보이기도 했다. 바람이 형제 사이로 불었다. 형배의 펄럭이는 자켓 자락은 꼭 향수내가 독하게 날 것 같았으나, 정작 그에게선 열아홉 사내 아이의 몸 냄새만 짙게 났다. 준호는 그의 자켓 자락을 끌어당겼다. 제게로 가까워진 상체에다 이마를 가져다 대었다. 뭐고, 하는 목소리가 먹먹히 들렸다. 그의 몸 냄새에 호흡을 담았다. 조금씩 울음으로 흐트러졌다.
밀어내지 않아 주어서 고마웠다. 우는 것을 알고도 묻지 않아 주어서 고마웠다. 들썩이는 어깨 위에 온기가 좋았다. 다행이었다. 한참 눈물 흘리고서 젖은 얼굴을 들어준 형의 손은 생각보다 다정하고 묵직했다.
형배준호 단문
평안히 가십시오. 고해가 끝나고 사내는 대답 없이 자리를 떴다. 아가토 신부는 곁눈으로 칸 너머를 살폈다. 빽빽한 격자 사이로는 사내의 뒷모습 절반도 보기 어려웠다. 그가 고해하고 나간 뒤에는 쎄하게 찬 향수 냄새가 오래 감돌았다.
아가토 신부는 사내를 알고 있었다.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코가 먹먹했다. 사내가 처음 성당에 왔을 때 성당의 신부, 수녀, 수사들은 그가 죽을 거라 했다. 머리가 깨지고 배에는 창상이 깊었기에 성당에서 응급처치로 다룰 환자가 아니었다. 그러나 사내는 온 시트와 숙소 바닥까지 피를 흥건하게 적셔 놓고도 살아남았다. 모두가 놀랐고, 또 사내를 두려워했다. 아가토가 처음 마주한 사내의 눈은 주인에게 두들겨맞은 개처럼 사납고 무기력했다.
- 신부님, 담배 좀 피도 됩니꺼?
아가토는 눈을 두어 번 깜박였다. 사내의 위압감이 적막을 만들었다.
- 붕대부터 갈고요.
겨우 대답했다. 사내의 몸에는 흉이 많았다. 아가토는 바짝 안은 그의 몸에서 쇠 냄새를 맡았다. 맨손이 닿을 때마다 열기가 높아 놀랐다. 감은 붕대의 끝까지 마무리를 하고서야 협탁 위 몇 안되는 사내의 소지품 중 구겨진 담뱃갑을 찾아 내밀어 주었다. 연기 너머로 한참 그 얼굴을 들여다 보았다. 번뇌가 검게 내려앉은 입술이 허옇게 주름을 내며 오므렸다 벌리길 반복했다. 연기가 빠지기 전에 사내는 붕대 위에다 옷을 겹쳐 입었다. 그날 밤에 그를 성당 밖으로 데려다 준 것도 아가토였다. 한참 걷다 인적 가득한 길에서 멈춰 선 사내는 불 붙이지 않은 담배를 비스듬히 문 채 아가토에게 말했다.
- 신부님, 인자 뒤돌아서 돌아가시고, 절대 돌아보지 마이소. 내 비슷한 놈 봐도 절대 아는 척 하지 마시고. 내는 거기 없었던 깁니더. 뭔 말인지 아시겠지예?
아가토는 어쩐지 먹먹했다. 거리는 춥고 발이 시렸다. 사내가 손짓하고 그는 홀로 온 길을 되돌아갔다. 검은 등 위에 오래 시선이 매달렸다. 사내가 찾아온 것은 석 달 뒤였다. 이후 아가토 신부를 찾아온 사내는 고해성사를 하고 말없이 떠났다. 두어 달 지나 잊을 만하면 다시 왔다. 사내가 떠난 자리 냉기 속에서 아가토는 몰래몰래 조금씩 앓았다. 그것이 신열 같은 애정인 줄 깨닫지 못해 영문을 모르고 막막함에 다시 앓았다. 버릇인 양 단어 끝마다 뭉그러지는 경상도 말투에, 그가 늘어놓는 날 선 죄들에 조금씩 길들여지고서야 아가토는 그를 궁금해하기 시작했다. 사내의 이름이 알고 싶었다. 그것이 다였다. 사내는 간혹 다리를 절며 왔다. 그런 날에는 독한 향수내가 없었다. 하루는 고해성사 중에 말이 한참 끊겼다. 토막 난 침묵 속에서 아가토는 숨 쉬기조차 힘이 들었다. 형제님, 하고 부르기 직전에 사내가 실소하는 소리가 들렸다. 지는 지 죗값보다, 지가 더 무섭심더. 갈다 만 쇳날 같은 목소리였다. 아가토는 그의 검은 입술을 떠올렸다. 숨소리 하나마저 이불을 덮은 듯이 빡빡해지는 성소 안, 다시 침묵이 이어졌다. 신부는 눈 감았다. 하나의 금기가 깨지고 있었다.
- 이름을 알려주십시오.
뛰쳐나온 아가토를 본 사내는 놀란 표정을 잠깐 띄우다가 고개를 저었다. 말없이 돌아섰다. 사내의 발꿈치마다 물자국이 남았다. 밖에는 눈이 쌓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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