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최김

[김최] 갇힌



루코님께서 풀어주신 퇴행 아가토 썰을 기반으로 썼습니다! 훌륭한 썰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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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호는 다시 범신의 손을 쥐었다. 서른 살의 아이는 또 도리질을 치다가, 커다란 손으로 범신의 손목을 틀어잡고 멋대로 당기다가, 끙끙 앓는 소리를 냈다. 몸은 서른 그대로의 녀석인지라 당기면 당기는 대로 범신의 상체가 흔들렸다. 준호야, 하고 부르니 아이는 듣지 않겠다는 양 눈을 꽉 감아 버렸다. 큰 덩치를 웅크렸다. 등이 둥글게 말렸다. 그대로 병실 바닥에 주저앉자 환자복 바지에 누렇게 먼지 자국이 남았다. 범신의 팔이 따라서 아래로 끌려갔다. 준호는 씩씩거리며 김신부의 정강이께를 주먹으로 쳤다. 아이고, 그는 급기야 탄식을 뱉었다. 


- 어이, 아그네스! 아그네스!


결국 그녀의 도움이 있어야 했다. 고집불통인 녀석이 아그네스의 말은 또 듣는 게 신통했다. 아기들을 많이 봐서 그렇다고, 덩치만 서른이지 지금 최신부님은 애나 다름 없잖아요, 하고 씁쓸하게 웃던 그녀 얼굴을 떠올렸다. 멋대로 병원 복도에 대고 질러댄 소리를 듣고 용케 달려와준 게 고마웠다. 


- 신부님, 왜 또 화가 났어요. 응?


그녀가 등을 도닥이고 안아다 일으키자 저보다 절반은 작아 보일 아그네스에게 매달린 녀석이 뾰족하게 범신을 노려보았다. 질질 끌린 발 아래 슬리퍼는 벗겨지고 짧둥하게 올라간 바짓부리 아래로 복숭아뼈가 드러났다. 발목을 멋대로 꺾고 뭉개는 모양새가 딱 대엿 살 가량 아이의 응석질이었다. 이전이라면 헛웃음 지었을 테지만 범신은 도저히 웃을 수 없었다. 텁텁한 입에다 마른침을 삼켰다. 아그네스가 겨우 녀석을 끌어다 침대에 앉혔다. 주먹으로 눈두덩을 비빈 준호가 그녀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 김신부님 따라갈래요.


퇴행증상이라고 했다. 아이나 다름 없는 사고방식으로 바뀌고, 커서 겪은 일 대부분을 기억 못한다 했다. 일종의 방어기제란 의사의 말에 김신부는 속에서 홧기가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핏덩이를 데리고 다니는 게 아녔다. 새파란 녀석은 역시 안된다. 날을 세우고 녀석을 병원에 집어 넣어 버리라고 했다. 범띠 사제는 또 찾으면 된다고. 


준호의 증상은 지난 가을, 사제 서품을 받고서 처음 한 구마예식이 끝나고부터 나타났다. 지독한 사령이었다. 어린 여자아이를 숙주로 삼은 것만 보아도 그러했다. 며칠을 싸워가며 힘들게 구마에 성공했을 때 아이가 뿜은 피를 그대로 맞은 준호는 지나치리만치 무딘 모습을 보였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준호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범신은 그제야 부마자가 그의 어린 여동생이 죽었을 나이와 비슷한 또래였음을 깨달았다. 사제관을 찾아갔을 때, 준호는 범신을 보자마자 빽 소리를 지르고 매달렸다. 신부님, 도망쳐요, 도망쳐요, 개가, 무서워요. 범신의 머릿속이 희게 지워졌다. 피를 맞고 멍하니 서 있던 녀석을 보고 알았어야 했다. 미리 읽어냈어야 했다. 화가 치솟아 빈 주먹을 쥐었다. 


대엿 살 아이의 수준으로 멈춰 버린 준호는 그 시간대를 살고 있는 듯 했다. 아이의 시간은 범신과 있는 낮동안 느리게 흘렀다. 이따금 창밖을 보고 멍하니 있는 준호는 스스로를 가둔 것처럼 말을 걸기도 어려워 보였다. 밤이 되어 범신이 돌아가려고 하면 떼를 쓰고 매달렸다. 범신은 저를 올려다보는 녀석의 눈이 싫었다. 자신이 알지 못하는 시간대에 갇혀서 저를 부르고 저를 당기는 그 눈이 싫었다. 


- 얼른 다녀오세요. 제가 보고 있을게요.


아그네스가 고개를 끄덕여 보이길래 미련 없이 돌아섰다. 가지 말라고, 서른 살 아이의 징징대는 목소리가 따라붙었다.


고작 그게 뭐 그리 힘들었다고, 뭐가 힘들었다고. 멍청한 녀석이, 제게 말도 않고.









나오자마자 담배에 불부터 붙이고 병원 건물을 올려다 보았다. 5층 창문에 매달려서 환자복 입은 상체를 절반이나 내고서 신부님, 신부님, 하고 부르는 소리가 길가까지 쩌렁쩌렁했다. 범신은 담배 연기를 삼키고 돌아섰다. 


여동생은 애를 보느라 고깃집을 그만두었다. 산후우울증이 있는 것 같아 요즘 바짝 신경이 쓰였다. 들를 때마다 동생은 조금씩 말라가고 있었다. 조금만 내버려두면 우는데, 아이 울음 소리가 요즘은 그렇게 듣기 싫다고, 고해처럼 제게 고백했다. 범신은 안겨 울고 있는 조카를 보면서 퇴행한 준호의 눈빛을 떠올렸다. 내버려두면 운다고. 먹먹함을 안고 여동생의 집을 나서는데 아그네스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범신이 돌아갔을 때 준호는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병실이 아비규환이었다. 커튼은 잡아뜯기고 꽃병들은 깨져 물과 사금파리가 엎어진 과자 조각들과 함께 바닥에 뒤엉켜 있었다. 범신은 물자국을 내며 준호에게 다가갔다. 새빨간 눈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 그만 하자, 준호야.


제발 그만 하자. 무릎을 감싸고 있는 손을 풀어 보았다. 녀석의 손바닥에 온통 피가 고여 있었다. 부서진 꽃병에 대고 뒹군 탓인지, 이제 보니 얼굴에도 잔 상처가 보였다. 준호가 범신의 무릎 위를 가만히 더듬었다. 눈치를 보느라 처진 눈꼬리로 힐긋힐긋 범신의 얼굴을 훔쳐 보았다. 범신이 아이의 팔을 끌어다 품에 안았다. 저보다 큰 덩치가 폭하니 안겼다. 


- 저도 데려가세요. 


여태 안심치 못하고 등을 더듬어다 옷깃을 늘어쥐는 투가 안타까웠다. 범신은 준호의 뒤통수를 쓰다듬어 주었다. 준호가 그의 어깨에다 코를 묻었다. 품을 맞대고서도 모자란지 옷깃 당기는 손을 더 보챘다. 


- 앞으로 실수 안할게요. 데려가 주세요.


범신의 마음 한가운데가 가라앉았다. 뻥 뚫린 것 같았다. 아가토. 탄식처럼 내뱉었다. 세례명을 기억하지 못한다 했는데도 준호는 고개를 끄덕이듯 그의 어깨에다 얼굴을 부볐다. 


녀석은 잠들고서도 한참 끙끙거렸다. 앓는 동안 잠꼬대를 하는 듯도 했으나 범신이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시계를 보자 자정이 넘어 있었다. 범신은 담배냄새 배긴 제 자켓을 벗어다 준호의 이불 위에 덮어 주었다. 아이의 끙끙거림이 천천히 줄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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