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김/김최] 빨강앵초
아침까지 쌓였던 눈이 노을 지기도 전에 벌써 녹아 질척질척했다. 준호는 목도리를 풀고 위를 보았다. 가톨릭병원의 푸른 간판 위에도 눈이 녹아 묽게 흐르고 있었다. 새벽 내내 눈 내린 탓인지 하늘이 몹시 맑았다. 시린 코끝을 찡그리고 바삐 발 옮겼다. 며칠만에 오는 것이니 마음이 달았다.
김신부님께서 어쩐지 어제는, 좋은 꿈 꾸신 거 같아요. 병원 복도를 함께 걷는 동안 아그네스가 웃었다. 왜요? 하고 준호가 물으니 그녀는 생각을 이으려 고개를 기울였다가, 다시 준호를 마주하고 대답했다. 그냥 그런 기분이 들 때가 있어요. 최신부님 오시는 날이기도 하잖아요? 눈을 휘며 웃는 수녀에게 준호는 손을 내저어 보였다. 그러면 악몽 아니면 다행인 걸요. 문고리를 잡고서 가볍게 목례하고, 멀어지는 아그네스의 뒷모습을 보고, 심호흡을 한 번 하고서야 병실로 들어섰다.
그는 들어가자마자 가습기를 켜고 커튼을 쳤다. 아그네스는 꼼꼼하고 정성스러웠다. 준호가 자주 오지 못해도 이 병실은 흐트러진 적이 없었다. 그가 보았던 김신부의 모든 거처들 중 가장 깨끗하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달라진 온도에 앞머리 아래 땀이 맺혔다. 준호는 손가락 끝으로 로만칼라를 살짝 늘어뜨렸다. 시선이 침대 옆 협탁으로 향했다. 병실에 둔 빨강앵초는 철이 지나고 겨울이 깊는 동안 붉은 꽃을 지우고 죽은 것처럼 색 없이 고요했다. 구마신부의 병실에는 아무나 들어올 수 없었으니, 빨강앵초가 봄에 가졌던 붉은 색을 기억하는 자 또한 드물었다. 준호는 빨강앵초의 마른 대를 쓸어 보았다. 내내 가습하는 병실인데도 습기 하나 먹지 못하고 뻣뻣하게 굳어 있는 가지가 속상했다. 식물 키우는 데 재주가 없는데, 영신이 어렵게 구해온 것이라 거절할 수도 없어 여기 놓아둔 게 벌써 반 년이 넘어 있었다. 그 때만 하더라도 그는, 김신부가 깨어날 거라 믿었다.
영신이, 남자친구 생긴 것 같아요. 좀 말려 봐요. 화분과 침대는 붙어 있으나 언제부턴가 병자를 옆에 두고 화분에 대신 말 거는 일이 버릇 되었다. 준호는 누운 김신부에게 말 걸 자신이 없었다. 대답 없음보다 제 말 뒤에 이어지는 고요가 더 고통스러웠던 탓이다. 화분 흙에다 말을 묻으면 고요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을 수 있었다. 검은 흙은 침묵을 당연하게 만들었다. 이게 베드로의 꽃이라 했던가, 영신의 깊은 마음에 위로 받는 것은 세상 모르고 누운 김신부가 아니라 그의 곁을 지키는 최준호 자신이었다. 커튼 너머 걸러 온 누런 빛이 링거 튜브를 비췄다. 겨울의 병실은 아무리 난방을 해도 지워지지 않는 한기가 있었다. 오래 있으면 코가 시리고 발이 저렸다. 숨을 참으면 수액 떨어지는 소리마저 들릴 것 같이 조용한 일인실이, 그는 마침 질리던 참이었다. 준호는 병실 반대쪽 벽 보호자 의자에 앉았다. 이불 밖으로 나온 김신부의 검은 두 발바닥이 보였다. 학장신부님이 안부 전하라십니다. 요즘 많이 바쁘세요. 마태오 수사님도 저번 주에 다시 서울 오셨어요. 조만간 뵈러 온다고 하시네요. 다시 똑, 똑, 끊어지는 물방울 소리 속에서 준호는 무릎 위 목도리를 구겨 쥐었다. 성모상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차라리 죽지 그랬어요.
내뱉지 못하고 품은 말이 스스로를 마른 가지처럼 찔러댔다. 준호는 품에서 붉은 알의 묵주를 꺼냈다. 손에 쥔 채 김신부의 두 발바닥을 노려보았다. 한참을 있고서야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 곁으로 다가갔다. 누운 김신부의 얼굴을 내려다 보았다. 그래서 어제, 무슨 꿈 꾸셨는데요? 물음 끝은 여전히 고요였고, 준호는 때로 이 무게 속에 함께 가라앉길 원했다. 혹은 작은 화분 속에 묻힐 수 있다면, 하고 바랐다. 눈두덩을 손가락으로 꾹꾹 누른 준호가 김신부의 손에 묵주를 쥐어 주었다. 이불을 끌어다 발도 덮어 주었다. 기도문은 짧고 나가는 발자국은 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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