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최김

[최김] 겨울 바다



범신은 뽀얗게 김 서린 안경을 벗어두고 첫 젓가락을 들었다. 녀석이 끓인 라면은 정말, 억울하다 싶을 만큼 맛있었다. 고개를 한 번 옆으로 기울이고 맞은편에 앉은 녀석을 빤하게 보았다. 


"너 뭐 나 몰래 딴 거 넣었냐?"

"맛있으면 그냥 맛있다고 하십시오."

"그래, 졸라게 맛있다. 뭐 넣고 끓였냐?"

"사랑이 들어가서 그래요."


또 까분다 싶어서 헛웃음을 지었다. 조금만 틈을 주면 좋다고 방방 날뛰고 덤비는 꼴이 개나 토끼와 다를 진배 없는데 법사놈은 녀석의 무얼 보고 제대로 된 범이라고 호들갑 떨었는지, 범신은 잘 이해가 가질 않았다. 여수로 출장 간다니까 바닷가라며 신나서 좋아하기에 한번 크게 혼을 냈고, 기차간에서도 신나서 달떠 있기에 머리를 쥐어박았는데도 뭐가 아직도 이리 신났는지. 핏덩이는 핏덩이구나 싶기도 했다. 장엄구마는 내일 밤으로 예정되어 있었다. 부마자는 늙은 어부였고, 이야기를 들으면 별것 아닌 사령이라고 예상되었다. 그러나 구마란 의식이 그리 간단하기만 하면 얼마나 좋을 텐가. 김신부는 준호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녀석은 밥그릇 하나만큼 덜어간 면발을 그새 다 먹고 또 젓가락 가득 집고 있었다. 볼을 부풀려가며 먹는 모양새가 아직 영락없는 어린애였다. 범신이 생각을 떨치는 동안 준호는 무언가 생각났는지 땀 젖은 이마를 문지르며 베시시 웃었다.


"신부님, 우리 이거 먹고 밤바다 보러 가요."


급기야는 화가 치솟고 말았다. 범신은 젓가락을 소리 나게 놓았다. 


"임마, 놀러왔어?"


혼난 강아지마냥 어깨를 움츠리고 빈 젓가락을 빨더니 그제야 풀이 죽어서 죄송합니다, 하는 녀석을 두고 범신은 일어섰다. 자켓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저를 부르는 녀석의 목소리가 문 닫힐 때까지 따라붙었다.








부러 민박을 외딴 곳으로 잡은 이유는 사령 때문이었다. 하루 묵고 부마자를 보러 갈 요량인데 굳이 노출시킬 이유가 없었다. 때문에 민박집 근처는 불빛이 하나도 없었다. 바다 비린내를 따라 범신은 한참 걸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모래가 밟혔다. 벌어진 구두코로 젖은 모래 알갱이들이 들어와 양말이 금세 축축해졌다. 신발, 사야 하는데. 또 잊었다. 갑갑해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라이터 켜는 동안 달빛만 남은 바닷가에 잠깐 불꽃이 일었다. 바람 탓에 여러 번 부싯돌이 헛돌았다. 겨우 불 붙이고서 작게 욕을 내뱉었다. 바닷바람이 한 번 불자 추위에 볼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날 세운 겨울 바다 바람을 무시한 제 안일함에 또 화가 났다. 몇 걸음을 더 걷다가 멈춰섰다. 뒤를 돌아보자 준호의 기다란 인영이 보였다. 범신은 도로 돌아서서 걸었으나 준호가 금세 따라잡았다. 헥헥대는 숨소리가 가까워지자마자 어깨에 패딩코트가 걸쳐졌다. 무시하고 걸음을 떼려는데, 뒤에서 어깨가 휘감겼다. 준호의 차가운 뺨이 범신의 귓불에 닿았다.


"죄송해요."


죄송해요, 정말 죄송해요. 여러 번 반복하는 말에다 뭐가 죄송하냐 되묻고 싶은 뾰족함을 억누르고 범신은 뒤로 손 뻗어 녀석의 뒤통수만 벅벅 쓰다듬어 주었다. 얼마나 뛰었는지 머리 밑까지 땀이 차 있었다. 


"조금만 걷자."


누그러진 말투에 그제야 안심한 듯 팔이 풀렸다. 범신은 준호를 힐끗 바라보았다. 달에 비친 코 끝이 새빨개져 있었다. 


"예민한 놈이 추위까지 많이 타는구만."

"신부님 몸이 너무 차가워요. 들어가요."

"조금만 걷자고, 새끼야. 밤바다 보자며."


시무룩해질 얼굴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딱 이런 바닷가 마을에 살던 초등학교 교사가 하나 있었어. 독실하고 착실하고, 니 나이쯤 되는 여자."


범신이 다시 걷기 시작하자 준호는 곁에 붙어 따라 걸었다. 바람은 조금 줄어 있었다.


"부마 증세를 보인다길래 가브리엘 신부님이랑 찾아갔는데, 첫날은 실패하고. 음기 약한 절기니까 일주일만 더 기다렸다가 예식을 하자고 우겼지, 내가."


범신의 걸음이 느려졌다. 준호는 그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틀 뒤에 목 매달아서 죽었다."


말을 끝내고 범신은 눈을 들어 하늘을 보았다. 바닷가 위에 뜬 보름달이 제법 환했다. 내일도 맑으면 좋으련만 싶었다. 그는 걸음을 멈추고 준호를 향해 섰다. 


"동생 기일 얼마 안 남았지? 그 전에 끝내고 가자."


손을 뻗어서 녀석의 어깨를 두들겨 주었다. 울상 짓던 얼굴이 조금 풀리더니, 긴 속눈썹을 내려깐 채 잠깐 떨고, 다시 눈 뜨고선 범신을 향했다. 범신은 아이의 그 시선을 좋아했다. 온전히 저를 보는 시선은 어리고 가시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예, 하고 대답하는 녀석의 손을 찾아 쥐었다. 잡은 채로 민박집을 향했다. 내 몸이 차갑다고? 니가 더 냉골인 거 같은데 확인해 볼까? 물으니 아니, 아뇨, 하고 말을 더듬기에 소리 내서 껄껄 웃어 버렸다. 두 사람의 발자국은 파도에 쓸리기 전까지 오래 달빛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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