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최김

왕겜 au 벽너머에서 돌아온 마에스터 베드로와 젊은 나이트워치 사령관 아가토



아가토가 나이트워치의 새 사령관으로 부임하고 두어 달 지났을 때, 와이들링 차림을 한 사내가 바늘 같은 눈발을 뚫고 북으로부터 다가왔다. 온 벽이 발칵 뒤집혔다. 소란 중에 나이 많은 나이트워치들이 외쳤다. 베드로, 베드로다. 정말 베드로인가? 그럴 리가, 그가 살아 있을 리가. 신을 찾는 탄식이 여기저기 들렸다. 아가토는 벽 위로 올라가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그닥 크지 않은 덩치의 중년이 곰 머리로 만든 모자를 벗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왼쪽 뺨에 난 기다란 흉터가 가장 먼저 보였다. 마침내 베드로가 성벽 안으로 들어왔을 때, 처음 마주친 눈동자를 아가토는 이후로도 오래 잊지 못했다. 북녘의 얼음이 서린 시선이었다. 어린 대장 까마귀의 깃털이 쭈뼛하게 섰다.

벽의 젊은 현자였던 베드로는 이곳의 마에스터를 오랫동안 보좌했다. 그리고 아가토가 검을 막 잡을 나이일 때쯤 숲으로 나갔다가 와이들링에게 납치되었다. 말이 납치다 뿐이지 당시 나이트워치 초소에서는 온갖 불길한 추측이 이어졌다. 와이들링이 그를 토막 내 죽였을 것이다, 그리즐리베어에게 잡아 먹혔을 테다 하는 말들이 아무렇지 않게 떠돌았다. 그래서 나이 든 까마귀들은 살아온 베드로의 모습에 더더욱 경악했다. 사지를 멀쩡하게 달고 돌아온 베드로는 무덤덤한 얼굴로 무기를 풀었다. 그의 검 또한 와이들링의 것이었다.

- 베드로, 꼴이 와이들링과 분간이 안 가는구만.

중년의 나이트워치 하나가 그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베드로가 무덤덤히 그를 껴안았다.

- 어떻게 살아남았나?
- 와이들링과 짐승을 죽이며 살았지.

나이트워치는 소리 내어 웃었다. 역시 북벽의 현자군. 다른 중년들이 베드로를 둘러쌌다. 아가토는 사령관 처소의 발코니에 서서 그를 내려다 보았다. 베드로의 허리춤에 달린 은색 와이들링 장검을 보며 아가토는 그 사내를 떠올렸다. 억센 억양과 눈발에 그을린 검은 손, 제 얼굴을 붙들고 노려보던 눈동자, 뒤틀린 웃음, 모두 눈발 같이 흐리게 느껴졌다. 사내의 거친 손 감촉이 기억나지 않았다. 불 앞에 다리를 꼬고 느긋이 앉아 저를 보던 얼굴의 색도 희미했다. 까마귀, 라고 저를 불렀다. 그것만은 기억났다. 여유롭고 낮아서 아래로, 아래로만 깔리던 목소리. 아가토는 돌아섰다. 사령관실로 들어가고서도 베드로가 가진 검날 위에 사내가 갖고 있던 검날이 교차되어 떠올랐다. 기억을 새것처럼 제련할 수만 있다면 그러고 싶었다.






아가토는 베드로를 사령관실로 부르자마자 비어 있던 마에스터의 자리를 맡아 달라고 청했다. 베드로는 사령관실을 낯설어하는 표정으로 둘러 보고, 아가토를 아래위로 훑어 보았다.

- 귀족 자제님께서 어째 여기까지 오셨소?

베드로의 목소리는 던지듯 도발적이었고 거침이 없었다. 묵직한 도발이라고 아가토는 생각했다.

- 저희 가문에는 검을 쥔 채 죽은 조상들이 많습니다. 다만 저는 제 검으로 누구를 지킬 기사가 되고 싶진 않았을 뿐입니다.
- 웃기는군. 벽을 지키는 것은 괜찮단 말인가?
- 사람이 아니니까요. 저를 바칠 자는 오로지 신입니다.
- 사령관이라고 앉혀 놓은 놈이 벽을 지키는 의미가 뭔지도 모르는군. 마에스터 자리가 여태 비어 있던 이유도 알 것 같다.
- 그러는 새 마에스터께선 검을 잡아 보아 아십니까?

베드로는 슬며시 웃었다. 그제야 붉은 불빛에 비친 아가토의 얼굴이 자세히 보였다. 귀족으로 자란 얼굴은 까마귀답잖게 티 하나 없이 깨끗했다. 구김 없이 맑은 얼굴이었다. 팽팽하게 두 시선이 부딪쳤다. 오래 노려보고서야 베드로는 생각을 고쳤다. 젊은 범과 같은 얼굴이다. 아직 상처 하나 입지 않은, 패기롭고 단단한.


- 마에스터.

아가토가 눈을 내려깐 채 그를 불렀다. 베드로에게 낯선 호칭이었다.

-벽 너머의 지도가 필요합니다. 와이들링의 거처가 표시된 지도말입니다. 


그가 베드로의 앞에 가까이 다가왔다. 덩치보다 좀 더 큰 인영이 시커멓게 베드로의 이마를 넘나들었다. 아가토는 제 망토 자락을 털고 바로 섰다. 나이트워치의 칼자루가 빛났다. 


- 도와주십시오. 찾아야 할 게 있습니다.

새파랗게 어린 나이트워치 대장은 나이답게 곧은 눈을 갖고 있었다. 베드로는 안경을 벗어 내려놓았다. 오랜만에 쓴 것이 통 적응되지 않았다. 아가토의 얼굴이 잠깐 흐렸다.

- 어이, 잘 들어라. 뭘 찾는진 몰라도 벽 밖에 까마귀가 탐낼 만한 물건은 없다.
- 와이들링과 오래 뒹굴어 아시는 게 많은가 봅니다. 소용은 제가 판단합니다.

얼굴색에 부서진 자존심조차 감추지 못하는 어린애였다.

- 너는 추위를 모른다. 밤과 밤을 잇는 심연도, 살에 붙는 눈 결정의 차가움과 걸음마다 남는 제 몸의 고름 냄새도 모르지. 알 거라 생각하나?

베드로는 쏟아내듯 말하고도 제 격양된 모습이 부끄럽지 않았다. 촛불이 일렁여 아가토의 얼굴 그림자가 깊어졌다. 검은 밍크와 곰가죽으로 둘러싼 아가토는 초 하나를 더 켜는 손짓에도 버릇처럼 우아함을 갖고 있었다. 우아한 까마귀라니, 베드로는 입술을 틀어 웃었다.

- 찾아야 할 게 아니라, 찾아야 할 사람인가?

금세 굳는 표정을 보니 베드로는 벽 너머에다 기둥서방이라도 둔거냐고 천박한 농을 던지고 싶어졌다. 제법 진지한 얼굴의 코앞까지 들이대고 부러 빈정댈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사령관을 빤히 볼 뿐이었다. 이어질 말을 기다렸으나 아가토는 되려 그가 입을 열길 기다리는 듯했다. 아가토가 장갑을 벗었다. 지루하고 갑갑한 표정 위에 마른세수를 했다. 주무르다 만 반죽처럼 엉망인 살덩이가 긴 손등 위에 흉터로 덧붙어 있었다.

- 고운 손에 어울리지 않는 이빨 자국이구만.
- 개에게 물어 뜯긴 적이 있습니다.
- 개?
- 지도, 그려 주십시오. 보상을 드리겠습니다.

둘의 호흡이 잠깐 긴장을 담고 멈췄다. 이내 베드로가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말을 끊고 덤비듯 '보상'을 이야기하는 어린 사령관의 고집에 날이 서 있었다. 아이는 아이구나, 싶을 수밖에 없었다.

- 보상이 뭘지 기대되는구만.

검은 매의 깃으로 장식된 아가토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들겨 주고 돌아섰다. 아가토는 남은 채 그의 책상 위 남겨진 안경을 내려다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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