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 국연

중년 부부 형배범신


* 약한 정도의 수위묘사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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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 째 눈이 오더니 형배네 집앞은 쓸지 않고는 걸을 수도 없게 쌓였다. 범신은 2층 3층에 사는 젊은 애들에게 윽박이라도 지를까 싶어 건물 창문들을 노려보았다. 형배가 1층에 사는 작은 3층짜리 주택에 집주인은 도통 오는 법이 없었으며 2층과 3층에는 젊은 대학생, 회사원들이 사는데, 같이 사는 건물에 어린 놈들이 비질 하나 인색한 게 매번 속상했다. 형배마저 바지런한 성격이 아니라 필시 올라오는 경사길을 저는 다리로 걷다가 몇 번 넘어지기도 하리라, 생각하면 울화통이 터졌다. 범신은 담배 필터만 애꿎게 씹다가 던져 버렸다. 낮게 욕을 씹어 뱉었다. 걸음을 헤매던 그는 결국 언덕 아래까지 조심조심하게 도로 내려가 철물점에서 청소 빗자루며 삽을 사 들고 걸어왔다. 기어이 얼음을 깨고 눈을 쓴 뒤 제설 모래까지 뿌려 놓았다. 뭉툭한 손 마디마디가 때묻고 붉어졌다. 그는 얼얼한 손을 주무르곤 화단에 주저앉아 담배 한 대를 더 피웠다. 형배가 오려면 그래도 십여 분을 더 기다려야 했다. 그가 공장에 갔다 오는 날이면 이렇게 밖에서 기다리는 게 버릇이 되어 있었다. 언젠가 형배가 비밀번호도 알려주었겠다 왜 미련하게 밖을 지키고 섰냐고 했을 때 범신은 그의 눈을 보잖고 툭 던지듯 대답했다. 너 없는 방에서 내가 뭘 하냐. 청승맞게. 


담배를 참고 기도 올리는 동안 형배가 저 아래서 걸어왔다. 절뚝, 절뚝 지팡이를 땅에 꽂으며 걷는 걸음이 버스 정류장 내려 10여 분, 아니, 저는 걸음으로 20분은 넘었다. 하늘은 해가 져서 벌써 어둑했다. 범신이 느린 걸음으로 다가갔다. 그의 손에 들린 비닐봉투를 받아들었다. 


"늦는다 싶더만 뭘 또 사 왔냐."

"니 온다 캐가 소주나 사왔지."

"좋은 거 좀 사오지."

"새끼, 카믄 니가 사오든가."

"다리병신 새끼가 마트까지 갔다 오느라 수고 많았다."


김신부가 비죽이 웃었다. 똑같은 웃음이 형배의 얼굴에 마주 떴다.







교자상에다 라면 냄비를 올려 둔 김신부는 탁상 앞에 앉은 형배의 굽은 등을 바라보았다. 또 웅크리고 뭔갈 적고 있었다. 공장에 다니기 시작한 뒤로 형배는 작은 수첩을 사서 뭔가 적기 시작했다. 끄적이는 뒷모습을 보고 어깨너머로 시선을 던지면 팩하니 덮고 괜한 역정을 내는 꼴이 우스워서, 김신부는 구태여 뭘 적느냐 묻진 않았다. 그래 보았자 나이 들고 적적해서 적는 일기나, 장 볼 거리나 그런 거겠지 하고 넘겨 짚었다. 


"뭘 해? 술이나 먹지."


하고 보채자 형배는 그제야 느릿느릿 몸을 돌렸다.


공장 일은 쉽다고 했다. 떡이 되도록 피흘리고 주먹질 하는 거, 이제 나는 몬한다. 마, 여기서는 배리어만 째깍 맞추믄 되고, 잘몬해가 혼나면 혼이 나믄 되고. 누캉 와가 내한테 뭐라 카는 사람도 없고. 뭣보담도 씨잘데기 없는 정치질 안해도 된다 아이가. 김신부는 술잔을 들여다보며 말하던 형배의 얼굴을 보고 깊이 안도했다. 녀석을 처음 만났을 때가 부제 과정 밟고 있을 때였으니 이제 햇수로 25년이었다. 공장에 나간 지 일주일 넘어 집에서 소주를 마시며 보았던 형배의 얼굴은 김신부가 보았던 그의 얼굴 중 가장 편안해 보였다.그는 서른 초반의 형배를 기억했다. 독기가 바짝 올라 피 냄새에 헐떡대는 들개 같은 모습이었다. 그때 범신은 쉽게 부서질 것 같던 그의 모습을 동정했다. 누군가 건드리면 산산조각이 나고 날을 세워 피아를 모두 찌를 것 같던 최형배를 진심으로 동정했다. 그때 비해 최형배의 날이 무뎌졌나 묻는다면 범신은 결코 아니라 대답할 터였다. 무뎌진 게 아니었다. 나이 들고서 감추는 법을 배웠을 뿐이었다. 형배가 자세를 고치자 빈 소주병이 두어 개 걸려 넘어졌다. 그가 허벅지를 손꿈치로 꾹꾹 눌렀다. 몇 년 동안 통증이 조금씩 자란다 싶더니 급기야 그는 절기 시작했고, 어떤 밤에는 통증으로 깨기까지 했다.


"다리는?" 


김신부가 턱짓으로 물으니 형배는 가볍게 웃었다. 


"평소랑 같지. 약을 묵어도 이제는 안 듣는다."


소주를 먹고 둘은 오랜만에 몸을 섞었다. 범신은 숨을 삼키며 형배의 머리칼을 손가락 새 감아 쥐었다. 많이 길어 있는 머리칼 사이 새치가 언뜻언뜻 비쳤다. 범신의 발 끝에 밀어둔 교자상이 걸려 규칙적으로 덜걱거렸다. 그는 형배의 목덜미에 코를 묻었다. 이 냄새가 좋았다. 매캐하면서도 몸이 편해지게 하는 최형배의 몸냄새는 25년 전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섹스중에 이 냄새를 맡으면, 범신은 마음이 깊게 가라앉았다. 최형배를 곁에 두고, 만지고, 안고, 안기면, 평소보다 한 층계 더 아래로 가라앉는 기분이 들었다. 


젊을 적의 둘은 각자의 싸움을 마치고 피투성이로 만나 마주앉은 채 함께 상처를 치료해 주곤 했다. 상처 위에 상처가 덮이고 몇몇 자국은 흉으로 남을 때쯤에는 어찌 다친 것인지 서로 묻지 않은 채 붕대를 감아주고 등의 자상 위에 연고를 발라주었다. 여관방에서 만나 서로의 몸에 붕대를 감기고 다시 그 위로 피가 배어나올 때까지 불 붙인 듯 섹스를 하고 나면, 같은 침대에 나란히 누운 둘만이 느낄 수 있는 하나의 선이 생겼다. 처음으로 구마사제가 된 후 내내 잠을 자지 못하던 범신은 그를 만난 뒤부터 간간이 꿈을 꾸지 않고 잘 수 있었다. 남의 상처에서 위로 받는 일을 고해하고 싶은 감정은 없었다. 그것은, 위로보다 조금 더 깊고 둥근 형태를 띠고 있었다. 


씻고 나온 형배가 범신에게 티셔츠를 던져 주었다. 범신이 그것을 받아들고 런닝셔츠 위에 덧입었다. 나이 들수록 형배의 몸집은 점점 더 커졌으므로 그의 옷은 범신이 입으면 품이 남아돌았다. 형배가 창문을 열고 옆에 기대 섰다. 범신이 옆에 다가섰다. 한 라이터 불로 둘의 담뱃불이 동시에 타들었다.


"성당 좀 나와라."

"됐다. 구찮구로."


오래도록 버릇처럼 한 말이었으므로 더 보채고픈 마음은 없었다. 둘은 말없이 담배를 태웠다. 눈이 그친 뒤라 별이 보일 만큼 밤하늘이 맑았다. 약속한 것마냥 둘의 꽁초는 모두 필터 끝까지 바짝 타들어가 있었다.


형배가 잠든 뒤에 범신은 먹은 자리를 대강 치우고 기도를 올렸다. 이부자리를 펴는데 형배의 수첩이 눈에 띄었다. 잠든 그의 얼굴을 보던 범신이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수첩을 펼쳐 들었다. 맨 앞장에는 형배의 번호가, 그 바로 뒤에는 범신의 번호가 이름과 함께 적혀 있었다. 어쩐지 보호자가 된 기분에 범신은 비죽이 웃었다. 빈 두어 장을 넘기자 두부, 계란, 라면 따위의 장 볼 목록이 휘날린 글자로 써 있었다. 다시 한 번 피식 웃었다. 몇 장을 더 넘기던 범신의 눈이 돌연 커졌다. 기도문이 형배의 글씨로, 그것도 정성들여 눌러 쓴 글자로 몇 장을 빼곡이 채우고 있었다. 대부분 그가 많이 아프거나 위험할 때 해주었던 기도였다. 25년 간 못 만난 때도 많았으나 만날 때마다 읊어댔으니 외울 만도 하잖느냐고, 그를 타박했던 게 후회가 되었다. 이걸, 정말 외우고 있었단 말인가. 작게 소리내어 푸스스 웃어 버렸다. 그는 수첩을 도로 놓아두곤 형배의 곁에 앉았다. 허벅지 위에 손을 올리고 천천히, 깨지 않을 만큼 부드럽게 주물러 주었다. 어슴푸레한 중에 범신의 묵주반지가 빛났다. 형배가 잠결에 끙, 끙 소리를 내었다. 범신이 입속으로 몇 마디 짧은 기도문을 읊었다. 바람이 부는지 창틀이 작게 덜걱거렸다. 둘이 먹다 남은 라면이 싱크대 속에서 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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