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최김

[검은 사제들] 낮은 곳으로



- 신부님께서도 그런 적 있지 않으십니까? 기억에 무게가 더해지면 그건 더 이상 기억이 아닙니다.


준호는 말을 멈추고 장작 몇 개를 모닥불에 집어 넣었다. 불꽃이 화르륵 일어 김신부의 얼굴을 환하게 밝혔다. 잠깐 드러났다 다시 어두워진 그의 얼굴을, 부제는 한참 들여다보고 있었다. 할 말은 많은데 취기로 혀가 얼얼했다. 


- 가라앉고 싶었습니다. 한도 끝도 없이 가장 낮은 곳으로……. 그곳에는 뭐가 있을까요…….


고개를 떨궜다. 불의 열기가 사라진 얼굴에 서늘한 흙 냄새가 와 닿았다. 구토감까지 함께였다. 그러나 준호는 얼굴을 들지 않았다. 김신부는 모닥불을 향했던 철망을 거두었다. 망 사이에 끼워 둔 오징어는 고소한 냄새를 풍기며 적당히 그을어 있었다. 뜨거워 몇 번을 땅에 놓치고서야 기어이 몸통을 찢어 입에 물었다. 짭쪼릅해서 침이 돌았다. 


- 고통이 있겠지. 구천을 떠도는 영들과, 음, 그래, 그리고 네 놈 노리는 개의 울부짖음?


질겅거리며 입꼬리 한 쪽으로 웃었다. 무릎 새에 고개를 파묻고 있던 준호가 어느새 얼굴을 들고 저를 노려보고 있었다. 어린 범의 독기 어린 눈을 보고 신부는 다시 한 번 웃었다. 얼굴이 붉어진 것이 영 이 동네 소주가 독했나보다, 취기 탓에 제 말의 무게가 더했나보다, 기억이니 뭐니 쓸데없이 주절거리는 것을 보니 녀석 정말 많이 취했나보다, 싶었다. 준호의 얼굴이 다시 아래로 떨어졌다. 무언가 웅얼거리는 듯도 하고, 슬퍼하는 듯도 하는 정수리를 김신부가 한참 바라보았다. 


- 야, 아가토.


대답이 없었다.


- 준호야.


그제야 얼굴을 들었다. 가장 큰 오징어 다리 하나를 떼어다 내밀었다. 부제는 오징어 다리를 받아 들고도 생전 처음 보는 것마냥 빤히 손바닥에 놓고 있다가, 얼마 지나고서야 입에 넣고 우물거렸다.


- 생각을 깊게 하지 마. 너무 깊으면 맑지 못한다.


준호는 미간을 구겼다. 이제는 구토감 대신 한기가 들고 있었다. 부르르, 한 번 어깨를 떨고 팔뚝을 감싸며 웅크리자 김신부가 제 엉덩이 아래 깔고 있던 담요를 꺼내서 건네 주었다. 준호는 담요를 어깨에 감싼 채 코를 한 번 훌쩍이고 모닥불을 응시했다. 장작 하나를 더 집어 넣었다. 타오르는 불을 보며, 김신부는 이곳 시골에 온 것이 어째 출장 아닌 휴가 같다 여겼다. 어린 범과 보내는 산골 밤은 충분히 고즈넉했다. 숙소로 잡은 산장도 마음에 들었다. 바로 이런 것이 영적이라 할 수 있잖은가, 싶어 속으로 헛웃음이 났다. 문득 다음에는 영신을 데려올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녀석이 수능 본 뒤에 넉넉한 시간 동안 셋이 다니는 것도 꽤 재밌을 터였다. 김신부는 불 너머 준호를 바라보았다. 누그러진 눈매만큼, 취기가 조금 식은 듯도 했다. 취한 두 범이 마주보고서 한동안 말이 없었다. 이번에는 몸통 조각을 내밀었다. 준호는 김신부의 손에 묻은 그을음을 한번 보고, 제 손에도 옮은 그을음을 문질러 보았다. 


- 항상 맑아야 합니까? 우리는?


핏덩이의 목소리에 무게가 실려 있었다. 김신부는 대답하지 못했다. 우리는 항상 맑아야 하느냐고. 그러하다면 나는 어떠냐고, 네 녀석 보기에 맑아 보이느냐고 묻고팠다. 필시 요 녀석을 먹인답시고 제게도 취기가 많이 오른 것이라고 여겼다. 붉은 부제의 얼굴을 보며 김신부는 오징어를 사납게 씹었다. 잇새로 끼는 지루함. 


- 꼰대 새끼. 술이나 먹어라.


잘박하게 술이 남은 소주병을 그가 들어 보이자 준호는 순순히 종이컵을 내밀었다. 잇자국이 가득하고 종이벽이 눅눅한 컵에 소주가 절반 찼다. 김신부는 영신을 생각했다. 아이는 서울 꽤 유명한 대학의 사회복지학과에 가고 싶다 했다. 머리도 이제 제법 길어 단정한 커트를 유지하고 있었다. 아가토 부제님요, 되게 사람이 먹먹해 보여요. 밝은데, 뭔가 먹먹해요. 언젠가 아이가 스치듯 했던 말이 계속 맴돌았다. 김신부는 안에 무엇이 가라앉아 있을지 모를, 검고 깊은 물을 떠올렸다. 물은 물일 뿐이었다. 강바닥도 물이 빠지면 드러나게 마련이다. 빛이 없으면 탁해 보이고, 그 깊이를 두려워하면 속이 보이질 않는다. 아가토의 작은 머리통이 아래로 규칙 없이 주억거리는 것을 보며, 그에게 들어찬 물은 얼마일지 가늠하고 싶다 생각했다. 그가 소주병 째로 입에 가져가 들이키는 동안 아가토는 컵에 남은 소주를 홀짝였다. 모닥불이 얼얼하게 붉었다. 


- 저 진짜 술 안 마신다고요 원래.


말투는 의도와 달리 어물어물하고, 자꾸 뾰로통해졌다. 이 지역의 소주는 풀 냄새 같은 은은한 비린내가 나는 것 같았다. 그것이 산장을 둘러싼 풀 내음과 구분 가지 않았다. 붉은 불이 점점 검어지더니 결국 잠에 빠졌다. 야, 아가토, 아가토, 하고 부르는 김신부 목소리가 멀었다. 손길이 가까운가 싶더니 서늘하고 큰 손이 제 몸을 감싸 들어올렸다. 무슨 서른 먹은 남자놈이 이렇게 가벼워, 하는 소리가 들렸다. 김신부의 등에 업혀 산장 안으로 들어가는 동안 볼 닿은 어깨가 낮게 울렸다. 그 소리가 낮게 부른 성가인 줄 깨달은 것은 산장 안으로 들어가고서였다. 보드라운 시트가 볼에 닿자 준호는 얼굴을 부비며 잠에 빠져들었다. 신부님, 하고 입속으로 불렀다. 할 말이 더 있었던 것 같은데, 도통 어지러워 생각이 나질 않았다. 김신부가 그의 어깨까지 이불을 끌어올려 주었다. 담배 냄새가 은은히 났다.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이 있었다. 나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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