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x강 크오 단편

[종성지원] 쇠


오덴지 말하면, 너가 알기는 하네? 


지원이 말없이 노려보니 동명수가 혀로 볼 안쪽을 긁으며 비죽이 웃었다. 


거, 형수랑 같이 갔어. 형님이 어이 말했는지 아네? 어떠한 일이 있어도 개인적인 연락을 말라. 인민영웅께서 차출된 데에 다 이유가 있지 않간? 


지원의 얼굴을 빤하게 보던 그가 급기야 허리를 굽히고 웃어댔다. 날이 서서 지원의 귀에 싸했다. 그는 말아쥐었던 주먹을 폈다. 입이 말랐다. 


그래서, 그게 어딘데? 


동명수가 웃음을 천천히 그치고서 혀로 입술을 핥았다. 


베를린. 


지원은 자켓을 집었다. 그는 카페를 나서며 가장 먼저 통역관 련정희를 떠올렸다. 희고 둥근 얼굴과 표종성의 약혼자답게 강단 있고 세련되던 말투가 기억났다. 몇 걸음 가지 못해서 행인 가득한 보도 한가운데에 걸음을 우뚝 멈췄다. 지나가던 몇몇이 지원을 흘끔 보았다. 지원은 그제야 16년 동안 함께 훈련 받았던 표종성의 얼굴이 전혀 기억나지 않는 것을 깨달았다. 베를린, 베를린이라고. 입 속으로 한번 말아물렸다가 나온 입술은 발갛게 처연한 색을 띠었다. 지원은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서울의 하늘을 올려다봤다. 독일의 하늘이 이와 다르지 않음을 알고 있었다. 그런 간지러운 감정이야 대학 나오기도 전에 버렸으니까. 다만......지원의 입술이 다시 앙다물렸다.










표종성 중좌가 표종성 소위였을 때, 지원은 딱 스무 살이었다. 표종성은 누구보다 단단했다. 철옹성 같은 사내라고, 지원은 생각했다. 철로 쌓고 지은 둑과 성을 의인화한다면 필경 표종성 같은 사내가 나올 거라 믿었다. 그는 차갑고 또 뜨거웠다. 그러므로 쇳덩이 같았다. 인간으로 만든 무기의 온상이 그에게 모두 뭉쳐 있는 것 같았다. 지원은 그가 다치는 것을 상상했다. 단단하기 그지없는 표종성이 다치고 아파 맥풀리는 것을 상상하면 묘한 쾌감이 일었다. 아랫배까지 간질간질해지는 감각이 곧 비밀스런 쾌감인지는 오래 지나고,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야 알았다. 


빌어먹을 아새끼, 그렇게 물러빠져서래 어케 살아남갔어? 


지원은 부은 입가를 훔치며 일어났다. 종성을 올려다보는 눈에 독기가 바짝 서 있었다. 그는 마음이 저릿저릿한 것을 느꼈다. 말이, 안된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마음이 저릴 수 있단 말인가. 그는 산탄총의 반동을 공부하고 낙법에서의 무릎 휘는 동작을 떠올리고 지혈법을 외웠다. 우겨넣을 것이 정해져있는 머릿속은 응당 소동이 일 이유가 없었다. 






조교 표종성이 딱 한번, 아픈 적 있었다. 몸살인지 감긴지 독하게 걸려서 도통 낫지 못하고 몇날 며칠 숙소에 틀어박혔던 때, 지원이 찾아갔다. 열에 달떠서 까무룩 감기는 눈꺼풀이 억지로 지원을 마주했다. 지원은 문 앞에서 거수경례하고 침대 곁 세 걸음만큼 떨어진 곳까지 걸어와 멈춰 섰다. 종성의 몸에서 나오는 열기가 눈에 보이는 것처럼 어른어른하게 심했다. 


좀 어떠십니까? 

별거 아니다. 하루 자면 말짱할 거.


엉망으로 뭉개진 목소리일지언정 말투는 영락없는 표종성의 것이라 다부지고 딱딱했다. 지원은 의자를 가져와 침대 옆에 자리잡았다. 종성의 숙소는 인민영웅을 보필하는 곳답게 언제 와도 깔끔하고 넓었으며 주인의 성정이 그대로 묻어서 쓸모없는 물건이란 단 하나도 없었다. 종성은 가래 끓는 소리를 내며 끙끙 앓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잠에 빠졌다. 그는 잠든 모습에서조차 무방비한 분위기를 지워냈다. 강함은 그에게 일종의, 태생 같았다. 지원의 시선이 그의 발치에 머물다가 바닥을 훑고 탁자 위로 올라갔다. 알약과 물잔이 놓여 있었다. 지원은 물잔을 들었다. 컵을 천천히 기울여 반쯤 차 있던 미지근한 물을 판자 바닥에 모두 쏟았다. 종이 위에 갯수 맞춰 놓인 알약을 손바닥으로 쭉 쓸었다. 모조리 굴러떨어졌다. 지원은 망가진 얼굴로 물과 알약으로 엉망이 된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표종성 앞에서 보였다간 필시 두들겨맞을 표정이었다. 


형님, 부르다 말고 목소리 끝이 뭉개졌다. 쏟은 물이 마르고 지원이 굳은 표정을 풀지 못하고 방을 나갈 때까지 표종성은 깨지 않았다. 그것이 지원이 딱 한번 보았던, '아픈' 표종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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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x강 크오 단편

[형배희철] 안녕히 가세요, 용강약국입니다

나는 항상 여기 있어요. 당신의 불안을 안고 침묵이 되어서.







불 하나만 켜놓은 약국은 특유의 어슴푸레한 흰 벽 때문에 밝을 때보다 침묵이 몇 배는 깊어졌다. 소독용 핀셋이 부딪치고 새 붕대를 풀어다가 허리에 감는 소리까지 들렸다. 이따금 살이 스쳤다. 그때마다 희철은 입술을 물었다. 약국 바닥엔 경계선 희미한 두 개 그림자가 졌다.


희철은 형배의 상처 위에 조심스레 입술을 올렸다. 어떤 타박상은 유독 낫지 않았다. 그 더딤이 꼭 무너지고 또 무너졌다가 다시 쌓을 수 없는 상처 같다고 희철은 생각했다. 그래서 더 안쓰러웠다. 


이건 뭐에 맞은 거예요? 참 희한하다. 꼭 장도리에 찍힌 것 같네. 

장도리 맞다.


허, 기가 차서 흘러나온 날숨이 먼저였고 두려움에 부르르 떠는 오한이 다음 순서였다. 장도리라니, 끔찍하게. 희철은 입꼬리를 꾹 내렸다. 이제 싸움은 안한다고 하지 않았어요? 뾰로통하게 물으면 형배는 대답 대신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줬다. 희철은 형배의 손목을 잡고, 끌어내려서 손날에 입맞췄다. 형배의 손날은 거칠고 딱딱했으며, 아물었다가 다시 다치고 또 아물길 반복한 흉터처럼 울퉁불퉁했다. 희철은 그의 울퉁불퉁한 손을 좋아했다. 요철을 손가락 끝으로 만지고 있으면 안정감이 들었다.


약사님요. 


형배가 불렀다. 희철이 흘끔거리며 그를 마주했다. 


마, 내 한동안 여 못올거 같은데.


한 마디에 가슴이 금방 무게를 지니고 가라앉았다. 형배는 늘 이런 식이었다. 잔뜩 다쳐 와서는 약사님요, 파스 하나 주이소.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말하고 담배를 빼 물었다. 연기가 약국에 꽉 차고 형배가 다시 한 대를 빼물어도 희철은 매번 물어볼 수 없었다.

이번엔 어디로 가요? 언제 가세요? 또 올 거죠? 

물음이 까끌까끌하게 입에 남았다. 그가 기침을 해도 형배는 담배를 끄지 않았다. 온통 울상을 지어야 겨우 담배를 끄는 심보도, 굳이 싫어하는 호칭을 불러대는 것도 그러려니 견딜 수 있었다. 다만 그는, 희철은, 형배의 침묵만은 버티기 힘들어했다. 부산에서 타고자라 주먹을 직업으로 삼는 그에게 침묵이 어떤 의미인지 적확하게는 짐작 못했지만 그것이 가지는 무게만은 절절하게 느꼈다. 다른 세계의 사람. 평행선의 거리를 실감하고 나면 닿는 일은 더 요원해졌다. 희철은 형배의 옆구리에 마지막 감은 붕대 끝을 꽉 매어 주고 그를 힐긋 올려다봤다. 눈이 마주쳐서 조금 주눅 들었다.


호랑이에 얼룩말 무늬 남겠네...하도 칼빵이 많아서.


그 말에 형배가 바람 빠진 웃음을 지었다. 웃으라고 한 이야기가 아닌데도 픽 터진 걸 보니 마음이 조금 풀려서, 희철도 웃고야 말았다. 그는 제가 감아놓은 붕대를 손가락으로 더듬어 보았다. 눈치를 보느라 형배를 연신 쳐다봤다. 두 대째 담배를 비벼 끈 형배가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희철이 시선을 비켰다. 돌아간 턱이 손에 잡혔다. 담배 냄새가 쎄하게 났다. 희철은 돌아간 얼굴에서 눈을 다시, 천천히 올려 떴다. 마주침, 안도. 그런 것은 이 사내와 영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지만......희철은 조금 슬프게 웃었고 형배는 조금 굳은 얼굴로 웃었다. 먼저 일어선 것은 희철이었다, 늘과 같이.


가세요. 몸 조심하시고요. ...또 오세요.


손님 대하듯 인사했고 형배는 등을 보인 채 옷을 입었다. 흰 셔츠 아래로 울긋불긋한 문신이 비쳤다. 방금 감은 붕대의 두툼한 두께감도 보였다. 소매 단추를 채우며 형배가 그에게 다가섰다. 희철이 한 걸음 물러섰다. 다만, 한 걸음일 뿐이었다. 형배가 그의 뺨에 검지를 가져다댔다. 희철은 숨을 참았다.


희철아.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애원하고 싶은 마음을 참느라 희철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형배의 검지가 뺨에서 턱선으로 내려갔다. 성적인 의도는 없었다. 담백했기에 더 서늘했다.


몸 조심해라이.


희철은 한참 지나서야 고개 끄덕였다. 약국문이 열리고, 형배가 나갔다. 돌아보지 않았다.

안녕히 가세요. 뒤늦은 인사가 따라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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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4. 6. 2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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