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스맨

[에릭찰스] 나를 찾아줘



악몽은 별 것 아니야. 너도 알잖아. 


에릭은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베개에서는 찰스의 냄새가 났다. 찰스의 냄새는 망가진 나무판자 따위를 떠올리게 했다. 눅눅하고 알싸한 이 냄새가 가짜인 줄 알고도 에릭은 매일 꿈의 끝마다 습관처럼 코를 묻었다. 찰스와 관련된 모든 것이 그러했다, 보잘것 없는 후각이 환상임을 알고도 쉽게 놓을 수가 없는,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조작된 증거 같은. 숨이 달아서 앓는 소리를 내고서야 에릭은 새빨개진 얼굴을 들어올렸다. 오전 5시 4분. 찰칵, 찰칵, 초침 소리가 쌓여갔다. 오래된 버릇처럼 혼자 사는 거처의 안위를 확인했다. 


내가 필요하면 불러.


그는 '필요하면'이라는 단어에서 찰스가 자신을 기만한다 여겼다. 


네가 필요하면 나를 찾아 와.


그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어디 있든 찾을 수 있는 사람. 그 자명함을 눈치 못챌 리 없는 찰스는 웃었으며, 에릭은 구두 앞코에 물든 흙먼지를 내려다보다가 뒤돌아섰다. 



결국 또 폴란드로 돌아왔다. 에릭은 이곳이 고향보다 더 한 의미를 갖고 있다고 여겼다. 뭐랄까, 구태여 형언한다면 끝의 시작이라고 해야 할까. 에릭은 수도꼭지를 틀며 이전에 찰스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찰스, 알고 있나? 어떤 끝은 시작과 닮아 있어. 그 말을 들은 찰스는 일순간 눈동자를 휘어 웃고 에릭이 아닌 앞을 보며 대답했다. 나도 알고 있어. 그의 '알고 있다'는 말은 깊은, 매우 깊은 위안을 주어서 에릭을 슬프게 만들었다. 수도꼭지에서는 간헐적으로 붉은 색의 녹물이 나왔다. 에릭은 뿌연 거울을 보았다. 입을 꾹 다물었다. 어떤 종류의 기억은 붉은 색 폭죽처럼 비현실적으로 화려하고, 형체 없이 아름다웠다.



빵을 굽고 크림을 만들고 작은 접시에 쿠키를 진열하는 일은 생각보다 재미 있었다. 제빵점의 주인은 젊은 여자였고, 능력은 약했으나 불을 조절할 줄 아는 뮤턴트였다. 맛있네요, 라고 그녀가 처음 말해주었을 때 에릭은 진심으로 기뻐하며 잔잔하게 웃었다. 가게를 내 보고 싶지 않아요? 라고, 제빵점에서 일한지 반년 되었을 때 그녀가 에릭에게 물었다. 재능이 있어 보여요, 조금만 더 연습하면, 이라고도 덧붙였다. 에릭은 고개를 저었다. 당신처럼 능력을 가진 뮤턴트도 아닌데요 뭐. 그렇게 대답한 그는 미스틱을 떠올렸다. 정확히 말하자면, 미스틱의 샛노란 눈동자와 붉은 머리칼을 떠올렸다. 그리고…….



모양이 일그러져 실패한 쿠키는 매일 저녁 에릭의 차지가 되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못생긴 쿠키를 씹으면서 그는 찰스의 저택을 떠올렸다. 학교가 되기 전의, 아이들과 레이븐과 찰스의, 자신의 공간이었던 그곳을. 노랗게 내려쬐던 햇살과 마룻바닥의 냄새와, 찰스의 속눈썹, 떨리던 눈꺼풀, 그의 목덜미에서 나던 바닐라 같은, 혹은 눅눅한 나무판자 같은 냄새.


에릭은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불 하나 켜지 않은 거처 위로 조금씩 빗소리가 들렸고, 그는 시계의 초침을 멈추었다. 철로 된 침대 헤드가 잠깐 흔들렸다. 집안의 금속이 파르르, 파르르, 약한 소리를 내며 주변과 부대꼈다. 히끅, 하고 그가 숨을 들이쉬었다. 사소한 소란이 멈추고 그는 베갯잇에 입술을 묻었다. 양쪽 속눈썹만은 소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오래 떨다가 천천히 침잠했다.


나를 찾아줘, 찰스.


빗소리가 거세졌다. 집 한 칸 만큼의 외로움이 거대한 짐승처럼 떨었다, 젖지 않으려고. 젖지 않으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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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피조윤] 그냥 단문


  영신은 깊이 앓았다. 그리고 살아남았다. 칼로 찔린 복부의 상처가 무려 한 뼘 길이였다. 영감은 이틀 내리 밤을 새서 사랑방을 지켰다. 조회장 댁은 으리으리하게 넓었고, 그 중 어느 한 방에 칼 맞은 자가 잠들어 있다 해도 알 바가 아니리라. 영감은 그렇게 믿어야 했다. 등잔밑이 어둡다고, 살부계의 시작을 끊고 죽은 서인의 집에, 살부계의 장이나 다름 없는 김영신이 숨어들 거라 누가 상상하겠는가. 영감은 파이프를 물고 작게 욕했다. 안채로부터 인기척이 들렸으나 무시했다. 조윤은 닫힌 사랑방 문을 한번 보고 영감을 흘긋 내려다봤다. 그 특유의 기다래지는 눈매가 달빛과 어울렸다. 


- 좀 어떻다고 합니까?

윤의 물음에 영감은 그저 고개만 저었다. 의사는 그렇게 찔리고 살아남은 게 기적이라고 했다. 여기를 빌려준 윤에게 감사를 해야 맞겠지만 그 악독하기로 소문난 조회장의 맏아들이니. 따지고 보면 살부계도 친일에 앞선 그의 아비 때문에 일어난 것이나 마찬가지였고, 영감이 떠올린 연결고리대로라면 이는 곧 조회장이 영신과 그의 부모의 원수나 다름이 없었다. 그는 헛기침으로 불쾌한 내색을 냈으나 윤은 그를 지나쳐 사랑방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땀에 흠뻑 젖은 영신이 누워 있었다.

윤이 스무살 때 서인과 함께 놀러 왔던 그를 본 적 있었다. 어린 것 답지 않은 총기와 붙임성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아 차갑게 눈짓하고 제 동생을 더러 나가 놀라 일렀었다. 윤은 영신의 옆에 앉았다. 십 년이 넘어 만난 아이는, 이제 아이랄 것도 없었지만, 저보다 큰 골격을 하고 자라 있었다. 사내의 선을 가진 턱선을 가만 훑어보고 콧등과 슬 벌어진 입술을 살폈다. 제 아비를 죽이기 위해 총을 잡았을 손은 무방비하게 놓여 있었고 붕대는 간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피에 젖어 있었다. 열을 앓느라 계속 끙끙하는 소리가 비음으로 터졌다. 윤은 손을 들어 그의 이마에 얹었다. 뜨거웠다.

서인은 아비를 죽이고 자살했다. 이 아이도 그럴 작정이었을까. 윤은 그것이 궁금했다. 사랑방을 내 주었으니 이 어린 범죄자와 공모했다 하여도 더 변명할 여지가 없었다. 왜 그랬는가 누가 물어도 답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윤은 미간을 구긴 채 오래도록 영신의 얼굴을 살폈다. 아비를 죽이고 온 아이는 악몽을 꾸는 것처럼 주기적으로 떨었다. 윤의 손가락이 그의 어깨 근처에서 오래 머물렀다. 노란 촛불이 병자의 어깨에 어른한 자국을 크게 내며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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